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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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염려하지말고오늘 저녁예배를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집에 꼭 들려달라고 전화하셨던 집사님 생각이 났다. 댁에 갔더니만, “호박죽을 끓였는데 ‘목사님’ 생각이 나서 조금 챙겼다”고 하시며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호박죽을 내어 오신다. 그러시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으니 잘 될 것이라”고 격려하신다. (실은 1년전 ‘강아지 학대’ 사건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다.) ‘이번주 토요일 점심까지 밖에서 식사 일정으로 꽉 찼는데…’ ‘언제 이걸 먹나?’ ‘토요일 저녁까지 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보관하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집에 오는데,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몰려든다. 1년반 전에 낯선 창원땅에 왔을 때, 끼니 제때 챙겨먹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만남들을 허락하셨고, 복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끼니는 저절로 해결되게 하셨다. 발달지체아동센터, 메밀국수집, 전주콩나물국밥집, 구포국수집, 사림동기사식당, 가정식백반집… 집처럼, 누님처럼, 여동생처럼… 나를 생각해주시고 끼니를 챙겨주시는 분들이 이리도 창원에 꽉 차게 해주셨다. 이미 떡과 물을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라(왕상 17:2-6). 역시 하나님 말씀이 지극히 맞다. 괜한 걱정했었다.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040125 *사진: 위에 얘기한 바로 그 호박죽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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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길 편의점 간판처럼비록 느끼지 못해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눈앞 큼직한 산처럼 떠억 버티고 있는 고난의 벽에 놀라 기도의 숨조차 멈춰버릴 때가 있다.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러,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을(눅 5:31-32) 보지 못했다면 ‘고난의 때’가 절호의 기회이다. 내가 병약하고 죄악으로 눌린 짐에 힘겨워 할 때… 비바람은 커녕 살랑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양어깨에 머금은 따사로운 햇살이 밀어주고 청명한 하늘이 환하게 인도해주는 산행길에선 ‘피난대피소’가 눈에 띄질 않는다. 정오에서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어두워지고 소낙비는 세찬 바람과 합세하며 맹공을 퍼붓고 경악으로 가득 찬 등산길에서 ‘대피소’ 세 글자가 골목 밤길을 환하게 비추는 편의점 간판처럼 눈에 확 들어온다. 고난의 어둔 터널에 갇혀 있을 때, 우린 자주 자신의 실수, 한계, 실망, 좌절을 목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르고 연약함을 묵상하며 한숨을 내쉰다. 설상가상 상황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기울어져만 가고… 한숨은, 자신 안에 꼬인 창자를 토해낼 정도로 깊은 탄식이 되어 뿜어져 나온다. ‘이게 인생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버텨야지!’ 내면의 구호와 함께 ‘믿음’이란 두 글자를 수도 없이 되뇌며 두 손 땅에 짚고 힘없던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일어난다. .. .. ‘이게 아닌데…’ 박제된 화석처럼 내가 토로했던 믿음의 구호로는 실제로 힘이 생기질 않는다. 생기가 여전히 없다. 자신안에 습관화된 내면의 구호로 버틸 일이 아니다. 인내로 혀를 깨물고 일어나 상황을 꾸역꾸역 버틸 일이 아니다. 부르짖을 일이다. 한 장 크리넥스 티슈처럼 연약한 자신의 바닥을 알았으니, 자신의 온 몸과 혼과 영을 그분께 맡길 일이다.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고, 부르짖는 자에게 더욱 큰 일을 보이시고 도우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할 일이다. “강헌아! 하나님의 은혜를 너 같이 얻은 아들이 누구냐?”(신 33:29) 이 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 믿음으로 부르짖으라고 내게 세찬 바람과 퍼붓는 소나기와 어둠의 불확실을 허락하셨다. 그분께서 내게 허락하신 고난이 - 우리 동네 사림동 골목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연두색 네온 ‘CU’간판 처럼 – 나를 ‘돕는 방패’시요, 나를 위해 일하시는 ‘영광의 칼’을 환하게 비춘다. 033025 *사진: 우리 동네 밤길을 환히 비취는 씨유편의점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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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점이다 선이 아니다가슴이 벅차오르는 지금의 뜨거운 믿음이 십년후의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뜨겁게 헌신한 지금의 봉사와 희생이 앞으로 5년후, 30년후의 믿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구원의 전제조건은 바로 믿음이다. 내게 임한 구원이 영원한 구원으로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우선 내 믿음이 온전해야 한다. 내가 얻은 구원, 확고하게 확실하게 내 것이 되려면 믿음이 확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생명체처럼 변한다. 자라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고 식어 없어지기도 한다. 그날 그때 하나님께서 보실 믿음은 한 순간, 한 정점의 신앙 상태를 일컫는다. 한 시대, 한 인생, 긴 기간의 상태가 아니다. 한 순간, 한 '정점(定點)’이지, 기나긴 기간, 세월을 의미하는 ‘선’이 아니다. 물론 그 동안 봉사하고 헌신했던 것 상급으로 보상받는다. 하지만 우선 심판을 통과해야지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일단 학교에 합격해서 입학해야지 공부 잘해서 우등상 받고, 조퇴/결석 않해서 개근상도 받고 할 것 아닌가? 