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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쏘솔티교회</title>
		<link>https://www.sosalty.or.kr</link>
		<description>Sosalty 쏘솔티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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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큰일 하는 자보다 끝까지 견디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44]]></link>
			<description><![CDATA[20년전 읽었던 안이숙 여사의 저서『죽으면 죽으리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의 처절하며 찬란한 신앙의 기록이다. "가장 약한 자를 통해 가장 강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고난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순간,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평양의 평범한 교사였던 안이숙은 일제의 강요 아래 온 국민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다. 남들이 눈치를 보며 타협할 때,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평탄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결국 그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좁디 좁은 감방 안에 놓인 똥통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늘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그 오물 위로 수천 마리의 구더기가 기어 나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살을 파먹었다. 한 겨울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그의 살점은 바닥과 달라붙어 얼어버렸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혔으나 그 피마저 금세 고드름이 되었다.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제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죽겠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이 책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은…
처철한 고문과 고통으로 가득 찬 절망적인 수형 장소를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6년의 옥고생활동안, 손발이 묶이고 온몸이 짓무르는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옆방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녀의 온유함과 강직함에 감동한 흉악범들과 일본인 간수들마저 하나 둘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메시지이다.

바울의 위대함은 끝까지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것에 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베드로 또한 수없이 반복되는 체포와 투옥, 그리고 갖은 매질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고난 경험을 바탕으로,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했다(벧전 4:12-13)
우리는 체질적으로 고난을 싫어한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능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지혜/실력/능력/재력/인맥을 총동원하여 피하려면 회피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교회는 고난을 혐오한다.
고난은 나쁜 것이고, 기도해서 척결해야 할 것이다. 기도를 통해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고난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를 간구한다. 주님의 뜻은 상관없고 평안 속 안주를 희구한다. 세속적 가치와 혼합, 형식적인 예배,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여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남유다의 멸망 직전, 영적 지도자들은 입을 모아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치며 거짓 위로로써, 임박한 심판을 부정하고, 죄를 증폭하고, 회개의 기회를 빼앗았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수십년전 들었던, LA에서 목회하시던 전직 인기가수 이종용목사님의 간증이 떠오른다. 좋은 주택을 장인에게 상속받았는데, 집이 너무 좋아서 평안과 안락에 영적으로 안이해질 것이 우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주에 하루는 꼭 교회에서 숙식하면서 젊은 날의 영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고 힘썼다고 한다.
주와 함께 하는 자의 영성은 간절히 간구하는 자에게서 나타난다. 인생의 어둔 밤길에 봉착한 영혼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실 수 없다. 최고의 재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가 겸손하여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런데 현대교회의 예배는 날이 갈수록 성대, 화려해지고 수준급 화음으로 명품화 되어 가지만, 간절함은 쇠약해지고 있다.

061226]]></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12 Jun 2026 14:47: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바울이 독신을 권고한 이유]]]></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43]]></link>
			<description><![CDATA[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고전 7:38-39)

위 성경구절을 통한 바울의 권고는 평상시가 아닌, 말세가 임박한 시점에서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에게 하는 메세지임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과 세상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 사이에서 '관심이 분산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에 온전히 헌신하기'를 권고한다. 장가간 자의 현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온전히 헌신하고 싶어도, 가장의 수입원으로써 마땅히 해야 될 세상의 일들, 자녀 양육 등 가족을 돌보는 일에 자연스럽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룩하게 몸과 영혼을 주님께 바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혼자 있는 상태가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전략적 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곧 임박할 종말에 대한 믿음이 퍼져 있었다. 이러한 예언은 AD 66년부터 7년간 지속된 로마와 이스라엘간의 전쟁으로 현실화되었고, 제2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초토화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인데, 그의 저서『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는 전쟁의 처참함과 예루살렘 멸망의 과정에 대한 유일한 동시대 목격자의 기록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요세푸스의 기록이, 실제 역사에서 종말의 예언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고전 7:32)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딤후 3:2-4). 이렇게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가 완연해지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 경계의 말씀대로 우리 각자는 과연 천국 갈 준비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말세의 때가 임박한 시점에서 정말 진심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살고 있는가? 고뇌하며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제안드린다.

061226

*photo from Trinity Bible Chapel(비영리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12 Jun 2026 07:54: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라]]]></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42]]></link>
			<description><![CDATA[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고전 5:10)

이상의 죄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죄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교회는 이들을 멀리하고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담을 쌓는 배타적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과 관계를 맺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이다. 세상에 대해서 정죄하며 그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되 그들의 죄에 동화되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 신자의 정체성이다. 배가 항해하려면 물과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물이 배로 들어오면 이내 침몰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함께 할 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생각, 가치관이 그 안으로 들어오면 교회는 이내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거룩성을 잃게 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절) 
그러나 이런 죄와 함께 하는 자가 교회 내에 있으면 문제는 완전히 다르다. 함께 교제하지도 말고, 같이 먹지도 말아야 한다. 교회 밖, 즉 세상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교회 안에 있는 누룩은 그 퍼지는 속성을 경계함으로 교회가 근절하고 내어 쫓아야 한다(13).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전 5:12)"
남을 판단하는 것은 나쁘지만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주의 말씀으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위 12절에서 쓰인 '판단'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은 κρίνω(Krīnō)로써, '분별하다', '판단하다', '재판하다'의 의미이다. 롬 2: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판단'과 동일한 단어이다.  이는 자기 의에 빠진 편견과 비난이며, 개인의 임의적인 판단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고전 5:12에서 언급된 '판단'은 교회라는 질서 있는 권위에서 비롯되어, 말씀에 근거한 객관적 분별이며, 공동체를 지키려는 데 목적을 둔다.

