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설교
체험하고 사유하고
등록일
2025-02-07 15:15
조회수
236
(성경본문) 눅 15:16-21
아버지 안계신 삶의 허망함의 끝을 이토록 절절히 경험한 자가…
불쌍하고 처연하고 처참함이 지긋지긋하게도 연속되는 삶속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은혜를 맛본 자가, 어찌 ‘언제 다시 아버지 품을 떠날’ 마음을 감히 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아버지 사랑을 몸소 체험한 자는, 아버지 곁이 최고의 자리임을 깨달은 자는, 다시는 다시는 절대로 아버지 품을 떠날 수가 없다.
세상삶이 어디 만만하고, 세상에서 이것 저것 이고진 삶이 어디 호락호락 한가?
나도 평신도시절, 해도해도 일이 잘 안풀릴 때.. 기도해도 기도해도 염원했던 기도의 응답은 없고 현실은 그대로인 상황앞에서.. 잘못된 생각이 치밀고 들어올 때가 있다. 변함없고 그대로 인 상황이 지겹도록 지속되면 은근히 부아가 오른다. 분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돋아난다. 그냥 자포자기 하고 싶은 생각이 잡초처럼 일어난다.
“하나님 계속 이렇게 놔두시면, 저 그냥 망가질거예요!” “더 망가질거예요!”
그러다가… 이렇게 하나님 계시지 않는 적막한 삶의 끝자락에, 심히 상처받은 나보다 더 상심하시는 하나님의 한숨이 들려온다. 원망하고 탓하는 나의 한숨보다 70배는 더 깊고 700배는 더 새까맣게 뿌연 주님의 안타까운 탄식이 내 폐부를 찌르며 들어온다.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한 신앙은 주님 은혜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불순종과 자기의로 똘똘 뭉친 삶의 끝자락에서 주님 사랑을 체험하여 다시 살게된 인생의 믿음은 쉽게 구부러질 수 없다. 누구든지 어떤 신자도 방황의 때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마저도 주님의 섭리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믿음이 풀무불과 같은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나오도록 사용하신다.
누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자인가?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온 동생인가? 몸은 항상 아버지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형인가?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형이 되는 자처럼, 아버지의 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신앙은 위험하다. 자기가 일평생 아버지 곁에서 가계일, 농사일을 도우며 살아왔으니 자신이 진정한 아들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착각하고, 자신 스스로를 속인 큰 아들처럼, 체험없는 신앙은 자신이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자가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깨달음 안에서 사유하는 신앙이 귀하다.
들은 말씀…
반드시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사유해야한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되고 자기 신앙이 된다. 건강한 자기 사유가 없는 신앙은 위태롭다. 생각없는 영적 각성은 없으며, 깨달음없는 영적 부흥은 인류역사에 없었던 것이다. 선진들이 주는대로 먹고 선배들이 가르치는대로 믿었던 이에게는 진보가 없다.
18세기 영국의 영적대각성운동…
이 운동을 통해서 오늘날 개신교의 주류 교단들이 탄생했다. 장로교(Presbyterian), 감리교(Methodist), 침례교(Baptist)등. 이 운동은, 개인의 진정한 회심이 없어도,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자신은 태생부터 크리스찬임을 세뇌받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갓난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줌으로써 기독교인임을 공표하고, 이러한 세례의식을 통해 그 아이는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러한 종교생활이 잘못됐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이 운동의 주창자들을 역사적으로 Dissenters, Separatists라고 부른다. 선진들이 신봉해왔던 신앙 생활을 객관적으로 믿음안에서 사유해보고 이것이잘못되었음을 인식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없는 영적 각성은 없으며, 깨달음없는 영적 부흥은 없다.
오히려 자기 생각없는 맹목적인 순종은 교회에 병이 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길은 종교생활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종/헌신/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한 업적으로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영적 탁월함을 인정받았다는 확신, 자신이 가진 달란트, 교회를 향한 모범적 헌신, 도덕적 우월감 등은 본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주된 근원이 된다. 이러한 굴절된 자신감은, 자신만이 신앙의 표준이라는 영적 교만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생각은 매우 단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건강한 사유없이 그들의 삶과 행동은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맹목적인 무비판적 수용과 함께 구동된다.
바울의 선교가, 그가 시무했던 교회가 건강했던 이유는 성도들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의식으로 깨어있었기 때문이다(행 17:10-14). 들은 말씀을 늘 ‘과연 그러한가?’하고 성경과 대조하여 확인했던 깨어있는 성도들 사이에서, 바울 또한 항상 거룩한 긴장 속에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기독교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말씀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드러난다. 자기 생각, 자기 대답, 자기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순종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 같지만, 나쁜 명령에도 잘 순종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사유하는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생각이 마비된 순종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사회를 병들게하고 위태롭게까지 만든다.
