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
무엇이 그들을 한 배에 타게 했을까?요즘 강남부자들에게 벤츠나 BMW 정도는 누구나 타는 중형차정도로 여겨진다고 한다. 벤틀리, 롤스로이스 정도되어야지 갖고 싶은 차 물망에 오른다고 한다. 더 많은 소유를 자랑하는 부자들은 보트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것도 1억이 아닌 10억 정도되는 가격. 세상낙 이것 저것 다 맛본 부자들은 미지의 세계인 우주에 관심을 둔다. 그 격을 넘어서 아예 세계 최상위급 부자들은 우주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제프 베조스(Blue Origin), 리차드 브랜슨(Virgin Galactic), 일론 머스크(SpaceX)… 그 중에서도 머스크가, 최근 가장 많은 관심과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엊그제 WSJ에 의하면, 그가 22년말부터 러시아 푸틴과 수차례 만나왔다고 한다. 머스크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초기인 22년 7월에 “Hold Strong Ukraine!”를 외치며, 인공위성으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터미날 15천대를 즉각적으로 공급했다. 이 접속망은 러시아군의 이동을 민첩하게 파악하고, 시민군을 포함한 우군 간에 실시간 작전협의를 가능케하므로써, 우크라이나가 적군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그 해 9월에, 월 2천만불이 소요되는 이 서비스제공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선언한다 (https://www.wsj.com/world/russia/musk-putin-secret-conversations-37e1c187). 그리고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당지역의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의 철군 여부를 가리자고 X(옛 트위터)에서 제안한다(아래 첨부파일 참조). 이 제안에 크레믈린도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https://www.themoscowtimes.com/2022/10/04/kremlin-hails-musks-attempt-at-ukraine-peace-deal-a7897). 몇 달도 안되어서, 이렇게 그의 ‘우크라이나 지지’입장이 돌변한 것은 왜 일까? WSJ기사에 의하면 22년말부터 지금까지 머스크는 푸틴과 수차례 만남을 해왔다고 하는데… 두 야욕꾼들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 뭘 주고 받기를 흥정했을까? 머스크가, 푸틴이 제안한 경제적 보상 때문에 입장을 바꿨다면, 돈 버는 사업가에겐 이념과 가치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푸틴이, 러시아산 에너지가 서방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자원부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경제’적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러시아 경제/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원/석유 재벌 엘리트(Oligarchy)들의 압력에 푸틴은 오랜 기간동안 시달렸으며, 유가하락/경기침체/서방국의 제재 등으로 이들의 폭발 직전의 불평을 잠재우는데 침공은 유효적절하게 작용했다. 푸틴의 이 위험한 결정 뒤에도 ‘돈’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다. 푸틴은 또 다른 세계적 부자 트럼프와도 친밀하다.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크레믈린이 해킹 및 SNS를 통한 가짜 뉴스 살포 등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것은 유력 언론을 통해 보도된 공공연한 사실이다. 특히 해킹에 의해 입수된 힐러리후보측의 이메일이 WikiLeaks에 공개되어, 선거직전 힐러리에 치명상을 주었다. 또한 트럼프의 아들과 사위가 러시아 고위인사들과 수차례 트럼프 타워에서 만났다는 것이, 당시 사건조사를 담당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에 의해 확인되었다(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18/jul/27/donald-trump-russia-meeting-michael-cohen). 트럼프는 정치적 지도자이기 이전에 사업가이다. 그가 내세우는 대부분 큰 공약은 대다수 국민들이 아파해하고 민감해하는 ‘돈’에 관련된 것들이다. 경제제재, 관세보복, 방위비삭감, 돈 안되는 환경조약 개무시… 이 피부에 쏙 와닿는 눈에 보이는 가치에 대해 여론을 현혹하며, 민주주의, 인권, 평등, 환경, 평화, 우방과의 상호호혜와 같은 건국이래 면면히 이어내려온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국가적 이념을 희생하고 있다. 그와 그의 측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뿐이다”라고 자신있게 천명하고 있다. 푸틴과 무슨 딜이 있었기에 이리도 자신 있을까? 트럼프가 제안하는 평화적 딜은, 지금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지금까지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현상태로 인정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협상꾼인 그는 그 대가로 뭘 받기로 했을까? 미대선을 얼마 안남기고 터진 북한의 ‘러시아 파병’ 소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우방국들을 불안과 걱정으로 몰아넣고 있다. 향후 이것이 미칠 파장에 대해 우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민을 ‘전쟁 확산’ 염려 속으로 내몬 이 소식으로 득을 보는 사람을 누굴까?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공언한 트럼프가 아닐까? 그것도 50:50 초박빙의 대결로 치닺고있는 선거일 20일 전에… 마치 2016대선직전, 힐러리측 이메일의 누출로 트럼프가 결정적 승기를 잡은 것처럼. 북한 또한 경제난/식량난으로 오랜 세월 힘들어 하고 있다. 여기에 서방측 제재등으로 빈곤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 참전한 병사들은 월급으로 일인당 2천달러를 받기로 했고(https://www.yna.co.kr/view/AKR20241025071600546), 참전병력이 1만명이면 2천만달러이니, 부족한 국부를 채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 푸틴을 통해 어떠한 플러스 알파를 제안 받았는지는 모른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어제 사설은 의미심장한 결론을 맺는다. “이 같은 북-러의 파병 속도전은 11·5 미국 대선 이후 안보 지형의 변화를 노린 도박, 즉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다걸기(올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과의 ‘브로맨스’를 자랑하는 트럼프는 ‘당선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해 왔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1027/130304081/2) 대선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미 대기업총수 및 기업인들이 속속 트럼프지지로 선회하고 있다. The Washington Post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기업에 대한 트럼프의 보복이 두려워서라고 분석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측 보좌관은 아래와 같이 기업인들을 협박하고 있다. “I’ve told CEOs to engage as fast as possible because the clock is ticking. … If you’re somebody who has endorsed Harris, and we’ve never heard from you at any point until after the election, you’ve got an uphill battle,” the Trump adviser said. 