사랑, 긍휼, 용납, 화평... 이라는
성경적 참의미가 너무나도 확대 왜곡 해석되고 있다.
현대교회의 아픔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면이 적지 않다.
사랑은 마쉬멜로우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측면만 있지 않다.
사랑하는 양들이 발을 헛디뎌 깊은 계곡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목자의 보호 반경을 벗어나 길을 잃고 들짐승의 사냥감이 되지 않도록
가시 울타리를 높게 친 수고(율법과 징계) 또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의 표현이다.

특히 ‘탐욕’이나 ‘속이고 빼앗는 것’은, 사업이나 일상적인 관계에 있어서 크리스천이라도 타협하기 쉬운 유혹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랑’과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행동을 묵과하곤 한다. 하지만 성경적 사랑은 죄를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서로를 바로 세워나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을 물들이고 있는 누룩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이, 공동체를 살리고 누룩을 분칠한 채 다니는 그 사람을 살리는 가장 성경적인 사랑일 수 있다. 하지만 때와 권면의 정도와 언어를 분별하여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 

형제와 이웃이 교회 밖에 있거나 신자로서 교회 안에 있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얻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상대가 불신자이든, 믿는 크리스천이든…
항상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어, 
"그들 영혼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하는데(고전 5:5)"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참 전도자의 길을 가게 도와주소서!

*image from https://www.heartlight.org/togetherinchrist (비영리적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Mon, 08 Jun 2026 08:45: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Never live a dull life]]]></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41]]></link>
			<description><![CDATA[야곱은 꿈에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 위에 서신 여호와께서는 그가 누워 있는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고,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잠에서 깬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고백한다.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깊이 깨닫는 것이다.

   『내 힘이 다할 때, 비로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야곱이라는 이름은, 속임수로 타인의 자리를 빼앗는 자를 뜻한다. 그는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대가로 분노한 형을 피해 춥고 외로운 광야로 도망쳐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누웠을 때, 그는 사기꾼이자 도망자로서 완벽한 한계에 부딪혔다. 자신의 꾀와 능력으로 살아가던 인간의 힘이 마침내 바닥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의지로 달리던 삶의 한계를 처절히 느낀 그때, 그 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야곱은 눈물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자신이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우리 삶 또한 아무리 광야 같이 거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빼어남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와 함께 하는 삶은, 이를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지 여부에 달려있다. 

   『지루한 예배, 고통스런 기도의 시간』

우린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지루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세상의 짜릿함을 쫓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지는 수증기 같은 허상이고 허탄을 줄 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코 지루할 수 없다. 그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 전능자이시며, 가장 깊은 상처까지도 치료하시는 치유자이시며, 축복을 쏟아부어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초자연적인 평안과 기쁨이 마르지 않고 넘쳐나는 여정이다.

시인 류시화의 한 에세이책에는 평생 매일 5시간씩 기도했지만 늘 불행했던 한 기독교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왜 자신에게 이렇게 끊임없는 불행을 주셨냐고 묻자, 하나님은 그가 너무 지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분 또한, 매일 영혼 없고 알맹이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기도를 하루에 5시간씩이나 듣느라 힘들었다고 덧붙이셨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와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종교적이고 습관적이고 외형적인 예배는 우리의 신앙을 질식시킨다. 오늘날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해 예배와 기도의 시간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는 삶』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의 삶을 뒤흔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하나님과의 대면 이후, 바울로 변화되었다. 그의 삶은 율법주의라는 껍데기를 벗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여정으로 바뀌었다. 한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시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을 카페 벽에 걸린 짝퉁 모나리자 초상화처럼 종교적인 틀 안에 가둬두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역동적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흥미진진하게 인도하시는데 우리 삶이 결단코 지루할 수는 없다. 주님이 곁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도 영적 소경처럼 내 뜻대로만 살아가며 그분을 무시하는 것은 슬픈 비극이다.

과연 여호와께서는 여기 계신다(창 28:16). 이제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이다. 온 만유(萬有)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의 손을 잡고, 오늘 그분이 주도하시는 역동적인 삶의 전율을 직접 경험하는데, 어찌 삶이 지루할 수 있겠는가?]]></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0:39: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인생은 갑자기 끼어든 위기 앞에, 당신의 반응에 달려있다]]]></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40]]></link>
			<description><![CDATA[ 

항상 맑은 날만 있을 수 없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폭설이 내릴 때도 있다.
바람 한 점 없고 해가 쨍쨍, 그런 날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겠지.
특별히 칼바람이 몰아치는 혹한기에는, 정신 바짝 차린 절제 있는 대응이 내 생명을 살린다.

어제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둔산동, 중앙로, 은행동 등 번화가에 있는 스타벅스 대형 매장들이 눈에 뜨였다. 매장 안은 조명으로 훤히 밝혀 있었지만, 손님 한 명 없었다. 고급스럽고 넓고 쾌적한 리저브(Reserve) 매장도 예외가 없다. 스타벅스에겐 지금이 혹한기이다. 이 시련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스벅코리아의 생존을 결정할 것이다.

나폴레옹에 의하면, 천재는 특별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평범한 판단과 행동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위기 앞에서 감정을 통제하고 당연한 조치를 당연하게 처리한다.(1)

항공 파일럿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이렇게 정의한다고 한다. “지루한 시간이 끝도 없이 계속되다가 간간이 끼어드는 공포의 순간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파일럿이 하는 일이다.(2)

우리의 삶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나의 직장생활 30년을 반추하면, 출근하고 일하고 만나고 회의하고 퇴근하고 출장가고… 이러한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일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긴박했던 순간, 위기의 때, 매우 중요한 결정의 순간…
그 때 ooo했더라면…
이런 저런 아쉬웠던 생각들만 줄지어 떠오른다.

우리는 수많은 평범한 날들을 유유히 하나씩 마주하며 살아간다.
일상적인 보통의 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되는 인생 속에서
낯선 위기가 갑자기 끼어든 순간. 절체절명, 절박한 그 순간에
나는 무얼 했나? 어떤 반응을 했나?
그때 나의 대응이 내 인생을 결정했음을 나는 잘 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앞길이 안보일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길을 아는 그분께 의탁하고 묻자.
감정을 통제하고 당연한 조치를 하자.
그게 당연한 반응이다.

