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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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금융중심가에서 한식업을 시작한 이유]삼성전자 유럽총괄 마케팅디렉터로서 직임을 정리하고, 내가 한식업을 시작한 것은 답답하고 억울해서였다. 당시 한식당에서 비빔밥 한 그릇은 5파운드였다. 손님은, 따라 나오는 반찬과 함께 한 그릇을 비운 후 셀프로 따른 물로 입가심하고 먹은 숫자대로 “5 곱하기 사람수” 해서 식대를 지불하면 그만이다. 일식, 프렌치, 이태리식에 다 있는 up-sell, cross-sell(1) 개념이 없다. 더 팔아서 이문을 남기기가 어려운 메뉴 구조이다. 그래서 평균 객단가 5파운드가 당시 런던에서 한식 경쟁력의 현주소였다. 반면에 up-sell, cross-sell 개념이 찬란하게 발달한 일식을 런던에서 즐기려면 15파운드 이상은 지불해야 했다. 고객의 심리적 지불가치(2) 측면에서 아시아 음식 중에서 한식은 일식, 인도, 태국, 인도차이나, 중국 음식에도 뒤처지는 싸구려 low-end로써 자리매김 받고 있었다. 한식에 대한 지불가치가 일식의 1/3정도로 형성되면, 한식은 싸구려가 가야만 하는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다. 빈한 자의 악순환의 고리를 밟을 수밖에 없다. 밝고 화려하고 분주한 거리보다, 임대료가 저렴한 어둡고 칙칙한 골목길에 위치하거나, 매장 외관과 인테리어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가고 싶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맛깔내게하고 고급 진 용기와 멋진 로고가 선명히 박힌 포장재를 쓸 수도 없다. 고객의 선택과 입맛을 북돋도록 상냥하고 영어에 능통한 능력 있는 스태프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신선하고 좋은 식자재를 선별해서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렇게 사업할 여건이 위축되면, 이것은 일개 식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지 한식업계 전체의 문제가 된다. 멋들어진 한글 간판을 뽑아 달려고 해도, 그만큼 큰 크기의 한글 폰트를 전문적으로 실크스크린 인쇄해서 톰슨 가공하는 업체를 구할 수가 없다. 시장 수요가 미미하기 때문에 이들 전문가들이 런던에서 사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면 규모의 경제가 발동하기에, 현지에서 일식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업할 여건이 좋아진다. 생선, 식초, 저린 랏쿄, 베니쇼가 같은 식재료를 현지에서 만든 신선한 식품으로 좀 더 싼 가격에 현지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한식의 기초 식재료인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모두 한국에서 들여와야 한다. 오랜 기간을 거쳐 바다 건너온 제품을 비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런던 현지에서 하는 한식업은, 파는 가격은 낮은 반면에 음식 만들어 팔기까지 소요되는 비용은 많이 드는 사업구조이다. 게다가 음식을 생산하는 과정 또한 간단하지 않다. 비빔밥만 하더라도 5 종류나 되는 엄청난 양의 야채를 씻고 다듬고 자르고 채 썰고 대치는 세심하고 긴장된 작업을 반나절동안 해야 한다. 고추장 또한 구입한 제품 그대로가 아니라 식당 고유의 맛을 내기위해 별도의 작업을 한다. 김치를 만들기 위해 배추를 소금물에 저리고, 배추 속 양념을 만들고… 하는 정성 어린 장시간의 수고를 잘 알지 않는가? 게다가 비빔밥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불고기(불고기비빔밥), 연어(연어비빔밥)를 정성껏 구워 내는 것은 또 하나의 숭고한 작업이다. 스시 전문집을 가봤지 않은가? 그들의 음식 만드는 프로세스가 얼마나 단순한가? 그런데 우리보다 가격을 3배나 비싸게 받다니… 그래서 현지의 손맛 좋은 쉐프 출신 한식 사업가들은 한식을 그만 두고, 일식업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한식당의 메뉴에 스시를 추가하여 수익성을 증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식당의 정체성이 애매해지는” 뼈아픈 순간이다.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 속, 깊고 정갈한 맛, 수준 높은 한식이 이렇게 폄훼(貶毁)되어, 아무렇지 않게 이종, 잡종들과 함께 섞여 팔리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한식업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계수적 목표를 분명히 했다. “5년 내에 객단가를 최소한 런던 도심 일식당 수준으로 올려서” 한식의 지불가치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한식의 이미지(Perceived Image)를 격상시키겠다는 목표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고객에게 내놓을 음식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아래 슬로건과 함께 고객에게 약속을 걸고 시작을 했다. “We offer genuine Korean food in a healthy, sizzling and environmentally friendly way.” - ‘순전한 한식”을 - 프레쉬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 ‘지글지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한국식 바베큐와 함께 - ‘환경친화적’으로 즐기세요. 순수한 한식만을 제공하기 위해, 쉐프들의 입에서 퓨전의 “ㅍ”도 나오지 않게 했으며, 새벽 4시반 청과도매시장에 가서 가장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받았으며, 고객의 바로 눈앞에서 고기를 지글지글 굽고, 지나가는 행인을 매혹적인 갈비연기로 자극하는 마케팅 기법으로 고객을 유인하고, 가장 환경친화적인 용기(100% 자연분해되는 생분해성 용기, 재생펄프로 만든 패키지, 친환경 잉크로 인쇄된 쇼핑백 등)에 담아 고객에게 건넨다.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인기있는 ‘Beef BBQ with Rice’(테이크아웃 버전)가 4.95파운드에서 시작해서 9.50파운드까지 올려 받았다. 이것도 성에 차지 않아 Galbi BBQ with Rice(테이크아웃)를 내놓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비싼 갈비를 테이크아웃 메뉴로 내놓을 수 있느냐?”며 만류했다. 테이크아웃 메뉴는 항상 저렴해야 하는가? 나는 편협한 편견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비싸게 받으면 되지!” 그래서 10.50 파운드에 출시했고, 3년도 지나지 않아 13.50까지 올려 받았다. 식당 안에 앉아 먹는 고객(Dine-in)은 최소한 손님당 15파운드 이상은 기꺼이 지불하며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주방장과 신메뉴 개발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Korean BBQ와 매치되는 Cross-sell을 위해 영국에서 가장 큰 와인 유통업체인 ‘Laithwaites’의 Sales Director를 우리집 바비큐 파티에 초청해서, 각종 바베큐를 맛보게 한 후에, 엄선된 8종의 와인을 2주 후에 추천받았다. 그 중 베스트 셀러 와인의 경우, 4잔 나오는 병 하나에 6.90파운드 주고 구매해서 잔당 4.95씩 팔아 200% 이문을 남겼으니, 손님 좋고 나도 좋고 기가 막힌 장사였다. 게다가 이 효자 와인으로 말미암아 고객은 바비큐를 더 시킨다. 이것이 cross-sell의 묘미이다. 같은 목적으로 개발한 ‘호떡 위 아이스크림’은 특히 직장 여성들에게 비빔밥 먹은 후 입가심으로 최고의 인기 품목이었다. Up-sell을 위해서 시도한 메뉴들도 많이 있었으나, 매출에 최고 일등 공신은 ‘BBQ 도시락’으로 16.95로 출시했다. 여기에 맥주 한 병(330ml) 곁들이면 22파운드를 훌쩍 넘는다. 이미 나의 계수적 목표 - 일식의 객단가 15파운드를 뛰어 넘는 것 -를 달성한 환희의 미소가 입술 방긋 넘친다. 