이미 해리스 지지를 천명한, Amazon창업자 베조스 소유의 The Washington Post는 지난 주에 지지를 취소했다. The Los Angeles Times 또한 해리스 지지에 대한 기사를 더 이상 싣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트럼프와 설전으로 유명했던 Meta의 주커버그도 중립적 입장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8월, “주커버그가 이번 선거에서 일말이라도 죄가 있으면,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마저도 08, 12년 대선에서 줄 곳 민주당 후보 오바마와 힐러리를 지지하다가, 이번 대선에서는 침묵하고 있다(https://www.washingtonpost.com/business/2024/10/28/trump-bezos-billionaires-zuckerberg/). 이들에게 연방정부와 계약을 통한 비즈니스 창출 기회는 막대하며, 이들에 대한 세무조사, 사법/행정적 압력은 실로 무서운 징벌이다. 천박한 장사꾼 정치인의 협박으로 기업인 엘리트들의 입에 족쇄를 채운 원동력에는 ‘경제’, 즉 ‘돈’의 문제가 걸려 있다. 다들 알다시피 재계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자는 머스크이다. 그는 트럼프 당선을 위해 이미 1억3천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0월 19일부터 선거일 11월 5일까지, 트럼프의 정책 지지자중 매일 1명을 뽑아 100만 달러씩 지원하는 괴이한 정책 프로모션을 벌이고 있다. 두 협상꾼 사이에 모종의 딜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머스크, 푸틴, 트럼프 그리고 김정은… 무엇이 그들을 한 배에 타게 했을까? 한 국가의 지도자 수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한 세계 시민에게도 ‘돈’이 일상생활에 작용하는 힘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위력적이 되어가고 있다. 부모, 가족, 형제애, 화목, 사랑, 박애, 정의와 같은 오래 묵은 귀한 가치관보다 ‘돈’이 미치는 현실적 위력에 점점 굴복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을 장악하는 돈의 지배력이 위력적인 때이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한다. 청년층은 흑수저, 백수저 하면서 돈 벌기 정말 힘들다고 한다. 경제만 술술 풀리면 정권 유지에는 문제 없다고들 말한다. 말세의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돈을 사랑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딤후 3:1). 구약의 이스라엘 열왕들은 아세라와 바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이들 이방신들에 대한 숭배로 이전 왕들의 패망을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이방신을 척결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영적 타락을 거듭하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멸망하고 만다. 바알과 아세라는 자연의 신, 풍요의 신, 다산의 신으로서, 식물/나무/가축 등의 생장과 결실을 주관하는 신들이었다. 당시 농경과 목축을 생업으로 살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신들이었다. 그들의 일상생활 면면에 깊숙히 침투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영향력을 – 오늘날 돈처럼 – 미치고 있었다. 말세의 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 그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나(마 24:36), 여러 정황을 통해 그 때가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 감사하지 아니한가? 세상 모든 이가 보이는 것에, 썩어 없어질 것, 돈과 경제에 몰입해 있을 때, 인생의 참된 가치, 즉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안목을 주셨으니 말이다. 어떠한 경제적 대가를 치루서라도 그 영원한 생명을 부여잡도록 믿음을 주셨으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2024-10-29
-
우는 자와 함께 울라‘감정이입'능력이 경쟁력이다. 수년전 Forbes紙에 실렸던 기사에 의하면, 초우량 글로벌기업에서 성공한 최고경영인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 능력이다. 감정이입(Einfühlung)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Robert Vischer의 1873년 박사논문, ‘On the Optical Sense of Form: A Contribution to Aesthetics’에서 처음 표현되었다. 이 용어는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feeling-into)의 의미이다. ‘Sympathy’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동정은 하지만 그 내면에 들어가지는 않는 제 3자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Empathy’는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결합하려 한다. 성경에서는 로마서 12:15말씀이 이 ‘감정이입’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풀어주고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5) 예수그리스도의 리더쉽 일면에도 바로 이 능력이 있었다. 우는 자의 슬픔을 비통히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쏟으시는 ‘감정이입'력이 탁월하셨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2-35) 진정한 친구는,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다. 좋을 때 같이 밥먹고 좋은 데 같이 가고 여행하고 함께 있어주는 사람보다도,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다. 그의 사회적 위치가 높든 낮든,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아니든… 진정한 친구는 자신의 슬픔을 함께 슬퍼해주며, 자신의 아픔에 대해 함께 애통해하는 사람이다. 같이 웃기는 쉬워도, 함께 울기는 어렵다. 숨막히게 분주하고 할 일 많은 이 시대에, 자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맺게된 다양하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차갑고 야박하고 냉정하고 메마르고 치열한 현대도시생활에서,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쉽지 않은데, 우는 자와 한 마음이 되어 함께 하는 자리에는 대략 소요가 요구되는 시간량이 가늠이 안된다. 맺고 끊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로와 위안은 날이 지나도 지속되어야 하기에 시간 소모가 늘어질 공산이 크다. 그렇치않아도 눈살 찌푸려지는 사건 사고가 주변에 많은데, 아픔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슬픔에 겨워 눈물 쏟는 그 현장에 누가 감정 소모하며 동참하고프겠는가? 자신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연락 않하는 것이,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래서 슬플 때엔 모질게 외롭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은 많지만,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슬픔을 공감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은 기억에 남는다. 그 감사한 기억이 무척이나 오래 간다. 자신의 인생에 소중한 사람은 같이 웃어주기보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다. 대안이나 충고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슬플 때 함께 있어줬던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 슬퍼할 때에 함께 있어줬던 사람이었던가? 난, 누가 슬퍼할 때 함께 눈물 흘리던 목회자로 기억될까? 0911242024-09-11
