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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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교회주의]해병대 채상병 순직사건'에 대한 대통령 격노설 관련하여,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이름들이 회자되고 있다. 기독교회가 한 국가의 사회와 정치와 기득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그릇된 이념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본다. 이와는 확연히 달리, 기독교적 신앙관은 성경적 진리에서 비롯된다. 즉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 사람을 만드신 사실과, 그가 사람과 관계하고자 계시한 진리가 우리 사회와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가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말씀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정치와 교회의 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소 행하심이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이적후, 자신을 정치적 지도자로 삼고자하는 대중을 떠나 산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5) 성경을 통한 예수의 몸소 가르침과는 달리, 오늘날 교회는 정치와 가까워지려 한다. 서로 너무 친하다. 그 대표적 실상이 '국가조찬기도회'이다. 성경적 인물에 빚대어 최고권력자를 찬양하고, 현실 정치를 두둔하는 발언을 기도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정황앞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듯 심히 아프다. 열심히 기도하고 일했으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니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 점은 국가의 법과 하나님의 가르침이 상충될 때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국가의 뜻을 저버리게도 했다. [...] 로마군대의 사령관이었던 마우리티우스(250-287)의 행동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기독교인의 학대와 박해를 주동하라"는 국가의 명령앞에, 자신의 휘장을 부관에게 넘겨주고 신자로서 당당히 죽음을 택했다(1). 캘빈(John Calvin)의 저서 중에 ‘기독교 강요(綱要)’라는 책이 있다. 종교개혁를 통해 태생한 개신교회의 신앙(Protestant Theology)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프랑수아 1세에게 저자가 헌정하는 내용, “Serenissimo ac Potentissimo Principi Francisco Regi Francorum”(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프랑스 왕 프랑수아에게)이 나온다. 프랑수아 1세는 당시 로마제국과 앙숙이었으며, 르네상스의 아이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데려온 인물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프랑스가 강성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럼 왜 캘빈은 자신의 저서를 프랑스왕에게 헌정했을까? 로마교황 정도는 아니지만 프랑스왕들도 자신의 왕국의 안정을 위해 개신교도들을 탄압했다. 개신교 신앙을 대변하는 캘빈에게는, 프랑스왕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개신교도들에 대한 오해를 씻고 박해를 멈춰달라고 탄원하는 것이 ‘기독교 강요’의 1차 저술 목적이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전하려는 주제와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은 당신이 염려하는 정치적 분파(political faction)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는데 유일한 목적을 두고 있는 순수한 신앙인들입니다. 종교개혁은, 나라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운동과 전혀 다른 영적 재각성 운동입니다.” 세상권력은, 종교가 ‘정치적 세력’이 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잠재력을 두려워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때로는 어르고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2천년 교회사를 통해 일관적으로 증명된 역사적 사실이다. 1)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했던 관점은 “과연 그가 로마정부에 위협이 될 만한 범죄를 범했는가?”에 있었다. 심문이후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라고 말했으나, 정치세력이 되어 저항할 유대인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마 27:24), 결국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2) 예수의 사후, 로마정부가 크리스천들을 탄압한 이유 중 하나는 로마제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하고 합법화 한 이유는, 점점 확장되어가는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시스템으로써 기독교만한 효율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세상과 악수할 때 세상의 수단이 되고, 순수한 신앙의 길을 갈 때에 모여드는 숫자로 인하여 세상은 주목하고 경계한다. 많은 이가 모이는 곳일수록 사람들이 주목하고 정치적 파장의 잠재력이 있기에 - 예수님께서 조용히 산으로 피신하신 것처럼 - 오해 살 일을 경계하고 조심하고 멀리 해야한다.