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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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밧세바를 간음한 다윗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의 선봉에 서게하여 죽게 만들고 그녀를 아내로 차지한다. 이에 선지자 나단은 -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가, 전재산이라곤 양 한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자에게서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다 – 는 우화를 다윗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 제3자의 실수/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분개한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반응을 한다. 그는 나단의 우화를 다른 사람에 대한 경책의 설교로, 다른 사람이 겪은 곤경과 그에게 해를 입힌 또 다른 나쁜 사람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로 듣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반응한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 12:5)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저만 떳떳하고 의롭다고 치부하는 도덕적 율법주의자, 남을 향한 책망과 비난을 쉽게 쏟아붇는 종교주의자가 되기는 쉽다. 자칫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팽팽한 영적 긴장과 함께 절제하지 않으면, 잡초처럼 쉽게 드러나는 육의 속성이다. 다윗처럼, 딸과 같은 양을 단 하나 소유한 가난한 자에게서 그 양을 빼앗은 부자에 대해서는 쉽게 분개하고, 빼앗긴 자에게는 하염없는 동정심을 베푼다. 이와 같은 동정심과 분개함은 우리에게 고상한 도덕적 우월감을 불러 일으킬지는 모르지만 영적 성숙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늘 당장 은혜받은 말씀. 이 말씀 남편이 들어야 하는데… 신앙심이 떨어진 내 아들이 꼭 들어야 할 말씀인데… 이러한 아쉬움 가지고는 자신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받은 말씀 가지고서 이웃의 허물을 보고 죄의 치수를 재고 도덕적 안경을 쓰고 더욱 더 종교적이 되어갈 뿐이다. 참으로 이웃이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자신이 가장 강력한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된다. 진정한 은혜는 내게 주신 말씀을 나를 향한 일인칭 말씀으로 들을 때 임한다. 저들이… 그가… 당신이… 아니라 "그 파렴치한 부자가 바로 당신이다(삼하 12:7)"라는 질책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바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했을 때, 내 안에서 새 역사가 시작되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제약없이 일을 하신다. 나 어렸을 때, 참으로 아름다운 사회적 캠페인이 생각난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 니 탓… 따지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들며, 상대를 비난하는 데에 노력을 경주하면 할수록 더 큰 비방이 돌아올 것이요, 오히려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 빨리 깨닫고 뉘우칠수록, 더 빨리 고치고, 회복할 수 없는 상채기가 곪기 전에 적으로부터 동의도 좀 더 수월하게 얻을 수 있다. 022725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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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둘째 아들: 영국 프리미어리그와 기독교영국 풋볼리그(English Football League; EFL, 1888)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범국가적 축구클럽리그이다. 스페인의 La Liga(1929), 이태리의 Serie A(1898, but became a national league in 1929), 프랑스의 Ligue 1(1932), 독일의 Bundesliga(1963)등 유럽 유수(有數)의 리그에 비하여 과연 혁명적으로 일찍 시작했다. 1992년 8월, EFL의 최우수 디비전인 1부 리그가 독립, EPL(English Premier League)가 출범하여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인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매년 프리미어 20개 팀중 상위 3개팀은 리그로부터 약 3200억원(£170-180 mil)을 보상받는다. 하위리그로 강등당하는 꼴찌 3개팀이라도 받는 돈이 상당하다. 무려 1500억원(£65-85 mil)을 보상받는다. (2023-24 시즌의 경우)영국에서 ‘축구’는 극히 중요한 생활과 문화의 일부이다. 특히 영국에 조기유학을 준비중인 자녀(특히 아들)를 둔 부모님은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주요팀, 주요선수들, 그리고 이들의 최근 성적에 대해 최소한 숙지하고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그래야지 낯선 나라, 낯선 학교, 낯선 아이들과 학교생활에 적응이 순탄해진다. 아이들 대화의 대부분이 축구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my favorite team과 my favorite player, 그리고 왜 이들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필수적으로 꿰차고 있어야 한다. 이것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일단 왕따로 가는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자기소개의 말미에 “my favorite team is…”으로 자신에 대한 소개를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 매너이다. 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통한다. 직장에서, 사업상 비즈니스 관계에서 통성명할 때, 이런 대화는 Ice-breaking하는데 윤활유 역할을 한다.영국에는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축구 클럽이 조직되어 있고 이들은 크고 작은 지역 리그에 소속되어 시즌 내내 경기를 펼친다. 꼬마들은 4살때부터 ‘Tots Football’이라는 지역마다 개설된 프로그램에서 축구라는 운동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며, 6살부터는 동네 클럽에 가입하여 마을을 대표하여 뛸 수 있다. 참고로, 아래는 우리 둘째 아들이 유소년때 뛰었던 Claygate Royals팀의 웹사이트이다. https://www.claygateroyals.club/teams이들이 9살이 되면, 유명 프로축구팀에서 꽤 유망해보이는 어린이를 발굴하여 Club Academy System에 참가시켜, 체계적인 훈련을 받도록 한다. 각 프로팀은, 여기에서 16세에 이르기전에 우수선수들을 선발(U18 team), 장학금을 지급하며 미래의 프로축구선수로서 본격적인 투자를 한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 축구는, 팬으로서, 아마추어선수로서(마을/학교/지역/국가를 대표하는), 프로선수로서, 뒷바라지하는 부모, 응원하는 할아버지/할머니로서 거의 전국민이 깊게 관여되어있다. 이들 문화의 중심에 축구가 있고, 자신 가족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있는 매주말 게임(그것이 프리미어리그 프로경기든, 아마추어경기든)에 사로잡혀 뜨거운 관심을 갖는다.