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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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그럼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를 외쳤던 마틴 루터의 구호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롬10:10).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다윗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오직 믿음을 잘 지켜 부활의 날,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핵심아니던가? 사도들과 그들의 무리들이, 채찍질과 결박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던가(히 11장)? 그런데 그보다 더 귀한 가치는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의 좋은 것, 맛난 것, 세상낙 다 즐기지 못하고 절제하며, ‘거룩’이라는 부담되는 옷을 입고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이유는, 소망때문이 아니던가? 믿는 자마다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요3:16). 믿는 크리스천과 믿지 않는 이의 다른 점은 이 소망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가(살전 4:13)? 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 믿는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자 아닌가(고전 15:19)? 그런데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랑. 예수는 사랑으로 오셨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은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다(요3:16).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때문에(갈2:20) 우리가 비로소 죄로부터 자유하고 영멸의 심판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게 되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사지로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소망도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신약의 산상수훈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건생활에 중요한 계명이 쉐마(Shema), 즉 신명기 6:4-9 구절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는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고, 강론하고,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마을입구 문에 기록하라고 하셨다. 왕과 백성관계라는 단지 계약적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만으로써 하나님의 명하신 사랑을 그들이 지켜낼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뜨거운 감정 없이는 지키기 힘든 계명이다. 나의 영국주재시절,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상사하고 잘 지내라." "넓고 길게 봐라." "어머니께 안부 전화 자주하고..." 그 말씀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명심하고 지키려 힘썼다. 오래 살아보니 맞는 말씀이라서라기보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기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이의 말씀이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당부이기에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부둥켜안고 지키려고 애썼다.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으로 교감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랑없는 믿음은 소리나는 구리요, 사랑없는 소망은 울리는 꽹과리이다. 하나님과 서로 사랑을 주고 나누는 관계가 튼실하면 이웃을 향한 수평적 사랑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믿음은 거짓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이웃사랑은 당연한 태도이요 자연스러운 향기이다(요1 4:20).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이라고 해서, 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건강할거라고는 보증못한다. 평화, 박애, 사랑을 외치고 실천하는 수많은 진보적 교회들이 정작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인본적으로 해석하고 스스로에게 관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그의 계명 앞에 겸손하여 순복할 수 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2024년 새해를 맞이 하며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복 주시길 간구하기보다 내가 주님 사랑으로 더 뜨거워지길 그 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짐한다. 010824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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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때내 마음속에 우러나는 헌신은 나를 뿌듯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와 다른 길을 걷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때가 아니라면 그 틀린 길을 가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오는데 수 년,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6-38) 122123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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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전도자의 깨우침]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 " 이보다 먼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다.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존재로부터 사랑에 대한 기대와 그에게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지 않은 자의 의문은 "Does God really love me?"가 아니라 "Is here God?"에 있다. 전도자에게는 이 의문에 확신을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121423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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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눌려 있을 때타국 땅과 같은 객지에서, 가족을 떠나 홀로 사역 생활을 한 지 3년이 되어 간다. 게다가 이제 이사온 지 한달 정도 된 창원은 내게 꽤나 낯선 이방 땅과 같다. 고독이 이렇게 서럽고 힘든 건 줄 몰랐다. 