052226

*image from https://www.tbsnews.net/splash/tom-cruise-returns-fighter-pilot-top-gun-sequel-393654 (비영리목적으로 사용)

(1) Morgan Housel, The Psychology of Money: 한국어판 《돈의 심리학》 (서울: 인플루엔셜, 2026), p 127
(2) 상동, p 129]]></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22 May 2026 21:51: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9]]></link>
			<description><![CDATA["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자신의 삶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억울한 일들과 이로 인한 고난을 눈앞의 사건, 아픈 상처로만 보면 원망과 미움만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바라볼 때,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살리는 전환의 전기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Big Picture 안에 있을 때, 미움보다는 용서를, 보복보다는 화해와 포용이라는 큰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고백이 있었기에, 과거의 깊은 상처는 치유되고 관계는 회복되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스라엘 12지파)은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큰 민족, 하나의 대국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 
요셉이 고난의 세월을 지나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사명자로 우뚝 섰던 것처럼, 저희 과거의 상처가 변하여 낙심한 누군가를 돕고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상처 준 이들을 향해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시고, 미움 대신 용서를, 보복 대신 화해와 포용을 선택할 수 있는 넓고 큰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함으로써 저희가 속한 가정과 일터, 공동체와 사회가 하나 됨을 이루는데 화평의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hu, 21 May 2026 07:41: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nternational Worship in woods]]></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8]]></link>
			<description><![CDATA[지난 주일 외국인 가정들을 초청해서 숲속 야외예배를 드렸어요

(대전시 서구 노루벌 적십자생태원).

 

"Never live a dull life(창 28:12-16)"의 제목으로 설교말씀을 나눴어요.

참석하신 부모님들께서, 귀 쫑긋 눈 크게 뜨고 예배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보고 놀라고 감사했대요.

 
<div>이분들께서 결신하여 꾸준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에도 기쁨으로 참여해서,</div>
<div>주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길  기도해요.</div>
<div></div>
<div>051926</div>]]></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19 May 2026 11:06:5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5"><![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대전 외국인초청 야외예배]]]></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7]]></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dj266r x14z9mp xat24cr x1lziwak x1vvkbs x126k92a">
<div>이번 주일 외국인분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을 소개하는</div>
<div>야외예배(영어)를 아래와 같이 가질 예정입니다.</div>
<div></div>
</div>
<div class="x14z9mp xat24cr x1lziwak x1vvkbs xtlvy1s x126k92a">
<div>대전 인근 지역에 아시는 외국인이 계시면 초청 부탁드립니다.</div>
<div></div>
</div>
<div class="x14z9mp xat24cr x1lziwak x1vvkbs xtlvy1s x126k92a">
<div>- 설교 제목: Never live a dull life</div>
<div>- 설교자: 이강헌 목사</div>
<div>- 장소: 대전시 서구 흑석동 산95-1 노루벌 적십자생태원</div>
<div>- 예배일시: 5월 17일(주일) 오전 11시</div>
<div>- 점심 및 다과 제공</div>
<div>- 문의 전화: 010 5731 5851</div>
</div>]]></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hu, 14 May 2026 08:15: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5"><![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동 행]]]></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6]]></link>
			<description><![CDATA[시골길을 가던 한 남자의 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졌다. 근처의 농부는 들판에 있는 노새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내 줄 수 있을 거요.”..

 

농부는 밧줄로 노새 워릭과 자동차를 연결했다. 그러고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그러자 놀랍게도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다.

 

“노새는 한마리인데 왜 워릭 이름을 부르기 전에 다른 이름들을 계속 외쳤어요?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럿인가요?”

“아니오.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1)

 

어둔 정적 속 고독 가운데 시무룩 어깨 처진 내게 힘을 주는 찬송가가 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1)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pp 6-7

 

*image from <a href="https://www.truthforlife.org/">https://www.truthforlife.org/</a>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Sat, 02 May 2026 12:46: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부흥은 내면의 각성에서부터]]]></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5]]></link>
			<description><![CDATA[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신약학자 제임스 패커는 위의 성경구절을 신약교회에 최초의 부흥을 불러 일으킨 그 원천이 되는 기록이라고 했다.(1) “어찌할꼬!” 믿음의 탄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각 개인의 심령 속에 임했다는 강력한 신호이다. 율법의 형식과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러 있던 이들이,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죄에 찌든 실상을 보았을 때 터져 나온 깊은 한숨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거창한 건물이나 장소 이전에, 각 개인의 심령에 임한다. 우리의 내면에 성령께서 오셔서 거룩한 통치를 시작하신다. 성경의 모든 은혜의 비유 -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 밭에 감추인 보화, 공력의 불에 타지 않는 믿음의 집 - 가 말해주듯, 하나님의 나라는 각자의 심령에서 시작되는 실재이다. 교회의 부흥은 각자의 심령에 임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삼위 하나님 중 '성령 하나님'이 가장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2)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적부흥운동(16세기 종교개혁, 18세기 영적 대각성 등)이 일어났을 때, 그 핵심은 '눈에 보이는 외형'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으로 영적인 시선을 돌린 것에 있었다. 화려하고 장엄한 종교적 의식, 크고 웅장한 성전 건물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외면의 양식과 형식에 치중했던 전통에서, 보이는 않는 성도 각개인의 내면적 실상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영적대각성운동을 통해 현대에서 개신교라 하는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등 주요 교단들이 탄생하였다. 이 영적 대부흥을 주도한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등 영적 리더들의 눈을 통해 관찰된 ‘부흥의 원동력’은 이 한 가지에 있었다. 바로 자신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향한 예민한 내적 각성이다. ‘부흥’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크고 거대한 외면의 현상을 생각한다. 술집이 교회로 변하고, 음란과 패역의 도시가 경건의 도성으로 변하는 등 외적 현상들은 부흥의 결과일 뿐, 부흥의 시발점은 한 영혼이 성령을 통해 겪는 통렬한 내면의 각성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존 웨슬리의 경우, 매 순간 순간마다 자신의 속사람, 영적 상태에 매우 민감하고 엄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적 고백을 저널 및 일기로 기록했다.(3) 왜?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써내려간 그의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쳐놓은 '영적 가드레일'이었다. 이 둘과 동시대에 미국의 영적 대부흥을 이끈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자신이 부임했던 매사추세스의 노스햄튼 지역이 어떤 과정을 통해 부흥을 했으며, 부흥시 발생했던 수백 명의 회심한 영혼들에게 어떤 체험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내면적 분석을, ‘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에 기록하였다. 그는, 참된 회심에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대한 비범한 감각'과 '내적이고 달콤한 기쁨'이 동반된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진정한 회심, 진정한 부흥이 아닌 경우에는 보이는 것, 외면의 행위, 겉으로 드러난 숫자에 관심을 둔다. 참신앙은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의 안을 보고 내면의 변화에 중점을 두는 반면, 외면적 신앙, 종교적 생활은 밖으로 드러나는 바에 신경을 쓴다. 특히 에드워즈가 ‘회심’을 묘사한 표현들을 보면, 주목할만한 것이 하나있다. 