따라서 오늘 바로 이 순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I affirm, I am not a Christian now. […] For a Christian is one who has the fruits of the Spirit of Christ, which are love, peace, joy. But these I have not. […] And I feel this moment I do not love God; which therefore I know, because I feel it. There is no word more proper, more clear, or more strong.”(1) 존 웨슬리가 1739년 1월 4일 일기에 기록했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신랄한 고백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만큼 순간순간 자신의 신앙 상태에 민감하며, 거룩한 신자로서 믿음 지키기에 영적 발버둥을 쳤으며, 이를 위해 매 순간 깨어있어 자신의 영적 상태에 엄격했다. 12제자 중 가장 지척에서 예수를 섬겼던 제자는 베드로로 알려져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의 기사와 이적을 가까이서 많이 목격했으며, 자신 스스로도 물위를 걷는 이적을 경험했으며(마 14:27-31),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귀담아 마음에 새긴 제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실” 예언을 듣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항변하며(마 16:21-22) 예수를 향한 뜨거운 믿음에서 나온 결기(決起)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앞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예수를 세번이나 연거푸 부인했다. 나의 석사 공부를 위해, 우리 가족은 미시간에 2년여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때 큰아들은 서너살 때였다. 미시간의 여름은 꽤 덥고 햇살은 매우 뜨거웠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들을 데리고 야외풀장에 자주 갔다. 그런데 수심 150cm가 넘는 풀안으로 내 아들, 그 조그만 꼬마가 겁도 없이 당찬 점프와 함께 뛰어드는 것이다. 왜? 그 풀안에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팔 벌리고 있는 아빠가 보듬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3년 동안 매일매일 한 지붕밑에서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고 했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관계가 믿음을 만든다. 관계의 단절은 믿음의 생명력을 앗아 버린다. 신자로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이 관계의 단절이다.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과거 아니 바로 어제까지 힘쓰고 애쓰며 눈물 흘리며 봉사/헌신하고 인내했던 그 위대한 과거 믿음이 이 참혹함을 덮어주지 못한다. 다섯 처녀가 아무리 신랑을 사랑하며, 그가 오실 날을 소망하며 정결하게 20년 평생을 준비해왔더라도, 신랑이 생각보다 더디게 온다 생각하여 신랑과 관계된 신부의 신분을 점차 잊어버리고 신랑맞을 등불 밝히기를 띄엄띄엄 까먹다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준비 안된 신부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 25:1-12). 다시 강조하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보실 믿음은 한 순간, 한 정점의 신앙 상태를 일컫는다. 한 시대, 한 인생, 긴 기간의 상태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보실 그 시점에서의 믿음 상태이다(눅 12:40-48). 영적으로 해이해져서 하나님과 단절의 상태가 있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 구절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어로 ‘κατεργάζομαι(카테르가조마이)’로써, ‘이루다’ 또는 ‘완수하다’는 의미로써, 성도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을 일생의 삶을 통해 살아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한다. ‘두렵고(φόβος; 포보스)’의 의미는 무섭고 공포에 질린 상태라기 보다, 존경하는 상대를 향한 경외심을 의미한다. 떨림(τρόμος; 트로모스)은 무서워 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분에 대한 진지한 자각으로 인한 영적 긴장 상태를 일컫는다. 032325 참조 (1): John Wesley, The Works of John Wesley: Journal and Diaries II (1738-1743), ed. by W. Ward and R. Heitzenrater, Vol. 19 (Nashville: Abingdon, 1990), pp. 29-30. *사진 설명: 수영장에 겁없이 풍덩풍덩 뛰어들던 시절의 큰아들, 우재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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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과 권력의 역학“OO을 보낸다”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보내는 자는 무언가를 가진 자이다. 보내는 그것이 값나가는 선물이라면 그것을 살 수 있는 경제력, 사람이라면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권위,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열이면 열 모두가 다, 보냄받는 자의 처지보다 보내는 자의 자리에 앉고자 한다. 글로벌 광고회사 DMB&B에서 근무하던 시절. 내가 맡은 팀에는 뉴욕본사에서 파견나온 Mattew라는 주재원이 있었는데, 나는 팀장으로서 그와 파트너 또는 동료격이었다. 어느날 그가 클라이언트인 한국P&G 이사와 통화하던 중, 이런 말이 내게 들려왔다. “I will send him to you.” 업무협의 하도록 나를 그 이사에게로 보낸다는 말이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그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Watch your words! You are not my boss.” 이와 같이 “보내다”의 단어에는 권력의 역학이 내재해있다. 