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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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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변명이 일을 그르친다“섣부른 변명이 오히려 매를 부른다.” 내가 23년 직장생활을 통해 얻은 귀한 배움이다. 기대치 않은 성과가 나왔을 때, 어찌 그것이 전적으로 내탓이었겠는가? 누군가 다른이가 결정적으로 일을 태만히 했거나, 지원이 절실했던 옆부서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던가,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터인데, 나 혼자 비난의 덤터기를 뒤집어 쓰는 것이 못내 억울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이런 자리에서 입바른 변명을 한다. 그리고 열이면 열, 이러한 변명은 자신을 향한 비난의 독소를 더욱 자극한다. “모두 저의 불찰에서 비롯됐습니다.” “송구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보다 십수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상사가 왜 정황을 모르겠는가? 변명 안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번 일을 통해, 부하직원이 더 클 재목인줄을 보고 싶어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 말 한마디에 호랑이 상사의 포효하는 분노의 예봉은 무디어지고 부드러워진다. 불신의 눈초리가 신뢰의 시선으로 바뀐다. 자신을 치러 코앞에까지 쳐들어온 블레셋 군사들 앞에서, 제사를 드리기위해 장장 7일을 눈빠지게 기다렸던 사무엘제사장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급한 마음에 사울 자신이 번제를 드리고 만다(삼상 13:5-15). 이윽고 도착한 사무엘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며, 세 부류에게 탓을 돌린다. 1)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2) 사무엘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3)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삼상 13:11) “그래서 이렇게 당신 대신 번제를 올린 것입니다.” 그가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마음에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했더라면… 그의 왕위는 온전했을런지 모른다. 섣부른 변명이 더 큰 매를 부른 것이다. 신약에서도 섣부른 변명으로 신세 망친 대표적인 경우가 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25) 그는 주인을 심하게 오해했다. 심지도 안고 씨뿌리지도 않았는데도 거기서 수확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이 굳은(σκληρός; 스클레로스; 기대수준이 높은, 비위 맞추기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주인이 실제로 그러하더라도, 하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아주 기분 상할 표현이다. 하지만 그 이전 다섯, 두 달란트 받았던 자들에게 취했던 주인의 행동을 살펴보면, 이 자가 말한 “굳은 사람”표현은 매우 왜곡/과장 되었다. 게다가 그가 한 변명은 앞뒤 두서가 전혀 맞지 않는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기를 바랄 정도로 기대 수준이 터무니 없이 높은 주인이라면, 주인에게 혼나지 않기위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이든지를 해서 그 돈을 불리는 것이 경우가 맞지 않는가? 그런데 그는 그것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변명하는 자의 전형적인 증후이다. 앞뒤 논리가 맞지 않아도… 섣부른 변명이라도 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상대방의 입장, 동료들이 하는 상식적인 태도… 이런 것들엔 아랑곳 하지도 않는다. 성경 본문은 외형적으로, 받은 한 달란트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않은 하인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게한 결정적인 이유는, 주인을 주인 앞에서 “굳은 사람’이라고 폄하했던 표현과, 그를 노력하지도 않고 이익 얻기를 바라는 하등한 인간 취급을 한 하인의 방정맞은 “변명”에 기인했음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뿐 아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5).” 이미 진노한 주인의 약을 바싹 올린다. 여기 당신이 준 한 달란트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제가 받은 한 달란트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여 당신에게 도로 돌려드렸는데, 왜 화를 내십니까? 이 하인은 여태까지 주인과 나눈 대화에서 느낀 바도 깨달은 바도 없다. 듣지를 않는다. 목이 곧은 자이다. 자신의 고집대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염소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 보신(保身)만 챙기는 마음밭이 단단한 자이다. 내 아들이… 내 아들 또래가 사회 중추가 될 가까운 미래엔…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는 상대방과 이웃을 배려하는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훈훈한 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011425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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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대한 생각Christmas는, 로마카톨릭과 라틴어에 영향받은 Old English "Cristes Maesse"에서 나왔다. 11세기경에 시작된 이 표현은 “Cristes(Christ's)”, “Maesse(missa; 미사)”로써,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미사’이다. ‘미사’를 우리는 예배로 알고 있는데, 원래 의미는 “send out(파송하다)”의 뜻이다. “이제 예배가 끝났으니, 각자 교회를 벗어나 세상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거룩한 책무를 일컫는다.(1) 따라서 Christmas의 본래 의미는 ‘예수님의 당부하신 사명’이란 뜻이라 할 수 있다. 결단코, 크리스마스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볍고 들뜨고 즐거이 만끽하는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엄숙하고, 신자로서 사명과 헌신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마태복음 2:1-12를 읽으면, 탄생하신 아기예수께 경배하러 먼 여정을 나선 동방의 현인들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이라크)지역에서 출발하여 800-1000km의 여정을 느려터진 낙타를 타고 약 3개월간을 소요하며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 낮엔 작열하는 태양으로 몸이 뜨겁게 타오르고… 밤엔 극심한 추위로 오돌오돌 떨면서… 끝도 없는 사막길을 지겹도록 가야한다. 생명줄인 낙타도 극진히 보살펴야 된다.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재우고 쉬게 하고… 무리하다 낙타가 만에 하나라도 죽으면 여정은 더욱 느려지고 고생은 배가된다. 게다가 호시탐탐 방심을 노리는 허기진 들짐승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한 구절 읽고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갈 여정이 절대 아니다. 그들에겐 메시아에게 경배하고자, 목숨을 건 뜨거운 헌신이 있었다. 신앙은 드리는 것이다. 경배가 핵심이다. 