문제는 이 범국가적 스포츠경기가 주말(대부분 일요일) 에 열린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봇물처럼 밀려드는 세속주의, 물질주의로 위축된 영국의 기독교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일을 축구장으로, TV앞으로 빼앗음으로써 – 큰 카운터 펀치를 가격한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나이 지긋하신 목사님과 크리스천들은, 1992년 8월 프리미어리그 탄생이후 기독교인들의 삶과 이전의 삶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탄식을 내쉬며 안타까와 한다.2006년 5월 영국으로 주재생활을 시작한 우리 가족에게도 이 여파는 얼얼할 정도로 쌩쌩하고 강렬했다. 둘째 아들의 경우엔 유달리 심했다. 축구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축구를 통해 낯선 이방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을 향한 동네 학부모들의 응원의 함성에 매료되었던 5살짜리 꼬마에게, 축구 시합이 있는 일요일 아침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장엄하고 존귀한 시간이었다. 아들의 축구를 향한 열의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부부는 예배시간과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시합이 끝나자마자 악수하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차에 태워 옷을 갈아입히고(유니폼과 축구화에서 떨어진 진흙 덕분에 내 차안은 온통 진흙밭이 되어버린다), 차안에서 간식/음료를 먹이면서, 쏜살 같은 속도로 예배에 가까스로 참석하는 것이 매주 일상이 되어갔다. 당연히 예배의 질이 떨어졌다.주일 축구를 강력히 반대를 했지만 우리 가족 4명중 나만 왕따가 되는 괴로움만 받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둘째에게 둘만의 면담을 제안했다. 많은 시간을 얘기했다. 대부분 내가 말을 했고, 선재는 들었다. 우리의 믿음이 뭔지, 예배가 왜 중요한지, 주일날을 어떻게 간수하고 보내야 하는지를… 곰곰히 들은 그는 나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날 선재의 결정이 지금까지도 고맙다.이후 선재의 생활을 지켜보는 아빠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토록 날쌘돌이 활발했던 그에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종달새처럼 명랑했던 그의 말수가 극도로 줄어들었다. “Sunny(선재 영어애칭), get the goal!” 전율할 정도로 자신을 응원했던 고함소리를 더 이상 못 듣게 됐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그때뿐… 불평하지 않고 비뚤게 나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준 그가 고맙다.몇주전 내가 사랑하는 전도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교차 영국에 갔는데, 어느 선교프로그램 세미나에서 의젓한 크리스천으로 자란 선재를 만났다고… “좋은 말 좀 많이 해주라!”는 나의 부탁에 더 이상 좋은 말을 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자랐다고… 5년이상 미국 남부, 멕시코 오지에서 목숨을 담보하며 선교활동을 했던 – 내가 존경하는 – 사역자의 말이라 더욱 뿌듯했다.022625* 축구훈련에 몰입중인 다섯살 선재20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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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바람직한 태도는 “왜?”라는 진지한 의문을 갖고 읽는 것이다. 성경말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올바르게 깨닫고 믿음으로 수용했을 때, 그 말씀이 자신의 믿음의 집을 건축해나가는데 온전한 주춧돌이 된다. 신앙의 영역이니 “무조건 믿어라!”는 주장에 건강한 사유없이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순종은 자신의 영혼에 독이 될 수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왜냐하면”, 다스리는 자들은(οἱ γὰρ ἄρχοντες)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롬 13:3)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θεοῦ γὰρ διάκονός ἐστιν)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롬 13:4) 여기 헬라어 성경원본에서 주목할 단어는 ‘왜냐하면(γὰρ; 가르)’ 접속사이다. 왜 하나님께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을 하라”고 명하셨는지, γὰρ 접속사 다음에 상세히 나와있다. 안타깝게도 한글 번역본에는 이 접속사를 해석하는 표현이 살려있지 않다. '왜냐하면'이란 표현이 없다. 과연, 이 성경구절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니,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앞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결론낼 수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그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은 자들을 통해 공정한 사회를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읽혀지는가? 선을 베푸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롬 13:4), 권세를 허락받은 그가 마땅이 해야할 바를 하기는 커녕, 하늘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 스스로가 악을 행하며 사익추구에 권력의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며 백성들을 근심케 한다면, 그는 이미 “각 사람이 복종해야될” 다스리는 자의 합당한 자리에서 벗어난 자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떨어진 자이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신중하게 사유하지 않고, 적지않은 교회지도자들이 로마서 13장 1절 구절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1) 대상이 되는 성경 구절의 앞뒤 의미있는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그 구절만 가지고 결론을 맺는 설교 2)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뜻/의도를 도외시하거나, 성경원본 original text가 기록되었을 당시의 사회/경제/정치/생활/언어적 맥락의 진지한 이해를 건너뛴 성경해석은… 독이 될 수 있다. 괴이한 신앙집단을 낳을 수 있다. 사회에 큰 아픔을 초래할 수 있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오늘 한국사회에서 두 눈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 대한 이러한 '문자해석주의'는, 오늘 한국사회를 아프게 만들고 있는 현상과 연결되어있다. ‘사유의 게으름’이란 치명적인 질병으로 서로 얽혀있다. "그 딴 것 모르겠고.." 하며 거짓/억지/왜곡 주장을 맹신하고 실어나르며, 진리를 탐구하는 순전한 노력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정보를 취사/편향 섭취하는 - '축소주의 reductionism'*,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 몹쓸 병과 일맥상통, 병명만 다를 뿐이지 동종의 질병이다. 022325 *Reductionism: The tendency to simplify biblical teachings or theological concepts, sometimes overlooking their full depth and context. **본 주제에 대한 좀 더 깊은 생각을 읽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sosalty.or.kr/inquiry/?mod=document&uid=123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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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는 모든게 낯설다내 인생 후반기 30년 동안 많이 옮겨 다녔다. 