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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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30%가 죽어나가도 여전히가장 참혹한 질병 중 하나는 문둥병(한센병, leprosy)이다. 말초신경계에 나균이 침범하여 감각이 소실되는 끔직한 병이다. 불에 데여도 뜨겁지가 않고, 살이 썪어져 가는데 아픔이 없고, 발가락이 괴사되어 떨어져 나가도 통증이 없다. 영혼에 치명적인 유혹이 밀려들어와도, 달콤한 죄악의 낙을 은밀히 음미하여도, 탐욕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도, 영혼의 감각이 소실된 환자처럼 ‘나는 문제 없어!’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도 거룩하지도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주여! 주여!”하면서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실체 없는 텅빈 고백을 습관적으로 외친다. 영혼의 생살에 나균이 덕지덕지 눌러붙어있는데도 애통함이 없다. 영적 몸부림이 없다. 말세의 때에는 독특한 징후가 있다. 자신의 행위가 더러워도 구역질 나질 않고, 징계를 당해도 돌아봄이 없고, 죄를 자행해도 뉘우침이 없다. 한마디로 뻔뻔하기가 그지 없다. 바로 옆사람이 죽어나가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여섯째 천사의 말로 말미암은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류의 1/3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죽지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에게 절하며 죄짓기를 즐겨한다(계 9:18-21). 오히려 심판의 예언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두 선지자의 죽음을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축하한다(계11:1-10). 이들에게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10:9)” 꿀송이같이 단 말씀을 먹는 자들이다. 문제는 달아서 삼키기 쉬운 말씀이 배 속으로 내려가니 쓰디 쓰다. 곤한 육신을 위로하며, 지적 욕구를 채워주며, 인본적 자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설교말씀은 육과 혼을 즐겁게 해주었지만… 듣고 읽은 말씀을 순종으로 행하려 하니, 자신의 익숙했던 생활, 습관, 인생관, 가치관, 쌓아 놓은 소유들과 여러모로 부딪친다. 더욱이 믿음의 길을 가려면, 이 귀한 것들의 포기뿐만 아니라 고난이 따른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믿는 길을 따르자니, 세상의 상식과 처세와 배치될 때 닥칠 왕따와 어려움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쓰다. 몹시 쓰다. 고통이 극심한 환란 가운데…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계 9:6)’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류의 1/3이 죽어나가도…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경시되고 외면된다. 선지자의 경고 메시지마저 배 속에 쓰리다고 배척하며 그들을 미워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뻐한다. 지금 한국 교회 상황이 그렇다. 스마트폰 속 붉은색 유튜브 아이콘이 불이 나도록 당대의 쟁쟁한 설교말씀 즐겨듣고 좋아서 “아멘, 아멘!” 하지만, 정작 순종의 행함 앞에서, 넉넉한 포기의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 배가 쓰리다고 말씀 앞에서 돌아선다. 이것이 불순종, 불신앙, 엄연한 죄임에도 끄떡없다. 목은 곧고 뻣뻣해서 수그러지지 않는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생활의 염려 가운데 실질적 도움이 되는 힘, 능력, 인맥, 돈의 우상에 영적 초점이 산만해진 시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경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경시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삶을 부정하는 시대이다. 귀를 즐겁게하는 인본의 소리, 혼과 육을 즐겁게 하는 지성과 교양과 인문의 소리,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각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에는 귀를 틀어막고 돌아선다. 참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는 싫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교회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눅 12:49) 예수의 가르침을 적절히 편집하여, 세상의 정신과 타협하고 있다. 세상적 관점에서 규모와 크기로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거룩한 성직의 자리가 남용되고 있다. 세상에 예수가 필요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오로지 사는 길은,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문제있는 죄인임을 경각하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참 목자는 성도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죄성을 드러내고 깨닫도록 하여 예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설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유모어와 위트도 섞어가며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성경 난제를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원어문헌을 신학적으로 해박하게 해석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인품이 온화하고 고상한 도덕자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성도들을 예수 앞으로 데려다 놓는 사람이다. 바로 베드로가 삼천명의 영혼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이들이 탄식하며 내뱉은 반응이 무엇이었던가?