엊그제 영국서 온 짐들을 풀어 정돈하니, 온갖 상념과 회상이 나를 짓누른다. 마음을 바로 잡고 오늘 늦은 오후에서야 이번 주 주일설교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은 사무엘서의 ‘순종’에 대한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참혹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다. 이렇게 죽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몸이 찢기며 피를 쏟고 피범벅이 되어 죽었으니, 너도 내 희생을 깨닫는다면 나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치른 대가에 대해, 상응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보답해야 하지 않겠니?” 이러실까? “아이구, 주님! 저 때문에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모진 수모와 조롱 속에서 죽으셨는데, 이 한 몸 주를 위해 바치겠나이다.” 이렇게 뜨겁게 헌신하는 태도도 귀하지만… 주님께서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정작 원하시는 바는 ‘순종’이다. 당신의 바람, 당신의 당부, 당신의 명령에 대한 순전한 순종. 앞서 말한 가족에 대한 상념이 주는 무게도 만만치 않지만, 교회개척에 대한 부담감 또한 적지 않다. 매일 아침 창원극동방송을 듣는데, 당당히 자신들이 담임하는 교회이름을 내걸고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부럽다. ‘언제 수많은 우리교회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그 날이 올까?’ 불확실한 앞날에 한숨이 나올 뿐이다.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힘없고 나약한 자신의 손에 의탁해봤자 탄식이 나오고, 푸석한 환경만 바라보다 의기소침해진다. 이것이 지난 화요일 영국 이삿짐 도착 후 3박4일간의 일기(日記)이다. 내가 아무리 산과 같은 고민에 눌려 있어도 내 안에는 여전히 빛이 비추고 있으며 외딴 섬 등대지기와 같은 고독이 밀려와도 주님은 여전히 나를 눈여겨 보고 계시다. 주님께서 하신다고 하시지 않는가?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자신이 세우신다고 하시지 않던가(마 16:18)? 나의 주인, 나의 대장(大將), 멘토이신 그 분을 신뢰하여 순종하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주일 설교 때문에 거룩한 부담감 때문에 성경을 펼쳤지만, 말씀이 심령에 들어오니 내 안의 빛이 안아주는 포근함이 밀려든다. 이것이 말씀 전하는 자의 유익 아닌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112423 *사진: 오늘 오후 창원대에서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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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17년전 영국에 주재 나온 후, 첫 해외출장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연이은 회의와 식사 미팅 등으로 피곤과 스트레스로 지친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으로 간절했다. 내 ‘집’은 한국에 있는데… 그 집은 남에게 전세주고 나왔지만 그 집이 바로 그리운 내 집인데… 한국을 떠나 영국에 부임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렌트로 살고 있는 런던 집이 내 ‘집’이라니… 그 곳이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내 ‘집’이라니… 실소(失笑)가 절로 나왔다. 세계 어느 도시에 있던, 어떤 장소에 있던, 보고픈 아내와 아들들이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다. 그 곳에는 참 쉼이 있고, 비빌 언덕이 있고, 가족들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훈훈한 곳이다. 평안과 안식을 주는 물리적 공간이자, 위안과 포근함을 주는 정서적 공간이다. 경제적 거래가 주는 가치를 중심으로 일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무관심과 냉담, 이기와 경쟁이 가득한 곳으로부터 이동하여 깊은 안식의 숨을 들이킬 수 있는 마음의 쉼터이다. 한 부잣집 아들이 집을 떠나,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하며 세월을 보내다 결국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며 돼지 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에게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허락되지 않았다. 늘 허기지고 처량하고 고독한 신세. 어찌 아버지의 사랑과 위로와 보살핌이 있는 ‘집’이 사무치게 그립지 않겠는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17-20) 영국에 15년 살면서, 나에게 그런 집이 또 하나 있었다. 분당에 부모님께서 사시던 집. 객지생활이 오랠수록, 심신이 지쳐갈수록, 위로와 충전이 필요할수록 그 집이 그립다. 어머니 밥이 그립다. 내 아버지는 부자는 아니셨지만, 절제의 사랑은 누구 못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달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본가에 찾아 뵈면, 그 분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자신하는 말씀들을 적당한 때에 적당한 빈도로 하셨다. 경황없다는 이유로 처신과 처세의 천박한 습관에 발을 담그려 할 때면, 육중한 인생의 무게 아래 그 분의 말씀이 기본으로 나를 돌려놓았다. 그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는 서울 형님댁 인근으로 이사하셨다. 영국에서 그녀의 소천 소식을 듣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한여름 서울, 작열하는 햇살은 독수리 부리마냥 내 살을 사정없이 쪼아댔다. 온몸을 땀으로 적신 나는, 어머님댁 아파트 문밖에 섰다. 벨을 눌렀다. “강헌이 왔니?” 그 날 따라, 그 정겨운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러도… 부모께서 생존해 계시지 않으니, 이제 그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조금 더 있으면 나에게, 아내와 아들들이 살고 있는 ‘집’의 개념이 달라질 것 같다. 내년 2월이면 아내도 한국으로 돌아와 같이 교회개척을 위하여 동역하게 된다. 아들 둘은 런던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자신들의 ‘집’을 세우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지? 이젠 아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다. 가급적 아들들이 자주 연락하고 소식도 전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 Photo taken in Praha, Aug 2007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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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시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 고백(confess), 탄원(lament), 찬양(praise), 감사(thanksgiving)의 형식을 통하여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 찬양, 예배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이 납득하기 쉽지 않는 ‘저주시’들도 있다. 시인은, 억압하는 자들 아래서 고통 받는 자신의 아픔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악인들을 심판해달라고 간구한다. 