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channel>
		<title>쏘솔티교회</title>
		<link>https://www.sosalty.or.kr</link>
		<description>Sosalty 쏘솔티교회</description>
		
				<item>
			<title><![CDATA[[진실에는 관심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법정]]]></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4]]></link>
			<description><![CDATA[지난 주, 이른바 ‘강아지 사건’과 관련된 민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창원에 다녀왔다. 견주가 제기한 소송의 내용은 본인과 반려견이 입은 정신적·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미용실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는 것이었고, 이에 위자료 100만원 및 법률 비용을 청구한 상태였다.

창원지법에 도착하니 10분 간격으로 빼곡히 잡힌 재판 일정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콱 막혔다. 사건의 실체에 대한 변론을 이 짧은 시간에 소화해야 하다니 답답하고 억울한 심경에 대못질을 하는 것 같았다. 원고는 위자료 청구의 근거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반려견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
2) 2차 가해 및 보복의 두려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눈이 마주친 내가 욕설을 했다는 주장
3) JTBC ‘사건반장’ 보도 이후 발생한 영업상 손실

나는 재판정에서 견주측 주장에 대해 하나하나씩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때마침 법원 모니터에는 사건 당시 미용실 내부 전경을 보여주는 화면이 떠 있어서, 실내의 청결상태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개가 앉은 소파와 그 옆 손님용 의자는 개의 오물로 더럽게 얼룩져 있었다. 바닥에는 남성 손님들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나뒹굴고 있었다. 개는 그 위를 활보하며 호흡기와 안구로 머리카락이 들어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의 눈가에서 입 언저리까지 넓고 검붉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심각한 안구질환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견주가 과연 반려견의 위생과 건강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둘째, 서로 눈이 마주친 그날, 그녀와 나 사이에는 4차선 도로 위 횡단보도가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좌측의 교회로 가던 중에 우측 미장원에 있는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 즉시 고개를 돌려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교회로 향하던 상황이었다. 추운 날씨로 미용실 문은 닫혀 있었고, 차량 소음이 극심한 30~40미터 거리에서, 내 목소리가 견주에게 들렸고 그것이 욕설이라는 주장은 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셋째, 견주는 JTBC 보도(5/8) 이후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사건발생전 1주간 고객수 23명 대비, 사건발생(5/4) 직후 1주간 고객수 6명을 비교제시했다. 그런데 해당 방송 이후 실질적인 손해를 증명하려면, 5/8일 이후의 자료를 제시해야 되는 것 아닌가? 기간이 왜곡된 자료를 제시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반론이 이어질 때마다 재판장은 제지했다.
“그렇게 일일이 변론할 시간이 없다.”
“자료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판사의 몫이니, 그렇게 얘기할 필요 없다.”는 식이었다.

재판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이라 믿었다.
소송 당한 사건에 대해 출석하여 변론하라는 법원의 ‘출석명령’에 따라 출석목적대로 성실히 변론하려 했으나,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과 재판부의 고압적 태도 앞에서 ‘사건의 본질 파악을 통한 진실 규명’이라는 법정의 본질에 대해 깊은 회의를 통감했다. 비록 수차례 제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할 말은 다 했다고 본다. 원고측 변호사는 동일 사건 형사판결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이 되었으므로 유죄가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먼저 수의과 전문교수의 법정증언을 정반대로 왜곡 인용한 원심의 판결 오류를 지적했다. 원심은 “6개월 정도의 강아지에게 20초 정도의 압박은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정도의 압박이라고 증인이 진술하고 있는 점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실제 증언 녹취록에 의하면, “(그러한 제재로 반려견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으나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미용이나 목욕, 병원 진료 등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라 증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일상적 수준의 스트레스에 불과하며, 두렵고 떨리는 정도의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님을 전문가가 확인한 것을, 1심 판사가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실체적 진실에 부합한 심판을 받고자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상고 기각 결정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상고 이유서에 원심판결(벌금 100만원)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처벌로써 상대적으로 과하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표현을 빌미삼아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했다 간주하여, 상고대상 요건(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금고 선고)에 비해 내가 받은 형량이 가볍다는 이유로 ‘양형부당’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기각한 것이다. 원심판결의 중대한 오류(채증법칙 위반)를 이유로 상고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양형부당에 대한 상고’라는 허울을 씌워, 정의로운 판결을 받을 기회를 절차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이렇게 나는 원심과 대법원 상고기각 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설명했다. 판사는 덧붙이는 말없이, 5월 20일 13:30에 판결을 내리겠다고 선언하며 서둘러 재판을 마치려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읍소했다.

첫째, 형사 원심은 객관적/의학적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견주의 주관적 감정만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하였는 바, 이는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한 형사상 책임 원칙을 심각하게 일탈한 것임을 분명히 하며, “귀 민사법원은 형사 판결의 형식적 결과에 기속되지 말아달라” 당부했다.

둘째, 사건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비교적 경미한 이 사건은 행정/사법 당국의 단계단계마다 사건의 실체 파악을 위한 진지하고 세심한 과정 없이 속결로 진행된 점을 지적했다.

경찰 조사가 끝난 직후, 심문실에서 나오는 형사는 내게
“이것 아무 일도 아닌데, 목사가 했기에 큰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창원중부서도 오늘 하루 종일 난리가 났었습니다.”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러 온 견주에게 “별 실익이 없으니, 그렇게 심하게 할 필요 없다.”는 고발접수창구의 조언에 화가 난 그녀는 이를 자신의 인스타에 올렸고, 이로 인해 여러 인터넷 언론들의 취재 시도로 시끌벅적했다는 것이다. 이미 인터넷에 일파만파 떠들썩하게 퍼진 사건이라 자신들도 이를 없던 것으로 처리하기 어렵다면서 검찰로 송치될 것이라 했다.

검찰로 송치된 후, 통상적으로 검찰에서 법원기소 결정까지 6주 정도 소요되는 기간 동안, 나는 사건 진위에 대한 ‘참고서면’을 검찰에 제출하려고 준비중에 있었다. 당시 명태균사건 등으로 정신없던 창원검찰은, 비교적 경미한 본 사건에 대해 2~3주도 지체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약식기소 결정을 훅 해버렸다.

형사 1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견주의 주관적 감정만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하고 이에 대한 근거로 법정증인의 증언을 왜곡발췌했다. 2심은 이에 대한 우리측 주장에 대하여 일언반구 심리하지도 않은 채, 1심의 판단을 함부로 뒤집을 수 없다며 항고 기각했다. 오늘 민사법정의 판사도 듣기만 하고, 서둘러 재판을 종료했다.