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행 2:37 )” 이 죄인된 삶, 앞으로 어찌 살꼬? 이들의 의문에 베드로는 뭐라고 했는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복 받고 은혜 받으라는 격려 이전에 “죄의 문제부터 해결받으라!” 하지 않았던가? 그 베드로도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반응이 무엇이던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우리는 조국과 북한,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여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과 자녀의 죄를 놓고 울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08232520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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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하나되기에 충분한 교회의 규모어제 인근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도수 100명 정도 참석하는 주일예배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드리는 교회다. 예배후 담임목사님과 오찬을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예수의 증인으로서 복음전파와 선교에 사명의 초점을 두며, 그동안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며 성도수 200명이 되면 분리 개척해오고 있는 교회라고 소개하셨다. 주님께서 애당초 쏘솔티교회에 주셨던 비전과 너무나 흡사해서 표현은 않했지만 속으론 짜릿한 흥분과 함께 경청했다. 당대의 제일 가는 율법학자요, 학문 높은 최고의 지식인이요, 귀품있는 로마장교로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삶이 180도 달라졌다. 핍박과 능욕과 고난과 침뱉음으로 가득한 삶으로 바뀌었다.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수가 많아지면 그곳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사도행전의 대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두세 페이지 분량으로만 채워졌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루스드라, 더베, 빌립보로… 그리고 데살로니가, 고린도, 그 다음 에베소… 이렇게 한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면 또 다른 생경한 도시로 달려가 목베임과 채찍질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를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형극이 기다리고 있는 낯선 곳으로 달려갔다.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연단받고 단련된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부터 해이해지고 안이해졌다. 삶이 안정되고 부가 쌓이고 이웃나라와 교역을 통해 풍요로와짐에따라, 그들의 영성에 낀 기름기는 두터워만 갔다. 성직자들, 성경교사들은 모임의 상석에 관심을 두고 직분의 높이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다가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며,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던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에 눈이 멀어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다. 성전은 화려해지고 예식은 더욱 거대해지고 제사장의 수효는 많아졌지만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의 순수함은 날이 갈수록, 외면의 화려함과 규모에 촛점을 잃고 탁해져갔다. 신앙의 본질은 외면되고 비본질에 사로잡혀갔다. 영국땅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운 사람은, 토마스 헬위 목사(Thomas Helwys; 1575–1616)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침례교회는 존 스미스 목사(John Smyth; 1554 – 1612)가 영국의 국가교회인 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망명했던 암스텔담에서 세운 가정교회이다. 스미스 목사와 그곳에서 동역하던 헬위는 런던으로 귀환하면서, 당시 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국가가 통치하던 기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자신의 진술을 정리한 ’A Short Declaration of the Mystery of Iniquity’책을 보냈다. 괘씸히 여긴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헬위는 4년후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이 책을 헌정하기 직전 저술한 책, ‘A Declaration of Faith of English People Remaining at Amsterdam in Holland’에서 헬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적절한 규모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한다. 화려한 예식과 웅장한 규모를 뽐내는 성공회의 교회시스템과 비교하며, 아래와 같이 밝힌다. “교회는, 구성원이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리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모든 성도들은 서로를 잘 알아야 하며, 그리함으로 영혼과 육신에 관련된 서로를 향한 모든 사랑의 의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직분자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지도자로 세우신 뜻을 깨달아 온 양 떼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A church ought not to consist of such a multitude as cannot have particular knowledge one of another... The members of every church or congregation ought to know one another, so that they may perform all the duties of love one towards another, both to soul and body. And especially the elders ought to know the whole flock, whereof the Holy Ghost hath made them overseers.” (1) 엊그제 큰매형과 누님이 오셔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서울의 대형교회에서 두 분 다 직분자로서 성실히 섬기신 분들이다. 