-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초등시절 등교길... 교문을 들어서면 교정 화단에 잘 가꾼 수풀과 나무들이 반긴다. 계절마다 자태를 바꿔가며, 화려한 용모로, 녹음으로, 때론 단풍으로... 구석에서 인사할까 말까 수줍은 듯, 단아하고 수수하게 피어있는 무궁화. 상대적으로 볼품이 없었다. 우리나라 국화라기에, 예의상 잠깐의 시선만 두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녀를 스쳐지날 때마다, 조국의 國花인 무궁화에 대한 선생님의 솔직담백한 표현이 뇌리를 스쳤다. "무궁화, 너무 보잘 것 없지 않니? 작고 꽃잎도 빈약하고, 꽃답게 화려한 맛도 없고, 벌레도 잘 꼬이고..." 내가 목격한 바와 틀림이 없는 진술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60평생동안 우리 국화에 대해 별 감동도 자부심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나의 고정관념이 뿌리채 뽑힌 사건이 지난 주에 발생했다. 일본 후지산 중턱 어느 길가에서 마주친 무궁화(아래 사진 참조). 단아했지만 백치미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탐스럽고 매력적이었다. 이런 무궁화를 난생 처음, 그것도 고국이 아니고 과거 침략국의 땅에서 본 것이 섭섭했다. 20대 청춘때 유학와서 근 35년간 줄곳 일본서 살아온 내 친구가 한 마디 거든다. 동경에서는 화단에 무궁화 심고 가꾸는 집이 많다고... 그리고 참 이쁘다고... 부끄러운 자괴감이 몰려들어왔다. 관심만 있었다면 그 잘난 과학과 기술력으로, 종자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며 이쁘고 튼실하고 매혹적인 우리나라 꽃이 나오고도 남았을텐데... 후지산 어느 마을에서 어쩌다 마주친 무궁화보다 칠백배 더 아름다운 그녀를 만났을텐데 말이다. "일본, 울릉도 오징어까지 연구 한국, 독도는 우리땅 노래만" 오늘 조간 중앙일보 1면 기사 헤드라인이다. - 24년 8월 15일 아침2024-08-17
-
광야를 건너는 가장 확실한 길수학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정석대로 풀면, 풀이 과정도 단순하고 가장 명쾌하게 답을 유출해낼 수 있다. 아무리 어렵고 험난한 광야, 인생의 고난 길이라도 정석대로 돌파하면 그것이 가장 수월한 길이고 안전한 길이다. 광야를 지날 때, 가장 올바른 정석 길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는 길이다. 보기에 가장 쉬워보이고 가장 짧아보이는 short-cut이 아니라, 눈에는 아무리 험난하고 멀게 보여도 그 곳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수월한 길이요 정석 길이다. 눈에 좋아 보이는 소돔을 택했던 롯의 실패처럼 말이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 2:15)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의 공통점은, 자신의 작고 연약함을 깨달아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때이다. 출애굽과 시작된 광야 생활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있다. 파라오의 절대권력과 애굽의 신에게 의지하여 패역으로 치닫던 길목에서 걸음을 멈추고, 여호와 하나님의 길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들짐승과 배고픔과 추위와 극심한 더위와 이방 거주민들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 수 밖에 없는 그들의 간절한 의탁을 기뻐하신다. 괴롭고 험난한 광야생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던 그들의 ‘의존’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 때, 고난의 때, 광야의 때에 머물러 있을 때, 그래서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지혜대로 하면 뭔가 될줄 알았던 오만을 버리고, 돈과 권력과 사람의 도움, 우상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그 때를 기뻐하신다. 수심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깊은 대양의 물이 눈앞을 가로막고… 세상의 시험, 고난과 염려의 화염이 맹추격을 해올 때… 주님의 말씀따라 믿음으로 대양을 향해 손을 내밀겠습니다(출 14:21-22).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분부하신 지시에 따라 행할 때에 주님의 기뻐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말씀을 주시옵소서. 그 말씀대로, 언약대로, 지시대로 믿고 따르고 행하겠습니다. 그것이 고난과 시험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081224 *Image from Daily Devotion@rejoiceandpraise2024-08-12
-
문밖에 서서어머니께서 떠나신 지 6년이 지났다. 두 차례에 걸친 대장암수술 후유증과 3년을 싸우시다 돌아가셨다. 그 해 여름, 그녀와 한 달 여를 함께 했었다.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 워싱턴에서 온 누나에게 간호를 인계하고, 영국에 돌아온 지 1주도 안되어 소천하셨다.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님댁으로 달려갔다. 한여름 서울, 작열하는 태양볕은 독수리 부리마냥 내 살을 사정없이 쪼아댔다. 온 몸을 땀으로 적신 나는, 어머님댁 아파트 문밖에 섰다. 벨을 눌렀다. “강헌이 왔니?” … … 그 날따라, 그 정겨운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러도…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이의 심정이 그렇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 빛이 하나둘씩 입장하며 밤이 왔음을 아우성쳐도, 그는 간절히 기다린다. 상대가 나와 반겨주기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리도 간절하시다. 초인종 몇 번 누르고 인기척 없으면 제 갈 길 가는 DHL맨의 마음과 엄연히 다르다. 그는 우리와 대면하기를 원하신다. 말씀하고파 하신다. 들려주고 싶으신 그의 마음 표현이 하늘 가득하다. 자식에게 무엇이 최고로 좋은 지 아시기 때문에, 그것이 자식이 좇는 것들과 다름에 새하얀 탄식으로 안타까와 하시며, 그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약사발을 내팽개치는 아픈 아들의 투정에도, 병마로 입맛을 잃은 아들이 찡그리며 뿌리쳐도... "밥 한 술만 더!" "한 술만 더…" 아비의 마음으로 가여운 마음으로, 하나님은 병약한 아들에게 생명 양식을 먹여주시려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절실한 마음으로. 내가 병들고 약하고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가 내 문제에 왜 이리 애타하시는 지 깨닫지 못하는 한, 나는 그 문을 열 수가 없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2024-07-29