대표적으로 시편 109편은 크리스천으로서 참으로 입에 주어 담긴 힘든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 찼다.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7)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8)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9)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0)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11)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12)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13)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14) …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가르침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접하기 힘든, 원망, 불평과 상대의 저주를 구하는 시편들도 우리에게 교훈적인 측면이 있다. 시편 3:1-2를 예로 든다면, 저자는 자신의 주변에 적들이 너무 많으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도 소용없다면서 좌절케 하는 이들이 많다며, 참으로 무엇인가 잘 못 되었다고 탄식을 한다. 그러나 결론으로써,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를 신뢰한다. 시편 109편도, 예외 없이 상대가 잘못되기를 기도했지만, 주님을 신뢰하며 그의 구원을 향한 갈구와 함께 종결된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30)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31) Singer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나는 기도할 뿐이다”(1) 고 고백했듯이 시편에서의 투덜댐, 불평, 분노, 탄원들은 더 이상 나쁜 쪽으로 발전되지 않고, 오히려 절대자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확신으로 승화되는 전환을 가져온다.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들을 도와주신다”는 사실에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뢰가 있다. 시편에서 다루는 ‘고통의 문제’는, 우리에게 고통 앞에서 그저 참고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처리하는 다른 방법도 있음을 제시한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불평, 미움, 저주의 감정을 주님 앞에 벌거벗고 다 드러낸다. 종교적으로 습관에 밴 거룩의 치장이 전혀 없다. 솔직히 나도 가끔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쌍시옷 소리가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누구를 OO하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적도 있다. 단지, 신앙심으로 그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내뱉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다 아뢴다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시편의 시인은 다른 방법으로 그 더럽고 악하고 추한 감정을 배설한다. 그 악한 저주의 말을 사람 앞으로 가져가지 않고, 주님 앞에서 솔직히 거리낌 없이 토해낸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구한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는 신약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시인처럼 원수를 향한 거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편에서 최소한 도전 받는 것이 있다. 나의 답답한 하소연, 끝까지 들어줄 사람 이 세상에 누가 있으랴? 답이 없는 갑갑한 사연일수록 아무리 친한 친구도 오랜 시간 인내하며 들어주는데도 한계가 있다. 시인에게는 절대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솔직히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교제가 있다(2). 그리고 그 거친 마음, 악한 말이라도 끊지 않고 다 들어 주시는 친한 벗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다. 이것이 시편의 ‘저주시’가 우리에게 참 신앙에 대한 도전을 주는 이유이다. (1) Issac Bashevis Singer의 말을 Eugene A. Peterson, Answering God: The Psalms as Tools for Prayer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9), 36에서 재인용. (2) 이에 대한 나의 심정을 기록한 글은 아래 참조: https://www.facebook.com/kanghun.lee/posts/pfbid09a7LQwgTXEVPv3FbUFsWCzyJgXvmmPqWLYVQPQGp3Tws2jJQ1ASb94abcMppKjzzl * image from https://bibleversestogo.com/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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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나를 겸손케 한다연분홍 한복 곱게 입고 잔뜩 수줍어 하는 새색씨처럼 새벽의 여명은 그렇게 세상을 찾아 든다. 살포시… 겸손하게… 드러나지 않게… 한낮의 폭염처럼 사납지 않아도 한여름 장대비처럼 목청 높이지 않아도 엄동설한 북풍처럼 날카롭지 않아도 봄날의 햇살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그에겐 힘이 있다. 요지부동 견고한 시멘트 콩크리트처럼, 밤새도록 떡하니 왕처럼 버티고 있던 칠흑 같은 어둠을 내몬다. 소리도 없이, 젠틀하게… 새벽 앞에 나는 겸손해진다. 여전히 졸리고 곤하고 다시 누웠던 자리고 돌아가고픈 내 육신의 연약함을 실감한다. 어젯밤까진 잘 버텼는데, 새벽을 맞이 하니 오늘 살아갈 세상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쿠바산 코히바 시가가 뿜어대는 매운 연기보다 칠십배는 더 진한 인생 수십년간 꾹꾹 눌러온 탄식과 한숨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날숨은 나를 겸손으로 내몬다. 내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내 힘으로는 턱도 없는 산더미 같은 일과 사건들 앞에 나는 땅꼬마다. 내 힘으로 안 된다. 내 능으로 되질 않는다. 절대자를 의지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황혼의 지는 해는 나에게 안식을 주지만 새벽의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082423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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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없는 이유친구로서 으뜸가는 자질은 한결같음이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승승장구할 때는 가깝게 지내다가, 부와 명예가 쇠락해진다 싶으며 슬며시 거리를 두는 반짝 친구는 참다운 벗이라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잠 14:20)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잠 19:4)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찌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잠 19:6-7) 진정한 친구는 형제보다도 더 친밀하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잠 18:24) 이러한 벗들은 항상 우리의 곁을 지켜준다. 