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은 “정치적 분파가 아니라 순수한 신앙인”의 자세를 순전히 지켜야 한다. 그런데 현대 교회들은, 특히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큰 교회들은 오히려 정치와 가까와지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 사실이든 아니든 과장이든 – ‘종교세력의 정치세력화’라는 오명과 낙인을 받고도, 예수의 가르침을 소개해야될 대상이 되는 이웃과 사회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라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1) Francis A. Schaeffer, How should we then live?: 프랜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 인가?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2), 49-50 *사진설명: ‘기독교 강요’ 초판본의 표지 072825 **대전지역에 신앙상담이나 양육이 필요하신 분 계시면, hunlee11@gmail.com 으로 연락주세요. 지체없이 달려가겠습니다.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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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_precarious기도(Prayer)는... 라틴어 'precarius'에서 나왔다. 영어로 'precarious'라는 의미로, "불확실한" "자신이 아닌 남의 뜻대로 되는"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라는 뜻이다.(1) 앞의 일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여 절대 주권자 앞에 섰다면 바른 기도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072525 (1) Lewis and Short's Latin Dictionary (a standard Latin-English lexicon)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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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있을 때가 바로 들어야 할 때현란한 네온과 질주하는 차량들 건물숲속에 쏟아져 나온 행인들로 가득 찬 도심 저녁에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한밤중 고독한 거리에서는 들린다. 볼거리가 많은 대낮 분주한 거리일수록 듣지를 못한다. 사방이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청력이 작동한다. 인생의 어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인생이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실 때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된다. 어둠 속에 있을 때… 힘들다고 투덜대지 말고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서럽다고 울지 말라. 잔말 말고 입 다물고 듣는데 몰입하라. 말을 할수록 듣지 못한다. 다시 인생에 빛이 비추는 날 전할 말이 있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오늘 새벽 주신 말씀. 072225 **사진: 대학친구 이원희의 '퇴근길'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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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ge size를 좇는 부흥목회자나 일반 성도나 한국의 교회를 섬기는 다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한다. 구체적으로 탁 까놓고 얘기하면 ‘양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양적 성장을 지향하며,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력이 적지 않은 대형교회를 부러워하고 그들이 하고 있는 시스템, 프로그램, 심지어 건축양식, 실내 인테리어까지도 흠모한다. ‘대형교회’가 그들의 롤 모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기도모임마다, 부흥, 부흥, 부흥을 외치고 간구한다. 말이 부흥이지, 실제로 구하는 바는 ‘양적 성장’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부흥’과는 전혀 상관없는 바를 구하고 있다. 성경에서 ‘부흥’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은 하박국서가 유일하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2) 여기서 ‘부흥’의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חַיֵּ֔יהוּ (하이예후)이다. “죽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하다”란 의미이다. 바벨론으로부터 패망당하기 직전 남유다 말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하박국은, 죄악과 불의와 패역이 만연한 조국의 현실을 보고 애통해한다. 사회는 부패하고 영적으로 타락한 유다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부흥’케 해달라고 읍소를 한다. 시체처럼 죽어가는 조국을 살리소서! 되살리소서! 다시 일으키소서! חַיֵּ֔יהוּ(하이예후; revive; 復興; 부흥)가 일어나기 이전(before)과 이후(after)의 상황은 엄연히 다르다. 극단적으로 다르다. 이전의 상태는 가망이 없고, 싹수가 노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상태이다. ‘부흥’을 울부짖어야 하는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구원의 손길이 절실한 상태에 있다.