유려한 설교, 실력 쟁쟁한 사역자들의 수준 높은 케어, 무얼 하든 규모와 위엄을 자랑하는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들, 촘촘한 직분제도, 수많은 교제와 만남들… 이러한 대형교회의 시스템에 오랜 기간 익숙해져서인지, 세종시로 내려와 많은 해가 바뀌었음에도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했다.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간만에 만나면 신앙이야기로 대화의 장을 대부분 채우지만, 온전히 영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2%의 부족함이 서로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최근 교회를 정하고 정착한 지 꽤 되었다고 한다. 세종시 구석 산자락 아래 소재한 작은 침례교회라고 한다. 겸손하신 목사님은 어눌하신 말주변으로 설교만 담당하시고, 모든 봉사와 사역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모든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음식을 나누”(행 2:42-47)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과거에는 아쉽게도 직분에 대한 의식, 주변에 대한 의식, 드러내려는 영성 등이 나의 영적 예민함에 감지되었다면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 ‘주안에서 하나되는 교제’와 같은 신앙의 본질에 흡족히 적셔 있었다. 교회의 물리적 크기가 커짐에 따라 서로 관계하는 구성원수가 많아지면, 관계의 깊이와 질이 양보되어질 수 밖에 없다. 본질만을 향한 영적 초점이 여기저기서 들이닥치는 비본질에 대한 관심들로 산만해진다. 현대교회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가지 재원과 인재를 확보하여 시스템으로 보강하려하지만, 시스템에 익숙해진 연약한 성도만 양산시킬 뿐이다. 081825 (1) Thomas Helwys, A Declaration of Faith of English People Remaining at Amsterdam in Holland, quoted in William L. Lumpkin, ed., Baptist Confessions of Faith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69), 120–121.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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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방주 UFO를 타야 하는가?몇 년전 꿈속에서 대형 씨네마스코프 4K 총천연색 화질로 내게 보여주신 이미지는 매우 충격적이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세상은 죄악과 음란과 탐욕으로 여기저기가 소란스럽고 경쟁과 갈등과 다툼으로 어지럽기가 그지없다. 한치앞이 안보이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별도 달도 없는 칠흑 같은 하늘로부터 붉은 빛 초대형 비행물체가 내려앉는다. 지상에 착륙한 비행선에서, 서두르지 않는 저음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임박한 종말을 피하시오! 서둘러 비행선에 탑승하시오. 조금 있으면 떠납니다.” 넓은 광장은 비행선이 뿜어내는 붉은 빛으로 피처럼 붉어졌고… 구원의 희망을 잡고자 사람들은 비행선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연로한 노인들은 밀려 길바닥에 나뒹굴고.. 넘어진 자들은 뒤에서 쇄도하는 발걸음에 밟히고... 종말을 피해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조선을 향해 내딛는 길은 기쁨도 평안도 없었다. 광경을 목격하는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타야 되나? 말아야 하나? 수년동안 이 꿈이 나를 수차례 소환했지만, 오랜 기간 나는 이 질문에 답을 못했다. 그러다 얼마전 이 성경구절이 명징(明澄)한 답을 줬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나만 구원의 방주 UFO 타고, 이 구차하고 무겁고 힘든 인생, 광폭하고 이기적이고 비열한 세상 떠나면 그만… 이 아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값없이 주신 주님께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이루기를 요구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使臣)이 되어(고후 5:20),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이땅에 남기를 원하신다. 구원받고 갱생의 축복이 임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기뻐서 전하고자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양심에서 나오는 발로이다.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 안의 양심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삶에 한 줄기 기쁨도 희망도 없는 기구한 인생,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직후 했던 반응이 그렇지 않은가? (요 4:28-30) 중병을 고생고생하며 앓아 왔던자가 나음을 입게되면, 그 의원, 그 약 소개하고 싶지않은가? 이 단계, 즉 복음을, 영혼에 좋은 의원을 소개하고픈 마음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단계에 이르면, 이렇게 기도하게된다. “지경을 넓혀주옵소서.”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의 영적 성장의 단계를 기도문의 형식으로 아주 잘보여주고 있다. 