서울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다가… 미시간 이스트랜싱.. 다시 서울.. 영국 런던.. 경남 창원.. 광야 같은 낯선 곳에서 살기 위해, 낯선 환경에서 살아 남기위해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낯선 광야에서는 모든 신경세포와 감각의 모든 돌기를 바짝 세우고 있어야지만 적응한다. 그 황량하고 추웠던 광야 생활의 초입, 1997년 7월 앤아버의 미시간호수에서 침례를 받고 나의 신앙생활은 시작됐다. 그리고 거주지를 옮긴 만큼, 그에 따라 교회도 옮겼다. 적지않은 교회를 섬겼으나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른 자, 상대방에 비수 꽂는 말을 재주삼아 하는 자, 민감한 내용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자, 자기밖에 모르는 자, 옆에만 있으면 상대방의 자존감/자신감을 떨구게 하는 자, 거짓말과 과장을 습관적으로 하는 자…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 지극히 부적절하고, 미성숙하고, 연약함으로 시끄럽고 혼미스러운 인간 군상들을 예외없이 목격했다. 내 자신을 포함해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은 회의와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와 멀어진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흠집많은 인간 공동체에 한 줄기 영롱한 빛이 임한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하는 선행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 촛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신가에 맞춰져야 한다. 광야는 지리적으로 현존하는 곳이지만, 영적 은유이기도 하다. 광야는 척박하고, 춥고, 굶주리고, 고독하고, 나 홀로 버텨야만 하는 곳이다. 갈급과 갈망이 용솟음치는 곳이다. 모든 것이 결핍된 환경에서 새벽이슬 단 한 방울이 감사한 곳이다. 생존하기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곳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 한복판에서, 적국 가드의 왕 아기스 앞에선 다윗… “다윗이 그 유명한 용사”임을 보고받은 아기스왕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간파한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척하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다(삼상 21:10-15). 그런데 그 매몰찬 광야에 사람들이 모인다. 모두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망한 자, 빚쟁이, 억울하고 원통하고 세상이 미운… 죄다 사회의 밑바닥, 변두리 인생들이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게다가 다윗을 애숭이 취급하며(삼상 17:28), 자신들을 제끼고 왕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형제들마저 그에게로 왔다(삼상 22:1). 광야의 환란은 나뉘어진 형제들 마저도 하나 되게 한다. 광야의 고통은, 삼류 인생들 마저도 서로 신뢰와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한다. 그들이 과거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못나고, 함량미달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을 불러 모아서 예배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이들을 기반으로 훗날 큰 병력이 되게 하셔서(대상 12장), 다윗을 통해 왕국을 이루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중요할 뿐이다. 앞으로 또 어디 낯선 곳으로 인도하실지 모르겠다. 몸은 내키지않고 주저하지만… 나와 동행하시며 분주하게 일하실 그분을 신뢰한다. 020325 *사진: 광야 초엽, 미 유학시절 큰 아들과 함께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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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16세기 종교개혁(the Reformation) 18세기 영국의 영적부흥운동(English Evangelical Revival)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North American Great Awakening) 선진들이 신봉해왔던 신앙 생활을 객관적으로 믿음안에서 사유해보고 이것이 잘못 되었음을 인식한데서 비롯된 아름다운 영적 유산들이다. 생각없는 영적 각성은 없으며, 깨달음없는 영적 부흥은 없었다. 유대인 학살의 대표적 인물 중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체포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수송하는 일을 충직하게 수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 감금되는 사람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수용소는 곧 만원이 되어 운영이 어렵게되자… 그는, 수용소로 이동하는 기차에 가스실을 설치하여 유대인들을 이동중에 효율적으로(?) 학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나중 재판정에 선 그는, 국가의 명령에 순종했을뿐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였다. 이에대하여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thoughtlessness)이 희대의 끔찍한 범죄를 낳았다”고 말하며, 이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1)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악의 평범성'을 잘 설명해준다.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한 명의 공무원, 그가 정말로 다름 아닌 평범한 한 명의 공무원일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2) 즉, 타인의 처한 입장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 생각이 무능력 상태(inability to think)에 있을 때에 - 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에 대한 현실 자체를 생각해볼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상투적인 논리의 방어벽 뒤에 숨어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피상적이었고, 1차원적이었고, 단순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한 생각만으로 그치는 곳에서 '타인이 처한 현실을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이 잉태된다. 평범하고 단순한 생각에 막혀 생각의 무능력을 낳을 때 악이 생산된다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지금 한국사회가 많이 혼란스럽고 많이 아프다. 사실과 진실이 너무 많이 왜곡되고 있다. 객관성과 신뢰성을 상실한 유튜브를 통한 메시지를 사람들이 퍼나르면서 언론과 국가의 공신력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뻔한 거짓말로 세력을 모으는데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부채질하고 있다. 몇주전 초등학교 동창의 장녀 결혼식이 있어 서울에 갔다왔다. 