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애끊는 애통함으로 회개해야 할 정황이다. 물에 빠진 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절실하게 간곡하게 주의 도우심을 부르짖어야 할 때이다. 자신이, 자기 교회가 죽어가는 상태, 그 안의 참혹한 죄악과 불순종, 패역을 보고 영적 구역질를 토로할 때이다.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가 완연한 지금 이 시대가 바로 ‘참’ 부흥을 간구해야 할 때이다. 가치관의 혼란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저마다 자기소견대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짓고 심고 거두고 하면서… 숨쉴 새없이 ‘분주’한 삶 속에서, 옮고 그름에 대한 생각 없이, 선과 악에 대한 분별없이, 각기 자기 주장대로 살고 있다. 왜 로마의 부유한 귀족, 당대의 최고 엘리트들이 허기지고, 고독한 아프리카 사막으로 들어갔는가? 하나님과 거룩한 대면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 집중의 시간이 우리 인류에게 준 유산이 실로 엄청나다. 수많은 궤변과 이단적 사상을 정리하고 건강한 기독교 신학이 이 시간, 이들 사막의 교부들(Church Fathers)을 통해 정리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오늘날. 분별의 ‘집중’으로부터 흩뜨려진 극심한 ‘산만’ 가운데 살고 있다. 이러한 어수선 소란 속에서 거짓이 진실을 능멸하고, 악한 자가 선한 자를 짓밟으며, 공정과 정의를 외면하며 사는 자가 오히려 사람 눈 보기에 행복하고 윤택하게 사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 거짓과 진실, 부정와 정의는 신자(信者)에게만 해당하는 가치가 아니다. 양심있는 인간이면 분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가 멸시되고 냅다 내팽개쳐진 사이에 우리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없는 – 정글처럼 전락해버렸다.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악은 제재되어야 하고, 선은 권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의의 기본적 개념이다. 선을 베푸시고 악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가 우습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 시대처럼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업신여김을 받은 때는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애통한 것은, 이토록 진리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정의가 짓밟힌 혼돈의 사회에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바른 길의 본이 되고, 옳은 길의 표준을 제시하는 어른이 – 그가 신자이던 불신자이던 - 이 사회에 없다. ‘꼰대’라고 비난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교인들은 ‘거룩’의 집중으로부터 산만케하는 요소가 다분히 많은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흠모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집중보다, 시스템, 프로그램, 거대 체제를 움직이기 위한 운영, 관리, 직분/서열/위계, 조직, 인사, 예산, 비용, 손익, 보고서… 어느덧 세상 영리기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교회의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영성의 깊이보다, 큰 조직을 이끌고 많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CEO같은 리더쉽을 원한다. 교회 지도자의 자질로 리더쉽 스킬, 실력, 학력이 요구되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의 깊이에서 나오는 설교보다 설교능력이 중시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하박국, 엘리야,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받은 말씀을 전달하는 영성보다 스킬, 프리젠테이션 실력, 해박한 지식, 유모어와 재치를 반겨한다. 살리소서! 되살리소서! 다시 일으키소서! ‘부흥’케 하소서! 한국 사회를… 한국 교회를… 비본질을 좇는 산만에서 분별의 집중, 거룩의 몰입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071925 *사진설명: 구글에서 ‘Church Revival’에 대한 검색 결과. “Revival”을 외치는 자의 정황은 이렇게 웃고 떠들썩할 때가 아니다. **(PS) 혹 대전에 신앙상담이나 양육이 필요하신 지인분이 계시면 연락주세요. 지체없이 달려가서 뵙겠습니다. - 연락처: hunlee11@gmail.com20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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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내가 산다영국의 주재원 신분에서 본사 귀임명령을 받은 후, Swine flu에 감염되어 결국 출국을 거의 한달간 연기한 일이 있었다. 한 사흘간 끙끙대며 앓았는데,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두통이 왔고, 잘 들지 않은 칼로 생살을 도려내듯 온몸이 아팠다. 생살에서 살아숨쉬고 있는 감각촉수 하나하나를 짓이기고 베듯이 통증이 극심했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왜 당시에 Swine flu로 수천명이 죽어나갔는지 몸으로 이해가 됐다. 이와 같이 신경이 살아 있는 채 받는 고통의 괴로움을 계시록 9:5-6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얼마나 아픔이 극심하면 죽기를 구하겠는가? 지긋지긋한 육신의 통증은 육이 죽으면 멎는다. 