정말 아쉬운 것은… 아베스의 기도(대상 4:10)에서 (1)내게 복에 복을 주시고 (2)(복음전파할 수 있도록)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3)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4)나로 환난을 벗어나 (5)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것이 영적 성장의 순서인데, 제2단계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이웃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함을 몹시 사모하는 단계를 쏙 빼고, “주님 도와주소서, 고난이 없고 근심이 없게 해주세요.” 이 부분만 열심히 간구한다. 왜 그런가? 복음전파에는 방해세력들의 훼방과 위협이 따른다. 그래서 특별히 부름받은 사역자, 전도자들만의 책무라고 착각하고 전도하지 않는 자기를 자위한다. 목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교회 전도자들에게도 이러한 물리적 핍박과 목베임, 채찍맞음과 같은 형벌이 함께 했다. 그래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는 공회의 명령과 함께 풀려난 사도들은 다시 담대히 복음전도를 재개하면서 무엇을 간청했는가?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9-30) 전도에 따라오는 고난은 영광의 면류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당연히 따라오는 고난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 믿음이 더 장성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이 연단의 과정을 경험하도록, 우리 주변에 악이 활동하도록 놔두시며 아픔과 고난과 참소와 치욕을 겪도록 환경을 허락하신다. 믿기만 하면 그냥 거저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그 과정에서 악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My prayer is not that you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protect them from the evil one. 081325 *image from https://ymi.today/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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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교회가 하나님 계획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절대 과거 교회가 범했던 오만과 교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자기만족에 빠져서 소위 세련된 설교와 박식한 언변을 자랑하고 즐기면서 그런 일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십시오. 번영한 빅토리아 여왕시대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즐기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학을 믿고 계시를 철학으로 대체하는 모습을 주목하십시오.”(1) 60여년전 마틴 로이드목사가 진단했던 현상이 그대로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역사는 반복한다.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목적이 있다. 지금 21세기에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분의 때에 그분의 계획대로 일을 하신다.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실 때와 징계를 주실 때를 분명히 구별하셨듯이… 영국에게 빅토리아시대의 부국강병 태평성대 축복의 때와 세속주의에 만신창이 되고 세상권세에 수탈된 영적 암울기를 주셨듯이… 숫자와 외형적 크기에 눈먼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상기하여 영적 안이와 나태와 교만의 잠에서 어서 깨어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081025 * Image from https://www.gotquestions.org/little-sleep-slumber-poverty.html202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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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관계이다진정한 관계는 친구가 뭘 해줘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기에 같이 있고 싶어진다. 이것 달라고 보채고 저것 해결해달라고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과 함께 시간을 갖고 싶어서 그 앞에 무릎 꿇은 적이 얼마나 되던가? 그가 주신 평안 속에서, 길을 걸으며, 버스를 타며, 산책을 하면서 말이다. 내쪽에서 뭘 좀 하면 그 다음 저쪽으로부터 돌아올 대가를 기대하는 식의 기도는 일종의 거래다. ‘관계’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거래’로써의 기복으로 변질된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1)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이 내 안에 계시는가 또는 부재하시는가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 다만 내가 인식하지 못해서 부재 중으로 느낄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를 주어로 치환해서 문구를 바꾼다면, ‘하나님을 향한 나의 몰입’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맥도날드매장에서 종달새처럼 친구들과 웃음꽃 함박, 깔깔 호호 떠드는 여중생들을 보라.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친구와의 대화, 몸짓, 표정에 즐겁게 열중한다. 그들의 서로에대한 몰입력은 경이롭다. 