경배는, 예배드리는 대상에 대한 뚜렸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간절한 사모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받으러 가는 자리보다, 드리러 가는 자리이다. 이것이 묵과되면 예배드리는 자가 중요해진다. 내가 중요해진다. 자신의 마음, 감정, 느낌이 중요해진다. 위로 받기 위해… 문제해결 받기 위해… 안식을 누리기 위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이러한 기대를 못채우면 예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가 불편하면 기대했던 예배가 아니라고… 예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예배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 기분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받으려는 자의 자세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헌신이다. 경배가 무너지면 신앙이 무너진다. 신앙이 쓰러지면 마음도 정신도 몸도 쓰러진다. 날이 갈수록 점점 예배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예배는 한 시간 넘기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설교 절대 30분 넘기지말라고 가르친다. 청중들이 지루해한다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예배를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보다 “오늘 예배에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가 먼저 나온다. 바쁜 일상 중에 마지 못해 나와주신 성도가 감사한 시대. 마지 못해서 예배드리는 시대. 하지만, 동방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전심으로 헌신하고 하나님 임재에 순전한 기쁨이 있었다.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9-10)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는 “그리스도의 미사”. 즉,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거룩한 헌신”이다. 122624 (1)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332) (2) Craig S. Keener, ‘Origins of the Magi and the challenges of their journey’,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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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it good to be rich?홍수때에는 정작 마실 물이 귀하다. 북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여로보암 2세 시절, 그들은 약자를 착취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8:4)”하시며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암 8:2)”선포와 함께 진노하신다. 그 보응의 핵심은 바로 그들에게서 말씀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교회 리플렛, 전도책자, 성경교재, 큐티책, 유튜브, SNS… 도처에 말씀이 널려 있다. 말씀이 홍수인 시대이다. 이렇게 말씀이 양적으로 풍성하고 물질로 번영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를 뚜렷이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자기 사랑, 돈 사랑으로 꽉 차있는 무정함으로 약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므로,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8:4)”하시는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보다 평안/사랑/은혜/위로/힐링/자아실현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말씀은 풍성하지만, 정작 말씀이 없는 시대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202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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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봄날에며칠간 기억의 영역을 어머니로 꽉 채운 아들에게 서운하셨는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라"고 그때 하신 말씀 또 하신다. 121124 --------- 3년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난히 생각나는 봄날이다. "너희 회사에서 ... 발표했더라." "네가 모시는 상사, 신문에 났더라." "상사하고 잘 지내라." "넓고 길게 봐라." "어머니께 안부 전화 자주하고..." 늘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으로, 자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신 분. 아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 나를, 절대 급하지 않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 분... 오늘은 그분을 다시 모시고 싶은 영국의 화창한 봄날이다. 슬프도록 눈부신... 042113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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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행 비행기안에서오랜만에 런던 가는 비행내내, 엄마 생각이 났다. 11년전, 영국 사는 아들 보러 먼 하늘길을 오셨을 때... 내가 오늘 탄 것과 똑같은 비행기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난 지금 이런 저런 생각으로 꽉 차 있는데... 120924 ----------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아들집에 오셨다. 집이 좁아 안방으로 모시려하니 거실이 낫다고 하신다. 거실이 좋아졌다. 평소 잘 가지 않는 곳에서 평소 잘 하지 않는 낮잠을 어제 늘어지게 잤다. 어머니 품이 좋다. Pictured @ Heron tower, City of London 123113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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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경제… 그리고 돈트럼프가 미국 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번처럼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이 낙선이후 재임에 성공한 경우가 미국 역사상 딱 두 번 있었다. 첫 케이스는 22, 24대 대통령을 역임한 Grover Cleveland이다. 마음이 무겁다. 경제논리를 앞세우고 돈이라면 사회정의, 윤리, 도덕, 인권, 환경 문제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트럼프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사회/정치/경제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하다. 더욱이 자신의 무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짓말과 막말을 서슴지않는 그의 천박한 언쟁방식과 처세술이, 자라나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사회를 굴절되고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세파를 살아가도록 영향을 미칠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아프다. 선거결과에 불복하며 다섯명의 사망자와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미 국회의사당 폭동을 부추긴 그에게 ‘정의’는 공허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서 주어왔는지 허무맹랑한 가짜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경’문제는 돈낭비라며 치부한다. 