죽으면 비로소 고통은 끝이다. 찬란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잃었을 때, 비로소 사도바울은 하늘나라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전부이며 자부심이다시피한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렸을때, 그는 비로소 살았다. 베드로 또한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고기 잡으며 살아온 전문가였지만 fisherman으로서 자부심을 버렸을 때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술과 전문성을 다하여 밤새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깊은 좌절감 앞에서,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 존재의 무능력, 무가치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이 믿고 의지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나도 강아지사건이후, 참혹할 정도로 민망하여 바닥에 코가 닿도록 낮아지기가 그지 없을 때 안들리던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바울처럼 눈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베드로처럼 자신 존재에 대한 무가치함을 깨달았을 때… 나의 자신감과 자부심과 능력, 모든 것이 죽었을 때… 결국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생명의 근원을 잡을 수 있다. 극심한 병마의 고통은 병자가 죽으면 멎듯이 염려, 걱정도 내가 죽으면 없어진다. 미움, 혈기도 내가 죽을 때 없어진다. 두려움은 내 자아가 살아있을 때 기세등등 활동한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안에서 온전히 작동한다. 내가 죽어야 그분께서 일 하신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산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사진: 지난 2년간 거주했던 창원 사림동 소재 국제 사격장 트랙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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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지를 대전으로…내일 아침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갑자기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경황이 없거나 당혹스럽진 않다. 오히려 오랜 시간, 주안에서 사리를 분별하고 두서를 생각한 일이기에 소망가득 기대가 된다. 그분께서 하실 일이 기대가 된다. 오늘 새벽 두시까지 짐을 싸다, 갑자기 은혜의 파도가 내 심령 속에 밀려들어왔다. 사실 새로 정착할 처소에 입주보증금을 마음을 다하여 온힘을 다하여 허리가 휘어지도록 준비하여 겨우 납입하다보니, 지불해야될 이사용역비와 커튼설치비에서 50만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엊그제 알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사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덧 해는 저물고, 저녁은 인스턴트 냉동밥으로 때우고, 싸야할 짐은 끝이 없고… 그러다가 날이 바뀌었다. 심야로 들어가니 할 일은 여전히 많았지만, 마음은 그다지 조급하지 않았다. 대신 만가지 지난 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난 2년간 창원에서의 일… 겁 없었던 청춘의 날… 어린 날의 추억… 모질게 찰싹 뺨 때리던 습기찬 겨울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했던 런던의 거리들… 그러다가… 정리하던 책상 서랍안에서 오만원권 11장이 나왔다. 평소 내가 돈을 놔두는 곳도 아니고, 그 곳에 돈을 둔 기억도 없다. 내 양어깨를 무겁게 눌러왔던 딱 그 금액, 그 액수였다. “너, 십일조 낼 돈 없지..” “…” 아들의 머리카락수 뿐만 아니라, 호주머니 사정까지도 훤히 아시는 그분은 이렇게 세심히 아들을 배려하신다. 딱 모자란 분량 50만원에, 십일조 5만원을 더해서 정확히 55만원 주셨다. 없어서 아들이 궁색해보이지 않도록 모자란 것 채워주시고, 쓰고 남아서 여유가 생기면 교만으로 떨어지까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정확하신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심하게 나에게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나를 돌보신다. 그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다니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전혀 낯선 새 사역지 대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소망과 기대로 꽉 차있다.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자의 위치에 항상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070625 *사진: 2년동안 나를 품어줬던 우리 동네 창원 의창구 사림동. (PS) 혹 대전에 신앙상담이나 양육이 필요하신 지인분이 계시면 연락주세요. 지체없이 달려가서 뵙겠습니다. - 연락처: hunlee11@gmail.com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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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한 일며칠간 타지에 갔다가… 혼자 사는 숙소에 늦은밤 도착하면 차디찬 철문 손잡이를 잡는게 그렇게 싫었다. 처진 엄지손가락에 겨우 힘주어 문을 열어도 아무도 반기지 않는 차갑고 어둔 공간 속으로 나혼자 시무룩 들어가는게 그토록 싫었다. 