런던 도심에서 임대료가 최고로 비싼 프리미엄 상권(바로 옆건물이 골드만삭스 유럽본사였음)에서 시작한 이유도, 수준 높은 한식에 걸맞는 가격을 받으려면 가격민감성이 덜한 고위 연봉소득자들을 타겟으로 하는 것이 타당했다. 그리고 사회의 Opinion Leader격인 이들의 만족한 입은, 고급 이미지 한식을 소개하고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업체의 이름을 왜 씨나(Ceena)로 했는지 이유를 밝히며 글을 맺고자 한다. 씨나는 시편 1:3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로고도 같은 교회를 섬기는 그래픽디자이너 자매가 시냇가와 나무를 형상화하여 개발했다. 당시 마음속 목청이 쉬도록 묵상했던 성경 말씀은 바로 이사야 43:18-19 말씀이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18-19)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풀타임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딱 7년 하고 종료한 사업이었지만 광야같이 척박하고 사막같이 메마른 사업 환경에서 강을 내어 전진하게 하시고 길을 내어 다음에 현지에서 한식사업을 하는 이들에게 선도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1) 업셀(up-sell): 먹으려 했던 것 보다 비싼 메뉴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 예를 들어 세트메뉴. 크로스셀(cross-sell): 메인 메뉴에 어울리는 음식을 추가로 시키는 것, 예를 들어 스시에 사케. (2) 지불가치(Perceived Value): 소비자가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는 가격대. 심리적 지불가치가 높은 상품일수록 고급재(high-end)라 부른다. (사진1) 여행방문객을 위한 영국 유명잡지 ‘Timeout’ 2012에 선정된 한식당 Ceena (영상1) KBS ‘세계는 지금’에 방영된 내용(2013년 7월)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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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을 예비해두신 하나님]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처음 만났을 때는 2차 전도여행 중이었으며, 육체적·정신적·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행 18장). 여러 다신을 숭배하는 아테네에서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채, 바울은 홀로 외롭게 고린도로 이동했다. 당시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합류하지 않은 상태였고(행 18:5),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기에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기록되고 있다(행 18:2-3). 당시 이 상황을, 고전 2:3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회상하며, 자신이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심약해져 있음을 고백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도, 그는 빌립보에서 투옥당하고,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났으며, 베뢰아에서도 박해와 핍박을 모질게 받았고, 아테네에서는 기대 만큼의 열매를 보지 못하고, 잇따른 실패에 패잔병처럼 고린도로 혼자 외롭게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돕는 동역자로서, 그를 회복시키는 친한 벗으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예비해두신 것이다. 코로나가 기세를 떨쳤던 2020년 영국생활을 정리하고 나 홀로 한국으로 사역길을 떠났다. 꽉 찬 6년동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배우게 하셨다. 특히 잇따른 낙심과 좌절과 실패 속에서, 이 눈에 아무 열매 보이지 않고, 황무지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모질게도 오래 지속될지라도, 예비해두신 작은 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게 하신 특별한 은혜가 도처에 있었다. 전도사 시절, 육체적/경제적/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하고 위축된 시절이었다. 난생 처음 실신을 경험하고 아직도 신경과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그 후유증은 강력했다. 심각한 불면증에, 전립선염과 한달 간 지속된 고열과 몸살(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코로나였다고…)로 불면의 밤을 나홀로 서럽게 보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역류성 식도염으로 약 6개월간 죽과 연한 음식만 먹어야 했다. 그 시절 가족처럼 돌봐 주신 서서울성서침례교회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성도분들의 세심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그 모질고 힘들었던 시간… 숨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모님과 자매님들께서 정성껏 끓여다 주신 흑임자죽, 잣죽, 염소탕…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반신이 불수 되어 요양병원에서 치료중인 아내를 돌보랴 노동일 하랴 바쁘고 지친 일상으로 꽉 찬 70대 집사님은 때마다 정성껏 끓인 죽과 직접 만드신 간식을 들고, 내가 기거한 교회 옥탑방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찾아오셨다. 2년간 창원 개척교회 시절에 받았던 ‘강아지 학대 목사’라는 오명과 굴욕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고아처럼 헤매고 있을 때, 창원하늘교회를 만나게 해 주셨다. 형님과 같은 목사님과 사모님의 격려와 응원, 성도분들의 위로가 아니었으면, 그 형극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지? 1년전 대전으로 옮긴 이 곳은 실버타운이라, 때 맞춰 밥 챙겨 먹는 상황은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혼자서 외롭게 사역을 해 나가야 하는 정황은 변함이 없다. 교회개척을 준비하며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죽으면 죽으리라’ 간증 서적의 저자로 유명하신 안이숙사모와 남편께서 세우신 새누리교회이다. 안이숙사모와 연관성을 모르고 거주지에서 가까운 침례교회를 찾다 방문했던 교회이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담임목사님은 바쁘신 일정 중에 내게 별도의 시간을 내주셔서 사역과 신학에 대한 토론을 즐기시는, 내게 친한 영적 동역자요 벗이다. 최근 외국인 사역을 맡겨 주셔서, 전도와 양육에 귀한 헌신을 할 수 있어서 너무도 감사하다. 주님! 연이은 실패, 박해와 잇따른 굴욕에 지치고, 약하고 두려워 떨던 바울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가장 필요한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예비하여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베푸심을 상기합니다. 저 또한 낙심과 외로움, 삶의 곤경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주께서 이미 가장 선한 길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이 믿음 항상 견고하게 붙들게 하옵소서. 