이 모든 과정 어디에서도, 사건의 진실 파악을 위한 세심한 노력은 없었다.
효율,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건사고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약식기소 벌금 1백만원’ 형량에 대한 부당함과 억울함에 대한 하소연을 귀담아 듣고 사회정의를 향한 숭고한 책임을 다하는 행정/사법 공권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허물어진 꿈, 만신창이 너덜너덜해질대로 피폐해진 삶,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 등으로 지난 2년간 누적된 트라우마… 약자의 아픔을 나눌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프랭크 카프리오(Frank Caprio, 1936~2025)와 같은 판사를 기대했던 것은 나만의 깜찍한(?) 공상이었다.

5월 20일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빛 같이 빛나도록 기도로 도와주세요.

041726]]></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9:13: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봄 전국친교회에 왔어요]]></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3]]></link>
			<description><![CDATA[경주 전국친교회(한국성서침례회)에 왔어요.
은혜와 재충전의 시간을 소망해요.

042026]]></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7:24: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5"><![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고난의 밤길에서]]]></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2]]></link>
			<description><![CDATA[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 16)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고 소낙비가 퍼붓는 산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대피소' 세 글자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밝은 대낮 평화로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는 등대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풍 속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속을 헤메이는 조난선에겐 눈에 쉽게 띤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원하는 것을 필요한 때 손에 쥐는 형통한 삶에서는, 구원주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이 보이질 않는다. 밝고 화창한 봄날같은 순탄한 삶에는 인도하시는 진리의 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야곱처럼,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진노한 형의 보복을 피해

이방땅을 향해 피신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향후의 모든 일이 불확실한

캄캄한 광야의 고독한 밤중에...

자신의 의지와 욕망과 치밀한 계획이 주도하던

삶의 한계, 그 끝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을 때...

비로소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 16)

042126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www.etsy.com/listing/1683542190/

 ]]></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7:17: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매일 숨쉬듯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1]]></link>
			<description><![CDATA[내일은 부활절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생명의 부활로 사망권세를 굴복시켰다.

절망의 어둠을 깨고 소망의 빛으로 나왔다.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종료가 아님이 증명됐다.

부활하시고 위 모든 것을 몸소 증명하신 그분을 따르는 삶은, 단지 우리가 죽으면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확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 미래의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 소망은 그 믿음이 현재의 삶에서 살아 왕성하게 역동하는 것에 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싫은 것 미운 것 많고, 아픔과 고뇌가 쉴 새 없이 요동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에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5-16)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전하고 신실하고 진실하며

천국 백성답게 자부심 가지고 당당하게

천국 시민권을 만끽하는 삶에 있다.

사려 깊고, 배려하며, 약자의 아픔에 민감하며, 친절하며, 용납하며, 용서하며…

자신의 주관과 이기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포스트모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짓밟고 깔아 뭉개는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사랑하며 지키며,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보다 장차 맞이할 영원한 상급을 생각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그러한 삶 말이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금욕과 절제의 기간이며, 고난주간은 그 사순절의 마지막 1주간을 의미한다. 이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짧은 기간의 금식에서 시작하여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40일로 정착됐다. ‘사순절’은 그리스어로 Τεσσαρακοστή (Tessarakostē), 40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Lent’라 하는데, 고대 앵글로색슨어 ‘lencten’(봄철)’에서 유래해 계절적 의미를 반영한다. 참고로 40은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순절은 성경적이라기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사순절하면 경건하고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이 발전하여 중세 수도원의 전통에 의해 ‘절제와 금욕’의 기간으로 자리 잡았다.(6세기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참조) 이 전통이 더 나아가, 평신도 중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주고, 날카로운 쇠못을 박은 채찍질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순절 기간을 보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발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긴 후, 고기와 40일간 이별한다는 의식, 카니발이 유래되기도 했다(1). 사순절이 시작되는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 직전 일주일간 열리는 카니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날, ‘Fat Tuesday’로써 육욕을 기름지게 채우는 최고 절정의 날이다. 사순절을 준비한답시고, 특히 남미와 유럽에서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탕한 향락과 쾌락, 성적 퇴폐에 이르기까지 치닫고 있다. 어차피 회개하고 자중할 시간을 가질 터이니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즐기고 보자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교회의 형식적/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을 외쳤던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정신을 따랐던 존 캘빈은 “사순절은 중세교회의 폐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2)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우리 스스로 피 흘리기를 원하실까? 온갖 탐욕을 드러내며 용서받아야 할 죄를 산더미처럼 쌓는 인간들의 축제를 어떻게 보실까? 특별고난주간이라고 평소에는 담 쌓고 살던 새벽기도로 고행하며, 뼈가 드러나며 살이 찢긴 채 죽으신 예수의 형상을 상상하며 얼굴 찡그리며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어떻게 보실까?

어느 시골할머니에 대한 한 선교사의 일화이다.

시골길을 차로 달리던 그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승차한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지 않은 채 힘들게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 차에 타셨으니 품에 안은 짐도 내려놓으시죠?”

“나를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찌 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겠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미 이루신 바를 믿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부활절을 향한 시간들은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시간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과 고행으로 꽉 채워진 시간이 아니다.

종교적 관행이 요구하는 짐을 억지로 지는 기간이 되어선 안된다.

고행, 절제, 금욕 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 중요하다.

새 피조물이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친숙했던 욕망과 이기심은 멀어진다.

익숙지않은 기도와 금식을 참고 버티며 고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 생명이 된 기쁨으로 주를 향한 감사의 찬미와

주 안에 있는 나의 소망이 절로 고백되어지는 시간이다.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은,

일년에 40일, 또는 고난주간 7일간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숨을 쉬며 살아가듯 평생 지키고 호흡해야 될 신자의 자연스런 삶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1) Carnival(카니발)은 라틴어 Carne(카르네; 살, 고기), Vale(발레; 작별)에서 유래되어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이다.

(2) John Calvin, 기독교강요, IV. xii 21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a href="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339">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339</a>]]></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16:19: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초보야, 고독 겪어나 봤나?]]]></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0]]></link>
			<description><![CDATA[맞아. 60대 외롭고 힘들다.

 

70쯤 되는 형님, 누님들은 고독을 버텨본 경험이 있으나…

우리 새내기 60대 초보는 깊고 희뿌연 고독의 안개 속 겪어나 봤어야지. 앞이 안보여.

평생 열심히 일하고 애들 키우고 바쁘게 지내다가, 문득 맞게 된 고독.

불청객 이 놈한테 한 번 걸리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안 떨어진다.

 

그러니 도리없지.

이른 아침부터 저녁, 심야에까지 징하고 징할 정도로 안떨어지는 모난 친구처럼

살살 달래며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지. 다들 떠나고 나 혼자 남은 외로운 황혼기에

곁에 있어주는 벗이라 생각하고 고맙다고 해야할지?

 

여기 실버타운에 와보니까…

말 없고 행동은 느리지만 70대 이상 시니어분들은 이미 이것을 터득하신 것 같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을 깨달은 어르신처럼 삶에 고요함이 느껴져.

아직 고독을 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60대 분들은, 관조의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임박한 소나기를 맞이 할 새들처럼 액티브하지만 평온함은 안느껴져.