그래서 저녁먹고 산책하러 나갈 때면… 좋아하는 크리스천뮤직을 모아둔 스포티파이와 실내등을 일부러 켜둔채 외출을 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무겁고 까만 침묵만이 반기는 공간에 전등 촉수도 낮은 자취방에 홀로 있는게 그리도 싫었던 내게… 그 공간이 좋아질 때가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외롭고 곤하여 쑥 처진 내게… 그분의 잔잔한 음성이 임하면 새까만 적막 속, 내 이름 불러주시면 축 처져 누워있던 내게 어디서 왠 힘이 나는지 일어나 바른 자세를 하고 책상 머리맡에 앉게 된다. 그가 주신 말씀. 꼬옥 움켜잡고자 섬섬옥수 여인이 길쌈하듯… 받아적고, 돌이키고, 생각하고, 주신 것 두주먹 힘줘 붙잡고 기도하면 나를 짓누르던 컴컴한 어둠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다. 그 어둠이 싫어 햇살 가득 머금은 바깥으로 허둥지둥 쏜살같이 나갔던 어제의 습관이 무색해진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19) 062825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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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일등할래? 세상을 이길래?”유대인의 정결예법은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다. 하지만 그 뒤에 베어있는 사상적 원리를 알면 하나하나 이해가 어렵지 않다.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정한 것이 부정한 것(시체나 속된 것)을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학 2:12). 유대인에게는 이러한 율법이 중요한 생활강령이기 때문에, 강도에게 때려 맞아 피 흘리며 죽게 된 사람을 보고서도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다(눅10:30-37). 하지만 예수의 행적은 이런 생활철칙에 물든 사람들의 삶에 큰 전환을 가져온다. “병든 여인의 손으로 만져진 그의 몸이 더러움을 입지 않는다.” 더 이상 율법 강령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12년간 혈루증으로 앓아왔던 그녀의 부정한 몸이 정결함을 입는다(막 5:25-34). 그의 몸은 이 땅에서 저주와 침뱉음과 모욕을 받으셨지만 그는 저주 안에 물들지 않고, 저주 안에 있던 우리도 그의 신성함을 접촉함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 그가 이 땅에 오셨다는 ‘Good News’가 그의 피로 우리 죽을 몸을 구원하셨다는 ‘복음’이 세상사는 이치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더러운 것 때문에 더러워지지 않고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깨끗게 한다.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 더러운 죄악으로 절여진 우리를 정결케하사 세상을 신선하고 깨끗게 하는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빛으로 변환되는 대전환이 일어나게 하셨다. 거룩한 성도가 세상을 만나면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정화되고 주변 세상사람들이 변하게 된다. “배가 항해하려면 물과 함께 해야한다. 하지만 그 물이 배로 들어오면 이내 침몰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함께 할 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온전히 감당하고 지켜갈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 문화가 그 안으로 들어오면 교회는 이내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거룩성을 잃게 된다( https://www.sosalty.or.kr/introduce/vision/#sub1-2).” 믿음 없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고, 세상사람들의 생각에 영향받기 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Good News’가 우리에게 새롭게 준 생활상식이다. 점점 음침해지고 생명력을 잃어가는 세상에 경건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것이, 복음으로 우리가 얻은 새 소망이다. 서로 비교하며, ‘스펙의 노예’로 묶여 안해도 될 걱정을 싸안고, 생활의 염려로 눌리고, 마음이 어두워진 세상에 이렇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일등할래? 세상을 이길래?” 062025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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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사고 앞에서 근심하시는 성령하나님“지금 당장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중지한다면?그래도 교회가 하는 일의 95% 정도는 변함없이 굴러갈 것이다.”“If the Holy Spirit was withdrawn from the church today, 95 percent of what we do would go on and no one would know the difference. (A. W. Tozer, The Root of the Righteous, 1955)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주요한 두 기둥은 '말씀 전파'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통한 사역'이었다.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기사와 이적의 일들을 통해 많은 불신자들을 진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후에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이었다. 