진정한 벗은 서로를 세워주며 진실된 관심과 애정이 듬뿍 담긴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때론 필요할 때 권고하며 꾸짖기도 한다. 면책(REBUKE)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wound)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잠 27:5-6)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 진정한 벗은 외과의사처럼 친구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칼을 들기도 한다. 친구 사이의 예리한 권면은 친구를 바로 세워준다. 친구 간 건전하고 건강한 의견 충돌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지혜로와진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 27:17) 그래도 친구 사이에 실망하는 법이 없다. 어떤 생각도 저울질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재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할 이야기를 쏟아내는 편안함이 있다. 쭉정이와 알곡을 한데 섞어 놓은 것처럼 서로 생각이 다름에도 신실한 손이 그것들을 걸러내어 남겨 둘 가치가 있는 것은 챙기게 하시고 나머지는 긍휼의 입김으로 날려 보내신다는 확신이 있다“ But oh! the blessing it is to have a friend to whom one can speak fearlessly on any subject; with whom one's deepest as well as one's most foolish thoughts come out simply and safely. Oh, the comfort - the inexpressible comfort of feeling safe with a person - having neither to weigh thoughts nor measure words, but pouring them all right out, just as they are, chaff and grain together; certain that a faithful hand will take and sift them, keep what is worth keeping, and then with the breath of kindness blow the rest away.”(1) 진정한 우정은 공통의 관심사 또는 동일한 대상을 향한 갈망을 바탕으로 한다. Ralph Waldo Emerson은 이러한 공통점이 서로가 다른 기질을 가졌음에도 서로가 가진 각기 다른 배경, 관계, 나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재지 않고 서로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만든다고 한다.(2) CS Louis도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에세이를 통해, “너도?”라는 탄성에 우정의 핵심이 있다고 말한다. “나눌 만한 것이 전혀 없고 딱히 가고자 하는 곳도 없다면 그는 절대로 여행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그저 친구만 원하는 이들에게 벗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고, 이렇다 할 취미도 없으며, 삶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과 목표가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3) 우정은 오로지 동일한 비전과 열정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남들이 갖지 않은 독특한 동질성이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좇으며 그의 삶을 본받으며 그가 예비하신 영생을 진지하게 준비하고자 하는 비전과 소망이 있다. 성격, 기질, 계층, 문화, 인종, 학력, 인생사 등에서 비롯된 모든 차이를 덮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동질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서로 교제하고 있다. 이는 바로 동일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앙의 여정에서 뜨겁고 진실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서로 솔직하게 자신의 죄에 대해 고백할 뿐 아니라(약 5:16),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허물을 사랑으로 지적해줄 수도 있다(롬 15:14).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신앙의 벗들에게 단호하게 바로잡아 줄 권리를 주고(갈 6:1), 사망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어야 한다(히 10:24). 이따금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래야 한다(히 3:13). 또한 믿음의 벗들은 서로 짐을 나눠지고 있다(갈 6:2). 벗이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면 소유는 물론 생명까지 나누며(살전 5:11, 14-15),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야 한다(히 13:16, 빌 4:14, 고후 9:13). 친구들을 존중하고 인정함으로 서로 세워 주어야 한다(롬 12:3-6, 12:10, 잠 17:2). 상대를 알아보고 은사와 장점, 능력을 끌어내야 한다. 함께 공부하고 더불어 예배하면서 믿음을 키워가야 한다(골 3:16, 엡 5:19). 기질과 성품, 성장 배경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가 너무 달라 인간적으로 보기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아도, ‘서로 세워 주는’ 신실한 우정을 쌓아갈 수 있다. 우정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점차 깊어가는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영적인 우정은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여정이다. 목적 자체가 지극히 고상하고 심원하지만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이를 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1) Dinah Maria Mulock Craik, A Life for a Life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877), 169 Dinah Maria Craik (born Dinah Maria Mulock, also often credited as Miss Mulock or Mrs. Craik) was an English novelist and poet. She was born at Stoke-on-Trent and brought up in Newcastle-under-Lyme, Staffordshire. After the death of her mother in 1845, Dinah Maria Mulock settled in London about 1846. She was determined to obtain a livelihood by her pen, and, beginning with fiction for children, advanced steadily until placed in the front rank of the women novelists of her day. She is best known for the novel John Halifax, Gentleman (1856). She followed this with A Life for a Life (1859), which she considered to be the best of her novels, and several other works. She also published