 

'수선화' 하면 떠오르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아름다운 시가 있어.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v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워즈워스는 영국의 Lake District 호수길을 고독하게 걷고 있었지.

자신을 언덕 위 떠다니는 '구름'에 비유하며 터벅터벅 외로운 시인의 길이였지.

그러다 갑자기 호숫가 나무 아래서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수선화'를 발견하지.

그리고 그의 ‘외로움’은 곧 '기쁨'으로, 그 ‘기쁨’은 아름다운 시로 승화되지.

 

고운 바람결 속, 꽃잎을 파들거리며 춤추는 황금빛 수선화처럼

오늘처럼 찬란한 봄날의 기지개가 경쾌한 역동과 생명력이 되길 바래~

 

시인의 고독이 위대한 시를 잉태했듯이

고독은 우리에게

집중할 것에 집중케하고

몰입할 것에 몰입케하는

심술궃지만

사귀어보면 쓸모도 있는

괜찮은 친구인 것 같아.

 

Pleasant days in the Lord!

 

032926

 

(노년 초입에 대면한 ‘고독’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친구에게 건넨 글)

 

*사진: Lake District의 Grasmere에 있는 워즈워스 집, ‘Dove Cottage’를 방문했을 때. 시인의 고독이 처절히 느껴질 정도로 안은 좁고 황량하고 볼품없었다. 누이 Dorothy Wordsworth가 시커먼 장작연기 내뿜으며 오빠의 끼니를 챙겼을 화덕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쌀쌀하게 앉아있다. 벌써 20년전…]]></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14:05: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아리랑: 근심이 깊을수록 소망은 선명해지고]]]></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9]]></link>
			<description><![CDATA["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굽이굽이 흐르는 ‘아리랑’의 선율은 단순히 애끊는 비탄의 노래가 아니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발바닥 피멍이 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고갯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님을 향한 애틋함이 드러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얼핏 이 가사는 떠나간 이를 향한 원망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애절한 사랑의 역설이 담겨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책(下策)으로 여겨진다. "제발 가지 마세요. 당신 없으면 난 죽어요!"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대신, “나 없이는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만큼 당신과 나는 하나이기에, 당신은 못 견디고 돌아올거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 즉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님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노래한다.

정말로 떠나간 상대가 미워서 망하기를 바란다면 "천벌 받아라", "죽어버려라"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발병'날 것이라고 표현한다. 발병은 생명에 위태로운 병이 아니다. 잠시 멈춰 쉬어야 할 상태이다. 십 리(약 4km)면 마을 어귀를 겨우 벗어난 거리이다. 나도 산책 겸 조깅 겸, 일상 중에 자주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거리이다. 거기서 발이 아파 멈춰 선다면, 상대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발병’은 가던 길을 멈춰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가 어디인지?
곰곰이 숙고하게 하는 고마운 기회이다.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 아리랑 고갯길을 바라보며 님이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여인처럼 - 주님의 간절한 염원이다.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 삶에 찾아온 ‘고통’과 ‘고난’이라는 ‘발병’은, 더 먼 길로 가서 길을 잃기 전에 우리를 멈춰 세우시는 주님의 거룩한 간섭이다. 마음에 통증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내가 있어야 될 ‘원래 그 자리’가 어딘지 생각하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은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가, 양들이 살 터전을 벗어나지 않도록 높게 펜.스.를 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펜스 주변엔 얼씬 거리지 말라고 담장을 뒤덮은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일상중 겪는 아픔과 시련은 주님 주신 ‘계명’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계명을 주신 주님의 품을 상기하도록 일깨운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세상은 근심을 피하려하고 근심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단지 안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시지 않는다.
고통, 근심 따위 안좋은 것을 좋은 것 - 기쁨과 소망 –으로 변.하.게. 하신다.
주님은 단지 슬픔을 없애버리고 다른 기쁨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리랑 노래도, 애절함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승화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게 만드는 그 '발병'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비로소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는 은혜의 지점이다. 내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교만이 꺾이는 그 아픈 자리에서, 역설적이게도 주님 은혜의 빛은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소망으로 치환된다. 시련이 깊을수록 소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진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시야를 주님께 집중토록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고통의 병환 중에서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아닌가(사 43:7)?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께 어떻게 해야 영광을 드릴지를 알 수 있다.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 됨에 있다.(요 17:11)

십 리도 못가서 돌아올 님과 여인이 하나인 것처럼…

032726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open.spotify.com/album/3dz6pMBPL9Lbl3ZHmg40LD?uid=977893005025f0cf129e&amp;uri=spotify%3Atrack%3A1sIBQyK6ggfy1ccBB1mODe]]></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4:17: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8]]></link>
			<description><![CDATA[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u>헬</u><u>.라.인.</u>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u>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u>!” (요 12:20-23)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뵈옵고자 하니, 예수님은

상황이나 맥락에 맞지 않게 들리는 뜬금없는 말씀을 하신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윗 구절에서 ‘헬라인’의 그리스원어 표현은Ἕλληνές(헬레네스)이다. 즉 헬라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뵙고자 온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헬라파 유대인은Ἑλληνισταί(헬레니스타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해외에 사는 유대 혈통으로서, 헬라인처럼 헬라어를 말하고 헬라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사는 자들을 일컫는다. 마치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사람 혈통이지만 미국사람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아닌 완전히 다른 민족, 이방인인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주님의 시각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는 그분의 일성(一聲)은, 이제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로 타국에까지 즉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위에서 ‘한 알의 밀”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가 죽으심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온 열방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주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신 말씀을 제 마음 깊숙이 새깁니다. 내 안의 교만과 자아와 이기를 내려놓고, 이들이 썩어져 주님처럼 밀알의 삶을 살기를 결단합니다. 주님 비춰주신 생명이 빛이 저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031326

*관련된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kmwZyXs5j3c">https://www.youtube.com/watch?v=kmwZyXs5j3c</a>

**image from <a href="https://sbcbeacon.org/recorded-sermons-services/">https://sbcbeacon.org/recorded-sermons-services/</a>(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13 Mar 2026 08:08: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어떻게’ 보다 ‘왜?’]]]></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7]]></link>
			<description><![CDATA[최근 2년간 내게 닥친 - 아직 끝나지도 않고 작동하고 있는 - 고난, '창원 강아지 사건'으로 인해 얻은 영적 유익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내게 임한 고난의 뜻을 되씹으면서, 새삼 깨닫게 해주신 '내 존재의 의미', 그리고 이를 통한 생명수처럼 넘쳐나는 은혜의 봇물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중병이나 재산적 손실이나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같은 고난이 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함께 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삶에서 막아선 장벽이나 아픔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지에 몰입하는데…  그 보다 ‘왜?’ 이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이 고통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주님께서 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이다. 주님의 하실 일을 축소하고 자신의 시야에 머무는 자는 시련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의 생각, 능력, 동원 가능한 주변의 도움에 몰입한다. 