수많은 여성들과 성추문을 일으키며 돈과 위력으로 입막음하려 했던 그에게 윤리/도덕은 먼 행성에나 존재하는 개념이다. 점잖은 방송인으로 알려진 Fox News의 앵커인 Tucker Carlson마저도 그에게 전염됐는지, 트럼프 유세현장에서 여성혐오 및 Harris를 향한 조롱적 발언이 놀라울 정도로 과격하고 혐오스럽다. “아빠(트럼프)가 집에 오신다! 아빠, 화가 많이 나셨어! 이년(해리스)이 말을 안들어! 나쁜 년은 세차게 엉덩이를 맞을거야! 너는 맞아도 싸! Daddy is coming home!”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틈만 나면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면서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불륜, 거짓, 인신모욕을 서슴지 않으며 비도덕적이라는 사람임을 만천하가 알고 있는데,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에 너무나 괴롭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경배의 대상이고, 축복과 능력의 근원이다.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용사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선 것도, 칼과 창과 갑옷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나간 것이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피조물 인간 크리스찬이 욕먹기 이전에,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다. 다윗의 당당함 뒤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블레셋용사 골리앗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있었다. 나는 이번 선거결과에 대한 첫째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정치계에 입문하기전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자신이 확보한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상대방을 압력, 협박, 위계(位階)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천하고 격이 떨어지는 장사꾼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그런 장사술이 이번 대선에서도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월 28일자 The Washington Post는 “대선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미 대기업총수 및 기업인들이 속속 트럼프 지지로 선회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트럼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기업에 대한 그의 보복이 두려워서”라고 분석했다. 본 기사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미 해리스 지지를 천명한, Amazon 창업자 베조스 소유의 The Washington Post는 해리스 지지를 취소했다. The Los Angeles Times 또한 해리스 지지에 대한 기사를 더 이상 싣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트럼프와 설전으로 유명했던 Meta의 마크 주커버그도 중립적 입장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8월, “주커버그가 이번 선거에서 일말이라도 죄가 있으면,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마저도 08, 12년 대선에서 줄곧 민주당 후보 오바마와 힐러리를 지지하다가, 이번 대선에서만은 침묵하고 있다(https://www.washingtonpost.com/business/2024/10/28/trump-bezos-billionaires-zuckerberg/). 이들에게 연방정부와 계약을 통한 비즈니스 창출 기회는 막대하며, 이들에 대한 세무조사, 사법/행정적 압력은 실로 무서운 징벌이다. 천박한 장사꾼 정치인의 협박으로 기업인 엘리트들의 입에 족쇄를 채운 원동력에는 ‘경제’, 즉 ‘돈’의 문제가 걸려 있다. 다들 알다시피 재계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는 머스크이다. 그는 트럼프 당선을 위해 이미 1억3천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0월 19일부터 선거일 11월 5일까지, 트럼프의 정책 지지자중 매일 1명을 뽑아 100만 달러씩 지원하는 괴이한 정책 프로모션을 벌였다. 두 협상꾼 사이에 모종의 딜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Tesla와 SpaceX(우주항공산업)를 보유한 그에게, 지구궤도에 쏘아올릴 수 있는 인공위성의 개수에 대해 정부로부터 받는 인가와 자율주행자동차의 고속도로 주행 허가 등은 사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더욱이 트럼프는 그를, 정부의 예산을 집행/관리/감사하는 신설 정부효율청(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의 책임자로 앉힐 것을 공약했다. WSJ는 기업인인 그를 이러한 포스트에 앉히는 것이 ‘공직자 이해 충돌’ 측면에서 우려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https://www.wsj.com/politics/elections/elon-musk-wins-big-with-trump-bet-3c61ad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은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가 불법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어떠한 행정을 펼쳐가더라도 국민 다수가 선택한 사람이기에 – 그의 특기인 억지주장, 거짓말, 날조, 비난, 위협등으로 - 왠만한 것은 그냥 넘어갈 것이 앞으로 예견될 일들이다. 민주당 해리스가 진 두번째 이유도 ‘경제’와 직관된다. 어제 WSJ에 의하면, 미유권자의 무려 40%가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경제’를 꼽았다. 이 사람들 중에서 60%가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경제성장율 이런 것보다, 당장 오늘 사먹을 식료품값, 렌트비에 더 민감하다. 미장원을 운영하는 한 여성은 “The economy is everything!”이라며 “애 키우고, 먹고, 일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무 힘들어졌다”며 한숨을 내쉰다(https://www.wsj.com/economy/economy-election-trump-voters-c4c2e9a3). 해리스와 현임 바이든의 오판은, 경제성장율, 실업률 등 거시경제지표는 나아졌다고 이를 강조했지만, 고물가로 허덕이는 서민들이 체감하는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분명한 경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큰 패착이 있었다. ‘그래도 기업을 일궈본 트럼프는 낫겠지!’라는 기대가 이들의 표심을 자극한 것이다. 버니 샌더스도 선거결과가 나온 후에, “민주당이 노동자를 버렸으므로, 노동자들도 민주당을 버렸다”고 표현했다. 이번 선거의 패인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인 노동자계층(특히 흑인과 히스패닉)의 이반(離反)에 있었다. “The economy is everything!”이 이 글의 주제이니, 러시아로 화제를 돌려보자. 푸틴이, 러시아산 에너지가 서방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자원부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경제’적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러시아 경제/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원/석유 재벌 엘리트(Oligarchy)들의 압력에 푸틴은 오랜 기간동안 시달렸으며, 유가하락/경기침체/서방국제재 등으로 폭발 직전의 이들의 불평을 잠재우는데 침공은 유효적절하게 작용했다. 푸틴의 이 위험한 결정 뒤에도 ‘돈’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다. 