주님과 대화하면서… 옆사람 통성기도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든지,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표현상의 문제에 지나친 신경을 쓴다든지, 오랜 시간 응답이 없어 낙망하여 돌아서려 할 때마다… 특별히 이 부분, 즉 친한 벗을 향한 ‘몰입’에 문제가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대부분이 여기에서 비롯됐음을 깨닫는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항상 살피시고(시 33:18) 우리에게 온통 관심을 쏟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 수양의 기름이 필요없다.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기복적 의식, 종교적 군더더기가 필요없다. 친구처럼 친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 필립 얀시, 기도 (서울: 청림출판, 2007), 86; Philip D. Yancey, Prayers: Does It Make Any Difference? (Grand Rapids, Zondervan, 2006) *사진: 지난 3월 창원대 산책길에서20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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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받는 설교자오늘, 영국영화 'Emma 2020'를 봤다. 지극히 영국적이다. 영국의 자연, 캐슬, 가든, 인테리어, 예술과 색상... 부와 신분에 민감한 속물적 근성을 애써 감추려는 예의로 치장한 언어들... 영국에 15년 살고, 그곳을 떠나온지 4년된 내게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주인공의 친구 Harriet Smith가 한 말이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몸이 아파, 엘튼목사의 크리스마스 설교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에서 나온 표현이다. "Mr. Elton will be there... And Mr. Elton's sermon. A sermon on Christmas Day." 이런 아쉬움과 사모함을 받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080225 *image from https://www.habituallychic.luxury/2020/02/a-look-at-the-emma-film-location-firle-place/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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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교회주의]해병대 채상병 순직사건'에 대한 대통령 격노설 관련하여,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이름들이 회자되고 있다. 기독교회가 한 국가의 사회와 정치와 기득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그릇된 이념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본다. 이와는 확연히 달리, 기독교적 신앙관은 성경적 진리에서 비롯된다. 즉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 사람을 만드신 사실과, 그가 사람과 관계하고자 계시한 진리가 우리 사회와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가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말씀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정치와 교회의 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소 행하심이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이적후, 자신을 정치적 지도자로 삼고자하는 대중을 떠나 산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5) 성경을 통한 예수의 몸소 가르침과는 달리, 오늘날 교회는 정치와 가까워지려 한다. 서로 너무 친하다. 그 대표적 실상이 '국가조찬기도회'이다. 성경적 인물에 빚대어 최고권력자를 찬양하고, 현실 정치를 두둔하는 발언을 기도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정황앞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듯 심히 아프다. 열심히 기도하고 일했으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니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 점은 국가의 법과 하나님의 가르침이 상충될 때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국가의 뜻을 저버리게도 했다. [...] 로마군대의 사령관이었던 마우리티우스(250-287)의 행동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기독교인의 학대와 박해를 주동하라"는 국가의 명령앞에, 자신의 휘장을 부관에게 넘겨주고 신자로서 당당히 죽음을 택했다(1). 캘빈(John Calvin)의 저서 중에 ‘기독교 강요(綱要)’라는 책이 있다. 종교개혁를 통해 태생한 개신교회의 신앙(Protestant Theology)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프랑수아 1세에게 저자가 헌정하는 내용, “Serenissimo ac Potentissimo Principi Francisco Regi Francorum”(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프랑스 왕 프랑수아에게)이 나온다. 프랑수아 1세는 당시 로마제국과 앙숙이었으며, 르네상스의 아이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데려온 인물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프랑스가 강성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럼 왜 캘빈은 자신의 저서를 프랑스왕에게 헌정했을까? 로마교황 정도는 아니지만 프랑스왕들도 자신의 왕국의 안정을 위해 개신교도들을 탄압했다. 개신교 신앙을 대변하는 캘빈에게는, 프랑스왕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개신교도들에 대한 오해를 씻고 박해를 멈춰달라고 탄원하는 것이 ‘기독교 강요’의 1차 저술 목적이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전하려는 주제와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은 당신이 염려하는 정치적 분파(political faction)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는데 유일한 목적을 두고 있는 순수한 신앙인들입니다. 