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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음을 지키라 하실까?
등록일
2025-07-31 14:49
조회수
122
(성경본문)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0-23)
우리는 전도를 통해, 불신자를 ‘믿음의 집’ 문 앞까지는 데려갈 수 있지만, 그 다음 그가 문을 열고 믿음 여정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순전히 그에게 달려있다. 그 과정은 며칠, 몇 달, 몇 년,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그가 전도자로부터 들은 바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비교해보고, 무엇이 좋은지 판단해보고 하는 ‘인지’적 과정을 통해, 전도자와의 대화, 전도자의 태도/행동/삶으로부터 받은 ‘느낌, 감정’ 등이 작동을 해서, ‘믿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전도자가 전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 “지정의” 전과정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대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정의’가 바로 ‘마음’과 직결된다. 오늘 본문은 전부 지정의에 대한 말씀이다.
내 말에 주의하고 네 귀를 기울이고(20),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말고 마음 속에 지키라(21)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23)
여기에서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לֵב(레브)이며 이와 일치하는 헬라어 단어는καρδία(카르디아)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마음으로 믿어야지 구원에 이른다. 그만큼 마음(카르디아; 레브)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마음, 카르디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희생하면서까지 완벽하게 예비하신 구원의 길을 마음(카르디아; 레브)가 거부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뜨겁게 전도한 후에, 전도한 대상자를 위해서 무어라고 기도하는가?
(오늘 만나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ooo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겔 11:19), 하나님을 주로 영접케 하소서.
여기서 ‘마음’은 인간의 ‘혼’에 속한다. 이 ‘혼’에 인간의 지정의가 다 있다. 혼은 바로 인간의 전인격을 일컫는다.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말씀이 임해도 혼, 즉 마음이 여전히 돌같이 단단히 굳어있어서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고 튕겨내면 구원이 임할 수 없다.
이미 구원받은 신자임에도,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자고있던 영이 깨어나, 구원을 받고, 영적인 일을 분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받고 기뻐하지만… 여전히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르려 하는 것은 왜 그런가? 자신의 영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가고자 하는데, 그 길목에서 나의 육신, 나의 인격, 혼, 마음이 반항하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은 사람에 속한 사람의 속성이 아니다. 우리의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영(spirit; πνεῦμα 프뉴마)은 육체 즉 피조물들의 연약함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존재이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 세상이, 사단이 더렵히려해도 더렵혀지지 않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영’이다. 영은 바로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신령(神靈)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영은 이 신령함을 기뻐하고 전적으로 좇고자 하나 육이 떡하니 버티고 저항을 한다. 영은 믿음으로 살아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이 육에게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대부분 성도들이 겪고 있는 삶의 참모습이다. 왜 그런가? 영의 영향력이 육에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갈등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이와같이 육신의 길, 영이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다.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려한다. 영이 아무리 말해도 육은 들어먹지를 않는다. 그래서 영과 육, 그 중간에 있는 존재, 혼이 중요하다. 영은 혼에게 말한다. 구원이 육에게까지 온전히 미치려면 먼저 혼이 영에 복종해야 한다. 그 다음 혼이 육을 향해 순종하도록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영으로 살기를 원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혼, 마음(카르디아; 레브)을 지키라 하신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In your anger do not sin"
이 성경구절에 의하면, 분을 내는 것은 죄인가? 죄 아니다. 분명히 분내는 것과 죄 짓는 것을 분리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 더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은 죄가 바로 코앞에 있는 정황이다. 화가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마음을 지키느냐에 따라서 바로 당장 죄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의 김이 머리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상황에서, 아직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이미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마귀가 이용하여 우리를 실족하도록 한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다들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 사람인 이상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차분하게 크리스천의 품성을 잃지 않으며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영혼육, 인간의 세가지 본질 중에서 ‘혼’이 우리 신앙 생활에서 제일 간과되어있는 것 같다. 태생부터가 육신의 소욕에 충실한 본능이 있으며,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 생활을 하는 성도로서 영의 중요성을 잘 깨닫고 있지만, 혼은 영혼이라 말하며 영에 부속되어 있는 영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하고, 잘 규명되지도 잘 알지도 못한 채, ‘혼’이 우리 믿음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대는 이성의 시대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증명되어야 비로소 신뢰하고 믿는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가 쉽게 무시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전도대상자에게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하려면 돌과 같이 단단한 마음을 만져주시도록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이성과 지성과 뭉클한 감동에 영향받는 현대인들의 생활상을 고려해야 한다.