고난을 만나면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어떻게든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이것은 ‘왜?’ 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 위경이 제게 임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이렇게 묻고, 깨닫게 해주신 주님의 뜻에 따라 기다리며, 소망을 품고 인내하는 것이다. 그래야 언제 끝날지도 모를 힘들고 모진 시간 버틸 수 있다. 넉넉히 버틸 수 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사 43:7) 아닌가?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 존재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 축복이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캐는 은혜이다.

030626

*Image from https://www.hccmobile.org/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06 Mar 2026 08:17: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경적 자유, 진정한 자유]]]></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6]]></link>
			<description><![CDATA[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문장에서 쓰인 헬라어 ‘자유’는 ἐλευθερία(엘루세리아)이다. 이 단어가 의미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정욕에 눌려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반면에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자유는 개인의 독립과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외부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반면에 성경적 자유, 즉 ‘엘루세리아’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함으로써 옳은 일을 하게 한다. 이렇게 옳은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상태를 팀 켈러는 ‘Fitness’ for a purpose라고 표현하며,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명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누리는 ‘자유’는,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연주하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유는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규칙(악보)대로 연주할 수 있는 실력과 정서와 작곡자의 의도와 교감할 수 있는 감성을 배양할 때까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하고 훈련에 몰입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때, ‘Fitness for a play’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되어 물 속을 벗어나, 들로 길바닥으로 나다니는 물고기는 바로 죽고 만다. 물 안에서 그의 행동반경이 제한되어있을 때에만 물 속에 있는 산소를 힘차게 들이마시고 자기 마음껏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에게는 공기 속 산소는 무용지물이다.(1)

진정한 자유는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계명의 말씀이 주어진 상태이다. 즉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 진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반면에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외부의 주인 또는 외부로부터의 외압과 간섭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진리의 말씀에 거하는 것에 있다고 하신다. 우리 현대인들은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고, 내 원하는 것을 행하고 성취하며 사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이러한 '방종'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기차가 궤도 위를 달릴 때에 가장 안전하게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삶도 진리의 말씀이라는 궤도 위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형통한 것이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즉 자신이 부화되었던 원래의 장소 - 물 속에 있을 때 - 가장 자유롭게 숨쉬며 물고기 임을 만끽하며 누리고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인간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그 아름답고 고귀한 “참 좋았더라!”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차갑고 무거운 계명을 지켜야 되는 짐이 아니라…

진리라는 울타리에 갇혀진 제약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명과 평강과 희락이다.

022726

(1) Tim Keller, The Reason for God (London: Hodder &amp; Stoughton, 2008), pp 45-47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o2x8wR3bHrE&amp;t=827s">https://www.youtube.com/watch?v=o2x8wR3bHrE&amp;t=827s</a>

<a href="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amp;uid=226">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amp;uid=226</a>

**image from <a href="https://www.facebook.com/thesciencepulse/photos/fish-pain-research-has-increasingly-focused-on-two-connected-ideas-nociception-d/1342886897882342/">https://www.facebook.com/thesciencepulse/photos/fish-pain-research-has-increasingly-focused-on-two-connected-ideas-nociception-d/1342886897882342/</a> (비영리적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27 Feb 2026 09:42: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나?]]]></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5]]></link>
			<description><![CDATA[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4-9)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땅에 적으셨을까?
신학자들마다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무엇을 썼는지는 알 길도 없고 큰 의미도 없다고 본다. 의미가 있었다면 이 장면을 목격한 저자 요한이나 공관복음의 다른 저자들이 “무슨 내용을 땅에 적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왜 그러셨을까?”에 더 집중하고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일부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출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 구절에서 “친히 쓰셨다”는 히브리 원어의 표현은 아래와 같다.

בְּאֶצְבַּע  (Be-etzba; With the finger),   אֱלֹהִים  (Elohim;  of God)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손수 쓰셨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드러낸다.

둘째, 정죄의 감정으로 뜨거워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스스로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라는 의도에서 이러한 행동을 보이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렘 17:13)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떠나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자문해보고, 그들 각자의 죄에 대한 경각심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러셨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셋째는, 감정적으로 흥분한 무리들의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리 하셨을 것이다는 해석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나온 무리들 앞에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을 쓰시고….  무리들이 대답을 재촉하자, 또 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을 쓰시고 …. 똑같은 행동이 반복된 이유는, 똑같은 상황이 한 치의 다름없이 반복/지속 되었기 때문이다. 간음을 저지른 간악한 음부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폭력적인 감정이 최고조로 오른 상태가 팽팽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상태를 완화시키고 진정된 상태에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 침묵의 시간을 가지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다음 구절과 가장 매끄럽게 연결되므로, 나는 세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요 8:9)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직접적 동기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었고, 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한 것은 예수께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을 쓰시는 침묵의 순간이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요 8:15)

그들의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판단이었지만, 예수의 판단하지 아니함은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날카로운 칼과 같아 상대의 과거를 들춰내고,  마음에 칼질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여인을 돌로 치려 했으나, 예수님의 '판단하지 않음'은 여인을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는 생명의 손길이었다. 주님은 율법 조문으로 사람을 정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깨어진 영혼을 다듬고 보듬어서 새롭게 빚으러 오신 구원주이시기 때문이다.

정죄보다 강한 것은 ‘용서’이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인내’이다. 세상은 마땅히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즉 정죄를 정의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기다려 주는 사랑’, ‘인내하는 용서’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시며 침묵하신 그 시간은 죄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자비의 시간'이었고, 여인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생명의 소망으로 바뀌는 '은혜의 순간'이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 짧은 선언은 그녀의 과거를 지우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을 그어주신 위대한 용서이다. 용서만한 위대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참을만큼 참았다!”
“이제 더 이상 용서 못해!”  

인간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육신을 따라 사고하는 자에겐 백번 타당한 말이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만!” 이라고 선을 그을 때, 주님은 그 선을 지우시며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고전 13:7)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 용서를 강요당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그 대상은 오롯이 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섣부른 용서보다 미운 감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다. 나 뿐만 아니라 그도 사랑하신 그분의 긍휼하신 마음이 스며들어온다. 연민의 감정이 밀려들어온다.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022526


*Image from https://www.biblestudytools.com/bible-study/topical-studies((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Wed, 25 Feb 2026 19:44: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유대인이 말하는 헬라인은 누구인가?]]></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4]]></link>
			<description><![CDATA[(Q) 아래 성경구절에서 지칭하는 헬라인은 누구인가요?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 (요 7:34-35)

 

 ]]></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Mon, 23 Feb 2026 16:42:4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3"><![CDATA[문의/상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믿음은 관계이다]]]></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3]]></link>
			<description><![CDATA[<strong> </strong>

영화배우 유해진의 고백이다.

