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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았는데, 왜 불신자 이웃보다 행복하지 않은가?

등록일 2024-06-1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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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 가려면 서를 등져야 한다. 하나를 취하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둘 다 놓치를 못하고 쥐고 있으려 하니, 삶이 기막혀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속에서 살다보니 기독교인의 삶이 굴곡지고 힘든 것이다. 속사람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싶은데, 겉사람은 믿음없는 이웃의 형통한 삶이 부럽다.

왜 그런가? 혼이 변하지 않아서 그렇다. 영은 살았는데, 아직도 보이는 것에 연연하는 육에 혼이 꽉 잡혀 있어서 그렇다.
이미 구원 얻은 사람들이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괴롭고 힘든 삶을 사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런가? 혼이 나의 구원을 반항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영을 통하여 임한다. 영이란 단어는 사람과 짐승을 구별짓는 사람의 속성에 대하여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영(spirit; πνεῦμα 프뉴마)은 육체 즉 단순한 피조물들의 무력함과 대조되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다. 따라서 구원은 영에 임한다.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영에 임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런데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을 얻었어도, 그 구원이 육신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영은 믿음으로 구원의 기쁨을 이미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이 육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 영이 육에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갈등한다. 육이 영이 가고자 하는 길을 대적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이렇게 육신의 길, 영이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다. 영이 아무리 말해도 육은 들어먹지를 않는다. 그래서 영과 육, 그 중간에 있는 존재, 혼이 중요하다. 영은 항상 혼에게 말한다. 구원이 육에게까지 온전히 미치려면 먼저 혼이 영에 복종해야 한다. 그 다음 혼이 몸을 향해 순종하도록 한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영과 혼이 잘되면, 범사 즉 육신의 일도 잘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영-혼-육의 순으로 임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영으로 살기를 원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혼을 지키라 하신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 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기서 ‘마음’은 히브리원어로 레브, 즉 혼을 일컫는다. 마음, 즉 혼에 지정의(인지하고 아는 것, 감정과 의지)가 다 있다. 혼은 바로 인간의 전인격을 일컫는다. 인간의 전인격을 잘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לֵב(레브)이다.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육신과 육신이 바라는 욕망에 관심을 둔 ‘지정의’, 자신의 인격이 바뀌어야 한다.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인격, 혼이, 영이 가고자 하는 길목에서 반항을 한다.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르려 한다.

내가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나라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에 확신이 있다면 이제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영의 소욕대로 살 것인가? 죄악과 죄성에 물든 육신의 소욕대로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