초등때에 공부 잘한 친구들이 많아 서울대에 들어간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대학교수, 정부관료, 대기업 CEO등을 하고 있거나 역임한 친구들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섭섭해서 2차 모임에 다 함께 참석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목사인 내게 질문이 집중됐다. “태극기부대… 애국, 애국 하면서… 왜 기독교인들은 객관적으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부패한 보수를 마치 자기들만이 애국자인냥 그것도 과격하게 감싸고 도는 이유가 무엇이냐?” 질문의 핵심이었다. 나의 대답은 “기독교인들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면서 그중에서 일부 극우 보수세력이 그러는 것이다. 다만 종교적 교리, 신앙 강령에 대해 복종적인 순종을 훈련받아온 기성노년세대에 이러한 경향이 다소 높은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생각없는 맹목적인 순종은 교회에 병이 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길은 종교생활이었다. 그들이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정, 칭찬, 보상을 위해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하며 자신들이 순종/헌신/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한 업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찬사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영적 탁월함을 인정받았다는 확신, 자신이 가진 달란트, 교회를 향한 모범적 헌신, 도덕적 우월감 등은 본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주된 근원이 된다. 이러한 굴절된 자신감은, 자신만이 신앙의 표준이라는 영적 교만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생각은 매우 단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건강한 사유없이 그들의 삶과 행동은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맹목적인 무비판적 수용과 함께 구동된다. 건강한 자기 사유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생활 방식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그것을 뒤집어 엎고자 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12:34-35) 선한 사람의 말은 선하다. 선한 말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선한 깨달음이 없는데 어찌 그 마음이 선하겠으며,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선하겠는가? 하나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진지하고 건강한 사유 없는 종교인들에 대한 예수의 일성(一聲)이 이러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드러난다. 자기 생각, 자기 대답, 자기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순종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 같지만, 나쁜 명령에도 잘 순종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사유하는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생각이 마비된 순종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사회를 병들게하고 위태롭게까지 만든다. *생각의 무능은 악한 행동을 낳는다(Hannah Arendt). 012825 (1)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Viking Press, 1963) (2) "Er war der typische Funktionär. Und ein Funktionär, wenn er wirklich nichts anderes ist als ein Funktionär, ist wirklich ein sehr gefährlicher Herr.": Hannah Arendt in conversation with Joachim Fest, a radio broadcast from 1964202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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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못 볼 2024년과 헤어지며'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우리는, 10킬로가 넘는 창을 마치 지휘봉처럼 다루는 2미터가 넘는 거인 골리앗에 압도된다. 하지만 다윗은 압도되지 않았다. 곰과 사자의 포효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연습한 그에게는, 곰의 맹렬함보다 사자의 사나움보다 주님의 사랑이 훨씬 더 실제적으로 실감되었다. 그의 마음과 생각과 정신력에는 온통 - 곰, 사자, 골리앗을 압도하는 - 훨씬 더 크고 강력한 하나님께서 자리잡고 계셨다. 눈앞 골리앗에 질려서 맥 못추는 사울과 그의 군대처럼... 코앞에 펼쳐진 불확실에 대한 염려, 결핍에 대한 걱정, 곧 덮칠 것만 같은 산더미만한 인생의 파도 앞에 맥못추는... 영혼의 중병에 걸렸음을 자각한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회개로 2024년을 마무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신앙의 본래 위치로 돌아오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해를 맞이할 영적 태세를 가다듬는다. 123124 *사진: Holy Trinity Church Coventry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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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변명이 일을 그르친다“섣부른 변명이 오히려 매를 부른다.” 내가 23년 직장생활을 통해 얻은 귀한 배움이다. 기대치 않은 성과가 나왔을 때, 어찌 그것이 전적으로 내탓이었겠는가? 누군가 다른이가 결정적으로 일을 태만히 했거나, 지원이 절실했던 옆부서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던가,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터인데, 나 혼자 비난의 덤터기를 뒤집어 쓰는 것이 못내 억울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이런 자리에서 입바른 변명을 한다. 그리고 열이면 열, 이러한 변명은 자신을 향한 비난의 독소를 더욱 자극한다. “모두 저의 불찰에서 비롯됐습니다.” “송구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보다 십수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상사가 왜 정황을 모르겠는가? 변명 안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번 일을 통해, 부하직원이 더 클 재목인줄을 보고 싶어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 말 한마디에 호랑이 상사의 포효하는 분노의 예봉은 무디어지고 부드러워진다. 불신의 눈초리가 신뢰의 시선으로 바뀐다. 자신을 치러 코앞에까지 쳐들어온 블레셋 군사들 앞에서, 제사를 드리기위해 장장 7일을 눈빠지게 기다렸던 사무엘제사장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급한 마음에 사울 자신이 번제를 드리고 만다(삼상 13:5-15). 이윽고 도착한 사무엘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며, 세 부류에게 탓을 돌린다. 1)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2) 사무엘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3)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삼상 13:11) “그래서 이렇게 당신 대신 번제를 올린 것입니다.” 