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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을 통해 확장하는 나라
등록일
2024-04-29 21:08
조회수
470
(성경본문: 막 3:23-26)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효과적으로 확장하시는 데 있어서 ‘순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이 ‘순종’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다. 순종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 되게 하시고, 그의 나라가 하나 되게 하신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어디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교회가 스스로 치고받고 분쟁하면 그것이 어디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영적질서를 무너뜨리고, 가정이 스스로 집안 싸움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일을 하시겠는가? 사탄이 좋아할 일이 아닌가?
사탄마저도 스스로 분쟁하면 망하는 줄 잘 아는데, 그래서 스스로 영적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워가는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가정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바로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즉 예배보다 낫다고 하시지 않는가? 제 아무리 그 귀한 숫양의 기름으로 제사를 드려도, 자신의 집을 팔고, 공장을 매각해서 받은 돈 전부를 봉헌하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도, ‘순종’이 없으면, 다 헛된 제사요 예배인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우리는 역사적인 단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아들이 순종의 관계에서 하나 되심을 재확인하고 분명히, 확실히, 잘 알고 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39)
이렇게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으심으로써, 아버지의 원하심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 되심에 있다. ‘하나’ 되심은 바로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수제자라 하면, 베드로라 입을 모으는데 반대하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자도 많은 연약한 사람이었다. 충동적이며, 주님의 뜻 앞에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면서 경솔하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도 많이 했다. “닭 울기 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면서 주님을 배신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베드로가 한 많은 실수 중 잊지못할 일은 바로 이것 – 가룟 유다가 죽고 12제자 중 한 사람의 자리가 비었으니 새로운 사도 한 사람을 세울 때의 일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행 1:15)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0)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26)
성경 어디에서 제비를 뽑아 사도를 결정하는 것을 정당화 한 구절은 없다. 이 방법은 순전히 베드로의 머리 속에서 착안되어 제안된 아이디어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을 세우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 열둘을 선발하기 위해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제자들을 세우셨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또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도 바울을 사도로 세우기 전에, 예수의 본을 따라 금식하면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행 13:1-3).
제비뽑기, 사다리타기 같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제안에 의하여 제비뽑기를 통해 선출된 맛디아는 그 이후 성경구절 어디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의 본을 따라 예수께서 12제자를 세우셨던 방식을 따라서 선발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전파자로서 원대하고 위대한 사역을 한다. 신약성경의 48%가 바울이 기록한 서신일 정도로, 우리에게 실로 엄청나고 위대한 영적 유산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룟 유다의 후임은 실제적으로 맛디아가 아니라 바울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비뽑기로 사도를 정하자고 제안한 베드로는 잘못 한 것 아닌가? 최소한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지? 곰곰히 사려깊게 생각도 좀 하면서 일의 방법과 순서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그가 현대교회에서 이렇게 처신했다면, 성경 좀 안다는 장로님, 집사님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을 것이다. 교회를 분열로까지 몰고가는 사건, 사고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초대교회, 주님께서 우리 현대교회에 본받으라고 전형을 삼으라고 모범적 모델로 보여주신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에게 순종했다.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것말고 다른 생각, 다른 대안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에게 불순종은 곧 그를 세우신 하나님께 반항을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게 항거했던 자들이 예외없이 멸망당했음을 심장 깊숙이 새긴 사람들이다.
오히려, 제비뽑기했던 그 이후에, 초대교회에는 '분열'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
다같이 한 곳에 모였다고 한다. 리더의 결정 방식이 다소 미숙했지만, 그 결정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분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하나로 연합하여 모인 곳에,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성령께서 임했다고 한다(행2:2-3). 순종으로 하나된 곳에 성령께서 일하신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남편의 선택이나 결정이 맘에 들거나 납득될 때에만 복종하라 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더 합리적이고, 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고, 상식적이기에 자신 스스로가 가정의 리더 역할을 기꺼이 하려는 현대의 여성, 아내들이 적지 않다. 그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항상 남편에게 불만이다. ‘이런 일까지 내가 해야하나?’ ‘남편이란 사람은 왜 이리 무관심할까? 자기밖에 모를까? 왜 일처리를 그 모양으로 하지?’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항상 긴장과 스트레스와 함께 한다. 자기 스스로 가정의 머리가 되려고 중압감과 짐을 지려한다. 스스로에게 스트레스와 불안과 불만이 쌓여만 간다. 그 이유는, 그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가장의 책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름부음을 주시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매, 자기 자신이 자기 뜻대로 그 부담을 감당하려고 하니 그냥 놔두신 것이다. 물론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겠지만, 이것은 열에 아홉의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이다.
“남편에 복종하는 것”은 남편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를 가정의 머리로 세우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이 생각하기엔, 하나님의 세우신 영적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자신에게 당장 손해인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가 주장한대로, 일과 형편이 자기 선호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어야 하고, 자신의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되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육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크게 양보하는 것 같다.
교회의 영적 리더, 한 가정의 영적 가장 또한 연약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날 때가 있다. “왜 저러시지?” “왜 저럴까? 나라면 저렇게 처리하지 않을텐데…” 하면서, 답답해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가 하나로 연합할 때,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영적 리더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그의 일을 하시고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하는 것을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마저도 합력의 마중물로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고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 매일 매일 눈앞에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장터에서, 선한 싸움을 치르고 있는 전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철저한 명령체계 안에서, 자신을 군사로 부르신 이의 뜻에 합당히 처신해야 하는 병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를 병사로 부르신 이에게 충성되고, 그가 세우신 질서 안에서 ‘순종’으로써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써,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주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이상)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효과적으로 확장하시는 데 있어서 ‘순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이 ‘순종’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다. 순종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 되게 하시고, 그의 나라가 하나 되게 하신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어디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교회가 스스로 치고받고 분쟁하면 그것이 어디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영적질서를 무너뜨리고, 가정이 스스로 집안 싸움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일을 하시겠는가? 사탄이 좋아할 일이 아닌가?