제자들의 복음 사역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도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간절히 구했다. 쇠못이 군데군데 박힌 채찍이 온몸을 휘감을 때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는(히 11:37)” 학대를 받으면서도, 담대히 복음 전파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성령에 의지함에 있었다. 단순히 성령에 의지함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구한 바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이었다."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 지성인들은, 치밀하고 정확한 인간의 이성, 합리적 사고를 통과해야만 믿을 수 있다. 과학적 사고와 합리와 이성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수용은 곧, 몰상식, 비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쉽게 치부한다. 자연의 체계를 세우시고 자연이 구동되는 법칙을 만드신 분께서, 때때로 그 체계와 법칙을 스스로 초월하시는 일들을 통해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신다는 중요한 관점에 관해, 많은 크리스천들마저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지만,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그의 초자연적 개입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John Locke의 주장으로 잘 표현된다.“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이성은 이와 같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싸울 무기는 이러한 이성적인 생각, 육신적 이론들을 무너뜨릴 영적인 병기, 즉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영적 능력이다.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현대교회는 영적 지도자에게, 영성과 영적 능력 보다 지적 자질, 이성적 판단력, 목회 전문성등을 요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뛰어난 설교, 탁월한 리더쉽, 빼어난 조직관리등과 같은 실력, 스킬이 교회에서 오늘날처럼 중요해진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리더쉽, 조직관리, 실력, 성공, 보고, 홍보, 마케팅… 기업영리조직에서나 사용되었던 용어들이 교회의 일상어가 되어 교회 깊숙히 밀려들고 있다. 반면에 성품과 성찰과 영적 깊이는 소홀해져만 가고 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왕성한 지적, 이성적 활동 끝에 빼곡히 써 내려간 설교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여백은 없다. 듣는 이에게 즐거움, 지적 동의와 감동은 미친 것 같은데, 성도들의 삶은 여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했지만 변함은 여전히 없다."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성령없이 신자의 거룩한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다. 혹자는 “성령의 활동은 사도 시대에 이미 끝났다.”는 성령중단설(Cessationism)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성령을 무시하고,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는 주장을 믿음으로 여기고 신앙생활을 하려하니, 체험이 있을 수 없다. 자기 열심으로 매일 기도하고, 성경책 수십독하고, 교회봉사, 헌신활동 분주히 하지만 변화는 없다. 영적 성숙, 신앙의 열매가 없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다” - “Personally meet Him” - 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체험이 없으니까 말이다.내가 런던에서 섬기던 교회에 면목동소재 한 교회 목사님께서 오셔서 간증설교를 하셨다. 어느 장로교회의 부흥사경회에 초청받아, ‘성령의 임재’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설교후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조용히 면담을 나누던 중, 문득 찾아오신 장로님.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눈에는 이슬이 맺힌 채, 어릴적부터 부모님 손 꼭 잡고 이 교회에 출석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나름 성경책 많이 읽고,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해왔는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령의 임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르니 사모하지도 않고… 이렇게 70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저 어떡해야 해요?”현재 내가 협력목회 하고 있는 창원하늘교회. 담임이신 노명학목사님처럼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임재에 그토록 민감하신 분 별로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길 가다가, 운전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주님,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데 저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 얼굴이 생각나면… “성령님, 10년동안 만나보지 못한 그 사람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영문입니까?” 그저 스쳐지나칠 수 있는 생각 한 조각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성령하나님과 대면하며 그 영적 의미, 실체를 깨닫고자 한다. 