종교개혁은, 나라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운동과 전혀 다른 영적 재각성 운동입니다.” 세상권력은, 종교가 ‘정치적 세력’이 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잠재력을 두려워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때로는 어르고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2천년 교회사를 통해 일관적으로 증명된 역사적 사실이다. 1)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했던 관점은 “과연 그가 로마정부에 위협이 될 만한 범죄를 범했는가?”에 있었다. 심문이후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라고 말했으나, 정치세력이 되어 저항할 유대인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마 27:24), 결국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2) 예수의 사후, 로마정부가 크리스천들을 탄압한 이유 중 하나는 로마제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하고 합법화 한 이유는, 점점 확장되어가는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시스템으로써 기독교만한 효율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세상과 악수할 때 세상의 수단이 되고, 순수한 신앙의 길을 갈 때에 모여드는 숫자로 인하여 세상은 주목하고 경계한다. 많은 이가 모이는 곳일수록 사람들이 주목하고 정치적 파장의 잠재력이 있기에 - 예수님께서 조용히 산으로 피신하신 것처럼 - 오해 살 일을 경계하고 조심하고 멀리 해야한다.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은 “정치적 분파가 아니라 순수한 신앙인”의 자세를 순전히 지켜야 한다. 그런데 현대 교회들은, 특히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큰 교회들은 오히려 정치와 가까와지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 사실이든 아니든 과장이든 – ‘종교세력의 정치세력화’라는 오명과 낙인을 받고도, 예수의 가르침을 소개해야될 대상이 되는 이웃과 사회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라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1) Francis A. Schaeffer, How should we then live?: 프랜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 인가?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2), 49-50 *사진설명: ‘기독교 강요’ 초판본의 표지 072825 **대전지역에 신앙상담이나 양육이 필요하신 분 계시면, hunlee11@gmail.com 으로 연락주세요. 지체없이 달려가겠습니다.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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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_precarious기도(Prayer)는... 라틴어 'precarius'에서 나왔다. 영어로 'precarious'라는 의미로, "불확실한" "자신이 아닌 남의 뜻대로 되는"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라는 뜻이다.(1) 앞의 일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여 절대 주권자 앞에 섰다면 바른 기도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072525 (1) Lewis and Short's Latin Dictionary (a standard Latin-English lexicon)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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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있을 때가 바로 들어야 할 때현란한 네온과 질주하는 차량들 건물숲속에 쏟아져 나온 행인들로 가득 찬 도심 저녁에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한밤중 고독한 거리에서는 들린다. 볼거리가 많은 대낮 분주한 거리일수록 듣지를 못한다. 사방이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청력이 작동한다. 인생의 어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인생이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실 때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된다. 어둠 속에 있을 때… 힘들다고 투덜대지 말고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서럽다고 울지 말라. 잔말 말고 입 다물고 듣는데 몰입하라. 말을 할수록 듣지 못한다. 다시 인생에 빛이 비추는 날 전할 말이 있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오늘 새벽 주신 말씀. 072225 **사진: 대학친구 이원희의 '퇴근길'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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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ge size를 좇는 부흥목회자나 일반 성도나 한국의 교회를 섬기는 다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한다. 구체적으로 탁 까놓고 얘기하면 ‘양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양적 성장을 지향하며,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력이 적지 않은 대형교회를 부러워하고 그들이 하고 있는 시스템, 프로그램, 심지어 건축양식, 실내 인테리어까지도 흠모한다. ‘대형교회’가 그들의 롤 모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기도모임마다, 부흥, 부흥, 부흥을 외치고 간구한다. 말이 부흥이지, 실제로 구하는 바는 ‘양적 성장’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부흥’과는 전혀 상관없는 바를 구하고 있다. 