푸틴은 머스크와 친하다. WSJ기사에 의하면 22년말부터 지금까지 머스크는 푸틴과 수차례 만남을 해왔다고 하는데(https://www.wsj.com/world/russia/musk-putin-secret-conversations-37e1c187)… 두 야욕꾼들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 뭘 주고 받기를 흥정했을까? 재작년 머스크는,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당지역의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의 철군 여부를 가리자고 X(옛 트위터)에서 제안했었다. 이 제안에 크레믈린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https://www.themoscowtimes.com/2022/10/04/kremlin-hails-musks-attempt-at-ukraine-peace-deal-a78973). 푸틴은 트럼프와도 친밀하다.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크레믈린이 해킹 및 SNS를 통한 가짜 뉴스 살포 등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것은 유력 언론을 통해 보도된 공공연한 사실이다. 특히 해킹에 의해 입수된 힐러리 후보측의 이메일이 WikiLeaks에 공개되어, 선거직전 힐러리에 치명상을 주었다. 또한 트럼프의 아들과 사위가 러시아 고위인사들과 수차례 트럼프 타워에서 만났다는 것이, 당시 사건조사를 담당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에 의해 확인되었다(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18/jul/27/donald-trump-russia-meeting-michael-cohen). 트럼프는 정치적 지도자이기 이전에 사업가이다. 그가 내세우는 대부분 큰 공약은 대다수 국민들이 아파해하고 민감해하는 ‘돈’에 관련된 것들이다. 경제제재, 관세보복, 방위비삭감, 돈 안되는 환경조약 개무시… 이 피부에 쏙 와닿는 손에 만져지는 가치에 대해 여론을 현혹하며, 민주, 정의, 인권, 평등, 환경, 우방과의 상호호혜와 같은 건국이래 면면히 이어내려온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국가적 이념을 희생하고 있다. 그와 그의 측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뿐이다”라고 자신있게 천명해왔다. 푸틴과 무슨 딜이 있었기에 이리도 자신 있었을까? 트럼프가 제안하는 평화적 딜은, 지금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지금까지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현상태로 인정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협상꾼인 그는 그 대가로 무얼 받기로 했을까? 미국 대선을 얼마 안남기고 터진 북한의 ‘러시아 파병’ 소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우방국들을 불안과 걱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향후 이것이 미칠 파장에 대해 우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민을 ‘전쟁 확산’ 염려 속으로 내몬 이 소식으로 득을 본 사람은 누굴까?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공언한 트럼프가 최대의 수익권자임에 분명하다. 그는 유세기간 내내 “환경문제보다 핵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강조하며, 전쟁위기를 틈날 때마다 불러일으켰다. 그것도 50:50 초박빙의 대결로 치닫고 있던 선거일 20일 전에 터진 ‘북한 파병’ 소식은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마치 2016 대선 직전, 힐러리측 이메일의 유출로 트럼프가 결정적 승기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북한 또한 경제난/식량난으로 오랜 세월 힘들어 하고 있다. 여기에 서방측 제재등으로 빈곤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 참전한 병사들은 월급으로 일인당 2천달러를 받기로 했고(https://www.yna.co.kr/view/AKR20241025071600546), 참전병력이 1만명이면 매월 2천만달러이니, 부족한 국부를 채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사설은 의미심장한 결론을 맺는다. “이 같은 북-러의 파병 속도전은 11·5 미국 대선 이후 안보 지형의 변화를 노린 도박, 즉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다걸기(올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과의 ‘브로맨스’를 자랑하는 트럼프는 ‘당선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해 왔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1027/130304081/2) “The economy is everything!” 세계의 정치판을 움직이는 거대한 원동력에 돈이 있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우리의 인생관,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에도 이것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서방선진국에서도 비혼과 출산율 저하 추세는 뚜렸한 추세이고 범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돈 때문에 자기 혼자 살기도 버거운데, 무슨 결혼을 하며 언제 집을 장만하며 애까지 낳고 키우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오늘날 우리나라만의 골치거리는 아니다. 가정, 육아, 부모와 자식간의 정, 가족애… 이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은 시리고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인류역사상 가장 세속화된 사회에서 태어나 인본주의적 가치와 합리적 사고의 틀 위에서 자라났다. 지금이야말로 세속화와 물질주의로 가득찬 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독교 고유의 신앙적 전통과 윤리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속화된 사회를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체득해야 할 때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보다, 사회의 세속화트랜드에 교회가 변질되어가고 있다(한국교회트렌드 2025, p287).” “돈이면 다 된다.”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는 세속화 현상은 엄연한 현실이자 교회의 위기이며, 또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과 크리스천공동체가 부대끼며 살아내야 할 필연적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3:1) 트럼프가 집권하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다소 누그러질 것이라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될 것라고… 오히려 반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아주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 썩는 양식 즉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에 현혹되어, 영생의 양식 즉 예수의 가르침 – 사랑, 화평, 긍휼, 관용, 경건, 인내, 정직 - 을 희생하면서까지(요 6:27) 이러한 위험을 잠시나마 회피하는 것이 바른 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세상 권세자나 통치자들에 의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좀더 얻고 어떤 위험은 잠시 피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임박해오는 말세의 때는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전쟁이 발발하든 아니든, 이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그분의 뜻에 대적하는 자의 길에 서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차가운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를, 성경적 크리스천의 가치관/세계관/인생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더 힘들어지고 있다. 