사탄마저도 스스로 분쟁하면 망하는 줄 잘 아는데, 그래서 스스로 영적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워가는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가정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바로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즉 예배보다 낫다고 하시지 않는가? 제 아무리 그 귀한 숫양의 기름으로 제사를 드려도, 자신의 집을 팔고, 공장을 매각해서 받은 돈 전부를 봉헌하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도, ‘순종’이 없으면, 다 헛된 제사요 예배인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우리는 역사적인 단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아들이 순종의 관계에서 하나 되심을 재확인하고 분명히, 확실히, 잘 알고 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39)
이렇게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으심으로써, 아버지의 원하심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 되심에 있다. ‘하나’ 되심은 바로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수제자라 하면, 베드로라 입을 모으는데 반대하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자도 많은 연약한 사람이었다. 충동적이며, 주님의 뜻 앞에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면서 경솔하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도 많이 했다. “닭 울기 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면서 주님을 배신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베드로가 한 많은 실수 중 잊지못할 일은 바로 이것 – 가룟 유다가 죽고 12제자 중 한 사람의 자리가 비었으니 새로운 사도 한 사람을 세울 때의 일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행 1:15)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0)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26)
성경 어디에서 제비를 뽑아 사도를 결정하는 것을 정당화 한 구절은 없다. 이 방법은 순전히 베드로의 머리 속에서 착안되어 제안된 아이디어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을 세우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 열둘을 선발하기 위해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제자들을 세우셨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또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도 바울을 사도로 세우기 전에, 예수의 본을 따라 금식하면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행 13:1-3).
제비뽑기, 사다리타기 같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제안에 의하여 제비뽑기를 통해 선출된 맛디아는 그 이후 성경구절 어디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의 본을 따라 예수께서 12제자를 세우셨던 방식을 따라서 선발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전파자로서 원대하고 위대한 사역을 한다. 신약성경의 48%가 바울이 기록한 서신일 정도로, 우리에게 실로 엄청나고 위대한 영적 유산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룟 유다의 후임은 실제적으로 맛디아가 아니라 바울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비뽑기로 사도를 정하자고 제안한 베드로는 잘못 한 것 아닌가? 최소한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지? 곰곰히 사려깊게 생각도 좀 하면서 일의 방법과 순서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그가 현대교회에서 이렇게 처신했다면, 성경 좀 안다는 장로님, 집사님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을 것이다. 교회를 분열로까지 몰고가는 사건, 사고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초대교회, 주님께서 우리 현대교회에 본받으라고 전형을 삼으라고 모범적 모델로 보여주신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에게 순종했다.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것말고 다른 생각, 다른 대안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에게 불순종은 곧 그를 세우신 하나님께 반항을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게 항거했던 자들이 예외없이 멸망당했음을 심장 깊숙이 새긴 사람들이다.
오히려, 제비뽑기했던 그 이후에, 초대교회에는 '분열'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
다같이 한 곳에 모였다고 한다. 리더의 결정 방식이 다소 미숙했지만, 그 결정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분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하나로 연합하여 모인 곳에,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성령께서 임했다고 한다(행2:2-3). 순종으로 하나된 곳에 성령께서 일하신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남편의 선택이나 결정이 맘에 들거나 납득될 때에만 복종하라 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더 합리적이고, 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고, 상식적이기에 자신 스스로가 가정의 리더 역할을 기꺼이 하려는 현대의 여성, 아내들이 적지 않다. 그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항상 남편에게 불만이다. ‘이런 일까지 내가 해야하나?’ ‘남편이란 사람은 왜 이리 무관심할까? 자기밖에 모를까? 왜 일처리를 그 모양으로 하지?’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항상 긴장과 스트레스와 함께 한다. 자기 스스로 가정의 머리가 되려고 중압감과 짐을 지려한다. 스스로에게 스트레스와 불안과 불만이 쌓여만 간다. 그 이유는, 그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가장의 책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름부음을 주시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매, 자기 자신이 자기 뜻대로 그 부담을 감당하려고 하니 그냥 놔두신 것이다. 물론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겠지만, 이것은 열에 아홉의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이다.
“남편에 복종하는 것”은 남편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를 가정의 머리로 세우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이 생각하기엔, 하나님의 세우신 영적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자신에게 당장 손해인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가 주장한대로, 일과 형편이 자기 선호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어야 하고, 자신의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되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육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크게 양보하는 것 같다.
교회의 영적 리더, 한 가정의 영적 가장 또한 연약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날 때가 있다. “왜 저러시지?” “왜 저럴까? 나라면 저렇게 처리하지 않을텐데…” 하면서, 답답해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가 하나로 연합할 때,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영적 리더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그의 일을 하시고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하는 것을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마저도 합력의 마중물로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고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 매일 매일 눈앞에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장터에서, 선한 싸움을 치르고 있는 전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철저한 명령체계 안에서, 자신을 군사로 부르신 이의 뜻에 합당히 처신해야 하는 병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를 병사로 부르신 이에게 충성되고, 그가 세우신 질서 안에서 ‘순종’으로써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써,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주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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