성경에서 ‘부흥’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은 하박국서가 유일하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2) 여기서 ‘부흥’의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חַיֵּ֔יהוּ (하이예후)이다. “죽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하다”란 의미이다. 바벨론으로부터 패망당하기 직전 남유다 말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하박국은, 죄악과 불의와 패역이 만연한 조국의 현실을 보고 애통해한다. 사회는 부패하고 영적으로 타락한 유다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부흥’케 해달라고 읍소를 한다. 시체처럼 죽어가는 조국을 살리소서! 되살리소서! 다시 일으키소서! חַיֵּ֔יהוּ(하이예후; revive; 復興; 부흥)가 일어나기 이전(before)과 이후(after)의 상황은 엄연히 다르다. 극단적으로 다르다. 이전의 상태는 가망이 없고, 싹수가 노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상태이다. ‘부흥’을 울부짖어야 하는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구원의 손길이 절실한 상태에 있다.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애끊는 애통함으로 회개해야 할 정황이다. 물에 빠진 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절실하게 간곡하게 주의 도우심을 부르짖어야 할 때이다. 자신이, 자기 교회가 죽어가는 상태, 그 안의 참혹한 죄악과 불순종, 패역을 보고 영적 구역질를 토로할 때이다.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가 완연한 지금 이 시대가 바로 ‘참’ 부흥을 간구해야 할 때이다. 가치관의 혼란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저마다 자기소견대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짓고 심고 거두고 하면서… 숨쉴 새없이 ‘분주’한 삶 속에서, 옮고 그름에 대한 생각 없이, 선과 악에 대한 분별없이, 각기 자기 주장대로 살고 있다. 왜 로마의 부유한 귀족, 당대의 최고 엘리트들이 허기지고, 고독한 아프리카 사막으로 들어갔는가? 하나님과 거룩한 대면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 집중의 시간이 우리 인류에게 준 유산이 실로 엄청나다. 수많은 궤변과 이단적 사상을 정리하고 건강한 기독교 신학이 이 시간, 이들 사막의 교부들(Church Fathers)을 통해 정리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오늘날. 분별의 ‘집중’으로부터 흩뜨려진 극심한 ‘산만’ 가운데 살고 있다. 이러한 어수선 소란 속에서 거짓이 진실을 능멸하고, 악한 자가 선한 자를 짓밟으며, 공정과 정의를 외면하며 사는 자가 오히려 사람 눈 보기에 행복하고 윤택하게 사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 거짓과 진실, 부정와 정의는 신자(信者)에게만 해당하는 가치가 아니다. 양심있는 인간이면 분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가 멸시되고 냅다 내팽개쳐진 사이에 우리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없는 – 정글처럼 전락해버렸다.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악은 제재되어야 하고, 선은 권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의의 기본적 개념이다. 선을 베푸시고 악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가 우습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 시대처럼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업신여김을 받은 때는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애통한 것은, 이토록 진리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정의가 짓밟힌 혼돈의 사회에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바른 길의 본이 되고, 옳은 길의 표준을 제시하는 어른이 – 그가 신자이던 불신자이던 - 이 사회에 없다. ‘꼰대’라고 비난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교인들은 ‘거룩’의 집중으로부터 산만케하는 요소가 다분히 많은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흠모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집중보다, 시스템, 프로그램, 거대 체제를 움직이기 위한 운영, 관리, 직분/서열/위계, 조직, 인사, 예산, 비용, 손익, 보고서… 어느덧 세상 영리기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교회의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영성의 깊이보다, 큰 조직을 이끌고 많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CEO같은 리더쉽을 원한다. 교회 지도자의 자질로 리더쉽 스킬, 실력, 학력이 요구되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의 깊이에서 나오는 설교보다 설교능력이 중시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하박국, 엘리야,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받은 말씀을 전달하는 영성보다 스킬, 프리젠테이션 실력, 해박한 지식, 유모어와 재치를 반겨한다. 살리소서! 되살리소서! 다시 일으키소서! ‘부흥’케 하소서! 한국 사회를… 한국 교회를… 비본질을 좇는 산만에서 분별의 집중, 거룩의 몰입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071925 *사진설명: 구글에서 ‘Church Revival’에 대한 검색 결과. “Revival”을 외치는 자의 정황은 이렇게 웃고 떠들썩할 때가 아니다. **(PS) 혹 대전에 신앙상담이나 양육이 필요하신 지인분이 계시면 연락주세요. 