고리타분한 관념적인 성경적 가르침이 “밥을 먹여주냐?” “돈이 나오냐?”며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세상적인 가치, 세속주의, 물질주의를 벗어난 영적인 가치를 드러내고 실천할 때에만이 교회는 교회다워지며,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다. 모욕과 침뱉음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세상사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아도, 삶에서 우선순위가 확고하게 세워져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개신교의 신앙적 전통 아래에서 우리가 처한 사회적 맥락을 돌아보고 사회적 사명과 요구를 감당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11082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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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들을 한 배에 타게 했을까?요즘 강남부자들에게 벤츠나 BMW 정도는 누구나 타는 중형차정도로 여겨진다고 한다. 벤틀리, 롤스로이스 정도되어야지 갖고 싶은 차 물망에 오른다고 한다. 더 많은 소유를 자랑하는 부자들은 보트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것도 1억이 아닌 10억 정도되는 가격. 세상낙 이것 저것 다 맛본 부자들은 미지의 세계인 우주에 관심을 둔다. 그 격을 넘어서 아예 세계 최상위급 부자들은 우주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제프 베조스(Blue Origin), 리차드 브랜슨(Virgin Galactic), 일론 머스크(SpaceX)… 그 중에서도 머스크가, 최근 가장 많은 관심과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엊그제 WSJ에 의하면, 그가 22년말부터 러시아 푸틴과 수차례 만나왔다고 한다. 머스크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초기인 22년 7월에 “Hold Strong Ukraine!”를 외치며, 인공위성으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터미날 15천대를 즉각적으로 공급했다. 이 접속망은 러시아군의 이동을 민첩하게 파악하고, 시민군을 포함한 우군 간에 실시간 작전협의를 가능케하므로써, 우크라이나가 적군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그 해 9월에, 월 2천만불이 소요되는 이 서비스제공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선언한다 (https://www.wsj.com/world/russia/musk-putin-secret-conversations-37e1c187). 그리고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당지역의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의 철군 여부를 가리자고 X(옛 트위터)에서 제안한다(아래 첨부파일 참조). 이 제안에 크레믈린도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https://www.themoscowtimes.com/2022/10/04/kremlin-hails-musks-attempt-at-ukraine-peace-deal-a7897). 몇 달도 안되어서, 이렇게 그의 ‘우크라이나 지지’입장이 돌변한 것은 왜 일까? WSJ기사에 의하면 22년말부터 지금까지 머스크는 푸틴과 수차례 만남을 해왔다고 하는데… 두 야욕꾼들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 뭘 주고 받기를 흥정했을까? 머스크가, 푸틴이 제안한 경제적 보상 때문에 입장을 바꿨다면, 돈 버는 사업가에겐 이념과 가치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푸틴이, 러시아산 에너지가 서방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자원부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경제’적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러시아 경제/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원/석유 재벌 엘리트(Oligarchy)들의 압력에 푸틴은 오랜 기간동안 시달렸으며, 유가하락/경기침체/서방국의 제재 등으로 이들의 폭발 직전의 불평을 잠재우는데 침공은 유효적절하게 작용했다. 푸틴의 이 위험한 결정 뒤에도 ‘돈’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다. 푸틴은 또 다른 세계적 부자 트럼프와도 친밀하다.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크레믈린이 해킹 및 SNS를 통한 가짜 뉴스 살포 등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것은 유력 언론을 통해 보도된 공공연한 사실이다. 특히 해킹에 의해 입수된 힐러리후보측의 이메일이 WikiLeaks에 공개되어, 선거직전 힐러리에 치명상을 주었다. 또한 트럼프의 아들과 사위가 러시아 고위인사들과 수차례 트럼프 타워에서 만났다는 것이, 당시 사건조사를 담당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에 의해 확인되었다(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18/jul/27/donald-trump-russia-meeting-michael-cohen). 트럼프는 정치적 지도자이기 이전에 사업가이다. 그가 내세우는 대부분 큰 공약은 대다수 국민들이 아파해하고 민감해하는 ‘돈’에 관련된 것들이다. 경제제재, 관세보복, 방위비삭감, 돈 안되는 환경조약 개무시… 이 피부에 쏙 와닿는 눈에 보이는 가치에 대해 여론을 현혹하며, 민주주의, 인권, 평등, 환경, 평화, 우방과의 상호호혜와 같은 건국이래 면면히 이어내려온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국가적 이념을 희생하고 있다. 그와 그의 측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뿐이다”라고 자신있게 천명하고 있다. 푸틴과 무슨 딜이 있었기에 이리도 자신 있을까? 트럼프가 제안하는 평화적 딜은, 지금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지금까지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현상태로 인정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협상꾼인 그는 그 대가로 뭘 받기로 했을까? 미대선을 얼마 안남기고 터진 북한의 ‘러시아 파병’ 소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우방국들을 불안과 걱정으로 몰아넣고 있다. 향후 이것이 미칠 파장에 대해 우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민을 ‘전쟁 확산’ 염려 속으로 내몬 이 소식으로 득을 보는 사람을 누굴까?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공언한 트럼프가 아닐까? 그것도 50:50 초박빙의 대결로 치닺고있는 선거일 20일 전에… 마치 2016대선직전, 힐러리측 이메일의 누출로 트럼프가 결정적 승기를 잡은 것처럼. 북한 또한 경제난/식량난으로 오랜 세월 힘들어 하고 있다. 