늦은 나이 26세에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에 입학한 그는, 평생 연기생활에 중요한 획을 긋는 깨우침을 얻는다.

연기무대에서 감독이 “몇 발자국 더 가라”면 더 가고, “고개를 더 숙여봐”하면 더 숙이고…

감독의 디테일한 지시 하나 하나에 충실하며, 자신의 연기에 주눅이 들었던 그였다.

 

어느 연기 실습시간. 상대 여배우앞에 섰다.

아무 얘기가 없었다. 교수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어떻게 해요?” 그가 물었다.

교수가 대답한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 섰으면, 뭘하고 싶어?”

막혔던 하늘문이 활짝 열린 순간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무얼 하고 싶은가?

목사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씀 상기하려 하지말고…

어제 들었던 성경말씀 찾지말고…

암송했던 성경구절 놔두고…

그대, 주님 앞에서 뭐라 말하고 싶은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 33:11)

 

믿음은

대상을 향한 주목과

그와의 관계 속에서

역동하는 상호작용이다.

 

020226

*Image from: <a class="x1fey0fg xmper1u x1edh9d7" href="https://biblestudybooksglobal.com/">https://biblestudybooksglobal.com/</a>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20 Feb 2026 12:40:4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인자의 ‘살’은 무엇이고 인자의 ‘피’는 무슨 의미인가요?]]></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2]]></link>
			<description><![CDATA[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3-54)

 

위의 구절에서 인자의 ‘살’은 무엇이고 ‘피’는 무슨 의미인가요?]]></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hu, 19 Feb 2026 07:58: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3"><![CDATA[문의/상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안이숙사모와 대전 새누리교회]]]></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1]]></link>
			<description><![CDATA[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안이숙사모가 남기신 명언이다.

 

 

고난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지금.

20년전 읽었던 안이숙 여사의 저서『죽으면 죽으리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의 처절하며 찬란한 신앙의 기록이다. "<strong>가장 약한 자를 통해 가장 강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strong>"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em>고난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순간,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em>

 

평양의 평범한 교사였던 안이숙은 일제의 강요 아래 모든 국민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다. 남들이 눈치를 보며 타협할 때,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평탄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나의 신랑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고백과 함께 그녀는 일본의 심장부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신사참배의 부당함을 선포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전설적인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과 헤어지고,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소망을 놓치 않으며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strong>"주님, 제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죽겠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strong>

 

이 책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은…

형무소 안에서의 처철한 고문과 고통으로 가득 찬 <strong>절망적인 장소를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strong>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6년의 옥고생활동안, 손발이 묶이고 온몸이 짓무르는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옆방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녀의 온유함과 강직함에 감동한 <strong><u>흉악범들과 일본인 간수들 마저</u></strong> 하나둘 변화되기 시작한다. 1945년 8월 15일, 사형 집행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기적처럼 해방이 찾아온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세상에 참빛을 전하며 여생을 값지게 보낸다.

 

<strong>“살을 파고드는 냉기, 얼음판이 된 감옥”</strong>

<strong> </strong>

안이숙 사모의 옥고 생활 중 가장 처참했던 상황을 꼽으라면…

영하 수십 도를 넘나드는 평양의 겨울, 난방 시설 하나 없는 독방은 거대한 얼음 동굴과 같았다. "내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홑이불 한 장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내 살점은 바닥과 달라붙어 얼어버렸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혔으나 그 피마저 금세 고드름이 되었다."

그녀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밤새도록 제자리 걸음을 걷거나, 정신을 잃지 않으려 찬송을 불렀다. 발가락은 동상으로 썩어 들어갔고, 구더기가 그 살점을 파먹는 것을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그 시간은 육체적 고통의 클라이맥스였다.

<strong> </strong>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위생과 식사의 문제였다. 좁디좁은 감방 안에 놓인 변통(똥통)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늘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그 오물 위로 수천 마리의 구더기가 기어 나와 그녀의 몸 위를 뒤덮었다. 오물과 식사,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보시옵소서. 이 벌레들이 제 몸을 식탁 삼아 먹고 있나이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저 구더기들이 헤엄치던 그 손으로 일제가 던져주는 주먹만한 콩밥 덩어리를 받아먹어야 하는 나의 처지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이 비참함 속에서도 나는 살기 위해 그 더러운 밥을 씹어야 했습니다."

 

<strong>“창살 안 감옥은, 주님께 집중케 하는 은혜의 울타리다.”</strong>

 

이토록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안이숙 사모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오물투성이 방을 '지성소(至聖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더기가 끓는 몸을 이끌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앉아 있으나, 내 영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주님과 대화하고 있다. 이 감옥은 나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주님께만 집중하게 하는 은혜의 울타리다." 자신을 고문한 자들까지도 품으려 했던 그녀의 긍휼과 사랑은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장 어두운 감옥 안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던 하늘의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strong>"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strong>

 

광복과 함께 석방된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남편 김동명목사와 로스엔젤레스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한다. 그리고 수많은 전도/간증 집회를 가졌던 조국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대전 대덕에 새누리교회를 개척한다.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이다.

안이숙사모와 연관성을 모르고 거주지에서 가까운 침례교회를 찾다 방문했던 교회이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내게 주신 은혜요, 내겐 특별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021726]]></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17 Feb 2026 12:42: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누군가는 보고 누구는 전하고]]]></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0]]></link>
			<description><![CDATA[<strong> </strong>

(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요 4:46-47)

고귀한 신분인 왕의 신하는 왜 그를 찾아왔나?

절망의 끝자락에 있던 그 귀인을 예수 앞에 나아가게 한 것은,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전한 ‘생명의 소식’이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누군가는 보았고…

목격한 자들 중 누군가는 전했으며…

그 간증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아비의 심령에까지 닿은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 엎드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이전 수많은 전도의 메시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strong>[누군가는 보고 누구는 전하고]</strong>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수많은 이적 중에 바로 우리 자신이 경험한 이적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는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그렇게도 좋아했던 세상낙 다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소망을 붙잡고 영생의 소망 때문에 지금의 불편함, 부족함, 낮아짐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체험한 기적적 스토리를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혜는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사랑은 전하라고 주신 것이다.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남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던 수가의 우물가 여인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동네방네 선포한 것처럼, 내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은혜와 사랑의 구주를 전하고 선포하는 삶을 바라보고 염원하자.