some poetry, narratives of tours in Ireland and Cornwall, and A Woman's Thoughts about Women (1858). (2) https://emersoncentral.com/texts/essays-first-series/friendship/ “My friends have come to me unsought(재지않고). The great God gave them to me. By oldest right, by the divine affinity of virtue with itself, I find them, or rather not I, but the Deity in me and in them derides and cancels the thick walls of individual character, relation, age, sex, circumstance, at which he usually connives, and now makes many one. High thanks I owe you, excellent lovers, who carry out the world for me to new and noble depths, and enlarge the meaning of all my thoughts.” (from It’s one of blessing of an old friend) (3) C. S. Lewis, The Four Loves (New York: Mariner Books, 1971), Chapter 4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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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사랑한다면정치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애국애민’이다. 이 점에서만은 보수당도, 진보당도 똑같다. 그것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혹자는 자기 편 잇속을 가능한 배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이루려 하고, 혹자는 애국이란 대의로 포장했지만 실은 자기 것 챙기기 급급한 정치인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 구호뒤에 숨겨있는 그들의 진심을 보고 싶어한다. 우리 크리스찬들도 늘 하는 표현이 있다. 골백번도 더 했을 것이다.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서로 교제하고 하루를 정리한다. 교회마다 작건 크건 갈등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지역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몸이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군상들은 하나같이 하자 많은 인간들인지라, 실수와 문제와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 내의 갈등의 정도가 심할수록, 양쪽 다 심하게 나오는 이유가 똑같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교회의 일에 열심이고, 열심인 만큼 그 갈등도 폭발적으로 강렬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그토록 자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의 속내가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7) 얼마전 TV에서 소년원에 관련된 특집다큐멘타리를 본 적이 있다. 한 소년은 일찍 부모를 잃고 16년간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다. 중죄를 짓고 소년원에 들어왔지만, 출소하면 다시는 죄짓지않고 착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이 꿋꿋하다. 자기만 바라보고 살아오셨던 할머니를 향한 사랑이 남달리 애틋하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삶을 살겠다는 견고한 다짐의 원천은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사지로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소망도 무가치하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다. (고전13:13) 그래서 더욱 큰 은사, 사랑을 사모하라고 하신다. (고전12:31) 수원사업장에 출퇴근하며 직장생활하던 시절, 퇴근버스를 타고 양재역에 내리면 혼잡한 대로보다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서 귀가하곤 했다. 골목길 전봇대에 붙어있던 사채업자 광고스티커. 마른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당장 급전이 필요한 이들을 유혹하는 현란한 문구로 가득찼다. 돈 때문에 딱한 처지에 있는 서민의 약점을 악용하여 무려 연리 8000%에까지 달하는 살인적인 이자를 받아 챙기는 고리대금사채업은 분명히 불법이며 악독하다. 광고문구 맨아래에 이렇게 써있었다. “※주일은 쉽니다.” 수많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권력형비리를 저지른 고위공무원, 정치인들… 검경찰이 작성한 수사일지를 보면 그들의 일요일은 유난히 특별한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교회예배참석”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부흥만 된다면, 거룩에 약간 흠집이 생기더라도 문제 없어들 하는 것 같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사역, 사람들만 꾸역꾸역 모여준다면 거룩에 균열이 가더라도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을 외치며 의연히 제 갈 길 꾸역꾸역 가는 것 같다. 죄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라면서 열심히 갈등하고 마침내 거룩의 질서를 잃고 서로 멱살잡고 싸운다. 결국은 주님앞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법정에 도움을 청한다. 하나님께서 앉으실 거룩한 자리에 어느덧 날이 날카롭게 선 이성과 논리와 비방으로 가득찬 인본의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짠 맛을 잃은 소금, 거룩의 맛을 잃은 성도, 거룩의 빛을 잃은 교회.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가,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지도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면(마5:13-15), 교회를 세우신 그분께 무엇이 될까? 나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큰 교회를 섬기는 성도일수록, 더욱 더 영적긴장의 고삐를 죄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거룩하신 주님께만 집중해야할 본질적 영적생활에, 본의 아니게 영향을 미치는 기타 비본질적 요소들이 너무 많다. 성장, 부흥, 목표, 달성, 부서, 조직, 위계, 예산, 평가, 계획, 행사, 프로그램, 의전, 보고, 관리, 매입, 투자, 전략... 성경에는 있지않은 생경한 단어들이 교회의 일상 업무가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조직을 관리하려면 당연히 요구되는 세상적 기술(Secular Skills)이 기도제목이 되어버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장 전체를 통틀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권능에 대하여 자세히 열거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행하여도, 주를 향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예언하는 능력을 갖추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고전13:1-3) ‘사랑’이란 단어는 신자들의 입에서 참으로 쉽게 나온다. ‘예수사랑’. 