-
고통이 즐거운 이유‘100세’시대라고 한다. 60세가 지나 환갑이 되면, 장수하셨다고 축하하며 온 가족/친지들이 모여 ‘회갑연’이라는 인생 최대의 파티를 베풀었는데… 지금은 ‘회갑연’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인생 한창 때에 무슨 ‘장수’했다고 축하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건강하게 살까?’ 무거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 날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노년건강 전문의들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히 오래 사는 것’, 즉 ‘건강 수명’을 강조한다. 이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먹고, 재정을 관리하며, 노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건강 수명을 오래 유지하기위해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항상성(恒常性): 여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체의 각 기능이 균형있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 뇌과학에 의하면, ‘통증’과 ‘쾌감’은 뇌의 동일한 부위(뇌섬엽,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 등)에서 처리된다고 한다. ‘통증’과 ‘쾌감’은 상호작용을 통해 불쾌감/유쾌감에 대한 다양한 감정정보를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1). 눈을 즐겁게 하는 숏츠에 한동안 빠진 후, 또는 짭조름달콤한 허니버터칩 한 봉을 먹어치웠을 때, 순식간에 불쾌감이 밀려들지 않는가? 꼼작하지 않고 두어시간 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한 책만 바라보는 독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시간이 즐겁다는 역설은, 내안에 무언가로 채워졌다는 포만감, 새로운 생각으로 내 좁은 시야가 넓어졌다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을 헉헉대며 올라가는 등산이 즐거운 건, 고통 후에 정상에서 부르짖을 “야호”가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을 다루고 처리하는 뇌의 한 영역에서, 50:50 절대 균형(Equilibrium)을 향해 이 둘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다. 한쪽이 반 이상을 점령하면 다른 한쪽이 가만 있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의 다이내믹한 조합의 연장선이다. 이 둘 간의 균형이 깨져, 즐거움의 무게추가 바닥을 향해 내려앉으면 고통의 무게추가 올라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경고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반작용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자기조정을 위한 정상적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을 ‘권태’라고 지적한다. 삶에 무료함이 들어오면, ‘어디 재미있는 것 없을까?’하고 더 짜릿한 자극을 찾는다. 더 큰 욕구가 밀려온다. 만족시키기 훨씬 더 어려운 욕망이 물밀 듯 들어온다. 절대 균형, equilibrium이 무너져내린 상태이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쯤의 고통과 불행을 필요로 한다.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배안에 무거운 물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소원이 마음 속에 생기자마자 바로 충족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소일거리로 삼아 세월을 보내게 되겠는가? 아마도 권태가 밀려 들어올 것이다… 행복에 대한 최대의 적은 무료함, 권태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욕구와 만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이때의 행복은 지극히 짧다. 금세 무료함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2)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근심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명확히 알아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고 불행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행복을 상기하게 된다.”(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의 시기는, 잊고 살아왔던 소중한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감사하게 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클수록 절대주권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돈독해진다.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에 철썩 같은 그분의 신뢰가 있기에 그러한 상황을 그가 허락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창 22)은, 그에게 이를 감당할만한 믿음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신뢰하셨기에 그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종 하갈에게서 자식을 얻은(창 16:15-16) 그때의 초라한 믿음 정도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시험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자신의 주변을 엄습해올 때,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고난이 해결된 결과보다 잃었던 삶의 균형, 항상성을 되찾아가는 고통속 과정이 중요하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무너져 내린 ‘항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게 필요한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어둠이 짙게 엄습해올수록, 항상성의 균형을 회복케하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의지해야한다. 고통속에 견디어 내는 과정이 내겐 즐거움이요, 주님께 영광이다. (1) Soo Ahn Lee, ‘Brain representations of affective valence and intensity in sustained pleasure and pain’, PNAS(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June 11 2024,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0433121 (2)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서울: 동서문화사, 2016), pp 17, 27, (3)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pp 75-76, 84 *Recommended Music: "Thank you for joy, thank you for pain", https://www.youtube.com/watch?v=6cnueS9Duis2024-07-26
-