그가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마음에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했더라면… 그의 왕위는 온전했을런지 모른다. 섣부른 변명이 더 큰 매를 부른 것이다. 신약에서도 섣부른 변명으로 신세 망친 대표적인 경우가 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25) 그는 주인을 심하게 오해했다. 심지도 안고 씨뿌리지도 않았는데도 거기서 수확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이 굳은(σκληρός; 스클레로스; 기대수준이 높은, 비위 맞추기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주인이 실제로 그러하더라도, 하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아주 기분 상할 표현이다. 하지만 그 이전 다섯, 두 달란트 받았던 자들에게 취했던 주인의 행동을 살펴보면, 이 자가 말한 “굳은 사람”표현은 매우 왜곡/과장 되었다. 게다가 그가 한 변명은 앞뒤 두서가 전혀 맞지 않는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기를 바랄 정도로 기대 수준이 터무니 없이 높은 주인이라면, 주인에게 혼나지 않기위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이든지를 해서 그 돈을 불리는 것이 경우가 맞지 않는가? 그런데 그는 그것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변명하는 자의 전형적인 증후이다. 앞뒤 논리가 맞지 않아도… 섣부른 변명이라도 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상대방의 입장, 동료들이 하는 상식적인 태도… 이런 것들엔 아랑곳 하지도 않는다. 성경 본문은 외형적으로, 받은 한 달란트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않은 하인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게한 결정적인 이유는, 주인을 주인 앞에서 “굳은 사람’이라고 폄하했던 표현과, 그를 노력하지도 않고 이익 얻기를 바라는 하등한 인간 취급을 한 하인의 방정맞은 “변명”에 기인했음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뿐 아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5).” 이미 진노한 주인의 약을 바싹 올린다. 여기 당신이 준 한 달란트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제가 받은 한 달란트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여 당신에게 도로 돌려드렸는데, 왜 화를 내십니까? 이 하인은 여태까지 주인과 나눈 대화에서 느낀 바도 깨달은 바도 없다. 듣지를 않는다. 목이 곧은 자이다. 자신의 고집대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염소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 보신(保身)만 챙기는 마음밭이 단단한 자이다. 내 아들이… 내 아들 또래가 사회 중추가 될 가까운 미래엔…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는 상대방과 이웃을 배려하는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훈훈한 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011425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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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대한 생각Christmas는, 로마카톨릭과 라틴어에 영향받은 Old English "Cristes Maesse"에서 나왔다. 11세기경에 시작된 이 표현은 “Cristes(Christ's)”, “Maesse(missa; 미사)”로써,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미사’이다. ‘미사’를 우리는 예배로 알고 있는데, 원래 의미는 “send out(파송하다)”의 뜻이다. “이제 예배가 끝났으니, 각자 교회를 벗어나 세상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거룩한 책무를 일컫는다.(1) 따라서 Christmas의 본래 의미는 ‘예수님의 당부하신 사명’이란 뜻이라 할 수 있다. 결단코, 크리스마스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볍고 들뜨고 즐거이 만끽하는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엄숙하고, 신자로서 사명과 헌신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마태복음 2:1-12를 읽으면, 탄생하신 아기예수께 경배하러 먼 여정을 나선 동방의 현인들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이라크)지역에서 출발하여 800-1000km의 여정을 느려터진 낙타를 타고 약 3개월간을 소요하며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 낮엔 작열하는 태양으로 몸이 뜨겁게 타오르고… 밤엔 극심한 추위로 오돌오돌 떨면서… 끝도 없는 사막길을 지겹도록 가야한다. 생명줄인 낙타도 극진히 보살펴야 된다.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재우고 쉬게 하고… 무리하다 낙타가 만에 하나라도 죽으면 여정은 더욱 느려지고 고생은 배가된다. 게다가 호시탐탐 방심을 노리는 허기진 들짐승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한 구절 읽고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갈 여정이 절대 아니다. 그들에겐 메시아에게 경배하고자, 목숨을 건 뜨거운 헌신이 있었다. 신앙은 드리는 것이다. 경배가 핵심이다. 경배는, 예배드리는 대상에 대한 뚜렸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간절한 사모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받으러 가는 자리보다, 드리러 가는 자리이다. 이것이 묵과되면 예배드리는 자가 중요해진다. 내가 중요해진다. 자신의 마음, 감정, 느낌이 중요해진다. 위로 받기 위해… 문제해결 받기 위해… 안식을 누리기 위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이러한 기대를 못채우면 예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가 불편하면 기대했던 예배가 아니라고… 예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예배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 기분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받으려는 자의 자세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헌신이다. 경배가 무너지면 신앙이 무너진다. 신앙이 쓰러지면 마음도 정신도 몸도 쓰러진다. 날이 갈수록 점점 예배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예배는 한 시간 넘기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설교 절대 30분 넘기지말라고 가르친다. 청중들이 지루해한다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예배를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보다 “오늘 예배에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가 먼저 나온다. 바쁜 일상 중에 마지 못해 나와주신 성도가 감사한 시대. 마지 못해서 예배드리는 시대. 하지만, 동방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전심으로 헌신하고 하나님 임재에 순전한 기쁨이 있었다.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9-10)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는 “그리스도의 미사”. 