이렇게 성령의 일하심을 존중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는 성령의 임재로 충만하다.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된 젊은 가장이 이내 아내를 데려오고, 몇 주가 지난후 친모를 모셔오고, 나중엔 불신에 가득 찼던 아버지까지 전도해서 예배에 임하게 한다. 어릴적부터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신앙생활해왔던 한 청년은 직장일로 창원에 내려오게됐는데… 창원하늘교회에 출석하자마자 회개하고, 눈물 쏟으며, 거듭 태어난 기쁨으로 침례받고, 주를 영접하였다. “그 동안 교회 20여년 다녔지만 저는 깡통이었어요.” 그의 고백이다.나는 28년간 신앙생활해오면서... 출장, 해외유학, 주재원, 교회사역 등의 사유로 많은 세계도시에서 많은 교회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한 지 실로 오래 되었지만, 신앙초보 수준에서 자라지 못하고 변함없는 –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신도 알고, 교회목사님과 성도들의 수년간에 걸친 묵은 기도가 있음도 알지만 – 경우를 수많이 목격했다. 그만큼 “거듭난” 체험을 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는 쉽다. 자신의 노력, 인간의 열심 등 모든 힘을 빼고, 이론과 교리등으로 높아지고 견고해진 진을 무너뜨리고, 단순히 성령을 의지하는 자에겐 쉽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061825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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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거름'과 같다“교회란 거름과 같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더럽고 악취를 풍기지만, 땅에 골고루 뿌려지면 세상을 비옥하게 한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고, 흩어져서 받은 은혜와 사랑 세상에 전하는데 에 있다. 은혜 받았다고 좋아라 자기들끼리 모여서 손뼉치며 기뻐하고, 어디 친교/친목회 클럽처럼 내부지향적 모임으로 오그라들면 안된다. 한 켠에 쌓아둔 냄새 나는 거름처럼, 이웃에게 칭송받기보다 사회에 악취를 풍기는 종교집단, 정치세력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053125 *사진: Luis Palau Jr. (November 27, 1934 – March 11, 2021), Argentine-American international Christian evangelist202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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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인사는 만국의 공통언어이다. 내가 오랜 기간 살아본 영국과 미국에서도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하면 이상한 것으로 느껴진다. ‘저 사람이 오늘 상태가 안좋은가?’ ‘혹시 나에게 안좋은 감정이라도..?’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 청소년, 특히 어릴수록 초등, 미취학아동들 교회에서도 인사를 안한다. 눈에 보이는 웃어른에게도 인사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 하나님께 경배를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상하간의 관계, 수평적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진지한 가르침과 훈육을 오랜 기간에 걸쳐 받아본 적이 없다. 오직 일류대 가면 모두가 손뼉치고, 성질이 좀 못돼도, 성격에 좀 모가 나도,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한다. 하지만 세상은 능력있고, 똑똑한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할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가치가 학벌과 지위와 돈으로 매겨지는 세태에 냄새 난다며 겉으로는 거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부자라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학벌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웃과 사회를 배려하고 품고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지에 그 인간의 고귀함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님의 속성은 '사랑' 이시다.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셨고, 그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존재이신 것이다. 인간의 참가치는 그와 같이, 이웃과 사회에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는데 있다. 교회 본질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나가서 이웃 영혼들을 품고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교회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이웃들과 온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칭송을 받게 되어있다.(행 2:46-47) 그런데 현대를 사는 부모들은 자식이 수학, 영어 잘 하기를 원하지, 남에게서 '사랑'받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해야 친구에게서 이웃에게서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정성을 다해 가르치지 않는다. 