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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회심했는가?
등록일
2024-04-15 08:03
조회수
440
(성경 본문)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우리의 믿음은 자신이 누구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창조하신 생명체 중 인간만이 영혼이 있다. 창원 거리에 나가 전도를 하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막연히 그럴거다고 추측할 뿐이지, 분명히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안타깝게도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기에, 우리 인간들은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없는 것처럼 무시하며 살고 있다. 더욱이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 이 주장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Martin Rees가 한 말인데,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인식의한계에 관한 문제이지, 부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을 뿐이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 말씀과 함께 영적인 삶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경험함으로써 확신한다.
우리 자신이 평소 관심을 쏟아 붙고 있는 육신, 외모, 육적 건강, 야망, 성취, 소유, 재산, 명예…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 썪어 없어질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속고 살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가치가 전부인냥, 이런 것들에 매혹되어 전심전력을 다해 이것들을 손에 잡으려고 인생의 모든 시간을 쏟아붇고 있지 않은가? 정작 중요한, 나의 본질, 영원히 존재할 내 자신, 영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경주하여, 영원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준비하며 투자하고 있는가?
두번째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할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인이다” 라는 자각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요일 1: 8)
그런데 이 죄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둔다면, 그야말로 세상 그 어떤 실수보다도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죄의 문제를 방치하면 영원한 고통과 형벌이 함께 하는 사망 불못에 빠지는 운명이 된다. 세상의 죄처럼, 죄를 짓고 안들키면, 사법/행정 당국에 걸리지만 않으면 무사하고 괜찮은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세상 권세자들처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셔서(마 10:28-30) 우리의 마음속까지 다 보고 계신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죄를 낱낱히 보고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고지고 쌓아올린 죄에 대하여 법정에서 심판하듯 반드시 심판하신다.
죽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인 사망이 아니다. 속지말라.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으면 심판의 부활로,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 처절한 고통과 형벌에 대한 인지와 경험과 느낌이 영원 지속되는 사망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육신의 감각과 지각이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로 맞이하는 곳이 바로 지옥 불못이다.
이 끔찍한 죄인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용서, 즉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구출할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은, 죄성이 하나도 없고, 100% 의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죄가 0.0001%도 없는 그 분께서 흘리신 피로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입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믿으며,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즉 구원받았음을 믿는다”는 믿음의 선포인 것이다.
중세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는 본인의 신앙 여정을 고백한 ‘고백록’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놀랍게도 어느덧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하나님을 향유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우심으로 인해서 당신께 사로잡혀가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아 저의 중력에 눌려 당신께로부터 떨어져나가곤 하였는데 저 중력이란 곧 육욕의 습관이었습니다(7.17.23)."
그가 세상에서의 성공, 인정, 명예를 추구하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경건한 신학자의 삶으로 변신하게된 위대한 계기가 바로 이 회심에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던 삶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으로…
내가 살던 삶에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심, 자신의 중력에 눌린 삶은 주변을 의식한다. 환경에 연연한다. 없다고, 적다고 불평하고… 춥다고 덥다고 투덜대고… 무심하다고 도와주지않는다고 원망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주목해야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밖의 환경 바라보지 말고, 옆 사람 보지 말고, 내 내면에 거하고 계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 안에 임한 진리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온전히 주님을 향유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천국을 누리는 길이다.
우리의 믿음은 자신이 누구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창조하신 생명체 중 인간만이 영혼이 있다. 창원 거리에 나가 전도를 하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막연히 그럴거다고 추측할 뿐이지, 분명히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안타깝게도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기에, 우리 인간들은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없는 것처럼 무시하며 살고 있다. 더욱이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 이 주장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Martin Rees가 한 말인데,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인식의한계에 관한 문제이지, 부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을 뿐이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 말씀과 함께 영적인 삶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경험함으로써 확신한다.
우리 자신이 평소 관심을 쏟아 붙고 있는 육신, 외모, 육적 건강, 야망, 성취, 소유, 재산, 명예…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 썪어 없어질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속고 살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가치가 전부인냥, 이런 것들에 매혹되어 전심전력을 다해 이것들을 손에 잡으려고 인생의 모든 시간을 쏟아붇고 있지 않은가? 정작 중요한, 나의 본질, 영원히 존재할 내 자신, 영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경주하여, 영원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준비하며 투자하고 있는가?
두번째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할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인이다” 라는 자각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요일 1: 8)
그런데 이 죄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둔다면, 그야말로 세상 그 어떤 실수보다도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죄의 문제를 방치하면 영원한 고통과 형벌이 함께 하는 사망 불못에 빠지는 운명이 된다. 세상의 죄처럼, 죄를 짓고 안들키면, 사법/행정 당국에 걸리지만 않으면 무사하고 괜찮은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롬 6:23).
세상 권세자들처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셔서(마 10:28-30) 우리의 마음속까지 다 보고 계신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죄를 낱낱히 보고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고지고 쌓아올린 죄에 대하여 법정에서 심판하듯 반드시 심판하신다.
죽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인 사망이 아니다. 속지말라.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으면 심판의 부활로,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 처절한 고통과 형벌에 대한 인지와 경험과 느낌이 영원 지속되는 사망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육신의 감각과 지각이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로 맞이하는 곳이 바로 지옥 불못이다.
이 끔찍한 죄인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용서, 즉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구출할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은, 죄성이 하나도 없고, 100% 의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죄가 0.0001%도 없는 그 분께서 흘리신 피로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입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믿으며,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내가 영생을 얻었음을, 즉 구원받았음을 믿는다”는 믿음의 선포인 것이다.
중세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는 본인의 신앙 여정을 고백한 ‘고백록’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놀랍게도 어느덧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하나님을 향유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우심으로 인해서 당신께 사로잡혀가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아 저의 중력에 눌려 당신께로부터 떨어져나가곤 하였는데 저 중력이란 곧 육욕의 습관이었습니다(7.17.23)."
그가 세상에서의 성공, 인정, 명예를 추구하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경건한 신학자의 삶으로 변신하게된 위대한 계기가 바로 이 회심에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던 삶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으로…
내가 살던 삶에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심, 자신의 중력에 눌린 삶은 주변을 의식한다. 환경에 연연한다. 없다고, 적다고 불평하고… 춥다고 덥다고 투덜대고… 무심하다고 도와주지않는다고 원망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주목해야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밖의 환경 바라보지 말고, 옆 사람 보지 말고, 내 내면에 거하고 계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 안에 임한 진리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온전히 주님을 향유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천국을 누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