‘내적이고 달콤한 기쁨’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감각, 감정, 기쁨’(4)

썩어 없어 질 것,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가 없다. 성도수, 교회 규모, 숫자에 대한 묘사가 없다. 부흥은 바로 내 심령 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부흥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욱 진전되고 확장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부흥은 우리 영혼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영적 수준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성령과 함께 새 계명으로 무장하고, 새 소망을 품고, 영혼을 향한 불타는 열정으로 주의 나라를 건설해가는 과정이다. 

“어떻게 하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부흥은, 매일 매일 자신의 내면을 향한 이 질문을 더욱 더 진중하게 묻고 더욱 더 영적으로 치열하게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1] James Packer, The Glory of God and the Reviving of Religion, p 100

[2] Nigel G. Wright, God on the Inside (Oxford: The Bible Reading Fellowship, 2006), pp 6-7

[3] The Bicentennial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 (34 volumes, including journals, diaries, sermons, etc.)

[4] 이진락,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적 감정’ 연구』, pp 75-76;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16:792-793]]></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Wed, 29 Apr 2026 18:31: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진실에는 관심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법정]]]></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4]]></link>
			<description><![CDATA[지난 주, 이른바 ‘강아지 사건’과 관련된 민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창원에 다녀왔다. 견주가 제기한 소송의 내용은 본인과 반려견이 입은 정신적·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미용실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는 것이었고, 이에 위자료 100만원 및 법률 비용을 청구한 상태였다.

창원지법에 도착하니 10분 간격으로 빼곡히 잡힌 재판 일정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콱 막혔다. 사건의 실체에 대한 변론을 이 짧은 시간에 소화해야 하다니 답답하고 억울한 심경에 대못질을 하는 것 같았다. 원고는 위자료 청구의 근거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반려견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
2) 2차 가해 및 보복의 두려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눈이 마주친 내가 욕설을 했다는 주장
3) JTBC ‘사건반장’ 보도 이후 발생한 영업상 손실

나는 재판정에서 견주측 주장에 대해 하나하나씩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때마침 법원 모니터에는 사건 당시 미용실 내부 전경을 보여주는 화면이 떠 있어서, 실내의 청결상태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개가 앉은 소파와 그 옆 손님용 의자는 개의 오물로 더럽게 얼룩져 있었다. 바닥에는 남성 손님들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나뒹굴고 있었다. 개는 그 위를 활보하며 호흡기와 안구로 머리카락이 들어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의 눈가에서 입 언저리까지 넓고 검붉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심각한 안구질환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견주가 과연 반려견의 위생과 건강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둘째, 서로 눈이 마주친 그날, 그녀와 나 사이에는 4차선 도로 위 횡단보도가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좌측의 교회로 가던 중에 우측 미장원에 있는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 즉시 고개를 돌려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교회로 향하던 상황이었다. 추운 날씨로 미용실 문은 닫혀 있었고, 차량 소음이 극심한 30~40미터 거리에서, 내 목소리가 견주에게 들렸고 그것이 욕설이라는 주장은 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셋째, 견주는 JTBC 보도(5/8) 이후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사건발생전 1주간 고객수 23명 대비, 사건발생(5/4) 직후 1주간 고객수 6명을 비교제시했다. 그런데 해당 방송 이후 실질적인 손해를 증명하려면, 5/8일 이후의 자료를 제시해야 되는 것 아닌가? 기간이 왜곡된 자료를 제시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반론이 이어질 때마다 재판장은 제지했다.
“그렇게 일일이 변론할 시간이 없다.”
“자료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판사의 몫이니, 그렇게 얘기할 필요 없다.”는 식이었다.

재판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이라 믿었다.
소송 당한 사건에 대해 출석하여 변론하라는 법원의 ‘출석명령’에 따라 출석목적대로 성실히 변론하려 했으나,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과 재판부의 고압적 태도 앞에서 ‘사건의 본질 파악을 통한 진실 규명’이라는 법정의 본질에 대해 깊은 회의를 통감했다. 비록 수차례 제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할 말은 다 했다고 본다. 원고측 변호사는 동일 사건 형사판결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이 되었으므로 유죄가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먼저 수의과 전문교수의 법정증언을 정반대로 왜곡 인용한 원심의 판결 오류를 지적했다. 원심은 “6개월 정도의 강아지에게 20초 정도의 압박은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정도의 압박이라고 증인이 진술하고 있는 점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실제 증언 녹취록에 의하면, “(그러한 제재로 반려견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으나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미용이나 목욕, 병원 진료 등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라 증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일상적 수준의 스트레스에 불과하며, 두렵고 떨리는 정도의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님을 전문가가 확인한 것을, 1심 판사가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실체적 진실에 부합한 심판을 받고자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상고 기각 결정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상고 이유서에 원심판결(벌금 100만원)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처벌로써 상대적으로 과하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표현을 빌미삼아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했다 간주하여, 상고대상 요건(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금고 선고)에 비해 내가 받은 형량이 가볍다는 이유로 ‘양형부당’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기각한 것이다. 원심판결의 중대한 오류(채증법칙 위반)를 이유로 상고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양형부당에 대한 상고’라는 허울을 씌워, 정의로운 판결을 받을 기회를 절차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이렇게 나는 원심과 대법원 상고기각 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설명했다. 판사는 덧붙이는 말없이, 5월 20일 13:30에 판결을 내리겠다고 선언하며 서둘러 재판을 마치려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읍소했다.