아버지 안계신 삶의 허망함의 끝을 이토록 절절히 경험한 자가…
불쌍하고 처연하고 처참함이 지긋지긋하게도 연속되는 삶속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은혜를 맛본 자가, 어찌 ‘언제 다시 아버지 품을 떠날’ 마음을 감히 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아버지 사랑을 몸소 체험한 자는, 아버지 곁이 최고의 자리임을 깨달은 자는, 다시는 다시는 절대로 아버지 품을 떠날 수가 없다.
세상삶이 어디 만만하고, 세상에서 이것 저것 이고진 삶이 어디 호락호락 한가?
나도 평신도시절, 해도해도 일이 잘 안풀릴 때.. 기도해도 기도해도 염원했던 기도의 응답은 없고 현실은 그대로인 상황앞에서.. 잘못된 생각이 치밀고 들어올 때가 있다. 변함없고 그대로 인 상황이 지겹도록 지속되면 은근히 부아가 오른다. 분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돋아난다. 그냥 자포자기 하고 싶은 생각이 잡초처럼 일어난다.
“하나님 계속 이렇게 놔두시면, 저 그냥 망가질거예요!” “더 망가질거예요!”
그러다가… 이렇게 하나님 계시지 않는 적막한 삶의 끝자락에, 심히 상처받은 나보다 더 상심하시는 하나님의 한숨이 들려온다. 원망하고 탓하는 나의 한숨보다 70배는 더 깊고 700배는 더 새까맣게 뿌연 주님의 안타까운 탄식이 내 폐부를 찌르며 들어온다.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한 신앙은 주님 은혜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불순종과 자기의로 똘똘 뭉친 삶의 끝자락에서 주님 사랑을 체험하여 다시 살게된 인생의 믿음은 쉽게 구부러질 수 없다. 누구든지 어떤 신자도 방황의 때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마저도 주님의 섭리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믿음이 풀무불과 같은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나오도록 사용하신다.
누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자인가?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온 동생인가? 몸은 항상 아버지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형인가?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형이 되는 자처럼, 아버지의 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신앙은 위험하다. 자기가 일평생 아버지 곁에서 가계일, 농사일을 도우며 살아왔으니 자신이 진정한 아들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착각하고, 자신 스스로를 속인 큰 아들처럼, 체험없는 신앙은 자신이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자가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깨달음 안에서 사유하는 신앙이 귀하다.
들은 말씀…
반드시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사유해야한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되고 자기 신앙이 된다. 건강한 자기 사유가 없는 신앙은 위태롭다. 생각없는 영적 각성은 없으며, 깨달음없는 영적 부흥은 인류역사에 없었던 것이다. 선진들이 주는대로 먹고 선배들이 가르치는대로 믿었던 이에게는 진보가 없다.
18세기 영국의 영적대각성운동…
이 운동을 통해서 오늘날 개신교의 주류 교단들이 탄생했다. 장로교(Presbyterian), 감리교(Methodist), 침례교(Baptist)등. 이 운동은, 개인의 진정한 회심이 없어도,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자신은 태생부터 크리스찬임을 세뇌받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갓난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줌으로써 기독교인임을 공표하고, 이러한 세례의식을 통해 그 아이는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러한 종교생활이 잘못됐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이 운동의 주창자들을 역사적으로 Dissenters, Separatists라고 부른다. 선진들이 신봉해왔던 신앙 생활을 객관적으로 믿음안에서 사유해보고 이것이잘못되었음을 인식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없는 영적 각성은 없으며, 깨달음없는 영적 부흥은 없다.
오히려 자기 생각없는 맹목적인 순종은 교회에 병이 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길은 종교생활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종/헌신/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한 업적으로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영적 탁월함을 인정받았다는 확신, 자신이 가진 달란트, 교회를 향한 모범적 헌신, 도덕적 우월감 등은 본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주된 근원이 된다. 이러한 굴절된 자신감은, 자신만이 신앙의 표준이라는 영적 교만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생각은 매우 단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건강한 사유없이 그들의 삶과 행동은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맹목적인 무비판적 수용과 함께 구동된다.
바울의 선교가, 그가 시무했던 교회가 건강했던 이유는 성도들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의식으로 깨어있었기 때문이다(행 17:10-14). 들은 말씀을 늘 ‘과연 그러한가?’하고 성경과 대조하여 확인했던 깨어있는 성도들 사이에서, 바울 또한 항상 거룩한 긴장 속에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기독교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말씀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드러난다. 자기 생각, 자기 대답, 자기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순종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 같지만, 나쁜 명령에도 잘 순종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사유하는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생각이 마비된 순종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사회를 병들게하고 위태롭게까지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