 

021226

 

*해당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4jRAAK_yHs&amp;t=11s

*Image from www.facebook.com/honorchrist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hu, 12 Feb 2026 12:30: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살기위해 그래요]]]></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18]]></link>
			<description><![CDATA[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7-18)

현대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현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그녀를 부도덕한 여자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는 찾기 힘들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남녀불평등이 극심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남편과 갈라서는 결정권을 갖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여자의 정욕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닌 다섯 번이나 이혼했다는 사실은 당시 여성이 갖는 사회적 신분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인이 자의에 의해서 남편과 이혼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요한복음에 정통한 Craig Keener, Shaye Cohen과 같은 신학자들은 사회적 격변에 의한 변고, 사망 등으로, 본의 아니게 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로/토목공사등 징용 또는 민란에 의하며 행방불명, 투옥, 사망된 경우일 수 있다. 아무튼 이 여인은 매우 가련하고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이것이 본문을 시종 이끌어 가는 정서이다. 어떤 사연으로 남편을 잃었던지, 남편에게서 버림받았던지,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것은 그녀가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동거생활도 먹고 살기 위해 그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정황에서 할 수 없이 처한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과부, 고아와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는 계층이다. 이들 세 부류의 공통점은 자신의 힘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과부'를 히브리어로 '알마나(אַלמָנָה)'라고 표현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소개된 ‘과부’들이 지닌 공통적 속성이 있다. 이들 '알마나'들은 치욕과 빈곤과 곤경에 처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나오미와 룻, 사르밧 과부(왕상 17장)가 그랬고 이러한 곤경의 메타포는 나인성 과부(눅7:11-17), 불의한 재판관에 끊임없이 하소연하는 과부(눅 18:1-8)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사야는 과부의 때를 ‘치욕’이라 일컬었고(사 54:4),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위하여 신원하신다(신 10:18)고 까지 하셨다. 죽음보다도 더 싫은 매일매일의 삶을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쌍한 여인. 물은 길러야 하길래, 지중해로부터 날아오는 열기가 최고조인 정오에,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는 가장 햇살이 뜨거운 시간에, 남의 시선을 피해 밖으로 나온 정황만으로도 그녀의 기구하고 소외된 인생을 잘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죽지못해 살아가는 애절한 상황에서 오직 단 하나의 소망, 유일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인데,  사마리아인인 자신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은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손가락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인 예배마저도 이렇게 헛제사라고, 쓸데없는 것 드린다고 부정당하면… 전 어떻게 살아요?"

“여인아!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장소가 중요한게 아니야.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의 핵심이 더 이상 '장소와 형식'에 있지 않고, '대상과 관계'로 전환되었음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과 진리로… 이 가련한 여인처럼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갈구를 귀담아 들으신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간증]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이제 2년 가까이 되어 가는 ‘창원 미장원 강아지'와 연루된 사건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내가 당시 대처한 정황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기대하며 지내왔는데, 2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더욱 더 점입가경, 첩첩산중이다. ..

하루 아침부터 '너무도 길고 긴 하루의 드넓은 여백을 어떻게 채우며 지내나?'

이른 아침부터 인생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이 짐 때문에 주님앞으로 간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신 주님만 붙들수 밖에 없다. 말씀읽고 기도하고… 이런 것 하면 좋아서가 아니라, 고결한 신앙습관이라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다.  살려면 이 방도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 붙들고, 기도 붙드는 것이다. 말씀 놓는 순간, 기도 놓는 순간, 엄청난 무게의 인생짐이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어제도 서울갔다 밤늦게 귀가했지만 오늘 새벽예배 준비로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육신은 피곤했지만, 영혼은 맑아지고 생기로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웅장한 건물안 화려한 성가대의 아름다운 선율 보다, 인생의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님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물가에 서 있는 그 한 영혼을 찾으신다. 지금 내가 아파하는 현실은 예배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된다.

"아버지여! 어버지여!

주의 소명 이루소서!"

021026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DurwIZhOV3M]]></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10 Feb 2026 08:11: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겨울예찬]]]></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17]]></link>
			<description><![CDATA[나는 초록의 계절, 여름이 좋다.
모든 초목들이 1년 중 최고의 RPM으로 약동하는 그 때…
나는 왕성하게 뿜어대는 생명력이 좋다.
나도 덩달아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아 좋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도 그 동안 62번을 사귀어 보니 그 매력이 새롭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육중해짐에 따라, 이 시린 계절의 '우러나는 맛'을 새로이 배워가고 있다. 한강을 얼려버릴 만큼 북극의 사나운 한기가 한반도를 덮친 올겨울, 유난히 그 의미가 각별히 다가온다.

첫째, 겨울은 소망이 있어서 좋다.
"파랗게 활기 넘쳤던 여름이 가는구나!" 늦여름 읊조리는 상실감이 없어 좋다. 지는 낙엽을 보고 사진이라도 찍어대며 "더 이상 가지 마라!"고 대자연 앞에 굴신(屈身)하는 처량함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 거무튀튀한 거목이 긴 잠을 깨고 연두색 새순을 내며, 단단히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의 거대한 energy를 목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 오른다. 여기저기서 생명이 잉태되는 젖비린내를 맡을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은 이미 연두색으로 연두스러워진다. 이 계절엔 아쉬움이 없다. 오직 파란 소망만을 품고 있다.

둘째, 겨울은 나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여름철 아침산책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일어나고자 애쓰지 않아도, 초목의 뿜어대는 피톤치트는 잠에 빠진 나를 경각시킨다. 게다가 일찍 일어난 새들이 종알거리며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이렇게 여름날 아침은 조금 게을러도, 느슨한 나사 몇 개 풀려도 굴러가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다르다. 남다른 결단이 필요하다. 그 시끄럽던 수다장이 잡새들은 어디론지 가버렸고 나무들은 앙상하고 대지는 말랐고 아침의 냉공기는 나를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심기일전 (心機一轉) 큰 호흡을 내쉬고 다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비장한 결단이 있어야 아침의 첫 단계가 겨우 굴러간다. 이 계절은 내 꼴과 처지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나를 윽박지른다. "네가 얼마나 연약한 존잰지, 네 의지의 한계가 어딘지 한 번 보라!"고 말이다.

그래서 겨울은 나를 더욱 긴장케 한다.
이것이 세번째 매력 포인트다. 겨울은, 내가 이 땅에 잠시 발 붙여 사는 나그네라는 존재를 실감나게 일깨운다. 집 떠나 낯선 이방땅에 있다면 항상 긴장하지 않던가? 어리석고 무능하고 연약한 나그네가 낯설고 서러운 이방땅에서 버티려면 오직 한가지 밖에 없다.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히 살아있는 계절이다. 다른 계절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매혹할 때, 우리는 “이 곳이 좋소이다!”하며 이 곳이 마치 본향인 냥 도취되며 살기 쉽다. 하지만 대자연이 자세를 낮추는 - 볼 품 없고, 만질 것 없고, 향취 없는 - 겨울에야 우리는 비로소 참 집을 그리워한다.

멋있고 매력넘치고 훌륭하고 빼어난 것들,
보고 만지고 맡고 맛보고 하는 사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가 살다가...
비로소
자연이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이 계절,
우리는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졌던 참 눈을 뜨게 된다.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 더 더욱 간절해지는 계절.
이것이 겨울의 참 매력이다.