사무엘하 11, 12에 의하면 왕국의 왕 다윗의 ‘보내고’ ‘보내서’ ‘보내게’하는 동사 표현이 무수하게 반복되어있다. 밧세바, 우리아, 요압과의 역학관계에서 보내는 자로서 최고권력자의 권력을 만끽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기간 그는 겸손을 놓치고 죄악의 심연에 빠져든다. 결국 참 권력자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을 통해 비로소 다윗의 탈선은 중단된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만왕의 왕, 지존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냄을 받고 이 땅에서 온갖 수모, 모욕, 침뱉음과 고난을 당하신 후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은 바로 ‘보냄받은 자”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시고, 자신도 연약한 육신인지라 십자가 형극을 피하고 싶었지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구하시며 ‘보냄받은 자’의 사명을 결국 이루어내셨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명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누구를 보내는 것에 맛들이면 겸손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보내는 자의 입장을 지향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모된다. 권력, 금력, 명예, 높은 지위에 따라오는 고급주택, 고급차, 고급옷… 눈에 보이는 것에 내 마음이 밟히게 되면 영성을 잃게 된다. 영적 감수성이 무디어진다. 좌우에 날이 선 검처럼 영적 감각을 예리하게 유지하려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늘 의식해야 한다. 그가 ‘보내신 자’의 신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전도 또한 무엇보다도 이 경각심이 우선되어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운차게 할 수 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보내심을 받은 자’의 신분을 깨달음이 주님과 뜻을 이루며 동행하는 자의 특권이다. 이것으로 내 안이 채워지지 않으면 ‘보내는 자’의 자리를 흠모하는 세상의 영성이 순식간에 빈 자리를 가득 차지한다. 031425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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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익으로 엮인 관계손실과 이익의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 이를 영어로 Transactional Relationship(거래적 관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생를 살다보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손익으로 엮인 관계는 바로 갈라선다. 뒤도 안돌아본다. 여유가 바닥난 상황에서 관계의 순수성이 드러난다.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있는 관계선상에 있는 지인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고약한 인생 파도의 높고낮은 싸이클을 겪으면서, 오랜 시간 묵은 관계가 극히 드물다면 자신이 이웃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방식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그저 좋고 싫음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순수하다. 관계가 세월과 함께 묵어갈수록 상대방의 험악한 상황도 내 것이 된다. 피하고 싶은 정황이 아니라 같이 껴안고 기도하고픈 주제가 된다. 그가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나는 과연 그를 안아줄 수 있을까?"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말이다. When forming human relationships based on “gains and losses”, as referred as a "transactional relationship", its true nature is easily revealed in a time of hardship. As we go through life, things don’t always go as planned or desired. Whe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relationships built on “gains and losses” quickly fall apart—they end without a second thought. How many acquaintances do you have to whom you can make a "difficult request" when you're in a tough and painful time? If you have very few or no relationships that have been aged for very long years throughout your life tides of highs and lows, you need to have a time to seriously reflect on your attitude and approach toward others. Building relationships purely based on likes and dislikes is genuine. As relationships deepen over time, the hardships of the other person also become your broken heart. His struggles are not something to avoid but rather agonies you embrace together in prayer. When he hits rock bottom, can I truly embrace him simply because I like him? 03132520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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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지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오늘은 뼈속 사무치게 ‘어머니’가 생각나는 날이다. 세상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내 말에 의구심을 품어도, 어머니만은 내편이셨다. 내가 실수해도, 어디서 문제를 일으키고 집에 들어와도… 자식 때문에 상대방의 퍼붓는 강공에 수많은 수모의 말을 이미 들으셨어도… 항상 “강헌이가 그런 건 이유가 있겠지”하셨다. 