즉,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거룩한 헌신”이다. 122624 (1)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332) (2) Craig S. Keener, ‘Origins of the Magi and the challenges of their journey’,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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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it good to be rich?홍수때에는 정작 마실 물이 귀하다. 북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여로보암 2세 시절, 그들은 약자를 착취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8:4)”하시며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암 8:2)”선포와 함께 진노하신다. 그 보응의 핵심은 바로 그들에게서 말씀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교회 리플렛, 전도책자, 성경교재, 큐티책, 유튜브, SNS… 도처에 말씀이 널려 있다. 말씀이 홍수인 시대이다. 이렇게 말씀이 양적으로 풍성하고 물질로 번영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를 뚜렷이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자기 사랑, 돈 사랑으로 꽉 차있는 무정함으로 약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므로,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8:4)”하시는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보다 평안/사랑/은혜/위로/힐링/자아실현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말씀은 풍성하지만, 정작 말씀이 없는 시대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202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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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봄날에며칠간 기억의 영역을 어머니로 꽉 채운 아들에게 서운하셨는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라"고 그때 하신 말씀 또 하신다. 121124 --------- 3년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난히 생각나는 봄날이다. "너희 회사에서 ... 발표했더라." "네가 모시는 상사, 신문에 났더라." "상사하고 잘 지내라." "넓고 길게 봐라." "어머니께 안부 전화 자주하고..." 늘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으로, 자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신 분. 아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 나를, 절대 급하지 않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 분... 오늘은 그분을 다시 모시고 싶은 영국의 화창한 봄날이다. 슬프도록 눈부신... 042113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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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행 비행기안에서오랜만에 런던 가는 비행내내, 엄마 생각이 났다. 11년전, 영국 사는 아들 보러 먼 하늘길을 오셨을 때... 내가 오늘 탄 것과 똑같은 비행기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난 지금 이런 저런 생각으로 꽉 차 있는데... 120924 ----------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아들집에 오셨다. 집이 좁아 안방으로 모시려하니 거실이 낫다고 하신다. 거실이 좋아졌다. 평소 잘 가지 않는 곳에서 평소 잘 하지 않는 낮잠을 어제 늘어지게 잤다. 어머니 품이 좋다. Pictured @ Heron tower, City of London 123113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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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경제… 그리고 돈트럼프가 미국 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번처럼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이 낙선이후 재임에 성공한 경우가 미국 역사상 딱 두 번 있었다. 첫 케이스는 22, 24대 대통령을 역임한 Grover Cleveland이다. 마음이 무겁다. 경제논리를 앞세우고 돈이라면 사회정의, 윤리, 도덕, 인권, 환경 문제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트럼프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사회/정치/경제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하다. 더욱이 자신의 무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짓말과 막말을 서슴지않는 그의 천박한 언쟁방식과 처세술이, 자라나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사회를 굴절되고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세파를 살아가도록 영향을 미칠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아프다. 선거결과에 불복하며 다섯명의 사망자와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미 국회의사당 폭동을 부추긴 그에게 ‘정의’는 공허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서 주어왔는지 허무맹랑한 가짜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경’문제는 돈낭비라며 치부한다. 수많은 여성들과 성추문을 일으키며 돈과 위력으로 입막음하려 했던 그에게 윤리/도덕은 먼 행성에나 존재하는 개념이다. 점잖은 방송인으로 알려진 Fox News의 앵커인 Tucker Carlson마저도 그에게 전염됐는지, 트럼프 유세현장에서 여성혐오 및 Harris를 향한 조롱적 발언이 놀라울 정도로 과격하고 혐오스럽다. “아빠(트럼프)가 집에 오신다! 아빠, 화가 많이 나셨어! 이년(해리스)이 말을 안들어! 나쁜 년은 세차게 엉덩이를 맞을거야! 너는 맞아도 싸! Daddy is coming home!”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틈만 나면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면서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불륜, 거짓, 인신모욕을 서슴지 않으며 비도덕적이라는 사람임을 만천하가 알고 있는데,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에 너무나 괴롭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경배의 대상이고, 축복과 능력의 근원이다.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용사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선 것도, 칼과 창과 갑옷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나간 것이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피조물 인간 크리스찬이 욕먹기 이전에,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다. 