마치 자신이 구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고 입밖에 내어 뱉는 나이 어린 꼬마 철부지처럼, 표현한 말과 실제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벧전1:16) 능력, 헌신, 봉사, 구제, 사역, 부흥… 다 좋지만 이것들 다 놓쳐도 거룩만은 끝까지 붙들어야한다. 아무리 성경을 36독을 하고, 신구약 구석구석을 훤히 꿰뚫고, 당대 최고 의술도 포기한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행하여도, 거룩을 놓치면 주님을 잃는 것이다. 주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히려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1-23) 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자질, 능력 같은 것들과 판이하게 다르다. 오히려 인생에, 심지어 교회 양적성장에 별로 도움 안되는 힘없고 무르고 약하디 약한 속성일 수 있다. 사랑하는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잡고 잘 살겠다는 그 소년원 수감자처럼, 주님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거룩해야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참그리스도인이 내어뿜는 거룩의 향취를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룩하고 봐야한다. 거룩의 끝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야 한다. 할머니를 향한 진정한 사랑 속에 파묻힌 손자는 할머니께서 하신 당부의 말씀, 마음에 새겨 평생 잊지 않고 준행한다. 사랑이 듬뿍 담긴 그녀의 말씀, 마음 속 깊이 새겼기에 그녀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힘쓰고 용쓰지 않아도 된다. 애틋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 하나하나가, 잔소리가 되고 성가신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지켜야지! 지켜야지!”하며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서 지켜야 되는 율법이 된다. 눈부시게 새하얀 웨딩드레스로 거룩히 단장한 신부가 신랑오시기를 기다리며 자신을 순결히 지키듯이, 더러운 곳 멀리하고, 더러운 때 묻히지 않고, 더러운 생각 품지 않으며, 상스러운 세상의 언어 입에 담지않으며, 세상의 화려하고 아름답고 고급스럽고 힘있고 찬란한 정신과 문물에 물들이지 않으며, 지혜로운 다섯 신부처럼 깨어있어서 경건의 기름 넉넉히 준비해서 거룩의 불 꺼뜨리지 않고 신랑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 참성도의 삶이요 참교회의 본질이며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기본이다.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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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현실은 암울해도(톨스토이 ‘부활’에서 도입부분 인용) 땅의 황폐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온통 숲속의 푸른 나무들을 베어내어도 대기에 가득 채워져 가는 미세먼지에도 무관심한 듯,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고 소비하고 무분별하게 버리고 처리해도 봄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소를 머금고 임한다. 새벽 이슬 머금은 개나리는 갓 피어난 새싹을 자랑하듯 피어 오르고 참새와 종달새는 새 봄을 맞은 환희를 노래하며 분주히 날고 있다. 찬란한 봄날에는 식물도 새도 곤충도 어린 아이도 모두 환히 웃는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베어버리는 가혹한 도끼날 앞에서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창조주께서 약속하신 환희의 봄날을 기다리며 그가 세우신 만유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처럼 하나님의 세우신 언약 앞에 잔말 말고 순종하며 앞날의 불확실한 미래 앞에 부질없이 주눅들지 아니하며 그가 약속하신 소망 붙들고 그가 세우신 계획 아래 꿋꿋이 임하리라. 아무일 없던 것처럼…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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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묵과와 포용이 정답인가?성소수자들의 성적 취향을 포용한다는 대학 선배의 의견에 대한 나의 답글이다. 이런 글 쓰기 싫지만, 앞으로 더 자주, 더욱 신중함으로 써야 할 것 같다. 때가 악하다. 모든 영적/육적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지켜야 할 현대의 크리스천들을 너무도 가열차게 흔들어 대는 때이다. ‘진리’보다 ‘이해’와 ‘포용’을 앞세우는 인본적 사고가 ‘자기중심’, ‘자기본위’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하여, 밀 까부르듯 세차게 흔들어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동성애'라는 원색적 이슈보다, 죄를 죄로 인식하는가의 문제이다. 동성애말고, 성경에서 죄로 엄금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성애에 대해 침뱉고 능욕하고 피켓들고 항거하면서, 동시에 힘껏 탐욕하고 서로 미워하며 불평하며 질투나 하고 있진 않은가? 성소수자나 이들을 대하는 기독교인이나, 죄에 대한 인식, 죄를 죄로 여기는 깨달음의 여부가 문제의 핵심이다. 깨닫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이 세상에는 죄를 깨달은 죄인들과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죄인 두 부류가 있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의인 하나도 없다 (롬 3:10).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하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 선배님, 전제가 잘못되면 결론이 이상하게 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누구는 성다수자, 누구는 성소수자 취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창조하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4).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모든 생물의 존재가치, 그 첫 번째는 번성(to increase in number)하는 것입니다(창 8:17).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이 수컷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른 수컷과 싸우는 일은 없습니다. 수컷이 암컷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남자인데 남자에게, 여자가 여자의 몸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을 개인적 취향으로 허용한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엄연한 죄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18:22)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6-27) 보수적 신학(신앙)관은, 성경을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 그대로 믿음의 전형으로 삼고 지키려고 하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진보적 또는 자유적 신학(신앙)관은, “똑 같은 말씀이 어찌 2천여년이 지난 현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하며 합리적인 의심에서 비롯됩니다. 