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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live a dull life]

등록일 2026-05-30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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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꿈에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 위에 서신 여호와께서는 그가 누워 있는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고,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잠에서 깬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고백한다.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깊이 깨닫는 것이다.

『내 힘이 다할 때, 비로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야곱이라는 이름은, 속임수로 타인의 자리를 빼앗는 자를 뜻한다. 그는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대가로 분노한 형을 피해 춥고 외로운 광야로 도망쳐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누웠을 때, 그는 사기꾼이자 도망자로서 완벽한 한계에 부딪혔다. 자신의 꾀와 능력으로 살아가던 인간의 힘이 마침내 바닥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의지로 달리던 삶의 한계를 처절히 느낀 그때, 그 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야곱은 눈물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자신이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우리 삶 또한 아무리 광야 같이 거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빼어남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와 함께 하는 삶은, 이를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지 여부에 달려있다.

『지루한 예배, 고통스런 기도의 시간』

우린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지루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세상의 짜릿함을 쫓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지는 수증기 같은 허상이고 허탄을 줄 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코 지루할 수 없다. 그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 전능자이시며, 가장 깊은 상처까지도 치료하시는 치유자이시며, 축복을 쏟아부어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초자연적인 평안과 기쁨이 마르지 않고 넘쳐나는 여정이다.

시인 류시화의 한 에세이책에는 평생 매일 5시간씩 기도했지만 늘 불행했던 한 기독교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왜 자신에게 이렇게 끊임없는 불행을 주셨냐고 묻자, 하나님은 그가 너무 지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분 또한, 매일 영혼 없고 알맹이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기도를 하루에 5시간씩이나 듣느라 힘들었다고 덧붙이셨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와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종교적이고 습관적이고 외형적인 예배는 우리의 신앙을 질식시킨다. 오늘날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해 예배와 기도의 시간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는 삶』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의 삶을 뒤흔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하나님과의 대면 이후, 바울로 변화되었다. 그의 삶은 율법주의라는 껍데기를 벗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여정으로 바뀌었다. 한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시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을 카페 벽에 걸린 짝퉁 모나리자 초상화처럼 종교적인 틀 안에 가둬두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역동적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흥미진진하게 인도하시는데 우리 삶이 결단코 지루할 수는 없다. 주님이 곁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도 영적 소경처럼 내 뜻대로만 살아가며 그분을 무시하는 것은 슬픈 비극이다.

과연 여호와께서는 여기 계신다(창 28:16). 이제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이다. 온 만유(萬有)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의 손을 잡고, 오늘 그분이 주도하시는 역동적인 삶의 전율을 직접 경험하는데, 어찌 삶이 지루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