“마음 챙기기”.
요새 현대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얼마나 마음이 상처받고, 슬프고, 아프고, 힘들면 이럴까? 그래서 진리이신 말씀(λόγος; logos; 로고스)을 수용하기엔, 그들의 마음밭은 육신의 일, 관계의 문제, 정신적 문제, 감정적 갈등 등으로 돌처럼 딱딱하고 완악해져 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영접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처럼 ‘혼’, ‘마음’이 중요해진 때는 없었다. 일단 그들의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져야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조차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말씀을 영접할 수 있다.
“믿는다는 것, 너무 애매해요”
얼마전 거리에서 만났던 30대 초반 미혼 직장인의 고백이다. 부모님 두분 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시고, 자기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고등부 회장까지 맡으며 열심히 신앙생활 했지만, 지금은 교회 나가는 것이 별 의미없는 형식적인 종교인이라고 한다. 부모님의 강권으로 주일예배에 나가기는 하지만, 바쁘고 스트레스로 꽉 찬 일상 속에서 왜 신앙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이러한 형제에게 당신은 어떻게 조언하겠는가?
나라면 제일 먼저 그 형제분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할 것이다. 손가락을 톡 대면 끊어질 것같은 박약한 믿음줄 겨우 붙잡고 사는 그에게 그 믿음줄마저 끊어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부드럽게 그의 ‘마음’을 만지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세심하고 지혜롭게 그의 마음에 다가가야 한다. 먼저 그와 생각의 공감대를 찾으려 했다. IT회사에 근무하는 엔지지어라고 한다. 나도 IT회사에 근무한 이력이 있는지라, 지루하지 않은 대화가 지속되었다. AI, HBM, O2O, O4O, EDI, DW… 피상적 관계에서 피상적인 대화의 단계는 넘어선 것 같다.
“무엇보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 현재 형제분은 ‘믿음’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믿음마저도 아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형제님은 믿음 안에 있기에 이처럼 아픈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민을 통한 진지한 사유의 과정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매우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나는 믿음이 없다'고 치부하지 마시고, 자신안에 있는 믿음을 소중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다소 약한 믿음은 좋은 영적 멘토를 만나면 나아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0-23)
우리는 전도를 통해, 불신자를 ‘믿음의 집’ 문 앞까지는 데려갈 수 있지만, 그 다음 그가 문을 열고 믿음 여정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순전히 그에게 달려있다. 그 과정은 며칠, 몇 달, 몇 년,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그가 전도자로부터 들은 바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비교해보고, 무엇이 좋은지 판단해보고 하는 ‘인지’적 과정을 통해, 전도자와의 대화, 전도자의 태도/행동/삶으로부터 받은 ‘느낌, 감정’ 등이 작동을 해서, ‘믿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전도자가 전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 “지정의” 전과정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대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정의’가 바로 ‘마음’과 직결된다. 오늘 본문은 전부 지정의에 대한 말씀이다.
내 말에 주의하고 네 귀를 기울이고(20),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말고 마음 속에 지키라(21)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23)
여기에서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לֵב(레브)이며 이와 일치하는 헬라어 단어는καρδία(카르디아)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마음으로 믿어야지 구원에 이른다. 그만큼 마음(카르디아; 레브)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마음, 카르디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희생하면서까지 완벽하게 예비하신 구원의 길을 마음(카르디아; 레브)가 거부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뜨겁게 전도한 후에, 전도한 대상자를 위해서 무어라고 기도하는가?
(오늘 만나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ooo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겔 11:19), 하나님을 주로 영접케 하소서.
여기서 ‘마음’은 인간의 ‘혼’에 속한다. 이 ‘혼’에 인간의 지정의가 다 있다. 혼은 바로 인간의 전인격을 일컫는다.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말씀이 임해도 혼, 즉 마음이 여전히 돌같이 단단히 굳어있어서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고 튕겨내면 구원이 임할 수 없다.
