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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제자여 어디 있었는가?

등록일 2024-04-0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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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고대 시절부터 하나님께서 확언하셨던 약속 -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저주를 대신 받고 나무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십자가 대속’의 언약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때. 그 어느 때보다 주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할 그 자리에…

제자들은 없었다.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 제자들은 없었다.

단지 몇몇의 여인들과 예상외의 사람들 소수뿐이었다(마 27:55-56). 그리고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었다(요 19:38-40). 요셉과 니고데모는 공회의원이었다. 지금의 말로 말하면 국회의원 즉 높은 신분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평생 수고하여 쌓아 올렸던 자신의 직과 명예와 부를 송두리째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을 감행한다. 감히 총독에게 가서 예수를 달라하며 그를 정성스럽게 장사 지낸다. 그리고 자신의 감추었던 ‘예수의 제자’의 신분을 coming-out 한다.

반면에 예수의 제자들은 어땠는가? 11제자 중 가장 수제자라던 베드로는 어떻게 했는가?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16:33-34)

“내가 존귀와 영광 받아야 할 바로 그 때, 오히려 발가벗기우고 모멸의 거리에 내팽개쳐 있을 그 때, 베드로여 너희 제자들이여 어디 있었는가?”

그들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음에도 그의 부활을 믿지도 그의 선언을 상기하지도 못했다. 예수의 그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까지 가서 확인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쉽게 말로 수많은 믿음의 표현을 한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순종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런데 주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말의 고백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실제로 믿음대로 하려니 못할 이유가 너무 많다.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들 때문이다. 믿음의 행함은 ‘포기’에서 나온다. 두 개 다 쥘 수 없다. 하나를 놓아야만 그 보다 더 귀한 다른 하나를 택할 수 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영웅들 못지 않게, 성경 속 구석구석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주를 섬겼던 그들이 주를 흡족하게 하지 않았을까? 사복음서를 썼던 제자들도 자신들의 글을 기록하며 이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예수의 직접 제자인 자기들보다 더 헌신적인 저희들을 생각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지 않았을까? 이 애끊는 깨달음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며(행 5:41) 목숨을 아끼지 않는 전도의 헌신을 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있어야 할 자리,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자리에 없었던 그 제자들이 변모하여, 진정한 예수의 증인된 삶을 사는 동인이 되지 않았을까?

사역, 헌신, 봉사… 다 존귀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주 앞에서 내가 죽어야 한다. 주 앞에 자신의 것 내려놓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먼저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선행이 되지 않는 헌신과 봉사는 오히려 교회를 아프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내 안에 계신 그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너 제자여 내가 모멸의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내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광받아야 할 그 때에 어디 있었는가?” 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참헌신이며 참믿음에서 비롯되는 순종의 행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