시대적/사회적/문화적/관습적 맥락(context)에 따라 다소 융통성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성경해석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할 현대인을 인본주의 신앙으로 이끄는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자기중심, 자기본위의 생각으로 가득 찬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뜨겁게 가열을 하고 있고요.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죄의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죄의 성립에 대한 규정도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습니다. 이들 사이에 인간의 판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모기 턱수염만큼도 없습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자기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해석한 죄(창3:1~6) 아닙니까? 어찌 한 나라의 법을 지켜야 될 백성이, 그 법을 공포한 왕의 권한을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믿음의 성도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배제’와 ‘혐오’가 된다면 또 다른 죄를 잉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겠지요. 죄의 양상과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죄인으로써 이들에게 비판, 비방과 미움의 태도를 갖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영국의 도심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할 때, 자신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젊고(20대 후반), 유능하고(IT회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훤칠하게 잘생기고, 연한 순처럼 온유하고 착해 보이던 그 친구에게 무어라고 얘기해주어야 할까요? “너는 동성애 취향 때문에 교회에 못나가고 있고, 나는 하나님 말씀에 은혜 받고 지금 전도하고 있고… 그런데 너나 나나 그 분 보시기에는 다 같은 죄인이다. 나 또한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탐욕, 자랑, 비판, 불평… 이런 수 많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수도 없이 남에게 들켜가며 또는 남에 들키지 않게 은밀히 마음 속으로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 또한 예외 없이 사랑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지만 네 안에 있는 죄는 미워하신다. 그 죄가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이야. 그만큼 죄의 대가는 치명적이야(롬 6:23).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하시지 않았니?” 진정한 사랑은 포용하고 묵과하는 것과 다르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친구가 사지로 향하는 불못으로 빨려가고 있는데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서적으로 동감을 표하며 지지만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가고 있는 길에 멈추어 서서, 돌이키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처럼 주님의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인은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행 1:8)이기도 합니다. 능욕과 침뱉음 받고, 갖은 수모와 함께 죽으실 줄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신 뜻을 항상 마음 속에 새기고 그 뜻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 거룩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죄악과 ‘포용’의 이름으로 화평할 수 없습니다. 더러움과 떨어져야 순결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삶과 전문영역에서 귀감이 되어주신 선배님께서,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의 표준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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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 Discovered: 들키지만 않으면민법이든, 형법이든, 율법이든 법률주의(법률에 근거가 없으면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의 맹점은 증거주의에 있다. 죄 지었다는 증거가 없다면 즉 들키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씨뻘건 죄인이라도 무죄로 추정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으로 치명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8) 이 구절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해석도 잘 안되고 이해하기 힘든 난해구절이었다. 가령 엄마가 제과점에서 맛있는 케익을 사와서 냉장고에 보관해두었다고 하자. 엄마는, 서너살 되는 작은 아들에게 “형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 같이 먹을 테니까, 절대로 케익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을 한다(계명이 세워짐). 작은 아들은 “케익 절대 먹지말라!”는 지시 한 마디 때문에 냉장고 안 케익에 온통 신경이 쓰인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냉장고를 살짝 열어본다. 그러자 먹고 싶은 탐심이 불일 듯 일어난다(제1범죄; 롬 7:8-9;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전에 법을 모를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결국, 티가 안나도록 케익 위에 코팅된 쵸코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다(제2범죄; 죄의 확장성; 롬 7:20; 원치 않은 것을 함,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안의 죄이니라).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는 냉장고 문을 자신이 열지 않았고, 케익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제3범죄; 끊임없는 죄의 확장성). 해서는 안될 것을 떨쳐버리려고, “죄짓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에 집착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도리어 얽매이는 형국에 빠진다. 청소년의 경우, “게임 하지 말아야지.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할수록 게임에 빠지게 된다. 음란물에 중독된 청년은, “보지 말아야지. 절대 안봐야지!” 할수록 저속한 그림과 영상에 빠져든다. 죄의 영향력은, “죄 짓지 말라”는 계명을 탑재했을 때, 그 힘이 부스터(booster)된다. 계명을 통해,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죄성을 흔들어 깨워서 죄에 연약한 육신이 결국 범죄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죄의 속성이다. 