여기에 서방측 제재등으로 빈곤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 참전한 병사들은 월급으로 일인당 2천달러를 받기로 했고(https://www.yna.co.kr/view/AKR20241025071600546), 참전병력이 1만명이면 2천만달러이니, 부족한 국부를 채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 푸틴을 통해 어떠한 플러스 알파를 제안 받았는지는 모른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어제 사설은 의미심장한 결론을 맺는다. “이 같은 북-러의 파병 속도전은 11·5 미국 대선 이후 안보 지형의 변화를 노린 도박, 즉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다걸기(올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과의 ‘브로맨스’를 자랑하는 트럼프는 ‘당선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해 왔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1027/130304081/2) 대선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미 대기업총수 및 기업인들이 속속 트럼프지지로 선회하고 있다. The Washington Post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기업에 대한 트럼프의 보복이 두려워서라고 분석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측 보좌관은 아래와 같이 기업인들을 협박하고 있다. “I’ve told CEOs to engage as fast as possible because the clock is ticking. … If you’re somebody who has endorsed Harris, and we’ve never heard from you at any point until after the election, you’ve got an uphill battle,” the Trump adviser said. 이미 해리스 지지를 천명한, Amazon창업자 베조스 소유의 The Washington Post는 지난 주에 지지를 취소했다. The Los Angeles Times 또한 해리스 지지에 대한 기사를 더 이상 싣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트럼프와 설전으로 유명했던 Meta의 주커버그도 중립적 입장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8월, “주커버그가 이번 선거에서 일말이라도 죄가 있으면,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마저도 08, 12년 대선에서 줄 곳 민주당 후보 오바마와 힐러리를 지지하다가, 이번 대선에서는 침묵하고 있다(https://www.washingtonpost.com/business/2024/10/28/trump-bezos-billionaires-zuckerberg/). 이들에게 연방정부와 계약을 통한 비즈니스 창출 기회는 막대하며, 이들에 대한 세무조사, 사법/행정적 압력은 실로 무서운 징벌이다. 천박한 장사꾼 정치인의 협박으로 기업인 엘리트들의 입에 족쇄를 채운 원동력에는 ‘경제’, 즉 ‘돈’의 문제가 걸려 있다. 다들 알다시피 재계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는 머스크이다. 그는 트럼프 당선을 위해 이미 1억3천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0월 19일부터 선거일 11월 5일까지, 트럼프의 정책 지지자중 매일 1명을 뽑아 100만 달러씩 지원하는 괴이한 정책 프로모션을 벌이고 있다. 두 협상꾼 사이에 모종의 딜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머스크, 푸틴, 트럼프 그리고 김정은… 무엇이 그들을 한 배에 타게 했을까? 한 국가의 지도자 수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한 세계 시민에게도 ‘돈’이 일상생활에 작용하는 힘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위력적이 되어가고 있다. 부모, 가족, 형제애, 화목, 사랑, 박애, 정의와 같은 오래 묵은 귀한 가치관보다 ‘돈’이 미치는 현실적 위력에 점점 굴복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을 장악하는 돈의 지배력이 위력적인 때이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한다. 청년층은 흑수저, 백수저 하면서 돈 벌기 정말 힘들다고 한다. 경제만 술술 풀리면 정권 유지에는 문제 없다고들 말한다. 말세의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돈을 사랑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딤후 3:1). 구약의 이스라엘 열왕들은 아세라와 바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이들 이방신들에 대한 숭배로 이전 왕들의 패망을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이방신을 척결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영적 타락을 거듭하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멸망하고 만다. 바알과 아세라는 자연의 신, 풍요의 신, 다산의 신으로서, 식물/나무/가축 등의 생장과 결실을 주관하는 신들이었다. 당시 농경과 목축을 생업으로 살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신들이었다. 그들의 일상생활 면면에 깊숙히 침투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영향력을 – 오늘날 돈처럼 – 미치고 있었다. 말세의 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 그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나(마 24:36), 여러 정황을 통해 그 때가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 감사하지 아니한가? 세상 모든 이가 보이는 것에, 썩어 없어질 것, 돈과 경제에 몰입해 있을 때, 인생의 참된 가치, 즉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안목을 주셨으니 말이다. 어떠한 경제적 대가를 치루서라도 그 영원한 생명을 부여잡도록 믿음을 주셨으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20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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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자와 함께 울라‘감정이입'능력이 경쟁력이다. 수년전 Forbes紙에 실렸던 기사에 의하면, 초우량 글로벌기업에서 성공한 최고경영인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 능력이다. 감정이입(Einfühlung)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Robert Vischer의 1873년 박사논문, ‘On the Optical Sense of Form: A Contribution to Aesthetics’에서 처음 표현되었다. 이 용어는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feeling-into)의 의미이다. ‘Sympathy’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동정은 하지만 그 내면에 들어가지는 않는 제 3자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Empathy’는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결합하려 한다. 성경에서는 로마서 12:15말씀이 이 ‘감정이입’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풀어주고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예수그리스도의 리더쉽 일면에도 바로 이 능력이 있었다. 우는 자의 슬픔을 비통히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쏟으시는 ‘감정이입'력이 탁월하셨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2-35) 진정한 친구는,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다. 좋을 때 같이 밥먹고 좋은 데 같이 가고 여행하고 함께 있어주는 사람보다도,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다. 그의 사회적 위치가 높든 낮든,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아니든… 진정한 친구는 자신의 슬픔을 함께 슬퍼해주며, 자신의 아픔에 대해 함께 애통해하는 사람이다. 같이 웃기는 쉬워도, 함께 울기는 어렵다. 숨막히게 분주하고 할 일 많은 이 시대에, 자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맺게된 다양하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차갑고 야박하고 냉정하고 메마르고 치열한 현대도시생활에서,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쉽지 않은데, 우는 자와 한 마음이 되어 함께 하는 자리에는 대략 소요가 요구되는 시간량이 가늠이 안된다. 맺고 끊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로와 위안은 날이 지나도 지속되어야 하기에 시간 소모가 늘어질 공산이 크다. 