고난의 때에 생각하라고난의 때에는 주께 물어야 한다. 고난은 주님께서 동역자로 사용하시려는 자신과 그분 사이에 벌어진 생각의 틈을 조정하시려는 특별한 장치이다. 그 간극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시간이다.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전 7:14). 그런데, 이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위로 받을 때가 아닌데도, 죄를 깨닫고 뉘우칠 상황인데도, 문제가 해결되기전에 미쳐 깨닫지 못한 중대한 것이 엄연히 있는데도… 우리는 성급하게 위로 받고자 한다. 고난의 형극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급한 기도를 한다. 위로해달라고 한다.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다. 복 달라고 한다. 뉘우쳐도 진솔하지가 않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종교적인 형식만 갖춘 채 대충 회개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그분을 위한, 그분에게 드리는 향연이다. 그분께서 흠향하시는 향기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이기를 위해 자신이 맡으려고 내뿜는 기도의 향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7-38). 이렇게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를 하고, 기도해도 변함없는 상황 속에서 ‘기도해도 소용없네!’ 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폄하하고 치부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격정적으로 몰아닥치는 고난의 파도앞에 도저히 견딜 수 없거든,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뒤돌아 볼 여유도 없거든… 이 영적 위경의 상황에서 부르짖을 바는 제발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간구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고통의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이 내게 엄습할 때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건져내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다. 기도와 간구로 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는, 내 앞의 문제를 뚝딱 해결하셔서 위경에서 즉각적으로 구출해주시기 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셔서 고난의 상황에서 믿음으로 벗어나길 원하신다. 마치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현명한 아버지처럼.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나의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신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부정적으로 일어난 상황 앞에서 이에 대한 반응이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우리는 눈앞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태도 때문에 오히려 더 동요한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따라, 더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1)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참혹한 인생의 무게 앞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 자신의 영혼을 간수하는 것이 삶의 참 의미이다. 밭의 감추인 보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귀중한 생명의 근원을 지키려면,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어야 한다. 밀까부르듯이 우리를 항상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일을 멸하신 그분의 성취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바로 코끝에 밀어닥친 사망의 위경 앞에서, 다윗은 항상 주를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켰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고난에서 벗어난 결과보다, 고난 중에 인내하는 과정이 주님께 영광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 인생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의 사역이다. 버티어 내는 것이 주님께서 부르신 자의 일이다. 주님께서는 ‘문제 해결’보다 문제 앞에서 선 나의 ‘믿음의 태도’를 보신다. 고난의 격랑 속에서 견디어 내는 모습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찬사를 아끼지 않으신다. 고난 중에 갈 바를 몰라 어찌 할 줄 모르는 나를 보고 좋아라 손뼉치는 원수의 눈 앞에, 패배당한 적군 앞에서 연회를 만끽하는 승자처럼 상을 베풀어 주시고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괴로울 때 그 사람이 생각나고… 슬플 때에 저 사람이 아쉬울 때… 문제의 심각성은 더 깊어진다. 그 사람에게 더욱 섭섭하고, 저 사람의 도움이 절실한데 그것이 여의지 않는 현실에서 좌절의 탄식만이 뿌옇게 깊어만 간다. 나를 짓누르는 괴로움의 무게는 더욱 나를 힘들게 한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찬양 가사). 070624 (1) Robert Waldinger and Marc Schulz, The Good Life: Lessons from the World’s Longest Scientific Study of Happiness(London: The Marsh Ltd., 2023), pp 248-249 (2) Image from https://gospelcenteredfamily.com/.../a-guide-walking-loss...2024-07-07
-
비신자와 신자의 차이믿는 자와 비신자의 차이는, 자신에게 영생이 있고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영생이 있음을 수긍해도 그 가치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가의 차이에 있다. 이 땅에서 길게 살아봤자 100년 정도의 아주 짧은 삶과 영원한 삶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영생을 설계하고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앙적 입장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신자와 비신자, 즉 양과 염소로 갈린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모르면서 교회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수를 안다”는 의미는 단지 지적으로 알거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를 통한 ‘지/정/의’, 즉 지식, 지혜, 이해, 분별, 성찰(知), 감정, 사랑, 기쁨, 분노, 열정, 애정, 배려(情), 뜻, 의지, 결정, 선택(意)등을 포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 깨달음이다. 나는 결혼 전부터 내 아내를 알고 지금도 잘 알지만, 30년간 한 방을 같이 쓰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살아 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안다. 