황무지처럼 아무 열매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모질게도 오래 지속될지라도,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임을 마음에 굳게 새기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저 역시 누군가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되어,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지친 영혼을 일으켜 세워 함께 주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신실한 동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견디어 주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게 하소서. 063026 관련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G98Bt05CPsQ *Image from https://anastpaul.c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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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음이냐? 평온이냐?]곧아야 할 것이 굽어지고, 속이는 저울을 보면 몹시 불편하다. 어릴 적부터 태생 때부터 그래왔던 것 같다. 어떤 저항이 있더라도 틀린 것은 바로잡기를 원했다. 마땅히 그에 따라오는 대가도 많이 감수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정당함을 향한 나의 순정을 훼손할 순 없었다. 그래야만 내가 숨쉬는 주변과 사회가 좀 더 바르고 청정해질 것 같았다. 여기 대전 실버타운에 입주한 지, 1년이 되어간다. 급식용역업체가 안정되게 양질의 음식을 공급할 수 있도록, 입주자는 한 달에 60식을 의무적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거둔 돈은 그대로 업체에게 지불되는 것이 공지된 계약사항이다. 그런데 올해초 그 돈이 전부 업체에게 가지 않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입주자 대표측은 관리실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며칠 전 주민 공청회 자리를 통해 해명을 했다. 그 해명도 입주자 대표위원 중 한 명이, 마치 관리실을 변호하듯 해명을 했다. 더욱이 못마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설명해왔던 급식비 구조를 식단가제에서 복잡한 운영원가제로 갑자기 바꾸어 설명을 했다. 그렇게 계산체계를 바꾸니 오히려 적자를 봤다는 것이다. 많은 회의와 의심이 갔으나, 질문하는 입주민은 나를 포함해 두 세명뿐. 그리고 “앞으로 식대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입주자 대표의 강성발언으로 공청회는 끝났다. 근거도 입증 자료도 없는 허무맹랑한 관리실이 만든 자료를, 관리실의 예산집행업무를 감독해야 할 입주자 대표위원이 해명한답시고 나서고, 입주자 대표가 관리실을 두둔하는 형국.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조용했다. 대노 (大怒)한 내 가슴만 쿵쾅거리며 시끄러웠을 뿐. 회의가 끝나고 오늘까지 많은 분들이 내게 “수고하셨어요.” “속이 상하시겠어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대다수는 이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조용한 평안을 원했던 것 같다. 입주자 대표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문제의 디테일을 파헤칠 시간도,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지적한 ‘옳음이 주는 즐거움(The Joy of Being Right)’ 에 내가 갇혀 있지는 않았는지 숙고해본다. 에고는 오직 '옳음'을 먹고 살아간다. 옳다는 것은 머릿속의 특정한 입장, 즉 하나의 관점이나 의견, 판단, 혹은 스스로의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내가 옳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틀려야 하기에, 에고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풀리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지적하길 원한다. 내가 옳아야만 한다는 그 갈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당신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깃든 평온과 마주하게 된다.(1) 톨레의 말에 시끌벅적 떠들썩했던 내 마음이 오히려 진정이 된다. 뒤늦은 나이에 인생을 사는 지혜를 깨달았는지 물러지고 힘 빠진 노년에 더 이상 대응할 기력이 쇠진해서인지 옳음을 향한 형극보다 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보는 평온함이 좋다. 충분히 나이 든 사람의 여유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가? 크게 틀린 줄 알면서도 대다수가 가는 편한 길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Put peace above being right! 062626 (1) Eckhart Tolle, A New Earth: Awakening to Your Life’s Purpose (London: Penguin Books, 2005), pp 71-72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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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몸된 교회보다 교회브랜드가 남지 않도록]"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전체에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우리나라나 전세계 근현대 교회사를 통하여 성령사역, 성령의 은사를 받고 능력사역을 하시던 사역자들이 많았다. 당시에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뜨거운 성령사역의 열기를 가는 곳마다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때 뿐. 위대한 영적유산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오랜 세월 교회와 기독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실제로 교회의 영적 유익보다, 사역자 개인이나 다른 차원의 유익으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는가?“ 반문해본다. 은사의 참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놀라운 현상이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 얼마나 유명해졌는가? 가 아니라… 그래서 교회가 더욱 거룩해졌는가? 성도들이 더 영적으로 성숙해졌는가? 복음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었는가? 그 사역이 사라진 후에도 교회가 건강하게 남았는가? 에 있다. 주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 보다 사역자의 이름이 남지 않도록, 주의 몸된 교회보다 교회 브랜드가 남지 않도록, 제자 양성 보다 집회 이벤트에 초점을 잃지 않도록 한국교회를 지켜주시옵소서. 061925 설교내용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live/I3CQ_rmtR0M?si=y_xw3DZFZwxhqVM4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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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하는 자보다 끝까지 견디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20년전 읽었던 안이숙 여사의 저서『죽으면 죽으리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의 처절하며 찬란한 신앙의 기록이다. "가장 약한 자를 통해 가장 강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고난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순간,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평양의 평범한 교사였던 안이숙은 일제의 강요 아래 온 국민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다. 