그렇치않아도 눈살 찌푸려지는 사건 사고가 주변에 많은데, 아픔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슬픔에 겨워 눈물 쏟는 그 현장에 누가 감정 소모하며 동참하고프겠는가? 자신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연락 않하는 것이,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래서 슬플 때엔 모질게 외롭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은 많지만,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슬픔을 공감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은 기억에 남는다. 그 감사한 기억이 무척이나 오래 간다. 자신의 인생에 소중한 사람은 같이 웃어주기보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다. 대안이나 충고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슬플 때 함께 있어줬던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 슬퍼할 때에 함께 있어줬던 사람이었던가? 난, 누가 슬퍼할 때 함께 눈물 흘리던 목회자로 기억될까? 091124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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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초등시절 등교길... 교문을 들어서면 교정 화단에 잘 가꾼 수풀과 나무들이 반긴다. 계절마다 자태를 바꿔가며, 화려한 용모로, 녹음으로, 때론 단풍으로... 구석에서 인사할까 말까 수줍은 듯, 단아하고 수수하게 피어있는 무궁화. 상대적으로 볼품이 없었다. 우리나라 국화라기에, 예의상 잠깐의 시선만 두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녀를 스쳐지날 때마다, 조국의 國花인 무궁화에 대한 선생님의 솔직담백한 표현이 뇌리를 스쳤다. "무궁화, 너무 보잘 것 없지 않니? 작고 꽃잎도 빈약하고, 꽃답게 화려한 맛도 없고, 벌레도 잘 꼬이고..." 내가 목격한 바와 틀림이 없는 진술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60평생동안 우리 국화에 대해 별 감동도 자부심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나의 고정관념이 뿌리채 뽑힌 사건이 지난 주에 발생했다. 일본 후지산 중턱 어느 길가에서 마주친 무궁화(아래 사진 참조). 단아했지만 백치미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탐스럽고 매력적이었다. 이런 무궁화를 난생 처음, 그것도 고국이 아니고 과거 침략국의 땅에서 본 것이 섭섭했다. 20대 청춘때 유학와서 근 35년간 줄곳 일본서 살아온 내 친구가 한 마디 거든다. 동경에서는 화단에 무궁화 심고 가꾸는 집이 많다고... 그리고 참 이쁘다고... 부끄러운 자괴감이 몰려들어왔다. 관심만 있었다면 그 잘난 과학과 기술력으로, 종자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며 이쁘고 튼실하고 매혹적인 우리나라 꽃이 나오고도 남았을텐데... 후지산 어느 마을에서 어쩌다 마주친 무궁화보다 칠백배 더 아름다운 그녀를 만났을텐데 말이다. "일본, 울릉도 오징어까지 연구 한국, 독도는 우리땅 노래만" 오늘 조간 중앙일보 1면 기사 헤드라인이다. - 24년 8월 15일 아침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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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건너는 가장 확실한 길수학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정석대로 풀면, 풀이 과정도 단순하고 가장 명쾌하게 답을 유출해낼 수 있다. 아무리 어렵고 험난한 광야, 인생의 고난 길이라도 정석대로 돌파하면 그것이 가장 수월한 길이고 안전한 길이다. 광야를 지날 때, 가장 올바른 정석 길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는 길이다. 보기에 가장 쉬워보이고 가장 짧아보이는 short-cut이 아니라, 눈에는 아무리 험난하고 멀게 보여도 그 곳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수월한 길이요 정석 길이다. 눈에 좋아 보이는 소돔을 택했던 롯의 실패처럼 말이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 2:15)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의 공통점은, 자신의 작고 연약함을 깨달아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때이다. 출애굽과 시작된 광야 생활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있다. 파라오의 절대권력과 애굽의 신에게 의지하여 패역으로 치닫던 길목에서 걸음을 멈추고, 여호와 하나님의 길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들짐승과 배고픔과 추위와 극심한 더위와 이방 거주민들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 수 밖에 없는 그들의 간절한 의탁을 기뻐하신다. 괴롭고 험난한 광야생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던 그들의 ‘의존’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 때, 고난의 때, 광야의 때에 머물러 있을 때, 그래서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지혜대로 하면 뭔가 될줄 알았던 오만을 버리고, 돈과 권력과 사람의 도움, 우상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그 때를 기뻐하신다. 수심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깊은 대양의 물이 눈앞을 가로막고… 세상의 시험, 고난과 염려의 화염이 맹추격을 해올 때… 주님의 말씀따라 믿음으로 대양을 향해 손을 내밀겠습니다(출 14:21-22).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분부하신 지시에 따라 행할 때에 주님의 기뻐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말씀을 주시옵소서. 그 말씀대로, 언약대로, 지시대로 믿고 따르고 행하겠습니다. 그것이 고난과 시험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081224 *Image from Daily Devotion@rejoiceandpraise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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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서서어머니께서 떠나신 지 6년이 지났다. 두 차례에 걸친 대장암수술 후유증과 3년을 싸우시다 돌아가셨다. 그 해 여름, 그녀와 한 달 여를 함께 했었다.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 워싱턴에서 온 누나에게 간호를 인계하고, 영국에 돌아온 지 1주도 안되어 소천하셨다.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님댁으로 달려갔다. 한여름 서울, 작열하는 태양볕은 독수리 부리마냥 내 살을 사정없이 쪼아댔다. 온 몸을 땀으로 적신 나는, 어머님댁 아파트 문밖에 섰다. 벨을 눌렀다. “강헌이 왔니?” … … 그 날따라, 그 정겨운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러도…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이의 심정이 그렇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 빛이 하나둘씩 입장하며 밤이 왔음을 아우성쳐도, 그는 간절히 기다린다. 상대가 나와 반겨주기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리도 간절하시다. 초인종 몇 번 누르고 인기척 없으면 제 갈 길 가는 DHL맨의 마음과 엄연히 다르다. 그는 우리와 대면하기를 원하신다. 말씀하고파 하신다. 들려주고 싶으신 그의 마음 표현이 하늘 가득하다. 