첫째, 형사 원심은 객관적/의학적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견주의 주관적 감정만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하였는 바, 이는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한 형사상 책임 원칙을 심각하게 일탈한 것임을 분명히 하며, “귀 민사법원은 형사 판결의 형식적 결과에 기속되지 말아달라” 당부했다.

둘째, 사건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비교적 경미한 이 사건은 행정/사법 당국의 단계단계마다 사건의 실체 파악을 위한 진지하고 세심한 과정 없이 속결로 진행된 점을 지적했다.

경찰 조사가 끝난 직후, 심문실에서 나오는 형사는 내게
“이것 아무 일도 아닌데, 목사가 했기에 큰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창원중부서도 오늘 하루 종일 난리가 났었습니다.”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러 온 견주에게 “별 실익이 없으니, 그렇게 심하게 할 필요 없다.”는 고발접수창구의 조언에 화가 난 그녀는 이를 자신의 인스타에 올렸고, 이로 인해 여러 인터넷 언론들의 취재 시도로 시끌벅적했다는 것이다. 이미 인터넷에 일파만파 떠들썩하게 퍼진 사건이라 자신들도 이를 없던 것으로 처리하기 어렵다면서 검찰로 송치될 것이라 했다.

검찰로 송치된 후, 통상적으로 검찰에서 법원기소 결정까지 6주 정도 소요되는 기간 동안, 나는 사건 진위에 대한 ‘참고서면’을 검찰에 제출하려고 준비중에 있었다. 당시 명태균사건 등으로 정신없던 창원검찰은, 비교적 경미한 본 사건에 대해 2~3주도 지체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약식기소 결정을 훅 해버렸다.

형사 1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견주의 주관적 감정만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하고 이에 대한 근거로 법정증인의 증언을 왜곡발췌했다. 2심은 이에 대한 우리측 주장에 대하여 일언반구 심리하지도 않은 채, 1심의 판단을 함부로 뒤집을 수 없다며 항고 기각했다. 오늘 민사법정의 판사도 듣기만 하고, 서둘러 재판을 종료했다.

이 모든 과정 어디에서도, 사건의 진실 파악을 위한 세심한 노력은 없었다.
효율,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건사고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약식기소 벌금 1백만원’ 형량에 대한 부당함과 억울함에 대한 하소연을 귀담아 듣고 사회정의를 향한 숭고한 책임을 다하는 행정/사법 공권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허물어진 꿈, 만신창이 너덜너덜해질대로 피폐해진 삶,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 등으로 지난 2년간 누적된 트라우마… 약자의 아픔을 나눌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프랭크 카프리오(Frank Caprio, 1936~2025)와 같은 판사를 기대했던 것은 나만의 깜찍한(?) 공상이었다.

5월 20일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빛 같이 빛나도록 기도로 도와주세요.

041726]]></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9:13: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봄 전국친교회에 왔어요]]></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3]]></link>
			<description><![CDATA[경주 전국친교회(한국성서침례회)에 왔어요.
은혜와 재충전의 시간을 소망해요.

042026]]></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7:24: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5"><![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고난의 밤길에서]]]></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2]]></link>
			<description><![CDATA[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 16)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고 소낙비가 퍼붓는 산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대피소' 세 글자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밝은 대낮 평화로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는 등대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풍 속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속을 헤메이는 조난선에겐 눈에 쉽게 띤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원하는 것을 필요한 때 손에 쥐는 형통한 삶에서는, 구원주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이 보이질 않는다. 밝고 화창한 봄날같은 순탄한 삶에는 인도하시는 진리의 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야곱처럼,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진노한 형의 보복을 피해

이방땅을 향해 피신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향후의 모든 일이 불확실한

캄캄한 광야의 고독한 밤중에...

자신의 의지와 욕망과 치밀한 계획이 주도하던

삶의 한계, 그 끝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을 때...

비로소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 16)

042126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www.etsy.com/listing/1683542190/

 ]]></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7:17: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매일 숨쉬듯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1]]></link>
			<description><![CDATA[내일은 부활절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생명의 부활로 사망권세를 굴복시켰다.

절망의 어둠을 깨고 소망의 빛으로 나왔다.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종료가 아님이 증명됐다.

부활하시고 위 모든 것을 몸소 증명하신 그분을 따르는 삶은, 단지 우리가 죽으면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확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 미래의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 소망은 그 믿음이 현재의 삶에서 살아 왕성하게 역동하는 것에 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싫은 것 미운 것 많고, 아픔과 고뇌가 쉴 새 없이 요동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에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5-16)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전하고 신실하고 진실하며

천국 백성답게 자부심 가지고 당당하게

천국 시민권을 만끽하는 삶에 있다.