남들이 눈치를 보며 타협할 때,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평탄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결국 그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좁디 좁은 감방 안에 놓인 똥통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늘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그 오물 위로 수천 마리의 구더기가 기어 나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살을 파먹었다. 한 겨울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그의 살점은 바닥과 달라붙어 얼어버렸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혔으나 그 피마저 금세 고드름이 되었다.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제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죽겠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이 책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은… 처철한 고문과 고통으로 가득 찬 절망적인 수형 장소를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6년의 옥고생활동안, 손발이 묶이고 온몸이 짓무르는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옆방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녀의 온유함과 강직함에 감동한 흉악범들과 일본인 간수들마저 하나 둘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메시지이다. 바울의 위대함은 끝까지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것에 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베드로 또한 수없이 반복되는 체포와 투옥, 그리고 갖은 매질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고난 경험을 바탕으로,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했다(벧전 4:12-13) 우리는 체질적으로 고난을 싫어한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능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지혜/실력/능력/재력/인맥을 총동원하여 피하려면 회피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교회는 고난을 혐오한다. 고난은 나쁜 것이고, 기도해서 척결해야 할 것이다. 기도를 통해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고난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를 간구한다. 주님의 뜻은 상관없고 평안 속 안주를 희구한다. 세속적 가치와 혼합, 형식적인 예배,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여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남유다의 멸망 직전, 영적 지도자들은 입을 모아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치며 거짓 위로로써, 임박한 심판을 부정하고, 죄를 증폭하고, 회개의 기회를 빼앗았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수십년전 들었던, LA에서 목회하시던 전직 인기가수 이종용목사님의 간증이 떠오른다. 좋은 주택을 장인에게 상속받았는데, 집이 너무 좋아서 평안과 안락에 영적으로 안이해질 것이 우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주에 하루는 꼭 교회에서 숙식하면서 젊은 날의 영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고 힘썼다고 한다. 주와 함께 하는 자의 영성은 간절히 간구하는 자에게서 나타난다. 인생의 어둔 밤길에 봉착한 영혼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실 수 없다. 최고의 재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가 겸손하여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런데 현대교회의 예배는 날이 갈수록 성대, 화려해지고 수준급 화음으로 명품화 되어 가지만, 간절함은 쇠약해지고 있다. 061226202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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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갑자기 끼어든 위기 앞에, 당신의 반응에 달려있다]항상 맑은 날만 있을 수 없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폭설이 내릴 때도 있다. 바람 한 점 없고 해가 쨍쨍, 그런 날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겠지. 특별히 칼바람이 몰아치는 혹한기에는, 정신 바짝 차린 절제 있는 대응이 내 생명을 살린다. 어제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둔산동, 중앙로, 은행동 등 번화가에 있는 스타벅스 대형 매장들이 눈에 뜨였다. 매장 안은 조명으로 훤히 밝혀 있었지만, 손님 한 명 없었다. 고급스럽고 넓고 쾌적한 리저브(Reserve) 매장도 예외가 없다. 스타벅스에겐 지금이 혹한기이다. 이 시련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스벅코리아의 생존을 결정할 것이다. 나폴레옹에 의하면, 천재는 특별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평범한 판단과 행동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위기 앞에서 감정을 통제하고 당연한 조치를 당연하게 처리한다.(1) 항공 파일럿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이렇게 정의한다고 한다. “지루한 시간이 끝도 없이 계속되다가 간간이 끼어드는 공포의 순간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파일럿이 하는 일이다.(2) 우리의 삶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나의 직장생활 30년을 반추하면, 출근하고 일하고 만나고 회의하고 퇴근하고 출장가고… 이러한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일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긴박했던 순간, 위기의 때, 매우 중요한 결정의 순간… 그 때 ooo했더라면… 이런 저런 아쉬웠던 생각들만 줄지어 떠오른다. 우리는 수많은 평범한 날들을 유유히 하나씩 마주하며 살아간다. 일상적인 보통의 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되는 인생 속에서 낯선 위기가 갑자기 끼어든 순간. 절체절명, 절박한 그 순간에 나는 무얼 했나? 어떤 반응을 했나? 그때 나의 대응이 내 인생을 결정했음을 나는 잘 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앞길이 안보일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길을 아는 그분께 의탁하고 묻자. 