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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일 안 하셔도
등록일
2023-08-22 15:52
조회수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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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일 안 하셔도]
워싱턴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중국에는 7천만 공산당원보다 많은 최소한 1억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 대하여,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중국의 기독교가 성장하는 원동력의 하나는 특히 농촌처럼 기본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능력과 연루되어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맨 경우가 있었다. 모두가 희망을 접은 상태였지만, 기도를 받은 뒤에 그녀는 건강을 되찾았고, 그 결과 그녀의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1)
한 신학자가 쓴 글이 생각난다.
“지금 당장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중지한다면?...
그래도 세상의 교회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변함없이 굴러갈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습관적으로 성령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지만, 과연 성령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임재를 실제로 기대하고 경험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한 번 진지하게 짚어 볼 일이다. ‘성령론’에 있어서 세계적 석학인 Nigel Wright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가 불균형적으로 가장 미흡하며 그의 사역에 대한 무지는 결국 그의 실제적 활동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온다.(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주요한 두 기둥은 말씀 전파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통한 사역이었다.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표적과 기사와 이적의 일들을 통해 많은 불신자들을 진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후에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이었다. 제자들의 복음 사역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도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간절히 구했다. 쇠못이 군데군데 박힌 채찍이 온몸을 휘감을 때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히 11:37)’를 받으면서도, 담대히 복음 전파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성령에 의지함에 있었다. 단순히 성령에 의지함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구한 바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이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
Philip Jenkins에 의하면, 20세기 말부터 제3세계 교회에서 폭발적인 대부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1980년 이래 크리스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의 그리스도인의 수가 비서구보다 두 배쯤 많았다. 그러나 2010년이후 비서구인 크리스천 수가 오히려 일곱 배 정도 많다고 한다. 오늘날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성령의 역사가 표적과 기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Jenkins는 주장한다. 치유, 축귀, 예언 등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표출이 그 현상의 중심에 있다.(3)
지역적으로 다른 위치에 살고,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의 사고와 생활방식, 경제활동, 엔터테인먼트의 수용행태 등은, 사회/문화/경제 여러 측면에서 서구인들의 그것과 점점 간극이 좁아져 간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가 서구에 남긴 정신적 유산이 우리에게도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 합리적 사고를 통과해야만 믿을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을 맹신하는 과학적인 사고와 합리와 이성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수용은 곧, 몰상식, 비 지성, 무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쉽게 치부한다.
자연의 체계를 세우시고 자연이 구동되는 법칙을 만드신 분께서, 때때로 그 체계와 법칙을 스스로 초월하시는 일을 통해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신다는 중요한 관점에 관해, 많은 크리스천들마저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참으로 슬프고 애통한 일임에 틀림없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지만,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그의 비이성적 개입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라는 아주 대담하고 뻔뻔스런 사상으로 견고하게 자리잡으며, 아래 언급한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John Locke의 주장으로 잘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일하심을 간과하거나 무시함은 영적 생활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저 성령 충만하면 영적 생활에 유익한 정도로 치부하면 절대 안 된다. 성령께서는 그를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만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온유(gentle)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를 무시하는 자는 그를 거부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죄와 연결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날이 갈수록 현대교회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탁월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뛰어난 설교, 탁월한 리더쉽, 빼어난 조직 관리… 교회에서 실력, 스킬이 오늘날처럼 중요한 시대는 없던 것 같다.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어 갈수록 결과와 실력을 강조하는 세상의 물결이 교회 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 반면에 성품과 성찰과 영적 깊이는 소홀해져만 가고 있다.(4) 밤을 꼬박 새워가며 왕성한 지적 활동 끝에 빼곡히 써 내려간 설교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여백은 없다. 듣는 이에게 즐거움, 지적 동의와 감동은 미친 것 같은데, 그들의 삶은 여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임했지만 변함은 여전히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롬 8:26), 내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내 안에 계신 그가 항상 내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격려하시고 앞날에 대한 비전으로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과 실감으로 가득 찬 삶이다.
내 자신 스스로가 동기부여 되어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잠시 자신감 가지고 달려 갈 수 있지만, 당장 어려운 환경을 만나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인간 관계로 감정이 상하고, 일이 막히면, 이내 위축되고 의욕을 잃는다.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아버지의 영, 성령을 경험하며 동행하는 삶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나를 좌절케 하는 환경에 닥쳐보면 내가 성령을 의지하는지, 그 동안 자신의 탁월함을 지향하며 살아 왔는지 바로 분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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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ichard Spencer, ‘Millions all over China convert to Christianity’, Washington Times, August 2, 2005, https://www.washingtontimes.com/.../2/20050802-115449-8165r/
(2) Nigel G. Wright, God on the inside (Oxford: The Bible Reading Fellowship, 2006), pp 6-7
(3)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New York: Oxford Univ Press, 2011), pp 1-3
(4) Timothy Keller, Preaching; '설교', 채경락 옮김 (서울; 두란노, 2016), p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