자식에게 무엇이 최고로 좋은 지 아시기 때문에, 그것이 자식이 좇는 것들과 다름에 새하얀 탄식으로 안타까와 하시며, 그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약사발을 내팽개치는 아픈 아들의 투정에도, 병마로 입맛을 잃은 아들이 찡그리며 뿌리쳐도... "밥 한 술만 더!" "한 술만 더…" 아비의 마음으로 가여운 마음으로, 하나님은 병약한 아들에게 생명 양식을 먹여주시려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절실한 마음으로. 내가 병들고 약하고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가 내 문제에 왜 이리 애타하시는 지 깨닫지 못하는 한, 나는 그 문을 열 수가 없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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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즐거운 이유‘100세’시대라고 한다. 60세가 지나 환갑이 되면, 장수하셨다고 축하하며 온 가족/친지들이 모여 ‘회갑연’이라는 인생 최대의 파티를 베풀었는데… 지금은 ‘회갑연’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인생 한창 때에 무슨 ‘장수’했다고 축하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건강하게 살까?’ 무거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 날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노년건강 전문의들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히 오래 사는 것’, 즉 ‘건강 수명’을 강조한다. 이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먹고, 재정을 관리하며, 노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건강 수명을 오래 유지하기위해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항상성(恒常性): 여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체의 각 기능이 균형있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 뇌과학에 의하면, ‘통증’과 ‘쾌감’은 뇌의 동일한 부위(뇌섬엽,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 등)에서 처리된다고 한다. ‘통증’과 ‘쾌감’은 상호작용을 통해 불쾌감/유쾌감에 대한 다양한 감정정보를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1). 눈을 즐겁게 하는 숏츠에 한동안 빠진 후, 또는 짭조름달콤한 허니버터칩 한 봉을 먹어치웠을 때, 순식간에 불쾌감이 밀려들지 않는가? 꼼작하지 않고 두어시간 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한 책만 바라보는 독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시간이 즐겁다는 역설은, 내안에 무언가로 채워졌다는 포만감, 새로운 생각으로 내 좁은 시야가 넓어졌다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을 헉헉대며 올라가는 등산이 즐거운 건, 고통 후에 정상에서 부르짖을 “야호”가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을 다루고 처리하는 뇌의 한 영역에서, 50:50 절대 균형(Equilibrium)을 향해 이 둘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다. 한쪽이 반 이상을 점령하면 다른 한쪽이 가만 있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의 다이내믹한 조합의 연장선이다. 이 둘 간의 균형이 깨져, 즐거움의 무게추가 바닥을 향해 내려앉으면 고통의 무게추가 올라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경고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반작용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자기조정을 위한 정상적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을 ‘권태’라고 지적한다. 삶에 무료함이 들어오면, ‘어디 재미있는 것 없을까?’하고 더 짜릿한 자극을 찾는다. 더 큰 욕구가 밀려온다. 만족시키기 훨씬 더 어려운 욕망이 물밀 듯 들어온다. 절대 균형, equilibrium이 무너져내린 상태이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쯤의 고통과 불행을 필요로 한다.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배안에 무거운 물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소원이 마음 속에 생기자마자 바로 충족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소일거리로 삼아 세월을 보내게 되겠는가? 아마도 권태가 밀려 들어올 것이다… 행복에 대한 최대의 적은 무료함, 권태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욕구와 만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이때의 행복은 지극히 짧다. 금세 무료함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2)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근심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명확히 알아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고 불행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행복을 상기하게 된다.”(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의 시기는, 잊고 살아왔던 소중한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감사하게 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클수록 절대주권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돈독해진다.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에 철썩 같은 그분의 신뢰가 있기에 그러한 상황을 그가 허락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창 22)은, 그에게 이를 감당할만한 믿음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신뢰하셨기에 그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종 하갈에게서 자식을 얻은(창 16:15-16) 그때의 초라한 믿음 정도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시험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자신의 주변을 엄습해올 때,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고난이 해결된 결과보다 잃었던 삶의 균형, 항상성을 되찾아가는 고통속 과정이 중요하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무너져 내린 ‘항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게 필요한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어둠이 짙게 엄습해올수록, 항상성의 균형을 회복케하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의지해야한다. 고통속에 견디어 내는 과정이 내겐 즐거움이요, 주님께 영광이다. (1) Soo Ahn Lee, ‘Brain representations of affective valence and intensity in sustained pleasure and pain’, PNAS(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June 11 2024,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0433121 (2)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서울: 동서문화사, 2016), pp 17, 27, (3)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pp 75-76, 84 *Recommended Music: "Thank you for joy, thank you for pain", https://www.youtube.com/watch?v=6cnueS9Duis202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