감정을 통제하고 당연한 조치를 하자. 그게 당연한 반응이다. 052226 *image from https://www.tbsnews.net/splash/tom-cruise-returns-fighter-pilot-top-gun-sequel-393654 (비영리목적으로 사용) (1) Morgan Housel, The Psychology of Money: 한국어판 《돈의 심리학》 (서울: 인플루엔셜, 2026), p 127 (2) 상동, p 129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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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행]시골길을 가던 한 남자의 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졌다. 근처의 농부는 들판에 있는 노새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내 줄 수 있을 거요.”.. 농부는 밧줄로 노새 워릭과 자동차를 연결했다. 그러고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그러자 놀랍게도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다. “노새는 한마리인데 왜 워릭 이름을 부르기 전에 다른 이름들을 계속 외쳤어요?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럿인가요?” “아니오.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1) 어둔 정적 속 고독 가운데 시무룩 어깨 처진 내게 힘을 주는 찬송가가 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1)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pp 6-7 *image from https://www.truthforlife.org/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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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는 관심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법정]지난 주, 이른바 ‘강아지 사건’과 관련된 민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창원에 다녀왔다. 견주가 제기한 소송의 내용은 본인과 반려견이 입은 정신적·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미용실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는 것이었고, 이에 위자료 100만원 및 법률 비용을 청구한 상태였다. 창원지법에 도착하니 10분 간격으로 빼곡히 잡힌 재판 일정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콱 막혔다. 사건의 실체에 대한 변론을 이 짧은 시간에 소화해야 하다니 답답하고 억울한 심경에 대못질을 하는 것 같았다. 원고는 위자료 청구의 근거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반려견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 2) 2차 가해 및 보복의 두려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눈이 마주친 내가 욕설을 했다는 주장 3) JTBC ‘사건반장’ 보도 이후 발생한 영업상 손실 나는 재판정에서 견주측 주장에 대해 하나하나씩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때마침 법원 모니터에는 사건 당시 미용실 내부 전경을 보여주는 화면이 떠 있어서, 실내의 청결상태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개가 앉은 소파와 그 옆 손님용 의자는 개의 오물로 더럽게 얼룩져 있었다. 바닥에는 남성 손님들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나뒹굴고 있었다. 개는 그 위를 활보하며 호흡기와 안구로 머리카락이 들어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의 눈가에서 입 언저리까지 넓고 검붉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심각한 안구질환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견주가 과연 반려견의 위생과 건강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둘째, 서로 눈이 마주친 그날, 그녀와 나 사이에는 4차선 도로 위 횡단보도가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좌측의 교회로 가던 중에 우측 미장원에 있는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 즉시 고개를 돌려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교회로 향하던 상황이었다. 추운 날씨로 미용실 문은 닫혀 있었고, 차량 소음이 극심한 30~40미터 거리에서, 내 목소리가 견주에게 들렸고 그것이 욕설이라는 주장은 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셋째, 견주는 JTBC 보도(5/8) 이후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사건발생전 1주간 고객수 23명 대비, 사건발생(5/4) 직후 1주간 고객수 6명을 비교제시했다. 그런데 해당 방송 이후 실질적인 손해를 증명하려면, 5/8일 이후의 자료를 제시해야 되는 것 아닌가? 기간이 왜곡된 자료를 제시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의 반론이 이어질 때마다 재판장은 제지했다. “그렇게 일일이 변론할 시간이 없다.” “자료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판사의 몫이니, 그렇게 얘기할 필요 없다.”는 식이었다. 재판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이라 믿었다. 소송 당한 사건에 대해 출석하여 변론하라는 법원의 ‘출석명령’에 따라 출석목적대로 성실히 변론하려 했으나,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과 재판부의 고압적 태도 앞에서 ‘사건의 본질 파악을 통한 진실 규명’이라는 법정의 본질에 대해 깊은 회의를 통감했다. 비록 수차례 제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할 말은 다 했다고 본다. 원고측 변호사는 동일 사건 형사판결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이 되었으므로 유죄가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먼저 수의과 전문교수의 법정증언을 정반대로 왜곡 인용한 원심의 판결 오류를 지적했다. 원심은 “6개월 정도의 강아지에게 20초 정도의 압박은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정도의 압박이라고 증인이 진술하고 있는 점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실제 증언 녹취록에 의하면, “(그러한 제재로 반려견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으나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미용이나 목욕, 병원 진료 등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라 증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일상적 수준의 스트레스에 불과하며, 두렵고 떨리는 정도의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님을 전문가가 확인한 것을, 1심 판사가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실체적 진실에 부합한 심판을 받고자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상고 기각 결정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상고 이유서에 원심판결(벌금 100만원)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처벌로써 상대적으로 과하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표현을 빌미삼아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했다 간주하여, 상고대상 요건(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금고 선고)에 비해 내가 받은 형량이 가볍다는 이유로 ‘양형부당’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기각한 것이다. 