사려 깊고, 배려하며, 약자의 아픔에 민감하며, 친절하며, 용납하며, 용서하며…

자신의 주관과 이기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포스트모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짓밟고 깔아 뭉개는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사랑하며 지키며,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보다 장차 맞이할 영원한 상급을 생각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그러한 삶 말이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금욕과 절제의 기간이며, 고난주간은 그 사순절의 마지막 1주간을 의미한다. 이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짧은 기간의 금식에서 시작하여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40일로 정착됐다. ‘사순절’은 그리스어로 Τεσσαρακοστή (Tessarakostē), 40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Lent’라 하는데, 고대 앵글로색슨어 ‘lencten’(봄철)’에서 유래해 계절적 의미를 반영한다. 참고로 40은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순절은 성경적이라기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사순절하면 경건하고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이 발전하여 중세 수도원의 전통에 의해 ‘절제와 금욕’의 기간으로 자리 잡았다.(6세기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참조) 이 전통이 더 나아가, 평신도 중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주고, 날카로운 쇠못을 박은 채찍질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순절 기간을 보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발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긴 후, 고기와 40일간 이별한다는 의식, 카니발이 유래되기도 했다(1). 사순절이 시작되는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 직전 일주일간 열리는 카니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날, ‘Fat Tuesday’로써 육욕을 기름지게 채우는 최고 절정의 날이다. 사순절을 준비한답시고, 특히 남미와 유럽에서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탕한 향락과 쾌락, 성적 퇴폐에 이르기까지 치닫고 있다. 어차피 회개하고 자중할 시간을 가질 터이니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즐기고 보자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교회의 형식적/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을 외쳤던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정신을 따랐던 존 캘빈은 “사순절은 중세교회의 폐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2)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우리 스스로 피 흘리기를 원하실까? 온갖 탐욕을 드러내며 용서받아야 할 죄를 산더미처럼 쌓는 인간들의 축제를 어떻게 보실까? 특별고난주간이라고 평소에는 담 쌓고 살던 새벽기도로 고행하며, 뼈가 드러나며 살이 찢긴 채 죽으신 예수의 형상을 상상하며 얼굴 찡그리며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어떻게 보실까?

어느 시골할머니에 대한 한 선교사의 일화이다.

시골길을 차로 달리던 그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승차한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지 않은 채 힘들게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 차에 타셨으니 품에 안은 짐도 내려놓으시죠?”

“나를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찌 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겠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미 이루신 바를 믿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부활절을 향한 시간들은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시간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과 고행으로 꽉 채워진 시간이 아니다.

종교적 관행이 요구하는 짐을 억지로 지는 기간이 되어선 안된다.

고행, 절제, 금욕 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 중요하다.

새 피조물이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친숙했던 욕망과 이기심은 멀어진다.

익숙지않은 기도와 금식을 참고 버티며 고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 생명이 된 기쁨으로 주를 향한 감사의 찬미와

주 안에 있는 나의 소망이 절로 고백되어지는 시간이다.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은,

일년에 40일, 또는 고난주간 7일간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숨을 쉬며 살아가듯 평생 지키고 호흡해야 될 신자의 자연스런 삶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1) Carnival(카니발)은 라틴어 Carne(카르네; 살, 고기), Vale(발레; 작별)에서 유래되어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이다.

(2) John Calvin, 기독교강요, IV. xii 21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a href="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339">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339</a>]]></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16:19: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초보야, 고독 겪어나 봤나?]]]></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30]]></link>
			<description><![CDATA[맞아. 60대 외롭고 힘들다.

 

70쯤 되는 형님, 누님들은 고독을 버텨본 경험이 있으나…

우리 새내기 60대 초보는 깊고 희뿌연 고독의 안개 속 겪어나 봤어야지. 앞이 안보여.

평생 열심히 일하고 애들 키우고 바쁘게 지내다가, 문득 맞게 된 고독.

불청객 이 놈한테 한 번 걸리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안 떨어진다.

 

그러니 도리없지.

이른 아침부터 저녁, 심야에까지 징하고 징할 정도로 안떨어지는 모난 친구처럼

살살 달래며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지. 다들 떠나고 나 혼자 남은 외로운 황혼기에

곁에 있어주는 벗이라 생각하고 고맙다고 해야할지?

 

여기 실버타운에 와보니까…

말 없고 행동은 느리지만 70대 이상 시니어분들은 이미 이것을 터득하신 것 같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을 깨달은 어르신처럼 삶에 고요함이 느껴져.

아직 고독을 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60대 분들은, 관조의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임박한 소나기를 맞이 할 새들처럼 액티브하지만 평온함은 안느껴져.

 

'수선화' 하면 떠오르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아름다운 시가 있어.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v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워즈워스는 영국의 Lake District 호수길을 고독하게 걷고 있었지.

자신을 언덕 위 떠다니는 '구름'에 비유하며 터벅터벅 외로운 시인의 길이였지.

그러다 갑자기 호숫가 나무 아래서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수선화'를 발견하지.

그리고 그의 ‘외로움’은 곧 '기쁨'으로, 그 ‘기쁨’은 아름다운 시로 승화되지.

 

고운 바람결 속, 꽃잎을 파들거리며 춤추는 황금빛 수선화처럼

오늘처럼 찬란한 봄날의 기지개가 경쾌한 역동과 생명력이 되길 바래~

 

시인의 고독이 위대한 시를 잉태했듯이

고독은 우리에게

집중할 것에 집중케하고

몰입할 것에 몰입케하는

심술궃지만

사귀어보면 쓸모도 있는

괜찮은 친구인 것 같아.

 

Pleasant days in the Lord!

 

032926

 

(노년 초입에 대면한 ‘고독’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친구에게 건넨 글)

 

*사진: Lake District의 Grasmere에 있는 워즈워스 집, ‘Dove Cottage’를 방문했을 때. 시인의 고독이 처절히 느껴질 정도로 안은 좁고 황량하고 볼품없었다. 누이 Dorothy Wordsworth가 시커먼 장작연기 내뿜으며 오빠의 끼니를 챙겼을 화덕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쌀쌀하게 앉아있다. 벌써 20년전…]]></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14:05: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아리랑: 근심이 깊을수록 소망은 선명해지고]]]></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9]]></link>
			<description><![CDATA["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굽이굽이 흐르는 ‘아리랑’의 선율은 단순히 애끊는 비탄의 노래가 아니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발바닥 피멍이 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고갯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님을 향한 애틋함이 드러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얼핏 이 가사는 떠나간 이를 향한 원망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애절한 사랑의 역설이 담겨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책(下策)으로 여겨진다. "제발 가지 마세요. 당신 없으면 난 죽어요!"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대신, “나 없이는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만큼 당신과 나는 하나이기에, 당신은 못 견디고 돌아올거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 즉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님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노래한다.