꾸지람이나 추궁보다, 기가 푹 죽어 집에 들어온 어린 나를 다독거려주셨다. “나는 널 믿는다.”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밟고 누르는 것 같은 중압감 속에 질식하던 나를 이렇게 격려하고 믿어주셨다. 어머니의 나를 향한 믿음은, 고난 속에 내 머리에 씌워진 무겁디 무거운 철모를 환하게 벗겨주신 구원의 손길이었다. 고등시절 학기말 시험 때, 내 뒤에 앉은 친구에게 답을 가르쳐주다 감독 선생님께 걸려 근신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풀이 죽어 귀가할 때는, 이미 어머니께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자초지종 설명을 다 듣고 나신 이후였다. 어머니께서 상심하신 것은 내가 부정행위 한 것보다, 담임선생님의 나에 대한 표현에 대해서 였다. “강헌이가 모범생인줄 알았는데, 부정행위나 저지르고 이중인격자인줄 몰랐다”고. 그 다음날 지적(知的)으로 차분하게 말씀 잘 하시는 어머니 친구 한 분을 대동하여, 그 분 집을 찾아 가셨다고 한다. 그러셨던 어머니께서 대장암으로 투병하시고 돌아가신지 이제 7년이 된다. 영국에서 사업한다고 신학한다고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다가, 신학교 여름방학 중에 2개월간 간병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지 몇주만에 돌아가셨다. 가까이서 뵙지 못한 자식이 가장 큰 불효임을 깨닫고, 평생 죄송함으로 살고 있다. 어머니는, 수년간의 긴 투병생활에서도 멀리 있는 막내아들 나에게 많이 의지하셨다. 회복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연로하신 분께서 얼마나 서럽고 서운하신게 많으셨는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전화를 드렸는데 한 번 통화하면 평균 2시간 이상 걸린다. 한 말씀 또 하시고 또 반복하시고. 어쩌다 내가 무심코 지나친 일에 대해 하나 하나 세심히 지적하시면서 그 서운함을 가지신 어휘력을 총동원하여 질책하신다 - 2시간 동안. 듣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전화기를 슬며시 내려놓고 싶지만, 그 섭섭하신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꾹 경청하면서 중간중간 ‘추임새’ 반응을 해야지 당신께서 서운해하지 않으신다. 교회개척하러 창원에 내려오기전, 어머니의 아래되시는 외삼촌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같이 식사하시면서 어머니를 회고하셨다.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니와 외삼촌 두 분, 이모 이렇게 네 분이서 식사 모임을 하시면, 자주 이러셨다고 한다. “강헌이 영국서 오면, 다 일러줄거야.” 듣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는 일에, 참 예민하셔서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을 그렇게 토로하셨다고 한다. 그 말씀을 전해듣고 내 숙소로 돌아가 참으로 서럽게 눈물 콧물 쏟으며 울었다. 더 전화할걸… 더 들어드릴걸… 그런 엄마가 이젠 없다. 지금 내 편이 절실한 이 때 없다. 지구인 99%가 내게 침을 뱉어도, 나를 끝까지 믿어주시던 그분이 없다. … … 어제 주일 예배 때, “네 부모를 공경하라”시는 설교말씀을 듣고 생각이 나서 적어봤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2-3) 051324 *작년 5월 기록한 글입니다.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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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밧세바를 간음한 다윗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의 선봉에 서게하여 죽게 만들고 그녀를 아내로 차지한다. 이에 선지자 나단은 -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가, 전재산이라곤 양 한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자에게서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다 – 는 우화를 다윗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 제3자의 실수/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분개한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반응을 한다. 그는 나단의 우화를 다른 사람에 대한 경책의 설교로, 다른 사람이 겪은 곤경과 그에게 해를 입힌 또 다른 나쁜 사람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로 듣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반응한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 12:5)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저만 떳떳하고 의롭다고 치부하는 도덕적 율법주의자, 남을 향한 책망과 비난을 쉽게 쏟아붇는 종교주의자가 되기는 쉽다. 자칫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팽팽한 영적 긴장과 함께 절제하지 않으면, 잡초처럼 쉽게 드러나는 육의 속성이다. 다윗처럼, 딸과 같은 양을 단 하나 소유한 가난한 자에게서 그 양을 빼앗은 부자에 대해서는 쉽게 분개하고, 빼앗긴 자에게는 하염없는 동정심을 베푼다. 이와 같은 동정심과 분개함은 우리에게 고상한 도덕적 우월감을 불러 일으킬지는 모르지만 영적 성숙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늘 당장 은혜받은 말씀. 이 말씀 남편이 들어야 하는데… 신앙심이 떨어진 내 아들이 꼭 들어야 할 말씀인데… 이러한 아쉬움 가지고는 자신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받은 말씀 가지고서 이웃의 허물을 보고 죄의 치수를 재고 도덕적 안경을 쓰고 더욱 더 종교적이 되어갈 뿐이다. 참으로 이웃이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자신이 가장 강력한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된다. 진정한 은혜는 내게 주신 말씀을 나를 향한 일인칭 말씀으로 들을 때 임한다. 저들이… 그가… 당신이… 아니라 "그 파렴치한 부자가 바로 당신이다(삼하 12:7)"라는 질책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바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했을 때, 내 안에서 새 역사가 시작되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제약없이 일을 하신다. 