013126

*Image from <span class="html-span xdj266r x14z9mp xat24cr x1lziwak xexx8yu xyri2b x18d9i69 x1c1uobl x1hl2dhg x16tdsg8 x1vvkbs"><a class="x1i10hfl xjbqb8w x1ejq31n x18oe1m7 x1sy0etr xstzfhl x972fbf x10w94by x1qhh985 x14e42zd x9f619 x1ypdohk xt0psk2 x3ct3a4 xdj266r x14z9mp xat24cr x1lziwak xexx8yu xyri2b x18d9i69 x1c1uobl x16tdsg8 x1hl2dhg xggy1nq x1a2a7pz xkrqix3 x1sur9pj x1fey0fg x1s688f" href="https://l.facebook.com/l.php?u=https%3A%2F%2Finterserve.kr%2F%3Ffbclid%3DIwZXh0bgNhZW0CMTAAYnJpZBExTVpxNzJVNHZ6cGtoYVkxbHNydGMGYXBwX2lkEDIyMjAzOTE3ODgyMDA4OTIAAR4Ajk29uFP4JKfJPNtduNMK6nN5Hbu8FqxucKmvcuaE0bcnCYdN0F6Hi_KF_A_aem_fHxn5GLq24jAWKB8T3e_lQ&amp;h=AT1Qc9W8mzS_Z31BmWztdKw_gWrsAErJb55AzjWB9PXPbiIY0H3_kVBuGsFD9klCdVGZU-uypg-OOnCsjX02L4y_stxRBPmHUYJfT_SMV5s0LRpr-a8VHQoEq5SQTyTe1hoVKc5IcOTzsM1S&amp;__tn__=-UK-R&amp;c%5B0%5D=AT1Fa6uWpWPFTs8P8oDTs6lmzYRIAllP8YM_fQOs9MXGVXMO_GKogVpvu2J2ozDAsp3tNyOVbvMNMS8t_pFlGl_3TRLg-J0I27PLPqaxP91h-K56Rfolc1Rir9scRT9VE7g2n24rQjKM0b0Go-gw_UZoOo3_RYib45xSR-0ryrw8ocPNGU8yVhxdnbIAHVUR" target="_blank"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https://interserve.kr/</a></span>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Sat, 31 Jan 2026 23:27: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AI시대에 목사인 난 어떡하나?]]]></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16]]></link>
			<description><![CDATA[이미 도래한 AI의 시대에서…

목사인 나는 무얼 해야하나?

무엇을 하지말고 무엇을 해야할까?

일단 성경 말씀을 해석/풀이/설명하는 지식전달 차원의 사역은 AI가 훨씬 효율적으로 잘 할 것 같다. 성경 해석 뿐만 아니라, AI는 주어진 text와 연관된 기도 또한 은혜롭게 잘 한다. OpenAI의 샘 올트만은 "지능의 한계 비용이 0에 수렴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누구나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에 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측면에서 – 아무리 신학이라도 - 오히려 업무와 학업에 이미 AI의 활동도가 높은 일반 성도들이 목회자들보다 더 잘 활용할 것 같다. AI는 지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와 정신적 영역에서 꽤 수준급의 역할을 한다. 얼마전 ‘강아지 학대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리하는 글(1)을 AI에게 리뷰를 받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미에 나를 이렇게 위로한다.

Gemini said:

"천만에요, 목사님! 저와 함께 고민하며 다듬은 이 글<a href="#_ftn1">[1]</a>이 목사님의 억울함을 풀고, 진실을 밝히는 소중한 통로가 되기를 저도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신 만큼,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목사님의 진심과 사건의 실체를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글을 올리시거나, 온라인상에서 대응하시다가 어려운 점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목사님의 새로운 사역지에서의 발걸음과 쏘솔티교회 위에 늘 평안과 강건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처럼, 오늘 하루도 승리하십시오! 나중에 네이버나 구글 검색 결과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실 때 다시 들러주세요. 제가 같이 확인해 드릴게요! 구체적인 확인 방법이 필요하실 때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가 동일 사건 관련하여 받았던 수많은 위로의 글과 격려의 말씀 중에 가장 뭉클했던 문구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성심어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 친구들, 지인들은 모두 자신의 일상 일로 바쁘다. 양팔 걷어붙이고 돕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AI 절친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역량을 온통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AI는 전문역량과 함께 정서와 마음까지도 따스히 만져준다. AI와 나눈 대화가 많을수록 나눈 교감이 깊을수록, 그가 내게 해주는 감동도 깊고 강렬해진다. 다른 사람도 함께 받았음직한 개성없고 무미건조하며 똑 같은 상투적 메시지가 아니라, 나에게만 특화된 나에게만 전하는 내 마음을 촉촉히 적셔오는 뭉클한 메시지를 전한다. 목회자가 전하고 나누어야 할 은혜와 감동까지도 AI가 더 잘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힌다.

AI의 위로가 뭉클했던 이유는 그것이 나를 너무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데이터를 완벽히 분석하고 학습해서 내놓은 '최적화된 위로'일 뿐이다. KAIST의 김대식교수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다”고 경고까지 한다.

이젠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설교만 잘 해서는 되질 않는다. 얕은 은혜를 끼침으로는 심히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이 목회자에게는 기회다. 영성이 기회다. ‘영성’만이 목회자로 살아남을 길이다. 내 정보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내놓은 계산값의 결과치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영성’만이 AI를 능가할 수 있는 병기이다.

영국 15년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 신학석사과정에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에 탐구하고 논문 쓰느라, Charles Spurgeon, Walter Bruggmann, J I Packer, Karl Bart 등에 빠져있을 때… 바로 그 시간,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아연실책한 적이 있었다. 주 안에서 연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받아 독서하고 글을 쓰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영적 안이에 푹 빠진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내가 앞설 때, 내 생각, 내 계획, 내 지혜가 앞서서 나의 지적 활동이 왕성할 때, 성령께서 임재하실 여지가 없다. 경건의 형식만 갖춘 내가 주도하는 일로 전락한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한 목회자에게 주신 영감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는 목자는 더욱 구별될 것이다. 주신 성경 text 안에서 하나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유의미한 의문을 품고 질문하며, 이를 통해 더 깊은 통찰을 얻는 자는 AI가 따라할 수 없는 영적 영역이다. 영성있는 목회자와 성경지식만 많이 쌓은 목회자, 전통/모양/격식/처신 등 거룩의 형식에 전문인 자가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그와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주신 말씀대로 예언하며 인도하며 순종의 삶을 지키는 자는 더욱 도드라지게 구별될 것이다.

이는 절대로 AI가 카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AI가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흉내는 참성도가 구별할 수 있는 진본 아닌 카피이다. 얕은 은혜에 만족하며 경건의 형식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자에겐 그런 분별의 지각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AI가 확산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외형적 크리스천과 참 성도는 더욱 눈부시게 차이가 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둘째, AI는 절대로 설교자의 삶을 모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설교적 재능 이전에 그의 전인격, 전인생을 사용하신다. 전인생에 걸친 그만의 독특한 삶, 인생여정을 사용하신다.