이미 구원받은 신자임에도,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자고있던 영이 깨어나, 구원을 받고, 영적인 일을 분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받고 기뻐하지만… 여전히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르려 하는 것은 왜 그런가? 자신의 영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가고자 하는데, 그 길목에서 나의 육신, 나의 인격, 혼, 마음이 반항하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은 사람에 속한 사람의 속성이 아니다. 우리의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영(spirit; πνεῦμα 프뉴마)은 육체 즉 피조물들의 연약함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존재이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 세상이, 사단이 더렵히려해도 더렵혀지지 않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영’이다. 영은 바로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신령(神靈)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영은 이 신령함을 기뻐하고 전적으로 좇고자 하나 육이 떡하니 버티고 저항을 한다. 영은 믿음으로 살아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이 육에게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대부분 성도들이 겪고 있는 삶의 참모습이다. 왜 그런가? 영의 영향력이 육에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갈등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이와같이 육신의 길, 영이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다.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가려한다. 영이 아무리 말해도 육은 들어먹지를 않는다. 그래서 영과 육, 그 중간에 있는 존재, 혼이 중요하다. 영은 혼에게 말한다. 구원이 육에게까지 온전히 미치려면 먼저 혼이 영에 복종해야 한다. 그 다음 혼이 육을 향해 순종하도록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영으로 살기를 원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혼, 마음(카르디아; 레브)을 지키라 하신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In your anger do not sin"
이 성경구절에 의하면, 분을 내는 것은 죄인가? 죄 아니다. 분명히 분내는 것과 죄 짓는 것을 분리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 더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은 죄가 바로 코앞에 있는 정황이다. 화가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마음을 지키느냐에 따라서 바로 당장 죄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의 김이 머리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상황에서, 아직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이미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마귀가 이용하여 우리를 실족하도록 한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다들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 사람인 이상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차분하게 크리스천의 품성을 잃지 않으며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영혼육, 인간의 세가지 본질 중에서 ‘혼’이 우리 신앙 생활에서 제일 간과되어있는 것 같다. 태생부터가 육신의 소욕에 충실한 본능이 있으며,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 생활을 하는 성도로서 영의 중요성을 잘 깨닫고 있지만, 혼은 영혼이라 말하며 영에 부속되어 있는 영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하고, 잘 규명되지도 잘 알지도 못한 채, ‘혼’이 우리 믿음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대는 이성의 시대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증명되어야 비로소 신뢰하고 믿는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가 쉽게 무시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전도대상자에게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하려면 돌과 같이 단단한 마음을 만져주시도록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이성과 지성과 뭉클한 감동에 영향받는 현대인들의 생활상을 고려해야 한다.
“마음 챙기기”.
요새 현대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얼마나 마음이 상처받고, 슬프고, 아프고, 힘들면 이럴까? 그래서 진리이신 말씀(λόγος; logos; 로고스)을 수용하기엔, 그들의 마음밭은 육신의 일, 관계의 문제, 정신적 문제, 감정적 갈등 등으로 돌처럼 딱딱하고 완악해져 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영접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처럼 ‘혼’, ‘마음’이 중요해진 때는 없었다. 일단 그들의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져야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조차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말씀을 영접할 수 있다.
“믿는다는 것, 너무 애매해요”
얼마전 거리에서 만났던 30대 초반 미혼 직장인의 고백이다. 부모님 두분 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시고, 자기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고등부 회장까지 맡으며 열심히 신앙생활 했지만, 지금은 교회 나가는 것이 별 의미없는 형식적인 종교인이라고 한다. 부모님의 강권으로 주일예배에 나가기는 하지만, 바쁘고 스트레스로 꽉 찬 일상 속에서 왜 신앙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이러한 형제에게 당신은 어떻게 조언하겠는가?
나라면 제일 먼저 그 형제분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할 것이다. 손가락을 톡 대면 끊어질 것같은 박약한 믿음줄 겨우 붙잡고 사는 그에게 그 믿음줄마저 끊어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부드럽게 그의 ‘마음’을 만지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세심하고 지혜롭게 그의 마음에 다가가야 한다. 먼저 그와 생각의 공감대를 찾으려 했다. IT회사에 근무하는 엔지지어라고 한다. 나도 IT회사에 근무한 이력이 있는지라, 지루하지 않은 대화가 지속되었다. AI, HBM, O2O, O4O, EDI, DW… 피상적 관계에서 피상적인 대화의 단계는 넘어선 것 같다.
“무엇보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 현재 형제분은 ‘믿음’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믿음마저도 아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형제님은 믿음 안에 있기에 이처럼 아픈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민을 통한 진지한 사유의 과정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매우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나는 믿음이 없다'고 치부하지 마시고, 자신안에 있는 믿음을 소중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다소 약한 믿음은 좋은 영적 멘토를 만나면 나아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