나 어렸을 때, 참으로 아름다운 사회적 캠페인이 생각난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 니 탓… 따지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들며, 상대를 비난하는 데에 노력을 경주하면 할수록 더 큰 비방이 돌아올 것이요, 오히려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 빨리 깨닫고 뉘우칠수록, 더 빨리 고치고, 회복할 수 없는 상채기가 곪기 전에 적으로부터 동의도 좀 더 수월하게 얻을 수 있다. 022725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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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둘째 아들: 영국 프리미어리그와 기독교영국 풋볼리그(English Football League; EFL, 1888)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범국가적 축구클럽리그이다. 스페인의 La Liga(1929), 이태리의 Serie A(1898, but became a national league in 1929), 프랑스의 Ligue 1(1932), 독일의 Bundesliga(1963)등 유럽 유수(有數)의 리그에 비하여 과연 혁명적으로 일찍 시작했다. 1992년 8월, EFL의 최우수 디비전인 1부 리그가 독립, EPL(English Premier League)가 출범하여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인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매년 프리미어 20개 팀중 상위 3개팀은 리그로부터 약 3200억원(£170-180 mil)을 보상받는다. 하위리그로 강등당하는 꼴찌 3개팀이라도 받는 돈이 상당하다. 무려 1500억원(£65-85 mil)을 보상받는다. (2023-24 시즌의 경우)영국에서 ‘축구’는 극히 중요한 생활과 문화의 일부이다. 특히 영국에 조기유학을 준비중인 자녀(특히 아들)를 둔 부모님은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주요팀, 주요선수들, 그리고 이들의 최근 성적에 대해 최소한 숙지하고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그래야지 낯선 나라, 낯선 학교, 낯선 아이들과 학교생활에 적응이 순탄해진다. 아이들 대화의 대부분이 축구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my favorite team과 my favorite player, 그리고 왜 이들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필수적으로 꿰차고 있어야 한다. 이것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일단 왕따로 가는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자기소개의 말미에 “my favorite team is…”으로 자신에 대한 소개를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 매너이다. 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통한다. 직장에서, 사업상 비즈니스 관계에서 통성명할 때, 이런 대화는 Ice-breaking하는데 윤활유 역할을 한다.영국에는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축구 클럽이 조직되어 있고 이들은 크고 작은 지역 리그에 소속되어 시즌 내내 경기를 펼친다. 꼬마들은 4살때부터 ‘Tots Football’이라는 지역마다 개설된 프로그램에서 축구라는 운동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며, 6살부터는 동네 클럽에 가입하여 마을을 대표하여 뛸 수 있다. 참고로, 아래는 우리 둘째 아들이 유소년때 뛰었던 Claygate Royals팀의 웹사이트이다. https://www.claygateroyals.club/teams이들이 9살이 되면, 유명 프로축구팀에서 꽤 유망해보이는 어린이를 발굴하여 Club Academy System에 참가시켜, 체계적인 훈련을 받도록 한다. 각 프로팀은, 여기에서 16세에 이르기전에 우수선수들을 선발(U18 team), 장학금을 지급하며 미래의 프로축구선수로서 본격적인 투자를 한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 축구는, 팬으로서, 아마추어선수로서(마을/학교/지역/국가를 대표하는), 프로선수로서, 뒷바라지하는 부모, 응원하는 할아버지/할머니로서 거의 전국민이 깊게 관여되어있다. 이들 문화의 중심에 축구가 있고, 자신 가족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있는 매주말 게임(그것이 프리미어리그 프로경기든, 아마추어경기든)에 사로잡혀 뜨거운 관심을 갖는다.문제는 이 범국가적 스포츠경기가 주말(대부분 일요일) 에 열린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봇물처럼 밀려드는 세속주의, 물질주의로 위축된 영국의 기독교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일을 축구장으로, TV앞으로 빼앗음으로써 – 큰 카운터 펀치를 가격한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나이 지긋하신 목사님과 크리스천들은, 1992년 8월 프리미어리그 탄생이후 기독교인들의 삶과 이전의 삶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탄식을 내쉬며 안타까와 한다.2006년 5월 영국으로 주재생활을 시작한 우리 가족에게도 이 여파는 얼얼할 정도로 쌩쌩하고 강렬했다. 둘째 아들의 경우엔 유달리 심했다. 축구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축구를 통해 낯선 이방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을 향한 동네 학부모들의 응원의 함성에 매료되었던 5살짜리 꼬마에게, 축구 시합이 있는 일요일 아침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장엄하고 존귀한 시간이었다. 아들의 축구를 향한 열의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부부는 예배시간과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시합이 끝나자마자 악수하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차에 태워 옷을 갈아입히고(유니폼과 축구화에서 떨어진 진흙 덕분에 내 차안은 온통 진흙밭이 되어버린다), 차안에서 간식/음료를 먹이면서, 쏜살 같은 속도로 예배에 가까스로 참석하는 것이 매주 일상이 되어갔다. 당연히 예배의 질이 떨어졌다.주일 축구를 강력히 반대를 했지만 우리 가족 4명중 나만 왕따가 되는 괴로움만 받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둘째에게 둘만의 면담을 제안했다. 많은 시간을 얘기했다. 대부분 내가 말을 했고, 선재는 들었다. 