원심판결의 중대한 오류(채증법칙 위반)를 이유로 상고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양형부당에 대한 상고’라는 허울을 씌워, 정의로운 판결을 받을 기회를 절차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이렇게 나는 원심과 대법원 상고기각 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설명했다. 판사는 덧붙이는 말없이, 5월 20일 13:30에 판결을 내리겠다고 선언하며 서둘러 재판을 마치려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읍소했다. 첫째, 형사 원심은 객관적/의학적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견주의 주관적 감정만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하였는 바, 이는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한 형사상 책임 원칙을 심각하게 일탈한 것임을 분명히 하며, “귀 민사법원은 형사 판결의 형식적 결과에 기속되지 말아달라” 당부했다. 둘째, 사건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비교적 경미한 이 사건은 행정/사법 당국의 단계단계마다 사건의 실체 파악을 위한 진지하고 세심한 과정 없이 속결로 진행된 점을 지적했다. 경찰 조사가 끝난 직후, 심문실에서 나오는 형사는 내게 “이것 아무 일도 아닌데, 목사가 했기에 큰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창원중부서도 오늘 하루 종일 난리가 났었습니다.”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러 온 견주에게 “별 실익이 없으니, 그렇게 심하게 할 필요 없다.”는 고발접수창구의 조언에 화가 난 그녀는 이를 자신의 인스타에 올렸고, 이로 인해 여러 인터넷 언론들의 취재 시도로 시끌벅적했다는 것이다. 이미 인터넷에 일파만파 떠들썩하게 퍼진 사건이라 자신들도 이를 없던 것으로 처리하기 어렵다면서 검찰로 송치될 것이라 했다. 검찰로 송치된 후, 통상적으로 검찰에서 법원기소 결정까지 6주 정도 소요되는 기간 동안, 나는 사건 진위에 대한 ‘참고서면’을 검찰에 제출하려고 준비중에 있었다. 당시 명태균사건 등으로 정신없던 창원검찰은, 비교적 경미한 본 사건에 대해 2~3주도 지체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약식기소 결정을 훅 해버렸다. 형사 1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견주의 주관적 감정만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하고 이에 대한 근거로 법정증인의 증언을 왜곡발췌했다. 2심은 이에 대한 우리측 주장에 대하여 일언반구 심리하지도 않은 채, 1심의 판단을 함부로 뒤집을 수 없다며 항고 기각했다. 오늘 민사법정의 판사도 듣기만 하고, 서둘러 재판을 종료했다. 이 모든 과정 어디에서도, 사건의 진실 파악을 위한 세심한 노력은 없었다. 효율,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건사고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약식기소 벌금 1백만원’ 형량에 대한 부당함과 억울함에 대한 하소연을 귀담아 듣고 사회정의를 향한 숭고한 책임을 다하는 행정/사법 공권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허물어진 꿈, 만신창이 너덜너덜해질대로 피폐해진 삶,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 등으로 지난 2년간 누적된 트라우마… 약자의 아픔을 나눌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프랭크 카프리오(Frank Caprio, 1936~2025)와 같은 판사를 기대했던 것은 나만의 깜찍한(?) 공상이었다. 5월 20일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빛 같이 빛나도록 기도로 도와주세요. 041726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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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밤길에서]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 16)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고 소낙비가 퍼붓는 산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대피소' 세 글자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밝은 대낮 평화로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는 등대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풍 속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속을 헤메이는 조난선에겐 눈에 쉽게 띤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원하는 것을 필요한 때 손에 쥐는 형통한 삶에서는, 구원주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이 보이질 않는다. 밝고 화창한 봄날같은 순탄한 삶에는 인도하시는 진리의 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야곱처럼,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진노한 형의 보복을 피해 이방땅을 향해 피신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향후의 모든 일이 불확실한 캄캄한 광야의 고독한 밤중에... 자신의 의지와 욕망과 치밀한 계획이 주도하던 삶의 한계, 그 끝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을 때... 비로소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 16) 042126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www.etsy.com/listing/1683542190/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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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숨쉬듯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내일은 부활절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생명의 부활로 사망권세를 굴복시켰다. 절망의 어둠을 깨고 소망의 빛으로 나왔다.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종료가 아님이 증명됐다. 부활하시고 위 모든 것을 몸소 증명하신 그분을 따르는 삶은, 단지 우리가 죽으면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확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 미래의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 소망은 그 믿음이 현재의 삶에서 살아 왕성하게 역동하는 것에 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싫은 것 미운 것 많고, 아픔과 고뇌가 쉴 새 없이 요동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에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5-16)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전하고 신실하고 진실하며 천국 백성답게 자부심 가지고 당당하게 천국 시민권을 만끽하는 삶에 있다. 