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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칼럼
인류의 30%가 죽어나가도 여전히
등록일
2025-08-23 12:09
조회수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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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에 치명적인 유혹이 밀려들어와도, 달콤한 죄악의 낙을 은밀히 음미하여도, 탐욕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도, 영혼의 감각이 소실된 환자처럼 ‘나는 문제 없어!’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도 거룩하지도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주여! 주여!”하면서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실체 없는 텅빈 고백을 습관적으로 외친다. 영혼의 생살에 나균이 덕지덕지 눌러붙어있는데도 애통함이 없다. 영적 몸부림이 없다.
말세의 때에는 독특한 징후가 있다. 자신의 행위가 더러워도 구역질 나질 않고, 징계를 당해도 돌아봄이 없고, 죄를 자행해도 뉘우침이 없다. 한마디로 뻔뻔하기가 그지 없다. 바로 옆사람이 죽어나가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여섯째 천사의 말로 말미암은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류의 1/3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죽지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에게 절하며 죄짓기를 즐겨한다(계 9:18-21). 오히려 심판의 예언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두 선지자의 죽음을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축하한다(계11:1-10).
이들에게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10:9)”
꿀송이같이 단 말씀을 먹는 자들이다. 문제는 달아서 삼키기 쉬운 말씀이 배 속으로 내려가니 쓰디 쓰다. 곤한 육신을 위로하며, 지적 욕구를 채워주며, 인본적 자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설교말씀은 육과 혼을 즐겁게 해주었지만… 듣고 읽은 말씀을 순종으로 행하려 하니, 자신의 익숙했던 생활, 습관, 인생관, 가치관, 쌓아 놓은 소유들과 여러모로 부딪친다. 더욱이 믿음의 길을 가려면, 이 귀한 것들의 포기뿐만 아니라 고난이 따른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믿는 길을 따르자니, 세상의 상식과 처세와 배치될 때 닥칠 왕따와 어려움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쓰다. 몹시 쓰다.
고통이 극심한 환란 가운데…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계 9:6)’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류의 1/3이 죽어나가도…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경시되고 외면된다.
선지자의 경고 메시지마저 배 속에 쓰리다고 배척하며
그들을 미워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뻐한다.
지금 한국 교회 상황이 그렇다. 스마트폰 속 붉은색 유튜브 아이콘이 불이 나도록 당대의 쟁쟁한 설교말씀 즐겨듣고 좋아서 “아멘, 아멘!” 하지만, 정작 순종의 행함 앞에서, 넉넉한 포기의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 배가 쓰리다고 말씀 앞에서 돌아선다. 이것이 불순종, 불신앙, 엄연한 죄임에도 끄떡없다. 목은 곧고 뻣뻣해서 수그러지지 않는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생활의 염려 가운데 실질적 도움이 되는 힘, 능력, 인맥, 돈의 우상에 영적 초점이 산만해진 시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경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경시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삶을 부정하는 시대이다. 귀를 즐겁게하는 인본의 소리, 혼과 육을 즐겁게 하는 지성과 교양과 인문의 소리,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각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에는 귀를 틀어막고 돌아선다. 참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는 싫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교회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눅 12:49) 예수의 가르침을 적절히 편집하여, 세상의 정신과 타협하고 있다. 세상적 관점에서 규모와 크기로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거룩한 성직의 자리가 남용되고 있다.
세상에 예수가 필요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오로지 사는 길은,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문제있는 죄인임을 경각하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참 목자는 성도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죄성을 드러내고 깨닫도록 하여 예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설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유모어와 위트도 섞어가며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성경 난제를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원어문헌을 신학적으로 해박하게 해석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인품이 온화하고 고상한 도덕자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성도들을 예수 앞으로 데려다 놓는 사람이다.
바로 베드로가 삼천명의 영혼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이들이 탄식하며 내뱉은 반응이 무엇이었던가?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행 2:37 )”
이 죄인된 삶, 앞으로 어찌 살꼬?
이들의 의문에 베드로는 뭐라고 했는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복 받고 은혜 받으라는 격려 이전에 “죄의 문제부터 해결받으라!” 하지 않았던가?
그 베드로도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반응이 무엇이던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우리는 조국과 북한,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여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과 자녀의 죄를 놓고 울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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