우리의 믿음이 뭔지, 예배가 왜 중요한지, 주일날을 어떻게 간수하고 보내야 하는지를… 곰곰히 들은 그는 나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날 선재의 결정이 지금까지도 고맙다.이후 선재의 생활을 지켜보는 아빠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토록 날쌘돌이 활발했던 그에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종달새처럼 명랑했던 그의 말수가 극도로 줄어들었다. “Sunny(선재 영어애칭), get the goal!” 전율할 정도로 자신을 응원했던 고함소리를 더 이상 못 듣게 됐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그때뿐… 불평하지 않고 비뚤게 나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준 그가 고맙다.몇주전 내가 사랑하는 전도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교차 영국에 갔는데, 어느 선교프로그램 세미나에서 의젓한 크리스천으로 자란 선재를 만났다고… “좋은 말 좀 많이 해주라!”는 나의 부탁에 더 이상 좋은 말을 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자랐다고… 5년이상 미국 남부, 멕시코 오지에서 목숨을 담보하며 선교활동을 했던 – 내가 존경하는 – 사역자의 말이라 더욱 뿌듯했다.022625* 축구훈련에 몰입중인 다섯살 선재20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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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바람직한 태도는 “왜?”라는 진지한 의문을 갖고 읽는 것이다. 성경말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올바르게 깨닫고 믿음으로 수용했을 때, 그 말씀이 자신의 믿음의 집을 건축해나가는데 온전한 주춧돌이 된다. 신앙의 영역이니 “무조건 믿어라!”는 주장에 건강한 사유없이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순종은 자신의 영혼에 독이 될 수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왜냐하면”, 다스리는 자들은(οἱ γὰρ ἄρχοντες)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롬 13:3)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θεοῦ γὰρ διάκονός ἐστιν)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롬 13:4) 여기 헬라어 성경원본에서 주목할 단어는 ‘왜냐하면(γὰρ; 가르)’ 접속사이다. 왜 하나님께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을 하라”고 명하셨는지, γὰρ 접속사 다음에 상세히 나와있다. 안타깝게도 한글 번역본에는 이 접속사를 해석하는 표현이 살려있지 않다. '왜냐하면'이란 표현이 없다. 과연, 이 성경구절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니,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앞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결론낼 수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그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은 자들을 통해 공정한 사회를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읽혀지는가? 선을 베푸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롬 13:4), 권세를 허락받은 그가 마땅이 해야할 바를 하기는 커녕, 하늘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 스스로가 악을 행하며 사익추구에 권력의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며 백성들을 근심케 한다면, 그는 이미 “각 사람이 복종해야될” 다스리는 자의 합당한 자리에서 벗어난 자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떨어진 자이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신중하게 사유하지 않고, 적지않은 교회지도자들이 로마서 13장 1절 구절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1) 대상이 되는 성경 구절의 앞뒤 의미있는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그 구절만 가지고 결론을 맺는 설교 2)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뜻/의도를 도외시하거나, 성경원본 original text가 기록되었을 당시의 사회/경제/정치/생활/언어적 맥락의 진지한 이해를 건너뛴 성경해석은… 독이 될 수 있다. 괴이한 신앙집단을 낳을 수 있다. 사회에 큰 아픔을 초래할 수 있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오늘 한국사회에서 두 눈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 대한 이러한 '문자해석주의'는, 오늘 한국사회를 아프게 만들고 있는 현상과 연결되어있다. ‘사유의 게으름’이란 치명적인 질병으로 서로 얽혀있다. "그 딴 것 모르겠고.." 하며 거짓/억지/왜곡 주장을 맹신하고 실어나르며, 진리를 탐구하는 순전한 노력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정보를 취사/편향 섭취하는 - '축소주의 reductionism'*,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 몹쓸 병과 일맥상통, 병명만 다를 뿐이지 동종의 질병이다. 022325 *Reductionism: The tendency to simplify biblical teachings or theological concepts, sometimes overlooking their full depth and context. **본 주제에 대한 좀 더 깊은 생각을 읽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sosalty.or.kr/inquiry/?mod=document&uid=123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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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는 모든게 낯설다내 인생 후반기 30년 동안 많이 옮겨 다녔다. 서울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다가… 미시간 이스트랜싱.. 다시 서울.. 영국 런던.. 경남 창원.. 