결혼 전 그녀를 피상적으로 알았던 수준과는 양적/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금과 비교해볼 때, 결혼 전 그녀를 알았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녀와 동반자의 삶을 지속할수록 그 전인격적 깨달음은 점점 숙성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1 2:3) 윗 구절에서 ‘알다’의 의미로 쓰인 헬라어 ‘γνωρίζω(그노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 그와의 관계를 통한 전인격적 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체험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를 체험하고 알게 되면 그를 향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높으시고 위대하신지 깨닫게 되면 그를 경외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을 두렵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듣게 된다. 그이 위대하심 앞에 나의 작고 초라하고 연약함이 보인다. 그가 커짐으로써 나는 작아진다. 내가 커지는 것과 내 능력이 강해지는 것과 정반대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에서 나온다. 순종이 힘들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나는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하지 말라. 사랑한다는 선포에는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주를 향한 경외함과 사랑에서 저절로 나오는 순종의 마음이 퍼부어 지는데 어찌 무덤덤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왔던대로 자기 원대로 자기 힘껏 함부로 살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6-7) 코람데오… 그의 사랑, 긍휼, 희생, 애통함, 당부, 계획 등에 대한 구체적 실체가 내 안으로 쏙쏙 들어와서 요동을 치고 마음을 휘 젖는다. 내 안에 그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알고, 내 삶의 주인이신 그를 믿음으로 내 안에 영접하면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작고 미세한 변화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엄청난 극단의 변화이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뀐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 내 영역, 우리 것에 대한 주장에 익숙하다. 그리고 주인의식, 주권, 책임감을 강조하는 사회는 자기 껏에 분명한 선 긋기를 더더욱 부추기고 있다. 여태껏 내 인생, 내가 살고… 누군가 자기에게 조언 한 마디 하려 하면, “됐어요! 내가 알아서 알게요.” “내 인생, 내가 주인이고 잘 돼도 못 돼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듯 우리는 자기 삶에 주인의식이 투철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권, 민권, 인권의식이 강해지고 강조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자아중심적 사고와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우리의 가치관을 사로잡고 있다. 기존의 전통, 사회규범, 절대적 진리도 자신의 가치관과 관념에 따라 쉽게 허물어진다. 그런데 가진 지식이 아무리 많고, 가진 재물 엄청나게 많고, 주변에 좋은 인맥 수두룩하고, 자신이 수십년간 준비하고 염원했던 계획들, 원하던 대로 빠짐없이 잘 되던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안 되는 일은 안된다. 누구는 절치부심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골백번 다짐을 하고 다시 해도 안되는 일은 안된다. 외부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의 거대함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미약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누구는 점을 보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잃었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본질이요, 믿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삶을 사는 것. 살아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을 해도 주님의 이름에 존귀함을 드리도록 일하고, 누굴 만나도 주님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 그런데 이것이 지적인 이해만 되고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전인격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은 상태가 되면, 가짜 ‘성화’의 상태에 빠진다. 마음밭은 온통 나, 나에 대한 것으로 꽉 차 있음에도, 입술로는 “주님, 주인님, 주인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준행하는 삶이다. 성화의 목표는 더 나은 인격, 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관계함으로써 그를 체험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은 그와 끊임없는 소통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그 통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다. 가짜 성화는 자신에게 집중하기에 기도를 자신의 영성개발의 용도쯤으로 여긴다. 기도 많이 하면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자부한다. 기도 몇 시간 한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 평상시 그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와 단절된 삶을 갖다고,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을 원 없이 펼쳐 나가다 뭔가 필요하면, 계획 중에 안 풀리는 문제가 생기면 램프의 요정 지니를 찾듯이 예수를 불러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은,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주인되신 그분에 대한 것이다. It’s about God, your Lord.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어도, 그가 주인 된 삶을 과연 내가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는 구원의 여부를 가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2024-04-26
-