다윗의 당당함 뒤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블레셋용사 골리앗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있었다. 나는 이번 선거결과에 대한 첫째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정치계에 입문하기전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자신이 확보한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상대방을 압력, 협박, 위계(位階)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천하고 격이 떨어지는 장사꾼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그런 장사술이 이번 대선에서도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월 28일자 The Washington Post는 “대선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미 대기업총수 및 기업인들이 속속 트럼프 지지로 선회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트럼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기업에 대한 그의 보복이 두려워서”라고 분석했다. 본 기사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미 해리스 지지를 천명한, Amazon 창업자 베조스 소유의 The Washington Post는 해리스 지지를 취소했다. The Los Angeles Times 또한 해리스 지지에 대한 기사를 더 이상 싣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트럼프와 설전으로 유명했던 Meta의 마크 주커버그도 중립적 입장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8월, “주커버그가 이번 선거에서 일말이라도 죄가 있으면,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마저도 08, 12년 대선에서 줄곧 민주당 후보 오바마와 힐러리를 지지하다가, 이번 대선에서만은 침묵하고 있다(https://www.washingtonpost.com/business/2024/10/28/trump-bezos-billionaires-zuckerberg/). 이들에게 연방정부와 계약을 통한 비즈니스 창출 기회는 막대하며, 이들에 대한 세무조사, 사법/행정적 압력은 실로 무서운 징벌이다. 천박한 장사꾼 정치인의 협박으로 기업인 엘리트들의 입에 족쇄를 채운 원동력에는 ‘경제’, 즉 ‘돈’의 문제가 걸려 있다. 다들 알다시피 재계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는 머스크이다. 그는 트럼프 당선을 위해 이미 1억3천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0월 19일부터 선거일 11월 5일까지, 트럼프의 정책 지지자중 매일 1명을 뽑아 100만 달러씩 지원하는 괴이한 정책 프로모션을 벌였다. 두 협상꾼 사이에 모종의 딜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Tesla와 SpaceX(우주항공산업)를 보유한 그에게, 지구궤도에 쏘아올릴 수 있는 인공위성의 개수에 대해 정부로부터 받는 인가와 자율주행자동차의 고속도로 주행 허가 등은 사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더욱이 트럼프는 그를, 정부의 예산을 집행/관리/감사하는 신설 정부효율청(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의 책임자로 앉힐 것을 공약했다. WSJ는 기업인인 그를 이러한 포스트에 앉히는 것이 ‘공직자 이해 충돌’ 측면에서 우려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https://www.wsj.com/politics/elections/elon-musk-wins-big-with-trump-bet-3c61ad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은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가 불법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어떠한 행정을 펼쳐가더라도 국민 다수가 선택한 사람이기에 – 그의 특기인 억지주장, 거짓말, 날조, 비난, 위협등으로 - 왠만한 것은 그냥 넘어갈 것이 앞으로 예견될 일들이다. 민주당 해리스가 진 두번째 이유도 ‘경제’와 직관된다. 어제 WSJ에 의하면, 미유권자의 무려 40%가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경제’를 꼽았다. 이 사람들 중에서 60%가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경제성장율 이런 것보다, 당장 오늘 사먹을 식료품값, 렌트비에 더 민감하다. 미장원을 운영하는 한 여성은 “The economy is everything!”이라며 “애 키우고, 먹고, 일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무 힘들어졌다”며 한숨을 내쉰다(https://www.wsj.com/economy/economy-election-trump-voters-c4c2e9a3). 해리스와 현임 바이든의 오판은, 경제성장율, 실업률 등 거시경제지표는 나아졌다고 이를 강조했지만, 고물가로 허덕이는 서민들이 체감하는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분명한 경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큰 패착이 있었다. ‘그래도 기업을 일궈본 트럼프는 낫겠지!’라는 기대가 이들의 표심을 자극한 것이다. 버니 샌더스도 선거결과가 나온 후에, “민주당이 노동자를 버렸으므로, 노동자들도 민주당을 버렸다”고 표현했다. 이번 선거의 패인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인 노동자계층(특히 흑인과 히스패닉)의 이반(離反)에 있었다. “The economy is everything!”이 이 글의 주제이니, 러시아로 화제를 돌려보자. 푸틴이, 러시아산 에너지가 서방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자원부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경제’적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러시아 경제/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원/석유 재벌 엘리트(Oligarchy)들의 압력에 푸틴은 오랜 기간동안 시달렸으며, 유가하락/경기침체/서방국제재 등으로 폭발 직전의 이들의 불평을 잠재우는데 침공은 유효적절하게 작용했다. 푸틴의 이 위험한 결정 뒤에도 ‘돈’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다. 푸틴은 머스크와 친하다. WSJ기사에 의하면 22년말부터 지금까지 머스크는 푸틴과 수차례 만남을 해왔다고 하는데(https://www.wsj.com/world/russia/musk-putin-secret-conversations-37e1c187)… 두 야욕꾼들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 뭘 주고 받기를 흥정했을까? 재작년 머스크는,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당지역의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의 철군 여부를 가리자고 X(옛 트위터)에서 제안했었다. 이 제안에 크레믈린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https://www.themoscowtimes.com/2022/10/04/kremlin-hails-musks-attempt-at-ukraine-peace-deal-a78973). 푸틴은 트럼프와도 친밀하다.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크레믈린이 해킹 및 SNS를 통한 가짜 뉴스 살포 등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것은 유력 언론을 통해 보도된 공공연한 사실이다. 특히 해킹에 의해 입수된 힐러리 후보측의 이메일이 WikiLeaks에 공개되어, 선거직전 힐러리에 치명상을 주었다. 