광야 같은 낯선 곳에서 살기 위해, 낯선 환경에서 살아 남기위해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낯선 광야에서는 모든 신경세포와 감각의 모든 돌기를 바짝 세우고 있어야지만 적응한다. 그 황량하고 추웠던 광야 생활의 초입, 1997년 7월 앤아버의 미시간호수에서 침례를 받고 나의 신앙생활은 시작됐다. 그리고 거주지를 옮긴 만큼, 그에 따라 교회도 옮겼다. 적지않은 교회를 섬겼으나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른 자, 상대방에 비수 꽂는 말을 재주삼아 하는 자, 민감한 내용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자, 자기밖에 모르는 자, 옆에만 있으면 상대방의 자존감/자신감을 떨구게 하는 자, 거짓말과 과장을 습관적으로 하는 자…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 지극히 부적절하고, 미성숙하고, 연약함으로 시끄럽고 혼미스러운 인간 군상들을 예외없이 목격했다. 내 자신을 포함해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은 회의와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와 멀어진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흠집많은 인간 공동체에 한 줄기 영롱한 빛이 임한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하는 선행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 촛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신가에 맞춰져야 한다. 광야는 지리적으로 현존하는 곳이지만, 영적 은유이기도 하다. 광야는 척박하고, 춥고, 굶주리고, 고독하고, 나 홀로 버텨야만 하는 곳이다. 갈급과 갈망이 용솟음치는 곳이다. 모든 것이 결핍된 환경에서 새벽이슬 단 한 방울이 감사한 곳이다. 생존하기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곳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 한복판에서, 적국 가드의 왕 아기스 앞에선 다윗… “다윗이 그 유명한 용사”임을 보고받은 아기스왕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간파한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척하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다(삼상 21:10-15). 그런데 그 매몰찬 광야에 사람들이 모인다. 모두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망한 자, 빚쟁이, 억울하고 원통하고 세상이 미운… 죄다 사회의 밑바닥, 변두리 인생들이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게다가 다윗을 애숭이 취급하며(삼상 17:28), 자신들을 제끼고 왕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형제들마저 그에게로 왔다(삼상 22:1). 광야의 환란은 나뉘어진 형제들 마저도 하나 되게 한다. 광야의 고통은, 삼류 인생들 마저도 서로 신뢰와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한다. 그들이 과거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못나고, 함량미달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을 불러 모아서 예배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이들을 기반으로 훗날 큰 병력이 되게 하셔서(대상 12장), 다윗을 통해 왕국을 이루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중요할 뿐이다. 앞으로 또 어디 낯선 곳으로 인도하실지 모르겠다. 몸은 내키지않고 주저하지만… 나와 동행하시며 분주하게 일하실 그분을 신뢰한다. 020325 *사진: 광야 초엽, 미 유학시절 큰 아들과 함께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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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16세기 종교개혁(the Reformation) 18세기 영국의 영적부흥운동(English Evangelical Revival)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North American Great Awakening) 선진들이 신봉해왔던 신앙 생활을 객관적으로 믿음안에서 사유해보고 이것이 잘못 되었음을 인식한데서 비롯된 아름다운 영적 유산들이다. 생각없는 영적 각성은 없으며, 깨달음없는 영적 부흥은 없었다. 유대인 학살의 대표적 인물 중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체포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수송하는 일을 충직하게 수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 감금되는 사람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수용소는 곧 만원이 되어 운영이 어렵게되자… 그는, 수용소로 이동하는 기차에 가스실을 설치하여 유대인들을 이동중에 효율적으로(?) 학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나중 재판정에 선 그는, 국가의 명령에 순종했을뿐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였다. 이에대하여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thoughtlessness)이 희대의 끔찍한 범죄를 낳았다”고 말하며, 이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1)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악의 평범성'을 잘 설명해준다.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한 명의 공무원, 그가 정말로 다름 아닌 평범한 한 명의 공무원일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2) 즉, 타인의 처한 입장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 생각이 무능력 상태(inability to think)에 있을 때에 - 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에 대한 현실 자체를 생각해볼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상투적인 논리의 방어벽 뒤에 숨어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피상적이었고, 1차원적이었고, 단순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한 생각만으로 그치는 곳에서 '타인이 처한 현실을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이 잉태된다. 