사려 깊고, 배려하며, 약자의 아픔에 민감하며, 친절하며, 용납하며, 용서하며… 자신의 주관과 이기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포스트모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짓밟고 깔아 뭉개는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사랑하며 지키며,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보다 장차 맞이할 영원한 상급을 생각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그러한 삶 말이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금욕과 절제의 기간이며, 고난주간은 그 사순절의 마지막 1주간을 의미한다. 이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짧은 기간의 금식에서 시작하여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40일로 정착됐다. ‘사순절’은 그리스어로 Τεσσαρακοστή (Tessarakostē), 40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Lent’라 하는데, 고대 앵글로색슨어 ‘lencten’(봄철)’에서 유래해 계절적 의미를 반영한다. 참고로 40은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순절은 성경적이라기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사순절하면 경건하고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이 발전하여 중세 수도원의 전통에 의해 ‘절제와 금욕’의 기간으로 자리 잡았다.(6세기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참조) 이 전통이 더 나아가, 평신도 중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주고, 날카로운 쇠못을 박은 채찍질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순절 기간을 보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발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긴 후, 고기와 40일간 이별한다는 의식, 카니발이 유래되기도 했다(1). 사순절이 시작되는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 직전 일주일간 열리는 카니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날, ‘Fat Tuesday’로써 육욕을 기름지게 채우는 최고 절정의 날이다. 사순절을 준비한답시고, 특히 남미와 유럽에서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탕한 향락과 쾌락, 성적 퇴폐에 이르기까지 치닫고 있다. 어차피 회개하고 자중할 시간을 가질 터이니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즐기고 보자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교회의 형식적/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을 외쳤던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정신을 따랐던 존 캘빈은 “사순절은 중세교회의 폐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2)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우리 스스로 피 흘리기를 원하실까? 온갖 탐욕을 드러내며 용서받아야 할 죄를 산더미처럼 쌓는 인간들의 축제를 어떻게 보실까? 특별고난주간이라고 평소에는 담 쌓고 살던 새벽기도로 고행하며, 뼈가 드러나며 살이 찢긴 채 죽으신 예수의 형상을 상상하며 얼굴 찡그리며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어떻게 보실까? 어느 시골할머니에 대한 한 선교사의 일화이다. 시골길을 차로 달리던 그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승차한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지 않은 채 힘들게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 차에 타셨으니 품에 안은 짐도 내려놓으시죠?” “나를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찌 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겠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미 이루신 바를 믿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부활절을 향한 시간들은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시간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과 고행으로 꽉 채워진 시간이 아니다. 종교적 관행이 요구하는 짐을 억지로 지는 기간이 되어선 안된다. 고행, 절제, 금욕 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 중요하다. 새 피조물이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친숙했던 욕망과 이기심은 멀어진다. 익숙지않은 기도와 금식을 참고 버티며 고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 생명이 된 기쁨으로 주를 향한 감사의 찬미와 주 안에 있는 나의 소망이 절로 고백되어지는 시간이다.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은, 일년에 40일, 또는 고난주간 7일간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숨을 쉬며 살아가듯 평생 지키고 호흡해야 될 신자의 자연스런 삶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1) Carnival(카니발)은 라틴어 Carne(카르네; 살, 고기), Vale(발레; 작별)에서 유래되어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이다. (2) John Calvin, 기독교강요, IV. xii 21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339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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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야, 고독 겪어나 봤나?]맞아. 60대 외롭고 힘들다. 70쯤 되는 형님, 누님들은 고독을 버텨본 경험이 있으나… 우리 새내기 60대 초보는 깊고 희뿌연 고독의 안개 속 겪어나 봤어야지. 앞이 안보여. 평생 열심히 일하고 애들 키우고 바쁘게 지내다가, 문득 맞게 된 고독. 불청객 이 놈한테 한 번 걸리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안 떨어진다. 그러니 도리없지. 이른 아침부터 저녁, 심야에까지 징하고 징할 정도로 안떨어지는 모난 친구처럼 살살 달래며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지. 다들 떠나고 나 혼자 남은 외로운 황혼기에 곁에 있어주는 벗이라 생각하고 고맙다고 해야할지? 여기 실버타운에 와보니까… 말 없고 행동은 느리지만 70대 이상 시니어분들은 이미 이것을 터득하신 것 같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을 깨달은 어르신처럼 삶에 고요함이 느껴져. 