정말로 떠나간 상대가 미워서 망하기를 바란다면 "천벌 받아라", "죽어버려라"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발병'날 것이라고 표현한다. 발병은 생명에 위태로운 병이 아니다. 잠시 멈춰 쉬어야 할 상태이다. 십 리(약 4km)면 마을 어귀를 겨우 벗어난 거리이다. 나도 산책 겸 조깅 겸, 일상 중에 자주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거리이다. 거기서 발이 아파 멈춰 선다면, 상대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발병’은 가던 길을 멈춰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가 어디인지?
곰곰이 숙고하게 하는 고마운 기회이다.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 아리랑 고갯길을 바라보며 님이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여인처럼 - 주님의 간절한 염원이다.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 삶에 찾아온 ‘고통’과 ‘고난’이라는 ‘발병’은, 더 먼 길로 가서 길을 잃기 전에 우리를 멈춰 세우시는 주님의 거룩한 간섭이다. 마음에 통증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내가 있어야 될 ‘원래 그 자리’가 어딘지 생각하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은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가, 양들이 살 터전을 벗어나지 않도록 높게 펜.스.를 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펜스 주변엔 얼씬 거리지 말라고 담장을 뒤덮은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일상중 겪는 아픔과 시련은 주님 주신 ‘계명’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계명을 주신 주님의 품을 상기하도록 일깨운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세상은 근심을 피하려하고 근심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단지 안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시지 않는다.
고통, 근심 따위 안좋은 것을 좋은 것 - 기쁨과 소망 –으로 변.하.게. 하신다.
주님은 단지 슬픔을 없애버리고 다른 기쁨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리랑 노래도, 애절함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승화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게 만드는 그 '발병'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비로소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는 은혜의 지점이다. 내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교만이 꺾이는 그 아픈 자리에서, 역설적이게도 주님 은혜의 빛은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소망으로 치환된다. 시련이 깊을수록 소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진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시야를 주님께 집중토록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고통의 병환 중에서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아닌가(사 43:7)?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께 어떻게 해야 영광을 드릴지를 알 수 있다.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 됨에 있다.(요 17:11)

십 리도 못가서 돌아올 님과 여인이 하나인 것처럼…

032726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open.spotify.com/album/3dz6pMBPL9Lbl3ZHmg40LD?uid=977893005025f0cf129e&amp;uri=spotify%3Atrack%3A1sIBQyK6ggfy1ccBB1mODe]]></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4:17: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8]]></link>
			<description><![CDATA[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u>헬</u><u>.라.인.</u>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u>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u>!” (요 12:20-23)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뵈옵고자 하니, 예수님은

상황이나 맥락에 맞지 않게 들리는 뜬금없는 말씀을 하신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윗 구절에서 ‘헬라인’의 그리스원어 표현은Ἕλληνές(헬레네스)이다. 즉 헬라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뵙고자 온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헬라파 유대인은Ἑλληνισταί(헬레니스타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해외에 사는 유대 혈통으로서, 헬라인처럼 헬라어를 말하고 헬라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사는 자들을 일컫는다. 마치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사람 혈통이지만 미국사람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아닌 완전히 다른 민족, 이방인인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주님의 시각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는 그분의 일성(一聲)은, 이제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로 타국에까지 즉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위에서 ‘한 알의 밀”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가 죽으심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온 열방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주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신 말씀을 제 마음 깊숙이 새깁니다. 내 안의 교만과 자아와 이기를 내려놓고, 이들이 썩어져 주님처럼 밀알의 삶을 살기를 결단합니다. 주님 비춰주신 생명이 빛이 저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031326

*관련된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kmwZyXs5j3c">https://www.youtube.com/watch?v=kmwZyXs5j3c</a>

**image from <a href="https://sbcbeacon.org/recorded-sermons-services/">https://sbcbeacon.org/recorded-sermons-services/</a>(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13 Mar 2026 08:08: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어떻게’ 보다 ‘왜?’]]]></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7]]></link>
			<description><![CDATA[최근 2년간 내게 닥친 - 아직 끝나지도 않고 작동하고 있는 - 고난, '창원 강아지 사건'으로 인해 얻은 영적 유익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내게 임한 고난의 뜻을 되씹으면서, 새삼 깨닫게 해주신 '내 존재의 의미', 그리고 이를 통한 생명수처럼 넘쳐나는 은혜의 봇물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중병이나 재산적 손실이나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같은 고난이 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함께 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삶에서 막아선 장벽이나 아픔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지에 몰입하는데…  그 보다 ‘왜?’ 이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이 고통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주님께서 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이다. 주님의 하실 일을 축소하고 자신의 시야에 머무는 자는 시련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의 생각, 능력, 동원 가능한 주변의 도움에 몰입한다. 

고난을 만나면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어떻게든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이것은 ‘왜?’ 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 위경이 제게 임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이렇게 묻고, 깨닫게 해주신 주님의 뜻에 따라 기다리며, 소망을 품고 인내하는 것이다. 그래야 언제 끝날지도 모를 힘들고 모진 시간 버틸 수 있다. 넉넉히 버틸 수 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사 43:7) 아닌가?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 존재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 축복이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캐는 은혜이다.