또한 트럼프의 아들과 사위가 러시아 고위인사들과 수차례 트럼프 타워에서 만났다는 것이, 당시 사건조사를 담당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에 의해 확인되었다(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18/jul/27/donald-trump-russia-meeting-michael-cohen). 트럼프는 정치적 지도자이기 이전에 사업가이다. 그가 내세우는 대부분 큰 공약은 대다수 국민들이 아파해하고 민감해하는 ‘돈’에 관련된 것들이다. 경제제재, 관세보복, 방위비삭감, 돈 안되는 환경조약 개무시… 이 피부에 쏙 와닿는 손에 만져지는 가치에 대해 여론을 현혹하며, 민주, 정의, 인권, 평등, 환경, 우방과의 상호호혜와 같은 건국이래 면면히 이어내려온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국가적 이념을 희생하고 있다. 그와 그의 측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뿐이다”라고 자신있게 천명해왔다. 푸틴과 무슨 딜이 있었기에 이리도 자신 있었을까? 트럼프가 제안하는 평화적 딜은, 지금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지금까지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현상태로 인정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협상꾼인 그는 그 대가로 무얼 받기로 했을까? 미국 대선을 얼마 안남기고 터진 북한의 ‘러시아 파병’ 소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우방국들을 불안과 걱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향후 이것이 미칠 파장에 대해 우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민을 ‘전쟁 확산’ 염려 속으로 내몬 이 소식으로 득을 본 사람은 누굴까?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공언한 트럼프가 최대의 수익권자임에 분명하다. 그는 유세기간 내내 “환경문제보다 핵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강조하며, 전쟁위기를 틈날 때마다 불러일으켰다. 그것도 50:50 초박빙의 대결로 치닫고 있던 선거일 20일 전에 터진 ‘북한 파병’ 소식은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마치 2016 대선 직전, 힐러리측 이메일의 유출로 트럼프가 결정적 승기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북한 또한 경제난/식량난으로 오랜 세월 힘들어 하고 있다. 여기에 서방측 제재등으로 빈곤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 참전한 병사들은 월급으로 일인당 2천달러를 받기로 했고(https://www.yna.co.kr/view/AKR20241025071600546), 참전병력이 1만명이면 매월 2천만달러이니, 부족한 국부를 채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사설은 의미심장한 결론을 맺는다. “이 같은 북-러의 파병 속도전은 11·5 미국 대선 이후 안보 지형의 변화를 노린 도박, 즉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다걸기(올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과의 ‘브로맨스’를 자랑하는 트럼프는 ‘당선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해 왔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1027/130304081/2) “The economy is everything!” 세계의 정치판을 움직이는 거대한 원동력에 돈이 있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우리의 인생관,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에도 이것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서방선진국에서도 비혼과 출산율 저하 추세는 뚜렸한 추세이고 범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돈 때문에 자기 혼자 살기도 버거운데, 무슨 결혼을 하며 언제 집을 장만하며 애까지 낳고 키우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오늘날 우리나라만의 골치거리는 아니다. 가정, 육아, 부모와 자식간의 정, 가족애… 이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은 시리고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인류역사상 가장 세속화된 사회에서 태어나 인본주의적 가치와 합리적 사고의 틀 위에서 자라났다. 지금이야말로 세속화와 물질주의로 가득찬 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독교 고유의 신앙적 전통과 윤리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속화된 사회를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체득해야 할 때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보다, 사회의 세속화트랜드에 교회가 변질되어가고 있다(한국교회트렌드 2025, p287).” “돈이면 다 된다.”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는 세속화 현상은 엄연한 현실이자 교회의 위기이며, 또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과 크리스천공동체가 부대끼며 살아내야 할 필연적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3:1) 트럼프가 집권하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다소 누그러질 것이라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될 것라고… 오히려 반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아주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 썩는 양식 즉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에 현혹되어, 영생의 양식 즉 예수의 가르침 – 사랑, 화평, 긍휼, 관용, 경건, 인내, 정직 - 을 희생하면서까지(요 6:27) 이러한 위험을 잠시나마 회피하는 것이 바른 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세상 권세자나 통치자들에 의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좀더 얻고 어떤 위험은 잠시 피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임박해오는 말세의 때는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전쟁이 발발하든 아니든, 이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그분의 뜻에 대적하는 자의 길에 서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차가운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를, 성경적 크리스천의 가치관/세계관/인생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더 힘들어지고 있다. 고리타분한 관념적인 성경적 가르침이 “밥을 먹여주냐?” “돈이 나오냐?”며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세상적인 가치, 세속주의, 물질주의를 벗어난 영적인 가치를 드러내고 실천할 때에만이 교회는 교회다워지며,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다. 모욕과 침뱉음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세상사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아도, 삶에서 우선순위가 확고하게 세워져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개신교의 신앙적 전통 아래에서 우리가 처한 사회적 맥락을 돌아보고 사회적 사명과 요구를 감당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1108242024-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