전장터에서인간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이것을 한다 밥 먹으면서, 얘기하면서, 일하면서, 컴퓨터게임하면서도… 잠시도 이것을 멈추지 않는다. ‘생각’. 생각이 바로 나다. 지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이를 잘 나타내는 지표는, 자신의 구글 검색 히스토리 또는 유튜브 방문 히스토리를 눌러 보면 잘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관심과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인터넷에서 자신이 검색하고 수용한 정보들의 누적과 기타 다른 방법으로 보고 들은 정보들에 대한 취사선택한 결과치가 자신만의 ‘생각의 틀’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체계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인격(혼)을 세워가며,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결정을 유도하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이것을 잘 아는 마귀도 우리의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힘쓰고 애쓴다. 영적 전쟁은 내 ‘생각’ 밭에서 벌어진다. 가룟 유다도 사단에게 생각의 영토를 내주다가 망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생각은 마음과 연결된다. 생각이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하다. 생각이 선하면 마음도 선하다. 생각과 마음은 어깨동무하며 함께 다닌다. 마음이 악하면 생각도 악하다. 마음이 이기적이면 생각도 자기중심적이다. 창세기 6:5에 의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표현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the thoughts of his heart; KJV)’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우리의 생각과 마음 밭은 지구 최대의 영적 격전장이다. 이 치열한 영적 전장터의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 마귀는 열심히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두루’ 돌아 다닌다. 그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야욕은, 우크라이나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푸틴의 야심보다 2만배는 강력하다. 이를 위해 ‘두루 다니는’ 열심은 그의 특성이다. 신약과 구약에서 일괄되게 표현하는 그의 고유한 특징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마귀가 이리도 열심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졸지 않고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새벽 파숫군의 눈동자처럼,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각의 골격에 그와 비슷한 생각의 살들이 붙어 나가면 사고의 체계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의 틀이라는 패턴(pattern)이 형성되고, 이 패턴을 자신과 친화적인 정보체계라고 인식(pattern recognition)한 정보 알갱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러붙으며, 이 과정이 지속될수록 서로 끌어 당기는 관성의 힘은 거대해지고 요지부동한 사고 체계, 즉 가치관, 세계관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확립된 가치관은 웬만한 설득과 호소력 있는 읍소에도 요동치 않는다. 크리스천의 신앙 가치관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립되고 견고해진다. 반면에 진리를 대적하는 생각도, 동종의 생각 편린들이 함께 뭉쳐서 사고체계가 형성되고 가치관/세계관으로 자라나면 그것이 견고한 진이 된다. 더 이상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을 보아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마음 속에 세운 - 돌처럼 단단해진 - 가치관대로 취사선택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가치관의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세상 살아가는 상식과 대립되기도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품고 살아가는 말세 시대의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징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분명히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말씀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상반된 가치관, 사고체계가 자신 안에 또아리 틀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집착하게 하는 세상적 가치관, 세상임금 마귀가 집어넣는 생각,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막 4:19)이 자신 안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세의 징후는 배교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 크리스천이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다(딤후 3:5). 항상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한다(딤후 3:7-8). 이는 가치관의 혼란에서 비롯되어 믿음에 금이 가면서 시작된다.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수 많은 좋은 설교와 성경강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순전해야 될 크리스천의 마음과 태도와 삶은 더욱 더 뿌옇게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외형적으로 분명히 자타가 공인하는 교인인데, 집사인데, 장로인데, 이러한 영적 가치관의 혼란 속에 빠져있어도,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한다.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설교는 수려하고 빼어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올바른 뜻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성도의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마 28:20). 성경은 삶의 참고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되는 매뉴얼이다. 매뉴얼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세월 앞에 쉽게 망가지는 가전제품처럼 망하고 만다. 매뉴얼(성경말씀)대로 자신을 관리하며,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미혹된 자이다(약 1:22). 말로만 “주여! 주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마 7:21). 말로만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그쯤이야 괜찮다”는 생각, “다들 그렇게 하던데…”하며 자위하는 생각을 은밀히 주입하는 마귀를 결박시켜야 한다. 한 번 당하면 계속 당한다. 한 번 양보한 전장터는 더 큰 퇴각을 예고한다. 내 안에 살포시 들어온 조그마한 분이 죄를 잉태한다(엡 4:26-27). 그 조그만 것이 미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을 잉태한다. 부지런하고 열심인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후회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바로 멈춰야 한다. 우물쭈물 방치하는 사이, 마귀가 순식간에 부지불식 들어온다.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 혼자 깨어 있기 힘들면, 깨어 있는 자 옷깃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교회의 힘이다. 이러한 영혼의 간절한 몸부림마저도 없으면, 예수 안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진지하게 짚어봐야 한다(고후 13:5). 031124 *image from https://studyandobey.com2024-03-19
-