평범하고 단순한 생각에 막혀 생각의 무능력을 낳을 때 악이 생산된다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지금 한국사회가 많이 혼란스럽고 많이 아프다. 사실과 진실이 너무 많이 왜곡되고 있다. 객관성과 신뢰성을 상실한 유튜브를 통한 메시지를 사람들이 퍼나르면서 언론과 국가의 공신력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뻔한 거짓말로 세력을 모으는데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부채질하고 있다. 몇주전 초등학교 동창의 장녀 결혼식이 있어 서울에 갔다왔다. 초등때에 공부 잘한 친구들이 많아 서울대에 들어간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대학교수, 정부관료, 대기업 CEO등을 하고 있거나 역임한 친구들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섭섭해서 2차 모임에 다 함께 참석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목사인 내게 질문이 집중됐다. “태극기부대… 애국, 애국 하면서… 왜 기독교인들은 객관적으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부패한 보수를 마치 자기들만이 애국자인냥 그것도 과격하게 감싸고 도는 이유가 무엇이냐?” 질문의 핵심이었다. 나의 대답은 “기독교인들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면서 그중에서 일부 극우 보수세력이 그러는 것이다. 다만 종교적 교리, 신앙 강령에 대해 복종적인 순종을 훈련받아온 기성노년세대에 이러한 경향이 다소 높은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생각없는 맹목적인 순종은 교회에 병이 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길은 종교생활이었다. 그들이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정, 칭찬, 보상을 위해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하며 자신들이 순종/헌신/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한 업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찬사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영적 탁월함을 인정받았다는 확신, 자신이 가진 달란트, 교회를 향한 모범적 헌신, 도덕적 우월감 등은 본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주된 근원이 된다. 이러한 굴절된 자신감은, 자신만이 신앙의 표준이라는 영적 교만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생각은 매우 단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건강한 사유없이 그들의 삶과 행동은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맹목적인 무비판적 수용과 함께 구동된다. 건강한 자기 사유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생활 방식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그것을 뒤집어 엎고자 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12:34-35) 선한 사람의 말은 선하다. 선한 말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선한 깨달음이 없는데 어찌 그 마음이 선하겠으며,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선하겠는가? 하나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진지하고 건강한 사유 없는 종교인들에 대한 예수의 일성(一聲)이 이러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드러난다. 자기 생각, 자기 대답, 자기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순종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 같지만, 나쁜 명령에도 잘 순종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사유하는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생각이 마비된 순종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사회를 병들게하고 위태롭게까지 만든다. *생각의 무능은 악한 행동을 낳는다(Hannah Arendt). 012825 (1)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Viking Press, 1963) (2) "Er war der typische Funktionär. Und ein Funktionär, wenn er wirklich nichts anderes ist als ein Funktionär, ist wirklich ein sehr gefährlicher Herr.": Hannah Arendt in conversation with Joachim Fest, a radio broadcast from 1964202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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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못 볼 2024년과 헤어지며'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우리는, 10킬로가 넘는 창을 마치 지휘봉처럼 다루는 2미터가 넘는 거인 골리앗에 압도된다. 하지만 다윗은 압도되지 않았다. 곰과 사자의 포효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연습한 그에게는, 곰의 맹렬함보다 사자의 사나움보다 주님의 사랑이 훨씬 더 실제적으로 실감되었다. 그의 마음과 생각과 정신력에는 온통 - 곰, 사자, 골리앗을 압도하는 - 훨씬 더 크고 강력한 하나님께서 자리잡고 계셨다. 눈앞 골리앗에 질려서 맥 못추는 사울과 그의 군대처럼... 코앞에 펼쳐진 불확실에 대한 염려, 결핍에 대한 걱정, 곧 덮칠 것만 같은 산더미만한 인생의 파도 앞에 맥못추는... 영혼의 중병에 걸렸음을 자각한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회개로 2024년을 마무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신앙의 본래 위치로 돌아오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해를 맞이할 영적 태세를 가다듬는다. 123124 *사진: Holy Trinity Church Coventry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