투명한 비커 안에 담긴 흙탕물은, 고요 속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 물속의 불순물은 밑으로 가라앉고 물은 맑게 보인다. 하지만 다시 비이커를 세게 흔들면 물 전체는 거무튀튀한 더러운 흙탕물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죄는 계명을 이용하여 내 안에서 숨죽이고 가라앉아있는 죄성을 마구 흔들어대며 용솟음 치도록 자극한다. 율법 계명에 사로잡히면, 죄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고 결국 죄에 무른 육신은 굴복하게 된다. “죄는 사람들에게 각양 악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첫 단계로 계명을 활용한다.”(1) 자신의 의지로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고 힘쓸수록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결국 죄의 덫에 빠지고 만다. 그것에 집착하여 애쓸수록 육신 안에서 내재되어있는 죄성이 용솟음 칠 뿐이다. 그리고 그 죄성이 남으로부터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자위한다. 결국 범죄해도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치부하며 은밀히 죄를 범하는 낙을 즐긴다. 이는 종교생활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 안의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밖에 있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며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기독교는 자신의 내면을 지키는 신앙이다. 자신 안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영과 혼과 마음을 지키는 믿음을 중요시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나님보다 주변 이웃들을 의식하면서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교회 마저 아프게 한다. 자신 안에 죄의 마음이, 예를 들어 미움이 거하고 있으면 이미 구원은 온데 간데 없는 것이다. 그 안에 영생은 없다. 행동으로 살인을 범해서만 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미움을 품어도 참혹한 죄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 3:15) 이것이 현대교회의 아픔이다. 성직자의 은밀한 일탈, 성도들의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에서의 크나 큰 편차, 이를 가정 안에서 보고 자란 자녀들에게 유전되는 종교생활. 양적 부흥, 효율, 외면의 경건, 복된 결과에는 관심을 갖지만 내면의 경건, 관계의 깊이, 거룩성을 가벼이 여기는 형식적이고 외면에 치중하는 종교인 수준의 얕은 영성이 바로 그 아픔이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 5) 비교, 교만, 자랑, 탐심, 원망, 불평, 비판, 비방… 성경에서 분명히 지적한 죄에 대해서는 잘 아는지라 경건의 모양에는 지독히 신경 쓰는 외면적 신자들은 입술 밖으로 그들의 속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유려한 믿음의 언어들로 습관적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잡초처럼 이들 죄의 마음이 자라나고 있어도 아무런 영적 거리낌이 없다. 마음껏 탐욕하고 원껏 비판해도 마음 속 찔림은 별로 없다. 오히려 외면적으로 술 담배 안하고, 때 되면 경건 생활 잘 지키고, 기도, 헌신, 봉사하면 믿음 생활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면서 노래를 은혜롭게(?) 부르며, 이웃에게 “사랑, 사랑”을 외치지만, 형제를 향한 사랑 보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경고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1-2)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고전 13:5)” 라는 말씀이 있는데,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크리스찬으로서 예의를 벗어난 언어와 선을 넘은 태도로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 상대방을 그만큼 사랑하니까, 교회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한다. 이는 상대방과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힘이 작용한 것이다. 이렇듯 “계명-죄-사망이 한 패가 되어 우리를 파멸의 불못으로 몰고 간다.”(2)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1절). 마을 입구에 아담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한 집이 있었다.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누군가가 집 앞 마당에 쓰레기 더미를 몰래 쌓아놓고 사라진다. 집주인은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경고 팻말을 세운다. 그러나 무단투기 문제는 그치지 않는다. “쓰레기 투기 엄금!”, “고발조치 하겠음!” 점점 더 큰 팻말, 강력한 문구로 대응을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그러다 주인이 생각을 바꾸었다. 집 앞을 아주 아름답게 꽃밭으로 가꾼 것이다. 그런 직후, 쓰레기 문제는 깨끗이 사라졌다. 자신을 얽매고 있는, 범죄자에게 형벌을 요구하는 율법의 계명 보다 그 반대편의 아름다운 가치, 살리는 생각,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율법보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계명 자체보다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 그분의 뜻을 새겨야 한다.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원수를 사랑하라. 비판하지 말라. 비교하지 말라. 오래 참으라.” 자신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계명임을 깨닫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그리고 그가 부어주시는 마음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의 초석은 계명의 행함 이전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는 것에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7, 19) 형벌이 두려워 율법 계명의 준수에 마음을 두는 자는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속성을 깨달으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무겁고 진지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믿음의 지향점은 그분의 생각, 뜻, 마음과 나의 그것들이 일치하는 것이다. 인생의 지향점은 남들에게 안 들키고 행위로 인정 받아서 즐겁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속성,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에 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1) Ben Witherington III, Paul’s Letter to the Roman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W. B. Eerdmans, 2004), p. 190 (2) John Stott, The Message of Romans (Leicester: IVP, 1994), p. 200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