비 온 뒤하루 종일 추적대던 빗줄기처럼 마음 속 상념은 내 심산(心算)을 어수선하게 흔들어 대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물 속에 산을 안고 파르르 떨던 호수처럼… 비가 온 뒤 호수는 아무런 파장도 없고 의연해졌다. 그에게 내비친 메타세콰이어는 일그러지고 굽어짐 없이 쭉쭉 뻗은 자태 그대로이다. 안정을 찾은 호수는 자기를 찾은 나무와 꽃과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고요한 호수는 내게도 평안 가득 선물을 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호수와 자연과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큰 행복이다. - 창원대 산책길에서 09:30pm, 0229242024-03-03
-
주셔도 다 주시지 않는다달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한밤 중,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갑자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계속 말씀을 주신다. ‘꿈이겠지’하며 곤한 육신, 계속 잠자기를 고집하며 비몽사몽 중에 버티면서도 들리는 그의 말씀은 또렷하다. “내가, 네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도 다 주지는 않는다.” “평생 공급이 끊이지 않고 필요가 충족된 상태에는 갈급함이 없다.” “내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한국에 사역하러 나온 지 훌쩍 4년이 가까와온다. 평생 동안 겪어본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갈급과 결핍을 겪는 나에 “들으라!” 하신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필요의 여백이 나를 살린다. 의지하게 한다. 두드리게 한다. 부르짖고 구하게 한다. 오뉴월의 가뭄 끝에 악착같이 살아내려는 마른 뿌리의 간절한 생명력에, 한여름 장대비에 대한 소망으로 꽉 차오른다. 단단한 콘크리트 아스팔트 바닥에 숨이 막힌 채, 생명의 빛 줄기를 향한 여린 싹의 애타는 몸부림은 아스팔트의 초극세 빈틈을 찾아내게 만든다. 결국 그 빈틈을 뚫고 빛을 만나고 만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윗 구절에서 시냇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פֶּלֶג(펠레그). 자연의 상태에 있는 시내가 아니다.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농부가 인공적으로 물을 댄 수로(channel)이다.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돌보는 과실수처럼, 자연 상태에 있는 나무들도 하나님께서 세심히 돌보심으로 철을 따라 과실을 맺는 형통한 나무가 된다는 말씀이다. 습기 하나 없이 메마른 지 꽤 오래된 땅에 서있는 나무도 때가 되면 푸른 잎사귀 내고, 과실을 맺도록 돌보신다는 것이다. 오랜 춘궁기에 시달린 깡마른 표범에게는 결핍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날렵함이 있다. 살기 위해 잡아 먹어야 하는 간절함이 있다. 일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그는 말랐지만 민첩하고 사납고 강인하다. 때가 되면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 먹으며 일상을 보내는 동물원 사자는 무기력하다. 매일을 쿨쿨 잠 자는 것으로 꽉 채운다. 그의 졸리운 눈은 2/3 가량 감기운 채, 낙도 희망도 생명력도 없어 보인다. 그를 바라보는 창살 밖 관람객도 축 처진다. 필요할 때 언제나 자기 보다 작고 약한 동물을 잡아 먹고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힘세고 용맹스럽던 동물들은 쉬이 멸종됐다. 지금도 멸종 위기에 있다. 맘모스, 티라노사우르스, 벵갈 호랑이, 골리앗 개구리, 아프리카들개 리카온… 반면에, 작고 미약해서 남에게 쉽게 먹잇감이 되던 동물들은 오랜 시대를 거쳐 종을 이어가고 있다. 사슴, 영양, 새, 벌레들… 덩치 크고, 날렵하고, 사납고, 힘센 자는 빨리 멸하고, 작고, 가녀리고, 약해서, 남에게 쉽게 당하는 자는 오래 간다는 패러독스가 지구 생성 이후 역사를 통해 증명된 진리이다. 가장 오래 사는 종은 가장 약한 것. 살기 위해 항상 깨어있고, 자기 생명을 지키려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가녀린 종들이다. “Winner lives short, loser survives long.”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0124242024-01-24
-
When I feel small한 해를 마무리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내게 최근 열흘간은 별로 좋지 않았다. A형 독감이 나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특히 밤중에 심했다. 오한에다 머리는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예리한 통증으로 매일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육신의 병마는 쏜살같은 속도로 나의 멘탈까지 무너뜨린다. 속수무책, 이불 속으로 움츠러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력감이 밀려 들어오고, 아무 연고도 없는 창원엔 “왜 왔지?”하는 자조적(自嘲的)인 생각마저 나를 휘감는다. 나쁘고 망할 생각임을 앎에도 쳐들어 오는 적군을 막아낼 힘이 없다. 앉아서 그냥 당하는 형국이다. 영혼마저 파리해져 기도는 하지만 간절함은 없다. 오늘 몸상태가 한결 좋아진 것이 느껴져, 정오의 찬란한 햇살을 잔뜩 품에 안고, 평소에 전도했던 지역 상점, 식당들에 마실갔다. 전도자에겐, 상대방의 무관심이 가장 두렵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든다. 평소 데면데면 했던 컴퓨터수리점 사장님이 오늘은 웬일인지 나를 반긴다. 그 동안 감기 때문에 못 왔다고 하니까, 뜨거운 도라지차를 내놓는다. 개업한 지 반년이 되어가는 국수집 여사장님은, 식당 하기 정말 힘들다며 이것 저것 푸념을 내놓는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상대방에게 토로하면서 푸는 스타일인 것 같다. ‘그래, 들어 주는 것도 전도다!’라는 생각으로 간간히 맞장구를 쳐가며 약 2시간을 귀담아 들었다. 오랜 시간 듣기만 한 후, 복음의 메시지로 반응을 하니, 듣는 이도 이미 부드러운 심령이 되어 있었다. 전도자의 전하는 말씀에 겸손히 경청한다. 올 봄 해군에서 제대한 후 시작한 차량광택서비스점의 젊은 사장님은 주문 들어 온 차량에 필름을 입히는 정교한 작업을 하느라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뜨거운 커피와 도넛을 의자에 놓아두고 나왔다. 그래도 사업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 이렇게 일감이 꼬리 물 듯 들어오니 내가 기뻤다. 30대 중반 아직 미혼인 최사장님은 도넛전문점과 호주식 레스토랑, 두 개의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플랫 화이트를 주문한 내게 커피를 갖다 주면서, 내 앞 빈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그가 대화를 주도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인생, 결혼, 가족 등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오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말미에 자신이 경영하는 도넛전문점 아래의 창고가 비어있는데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출입문 비번을 알려주면서 들어가서 보라고 한다(사진 참조). 오늘 오후, “I will build my church(마 16:18)!” 선포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또렷이 실감케 하셨다. 창원에 내려와 전도를 하면 할수록, “교회가 어디예요?”라는 질문에 대답할게 없었던 전도자에게 큰 위안과 선물을 주셨다. He cares for me even when I feel small.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010324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