지체없이 달려가서 뵙겠습니다. - 연락처: hunlee11@gmail.com20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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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내가 산다영국의 주재원 신분에서 본사 귀임명령을 받은 후, Swine flu에 감염되어 결국 출국을 거의 한달간 연기한 일이 있었다. 한 사흘간 끙끙대며 앓았는데,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두통이 왔고, 잘 들지 않은 칼로 생살을 도려내듯 온몸이 아팠다. 생살에서 살아숨쉬고 있는 감각촉수 하나하나를 짓이기고 베듯이 통증이 극심했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왜 당시에 Swine flu로 수천명이 죽어나갔는지 몸으로 이해가 됐다. 이와 같이 신경이 살아 있는 채 받는 고통의 괴로움을 계시록 9:5-6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얼마나 아픔이 극심하면 죽기를 구하겠는가? 지긋지긋한 육신의 통증은 육이 죽으면 멎는다. 죽으면 비로소 고통은 끝이다. 찬란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잃었을 때, 비로소 사도바울은 하늘나라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전부이며 자부심이다시피한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렸을때, 그는 비로소 살았다. 베드로 또한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고기 잡으며 살아온 전문가였지만 fisherman으로서 자부심을 버렸을 때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술과 전문성을 다하여 밤새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깊은 좌절감 앞에서,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 존재의 무능력, 무가치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이 믿고 의지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나도 강아지사건이후, 참혹할 정도로 민망하여 바닥에 코가 닿도록 낮아지기가 그지 없을 때 안들리던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바울처럼 눈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베드로처럼 자신 존재에 대한 무가치함을 깨달았을 때… 나의 자신감과 자부심과 능력, 모든 것이 죽었을 때… 결국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생명의 근원을 잡을 수 있다. 극심한 병마의 고통은 병자가 죽으면 멎듯이 염려, 걱정도 내가 죽으면 없어진다. 미움, 혈기도 내가 죽을 때 없어진다. 두려움은 내 자아가 살아있을 때 기세등등 활동한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안에서 온전히 작동한다. 내가 죽어야 그분께서 일 하신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산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사진: 지난 2년간 거주했던 창원 사림동 소재 국제 사격장 트랙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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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지를 대전으로…내일 아침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갑자기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경황이 없거나 당혹스럽진 않다. 오히려 오랜 시간, 주안에서 사리를 분별하고 두서를 생각한 일이기에 소망가득 기대가 된다. 그분께서 하실 일이 기대가 된다. 오늘 새벽 두시까지 짐을 싸다, 갑자기 은혜의 파도가 내 심령 속에 밀려들어왔다. 사실 새로 정착할 처소에 입주보증금을 마음을 다하여 온힘을 다하여 허리가 휘어지도록 준비하여 겨우 납입하다보니, 지불해야될 이사용역비와 커튼설치비에서 50만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엊그제 알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사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덧 해는 저물고, 저녁은 인스턴트 냉동밥으로 때우고, 싸야할 짐은 끝이 없고… 그러다가 날이 바뀌었다. 심야로 들어가니 할 일은 여전히 많았지만, 마음은 그다지 조급하지 않았다. 대신 만가지 지난 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난 2년간 창원에서의 일… 겁 없었던 청춘의 날… 어린 날의 추억… 모질게 찰싹 뺨 때리던 습기찬 겨울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했던 런던의 거리들… 그러다가… 정리하던 책상 서랍안에서 오만원권 11장이 나왔다. 평소 내가 돈을 놔두는 곳도 아니고, 그 곳에 돈을 둔 기억도 없다. 내 양어깨를 무겁게 눌러왔던 딱 그 금액, 그 액수였다. “너, 십일조 낼 돈 없지..” “…” 아들의 머리카락수 뿐만 아니라, 호주머니 사정까지도 훤히 아시는 그분은 이렇게 세심히 아들을 배려하신다. 딱 모자란 분량 50만원에, 십일조 5만원을 더해서 정확히 55만원 주셨다. 없어서 아들이 궁색해보이지 않도록 모자란 것 채워주시고, 쓰고 남아서 여유가 생기면 교만으로 떨어지까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정확하신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심하게 나에게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나를 돌보신다. 그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다니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전혀 낯선 새 사역지 대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소망과 기대로 꽉 차있다.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자의 위치에 항상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070625 *사진: 2년동안 나를 품어줬던 우리 동네 창원 의창구 사림동. (PS) 혹 대전에 신앙상담이나 양육이 필요하신 지인분이 계시면 연락주세요. 지체없이 달려가서 뵙겠습니다. - 연락처: hunlee11@gmail.com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