030626

*Image from https://www.hccmobile.org/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06 Mar 2026 08:17: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4"><![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경적 자유, 진정한 자유]]]></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6]]></link>
			<description><![CDATA[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문장에서 쓰인 헬라어 ‘자유’는 ἐλευθερία(엘루세리아)이다. 이 단어가 의미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정욕에 눌려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반면에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자유는 개인의 독립과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외부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반면에 성경적 자유, 즉 ‘엘루세리아’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함으로써 옳은 일을 하게 한다. 이렇게 옳은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상태를 팀 켈러는 ‘Fitness’ for a purpose라고 표현하며,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명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누리는 ‘자유’는,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연주하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유는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규칙(악보)대로 연주할 수 있는 실력과 정서와 작곡자의 의도와 교감할 수 있는 감성을 배양할 때까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하고 훈련에 몰입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때, ‘Fitness for a play’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되어 물 속을 벗어나, 들로 길바닥으로 나다니는 물고기는 바로 죽고 만다. 물 안에서 그의 행동반경이 제한되어있을 때에만 물 속에 있는 산소를 힘차게 들이마시고 자기 마음껏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에게는 공기 속 산소는 무용지물이다.(1)

진정한 자유는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계명의 말씀이 주어진 상태이다. 즉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 진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반면에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외부의 주인 또는 외부로부터의 외압과 간섭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진리의 말씀에 거하는 것에 있다고 하신다. 우리 현대인들은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고, 내 원하는 것을 행하고 성취하며 사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이러한 '방종'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기차가 궤도 위를 달릴 때에 가장 안전하게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삶도 진리의 말씀이라는 궤도 위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형통한 것이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즉 자신이 부화되었던 원래의 장소 - 물 속에 있을 때 - 가장 자유롭게 숨쉬며 물고기 임을 만끽하며 누리고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인간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그 아름답고 고귀한 “참 좋았더라!”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차갑고 무거운 계명을 지켜야 되는 짐이 아니라…

진리라는 울타리에 갇혀진 제약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명과 평강과 희락이다.

022726

(1) Tim Keller, The Reason for God (London: Hodder &amp; Stoughton, 2008), pp 45-47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o2x8wR3bHrE&amp;t=827s">https://www.youtube.com/watch?v=o2x8wR3bHrE&amp;t=827s</a>

<a href="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amp;uid=226">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amp;uid=226</a>

**image from <a href="https://www.facebook.com/thesciencepulse/photos/fish-pain-research-has-increasingly-focused-on-two-connected-ideas-nociception-d/1342886897882342/">https://www.facebook.com/thesciencepulse/photos/fish-pain-research-has-increasingly-focused-on-two-connected-ideas-nociception-d/1342886897882342/</a> (비영리적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author><![CDATA[sosalty]]></author>
			<pubDate>Fri, 27 Feb 2026 09:42: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osalty.or.kr/?kboard_redirect=1"><![CDATA[설교칼럼]]></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나?]]]></title>
			<link><![CDATA[https://www.sosalty.or.kr/?kboard_content_redirect=225]]></link>
			<description><![CDATA[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4-9)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땅에 적으셨을까?
신학자들마다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무엇을 썼는지는 알 길도 없고 큰 의미도 없다고 본다. 의미가 있었다면 이 장면을 목격한 저자 요한이나 공관복음의 다른 저자들이 “무슨 내용을 땅에 적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왜 그러셨을까?”에 더 집중하고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일부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출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 구절에서 “친히 쓰셨다”는 히브리 원어의 표현은 아래와 같다.

בְּאֶצְבַּע  (Be-etzba; With the finger),   אֱלֹהִים  (Elohim;  of God)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손수 쓰셨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드러낸다.

둘째, 정죄의 감정으로 뜨거워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스스로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라는 의도에서 이러한 행동을 보이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렘 17:13)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떠나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자문해보고, 그들 각자의 죄에 대한 경각심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러셨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셋째는, 감정적으로 흥분한 무리들의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리 하셨을 것이다는 해석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나온 무리들 앞에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을 쓰시고….  무리들이 대답을 재촉하자, 또 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을 쓰시고 …. 똑같은 행동이 반복된 이유는, 똑같은 상황이 한 치의 다름없이 반복/지속 되었기 때문이다. 간음을 저지른 간악한 음부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폭력적인 감정이 최고조로 오른 상태가 팽팽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상태를 완화시키고 진정된 상태에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 침묵의 시간을 가지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다음 구절과 가장 매끄럽게 연결되므로, 나는 세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요 8:9)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직접적 동기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었고, 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한 것은 예수께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을 쓰시는 침묵의 순간이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요 8:15)

그들의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판단이었지만, 예수의 판단하지 아니함은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날카로운 칼과 같아 상대의 과거를 들춰내고,  마음에 칼질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여인을 돌로 치려 했으나, 예수님의 '판단하지 않음'은 여인을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는 생명의 손길이었다. 주님은 율법 조문으로 사람을 정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깨어진 영혼을 다듬고 보듬어서 새롭게 빚으러 오신 구원주이시기 때문이다.

정죄보다 강한 것은 ‘용서’이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인내’이다. 세상은 마땅히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즉 정죄를 정의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기다려 주는 사랑’, ‘인내하는 용서’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시며 침묵하신 그 시간은 죄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자비의 시간'이었고, 여인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생명의 소망으로 바뀌는 '은혜의 순간'이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 짧은 선언은 그녀의 과거를 지우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을 그어주신 위대한 용서이다. 용서만한 위대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참을만큼 참았다!”
“이제 더 이상 용서 못해!”  

인간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육신을 따라 사고하는 자에겐 백번 타당한 말이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만!” 이라고 선을 그을 때, 주님은 그 선을 지우시며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고전 13:7)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 용서를 강요당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그 대상은 오롯이 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섣부른 용서보다 미운 감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다. 나 뿐만 아니라 그도 사랑하신 그분의 긍휼하신 마음이 스며들어온다. 연민의 감정이 밀려들어온다.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022526


*Image from https://www.biblestudytools.com/bible-study/topical-studies((비영리 목적으로 사용)]]></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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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Feb 2026 19:44:4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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