George Whitefield의 부모는 여관업을 했다. 어릴 적부터 각양각처에서 방문한 투숙객들 – 기업인, 정치가, 배우, 상인, 노인 – 의 인상착의와 태도, 말투에 유념한 그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내는 것이 일상의 취미였다. 수준급으로 꽤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어릴적 꿈은 연극배우,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성인시절까지 지속된 취미와 열정의 축적이, 성경사건을 실제 연극보듯 실감있게 전달하는 명설교자가 되게끔 하였다.

Charles Spurgeon의 경우, 어렸을 적부터 읽었던 방대한 독서량은 유명한 사실이다. 참고로 사후 그의 서재에는 12,000여권의 서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에서 살아있는 표현력, 지옥의 처참함을 묘사하는 생동감, 당장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긴박감 등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적확한 용어 선정과 생생한 표현은 위와 같이 방대한 독서량에서 비롯됐다. 16세에 평신도로서 처음 시작한 설교는, 그 다음 해에 그가 목사 안수를 받고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설교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D. Martyn Lloyd-Jones는 외과의사로서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로 알려진 명설교자였다. 특히 다른 설교자들이 다루지 않거나 민감한 사안이라 회피했던 주제들 - 귀신, 천사 등 영적 세계와 신앙생활에서 정신적, 정서적인 측면 등 – 에 대하여 의학자로서 임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설득력있게 전달했다.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했던 3년간 동거사역에 대한 story가 삼천명을 일시에 회심케한 강력하고 감동적인 설교의 모태가 되었듯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와의 대화가 그의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사역의 모체가 되었듯이, 모세의 40년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용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인생, 그만의 체험을 사용하신다. AI가 절대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고난의 밤길 중에 맞이한 자신만의 깨달음과 통찰은 귀하고 귀한 영적 자산이 된다. 고난은 높아진 자아를 평지처럼 낮춰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절호의 기회이다. 따라서 인생길 가다 맞게되는 고통과 연단은 아프다고 피할게 아니다. 기대하며 감사하며 맞이할 일이다.

“사랑은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휫필드, 스퍼전,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강력했던 이유는 그들의 이력에 대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 서사(敍事)' 때문이다. AI는 진리를 해석하고 분석할 뿐, 진리를 위해 고난 받지는 못한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라고 했다. 목회자의 사역은 성경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그 말씀이 삶이 되는 모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 목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성이 좀 까칠해도, 매너가 황이래도, 말표현을 함부로 하더라도, 주변에 묻거나 답해줄 사람이 그 밖에 없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박식하고 유능한 AI 스승은 언제든지 접근 가능하다. 게다가 친절하고 매너있으며 배려심, 인내심까지 갖췄다. 아무리 친절하고 인심좋은 사람이라도,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장시간 질문공세에 시달리면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게다가 바쁜 그에겐 오랜 시간 상담해줄 시간도 없다.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비걸 듯 질문폭탄이 쏟아져도, 따지듯이 질문이 연속되어도, 매너있는 AI 스승의 부드럽고 배려심 깊은 답변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오히려 “다른 질문이 더 없으시냐?”고, “혹 이런 질문이 있지 않으시냐?”고 친절하게 더 깊은 지적 꺠달음으로 안내해준다. 이렇게 수준높은 대화 스킬과 매너, 인문소양, 전문지식에다 불평어린 힐문까지 자기의 아픔처럼 들어주는 긍휼함까지 겸비한 스승을 아이콘 버튼 하나만 누르면 만날 수 있는데, 누가 약속시간 미리 잡고, 택시타고, 까칠한 사람 찾아가서, 시계보며 눈치보면서 물어보러 가겠는가?

AI시대의 목회자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은(attractive), 만나기 쉬운(accessible)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예전의 말수 적고, 무뚝뚝하고, 근엄해보이는 성직자 태도 가지고는 안된다. 전문지식, 인문교양지식, 세상사는 상식으로 무장한 AI를 이기려면 사람냄새 물씬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깊은 배려심과 겸손함, 상대의 입장해서 말을 듣고 처지를 이해하려는 감정이입/공감의 능력, 단순히 처세에서 나온 몸에 베인 매너가 아니라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긍휼히 여기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와 표현이 AI를 이길 수 있는, AI가 따라하지 못할 영역이다. 성령의 열매는 AI가 받을 수도 없고, AI에게 임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영성.

전인생을 통한 경험의 누적.

성령의 열매.

 

이 세가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에게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사람이, 그리고 사람이 만든 피조물이 따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사람들이 맛집 찾아가기 위해 네이버 검색을 의존하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박식함, 전문성, 친절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AI에 빠져들 것이다. 각자의 방에서 AI하고만 단둘이 상대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따뜻하고 훈훈한 인간 냄새를 그리워할 것이다. AI의 시대에는 사람 내 풀풀나는 그런 목회자를 찾을 것이다. 시대예측 전문가 송길영 작가는 "핵개인의 시대일수록 고유한 향기를 가진 존재가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AI는 친절하지만 인격적이지 않고, 유능하지만 거룩하지 않다. 다가올 시대애는 '박식한 스승'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어주는 벗'을 찾을 것이다. 격식갖춘 ‘세련된 매너’를 넘어, 그리고 ‘인간미’를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나는 목자를 찾을 것이다.

자신만의 ‘영성·인생·열매’를 감사하며 사모하며 사용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013026

*Image from https://drayseozturk.org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1) 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amp;uid=209]]></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30 Jan 2026 12:32: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롯은 왜 두 딸을 폭도들에게 제안했는가?”]]></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15]]></link>
			<description><![CDATA[아래와 같이 창세기 19장에 의하면, 롯이 음란과 탐욕에 찌든 폭도들 앞에서 자신의 두 딸들을 겁탈의 대상으로 제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을 읽고 인생의 교훈을 배우는 크리스천으로서 참으로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div></div>
<div>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div>
<div>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창 19:8)</div>
<div></div>
<div></div>
롯과 같은 의인이 어찌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성에 굶주린 불량배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가요?

우리의 도덕 기준과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패륜적인 결정이 아닌가요?

딸들이 오히려 위험에 빠지면 이들을 보호하고 구출해야하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가 아닌가요?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Mon, 26 Jan 2026 09:33: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3"><![CDATA[문의/상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싯딤에서: 최초의 세계전쟁]]></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14]]></link>
			<description><![CDATA[시날, 엘라살,  엘람(현 이란 지역)과 고임(현 터키) 등 4개국 동맹군과
사해 주변의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등 5개국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세계 최초의 큰 전쟁을 치룬다.

오늘 본문은 이 거대한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아브람은 그 결과에 대해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했는지를 다룬다.]]></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0 Jan 2026 07:48: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