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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나?]

등록일 2026-02-2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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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4-9)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땅에 적으셨을까?
신학자들마다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무엇을 썼는지는 알 길도 없고 큰 의미도 없다고 본다. 의미가 있었다면 이 장면을 목격한 저자 요한이나 공관복음의 다른 저자들이 “무슨 내용을 땅에 적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왜 그러셨을까?”에 더 집중하고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일부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출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 구절에서 “친히 쓰셨다”는 히브리 원어의 표현은 아래와 같다.

בְּאֶצְבַּע (Be-etzba; With the finger), אֱלֹהִים (Elohim; of God)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손수 쓰셨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드러낸다.

둘째, 정죄의 감정으로 뜨거워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스스로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라는 의도에서 이러한 행동을 보이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렘 17:13)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떠나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자문해보고, 그들 각자의 죄에 대한 경각심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러셨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셋째는, 감정적으로 흥분한 무리들의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리 하셨을 것이다는 해석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나온 무리들 앞에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을 쓰시고…. 무리들이 대답을 재촉하자, 또 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을 쓰시고 …. 똑같은 행동이 반복된 이유는, 똑같은 상황이 한 치의 다름없이 반복/지속 되었기 때문이다. 간음을 저지른 간악한 음부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폭력적인 감정이 최고조로 오른 상태가 팽팽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상태를 완화시키고 진정된 상태에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 침묵의 시간을 가지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다음 구절과 가장 매끄럽게 연결되므로, 나는 세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요 8:9)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직접적 동기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었고, 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한 것은 예수께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을 쓰시는 침묵의 순간이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요 8:15)

그들의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판단이었지만, 예수의 판단하지 아니함은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날카로운 칼과 같아 상대의 과거를 들춰내고, 마음에 칼질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여인을 돌로 치려 했으나, 예수님의 '판단하지 않음'은 여인을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는 생명의 손길이었다. 주님은 율법 조문으로 사람을 정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깨어진 영혼을 다듬고 보듬어서 새롭게 빚으러 오신 구원주이시기 때문이다.

정죄보다 강한 것은 ‘용서’이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인내’이다. 세상은 마땅히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즉 정죄를 정의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기다려 주는 사랑’, ‘인내하는 용서’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시며 침묵하신 그 시간은 죄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자비의 시간'이었고, 여인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생명의 소망으로 바뀌는 '은혜의 순간'이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 짧은 선언은 그녀의 과거를 지우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을 그어주신 위대한 용서이다. 용서만한 위대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참을만큼 참았다!”
“이제 더 이상 용서 못해!”

인간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육신을 따라 사고하는 자에겐 백번 타당한 말이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만!” 이라고 선을 그을 때, 주님은 그 선을 지우시며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고전 13:7)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 용서를 강요당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그 대상은 오롯이 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섣부른 용서보다 미운 감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다. 나 뿐만 아니라 그도 사랑하신 그분의 긍휼하신 마음이 스며들어온다. 연민의 감정이 밀려들어온다.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022526


*Image from https://www.biblestudytools.com/bible-study/topical-studies((비영리 목적으로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