영국의 사립학교(중고등학교의 경우)는 학문을 가르치는 Classroom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성/인품/예절을 배우는 House로 나뉘어져 있다. Classroom는 같은 학년 남녀학생들이 한 곳에서 학문을 배우는 곳이지만, House는 각학년생들이 골고루 분포된 전학년생의 생활/학습 공동체이다. 여기에서는 공동체 조직에서의 질서와 예절, 인성을 엄격히 가르치며 몸으로 배우게 한다. 나에겐 일년 학비가 약 6-7천만원(school trip, 유니폼, 책 등 기타 학습관련비용 포함)이 소요되는 것도 경악스러웠지만, 큰 아들 때문에 Housemaster에 불림을 당한 적이 여러 차례 있어서 고통스러웠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학생의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다룬다.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 부모도 불려와 가열차게 한 소리 듣는다. 모두가 타당하고 맞는 말이다. 어느날 또 Housemaster로부터 콜을 받았다. 그토록 눈꼽 뗄 새도 없이 바쁜 주재원의 일과 중에, 헉헉 거리며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니… 이번엔 내 아들이 체육시간에 하급생 체육복을 빼앗아 입고 나갔다는 것이다. 업무로 복귀하는 차안에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초등 5학년을 마치고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된 아이라, 왜 그런지 대충 이해가 갔다. 한국 초등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비슷한 경험을 당해봤기에 별 죄의식을 못느끼고 행동한 것 같았다. “난, 너보다 학년이 높아!” 비뚤어진 서열의식이 그런 행동을 초래한 것이다. 권위에 대한 잘못된 의식이 죄를 죄로 못느끼게 한 것이다. 난 너보다 높아! 내가 너보다 나아! 난 너보다 많은 것을 소유할 능력이 있어! 우리 사회가, 젊을수록 어릴수록 – 휘황찬란한 불빛을 향해 모여드는 불나방처럼 – 병든 서열의식에 몰입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웃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보다…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되기를 몸부림치면서 사모하는 것 같아 슬프다. 그 영국의 사립학교에 방학이 시작되면, 부모가 보낸 헬기를 타고 교정을 떠나는 거부의 자녀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늘 겸손하고 상냥하고 진실되어 보인다. 상대에게 대하는 태도에 가식이 없다. 피부 거무잡잡한 이방인 티 물씬 나는 나에게도 - 처음 보는 사이인데 -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극진하게 인사한다. 높은 상류층일수록, 돈 많은 부자 가문일수록, 평범하고 천한 이에게 대하는 태도는 늘 겸손하다. 나도 오랜 세월 런던 도심지에서 레스토랑업을 해본 경험이 있어 잘 안다. 인근 골드만삭스등 굴지의 금융회사, 딜로이트등 유명 컨설팅회사, 글로벌 로펌에 다니는 직장인들 중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스페인,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명망있는 가문 출신들이 많다. 그들이 내 아래 종업원들에게 대하는 언행을 보면 나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겸손하고 남을 존중한다. 한국의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비정상적 의식이 적지않게 작용하는 것 같다. 직분이 높을수록 상석에 앉기를 즐겨하고, 직분이 높은 자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런 것들보다, 믿음의 성숙도, 하나님과 관계의 깊이, 믿음의 말과 행실의 일치에 그 사람의 고결함이 있는 것 아닌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4:12) 경건의 능력은, 그 사람의 지식과 소유와 신분에 있지 않다. 경건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과 살아있는 건강한 관계에 있다. 날이 갈수록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세태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토록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가 완연한 오늘, 예수께서 거듭 당부하신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052325 *사진: 내 큰아들이 다녔던 그 학교202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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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향한 정서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정글의 맹수는 이런 감정이 없다. 자기 스스로 잡아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면, 가차없이 부모품을 떠난다. 공중의 새도 성년의 때가 되면, 미련없이 둥지를 떠난다. 가정집의 강아지도 다른집으로 분양되면, 그때부터 자기를 먹여주는 인간주인이 바로 부모가 된다. 그동안 젖물리며 핱아주고 품어줬던 어미는 온데간데 없다. 인간만이 부모를 향한 감정과 상념과 사랑이 있다. 세상의 영은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에게서 이 존귀한 마음, 인간의 양심을 빼앗으려 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딤후 3:1-2) 어버이주간이래서 특별히 잘 할 일이 아니다. 날 때부터 품게하셨던 이 존귀한 마음, 항상 붙들어야 한다. 두 양친을 이미 잃은 나로써는 더욱 깨닫고 경각이 되는 마음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2) 051125 *사진설명: 오늘 교회청년에게서 받은 카네이션202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