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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근심이 깊을수록 소망은 선명해지고]
등록일
2026-03-27 14:17
조회수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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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굽이굽이 흐르는 ‘아리랑’의 선율은 단순히 애끊는 비탄의 노래가 아니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발바닥 피멍이 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고갯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님을 향한 애틋함이 드러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얼핏 이 가사는 떠나간 이를 향한 원망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애절한 사랑의 역설이 담겨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책(下策)으로 여겨진다. "제발 가지 마세요. 당신 없으면 난 죽어요!"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대신, “나 없이는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만큼 당신과 나는 하나이기에, 당신은 못 견디고 돌아올거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 즉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님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노래한다.
정말로 떠나간 상대가 미워서 망하기를 바란다면 "천벌 받아라", "죽어버려라"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발병'날 것이라고 표현한다. 발병은 생명에 위태로운 병이 아니다. 잠시 멈춰 쉬어야 할 상태이다. 십 리(약 4km)면 마을 어귀를 겨우 벗어난 거리이다. 나도 산책 겸 조깅 겸, 일상 중에 자주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거리이다. 거기서 발이 아파 멈춰 선다면, 상대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발병’은 가던 길을 멈춰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가 어디인지?
곰곰이 숙고하게 하는 고마운 기회이다.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 아리랑 고갯길을 바라보며 님이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여인처럼 - 주님의 간절한 염원이다.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 삶에 찾아온 ‘고통’과 ‘고난’이라는 ‘발병’은, 더 먼 길로 가서 길을 잃기 전에 우리를 멈춰 세우시는 주님의 거룩한 간섭이다. 마음에 통증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내가 있어야 될 ‘원래 그 자리’가 어딘지 생각하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은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가, 양들이 살 터전을 벗어나지 않도록 높게 펜.스.를 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펜스 주변엔 얼씬 거리지 말라고 담장을 뒤덮은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일상중 겪는 아픔과 시련은 주님 주신 ‘계명’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계명을 주신 주님의 품을 상기하도록 일깨운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세상은 근심을 피하려하고 근심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단지 안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시지 않는다.
고통, 근심 따위 안좋은 것을 좋은 것 - 기쁨과 소망 –으로 변.하.게. 하신다.
주님은 단지 슬픔을 없애버리고 다른 기쁨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리랑 노래도, 애절함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승화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게 만드는 그 '발병'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비로소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는 은혜의 지점이다. 내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교만이 꺾이는 그 아픈 자리에서, 역설적이게도 주님 은혜의 빛은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소망으로 치환된다. 시련이 깊을수록 소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진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시야를 주님께 집중토록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고통의 병환 중에서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아닌가(사 43:7)?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께 어떻게 해야 영광을 드릴지를 알 수 있다.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 됨에 있다.(요 17:11)
십 리도 못가서 돌아올 님과 여인이 하나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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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open.spotify.com/album/3dz6pMBPL9Lbl3ZHmg40LD?uid=977893005025f0cf129e&uri=spotify%3Atrack%3A1sIBQyK6ggfy1ccBB1m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