아직 고독을 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60대 분들은, 관조의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임박한 소나기를 맞이 할 새들처럼 액티브하지만 평온함은 안느껴져. '수선화' 하면 떠오르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아름다운 시가 있어.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v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워즈워스는 영국의 Lake District 호수길을 고독하게 걷고 있었지. 자신을 언덕 위 떠다니는 '구름'에 비유하며 터벅터벅 외로운 시인의 길이였지. 그러다 갑자기 호숫가 나무 아래서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수선화'를 발견하지. 그리고 그의 ‘외로움’은 곧 '기쁨'으로, 그 ‘기쁨’은 아름다운 시로 승화되지. 고운 바람결 속, 꽃잎을 파들거리며 춤추는 황금빛 수선화처럼 오늘처럼 찬란한 봄날의 기지개가 경쾌한 역동과 생명력이 되길 바래~ 시인의 고독이 위대한 시를 잉태했듯이 고독은 우리에게 집중할 것에 집중케하고 몰입할 것에 몰입케하는 심술궃지만 사귀어보면 쓸모도 있는 괜찮은 친구인 것 같아. Pleasant days in the Lord! 032926 (노년 초입에 대면한 ‘고독’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친구에게 건넨 글) *사진: Lake District의 Grasmere에 있는 워즈워스 집, ‘Dove Cottage’를 방문했을 때. 시인의 고독이 처절히 느껴질 정도로 안은 좁고 황량하고 볼품없었다. 누이 Dorothy Wordsworth가 시커먼 장작연기 내뿜으며 오빠의 끼니를 챙겼을 화덕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쌀쌀하게 앉아있다. 벌써 20년전…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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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근심이 깊을수록 소망은 선명해지고]"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굽이굽이 흐르는 ‘아리랑’의 선율은 단순히 애끊는 비탄의 노래가 아니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발바닥 피멍이 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고갯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님을 향한 애틋함이 드러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얼핏 이 가사는 떠나간 이를 향한 원망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애절한 사랑의 역설이 담겨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책(下策)으로 여겨진다. "제발 가지 마세요. 당신 없으면 난 죽어요!"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대신, “나 없이는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만큼 당신과 나는 하나이기에, 당신은 못 견디고 돌아올거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 즉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님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노래한다. 정말로 떠나간 상대가 미워서 망하기를 바란다면 "천벌 받아라", "죽어버려라"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발병'날 것이라고 표현한다. 발병은 생명에 위태로운 병이 아니다. 잠시 멈춰 쉬어야 할 상태이다. 십 리(약 4km)면 마을 어귀를 겨우 벗어난 거리이다. 나도 산책 겸 조깅 겸, 일상 중에 자주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거리이다. 거기서 발이 아파 멈춰 선다면, 상대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발병’은 가던 길을 멈춰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가 어디인지? 곰곰이 숙고하게 하는 고마운 기회이다.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 아리랑 고갯길을 바라보며 님이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여인처럼 - 주님의 간절한 염원이다.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 삶에 찾아온 ‘고통’과 ‘고난’이라는 ‘발병’은, 더 먼 길로 가서 길을 잃기 전에 우리를 멈춰 세우시는 주님의 거룩한 간섭이다. 마음에 통증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내가 있어야 될 ‘원래 그 자리’가 어딘지 생각하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은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가, 양들이 살 터전을 벗어나지 않도록 높게 펜.스.를 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펜스 주변엔 얼씬 거리지 말라고 담장을 뒤덮은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일상중 겪는 아픔과 시련은 주님 주신 ‘계명’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계명을 주신 주님의 품을 상기하도록 일깨운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세상은 근심을 피하려하고 근심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단지 안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시지 않는다. 고통, 근심 따위 안좋은 것을 좋은 것 - 기쁨과 소망 –으로 변.하.게. 하신다. 주님은 단지 슬픔을 없애버리고 다른 기쁨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리랑 노래도, 애절함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승화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게 만드는 그 '발병'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비로소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는 은혜의 지점이다. 내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교만이 꺾이는 그 아픈 자리에서, 역설적이게도 주님 은혜의 빛은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소망으로 치환된다. 시련이 깊을수록 소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진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시야를 주님께 집중토록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고통의 병환 중에서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아닌가(사 43:7)?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께 어떻게 해야 영광을 드릴지를 알 수 있다.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 됨에 있다.(요 17:11) 십 리도 못가서 돌아올 님과 여인이 하나인 것처럼… 032726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open.spotify.com/album/3dz6pMBPL9Lbl3ZHmg40LD?uid=977893005025f0cf129e&uri=spotify%3Atrack%3A1sIBQyK6ggfy1ccBB1mODe2026-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