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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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뜨겁지만나의 다섯 형제/자매들 중에 맨 중간에 계신 누님만이 천주교 신자이다. 내 생각엔 우리 다섯 중 그 누님의 사랑이 가장 많으신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그 딸의 효심과 마음 씀씀이가 가장 낫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5년전 남편을 여의고, 그 무거운 나이에도 직장일을 지속하며, 혼자 힘겨운 삶을 살아가시면서도 이웃과 혈육에 퍼주는 그녀의 사랑은 각별하다. 올 겨울 미국의 그녀 집에 방문했을 때,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은 저녁에 귀가하는 고된 삶에도 매끼니 빠짐없이 뜨겁고 신선한 음식으로 든든하게 챙겨주시고, 돌아올 때는 그 없는 살림에 2천불을 내 손에 꼬옥 쥐어주셨다. 지인분들의 초청으로 인근 학교와 체육공원에 가서 테니스를 즐긴 지 꽤 되었다. 간혹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부터 신앙배경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만남을 지속하다 보면 그들의 겸손한 언어와 배려의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교회, 믿음, 말씀, oo목사 등등을 언급하면서 큰 소리로 통성명하는 – 어떨 때에는 그것이 믿음의 과시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 개신교신자들과 결이 다소 다르다. 내가 일생 동안 만나본 개신교신자와 천주교신자의 숫자가 너무나 한정적이라, 일반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나의 주관과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인정한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주변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정체성에 대해 그렇게 강변하지도 시끄럽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하지만 만나보면 만나볼수록 괜찮은 사람, 향기 나는 사람, 같이 있고픈 사람, 배우고 싶은 사람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주변에 그에 못지않은 개신교 신자, 사역자들도 많이 만났고 만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편차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는 나의 영적 정체성, 영적 지향성과 관련된, 오랜 동안 내 안에서 무겁게 묵어왔던 내적 질문이었다. 아직도 끝 없이 내가 내게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엊그제 팀 켈러가 주창한 ‘City to City 교회개척운동’ 3박4일 세미나에 다녀왔다. 신학교 시절부터 팀 켈러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지도 받고, 지금은 뉴욕에서 사역하시고 계신 한 목사님으로부터 그를 회고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평생 동안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에 초점을 맞춰 사역을 해오셨다고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 우리는 ‘열매’라 하면 성과, 유형 무형의 결과치를 자연스럽게 연상하는데, 이 모든 성령의 열매는 ‘성품’에 관련된 것이다. 제 아무리 큰 사역을 하고, 큰 존경과 인정을 받는 신앙의 결과치를 얻더라도,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의 향기, 예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 11:45) “내가 행복하니 너희도 행복할지니라”하시지 않았다. “내가 성공했으니 너희도 성공하라”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비신자나 신자 할 것 없이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행복’, ‘성공’, ‘능력’은 매우 중요한 가치 덕목이 되어왔다. 이것들을 보유한 크기에 따라 자리의 상석이 정해지고, 존경의 질과 크기가 달라진다. 심지어 교회개척세미나에 참석한 많은 목사님들도 ‘교회개척 성공’, ‘성공한 목회’ 등의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만큼 거룩을 향한 뜨거운 몸부림, 거룩하신 그분과의 관계, 관계의 깊이, 성찰의 깊이는 얕아만 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중세 유럽에는 ‘수도원(monastery)’이란 영적 공동체가 있었다.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사적이고 인격적인 일대일 관계 속에서 성찰의 깊은 우물을 파면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곳이다. 영국에는 카톨릭이나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그러한 곳이 아직도 있다. 인생의 어둔 골짜기를 지날 때, 몹시도 그분과 사적인 교감이 간절할 때, 그 곳은 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이러한 곳은, retreats라고 한다. 한국에 홀로 나온 지 이제 삼 년. 그 수도원, retreats 가 그립다.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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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풀처럼 평범한 삶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발레리나의 길은 험하고 어렵다고들 말한다. 수백 번 수천 번에 이르는 같은 동작의 반복에 반복, 점프에 점프, 더 높게, 더 가볍게, 더 사뿐이, 다이어트의 압박감, 감량에 감량 … 발레리나 강수진의 부르트고 망가진 발이 생각난다. 발레리나의 최종 완성은 표정에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면 안 된다. 항상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이 고난의 연속인 발레리나의 경력에 찾아오는 절대 위기는 자기보다 잘 하는 사람, 라이벌을 만났을 때 엄습해 오는 좌절감에 있다. 그리고 이어서 슬럼프라는 불청객이 찾아온다. 겨우 이 슬럼프를 벗어나면 이전 보다 더 수준 높은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극심한 좌절감에 빠진다. 더 이상 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낭패감 -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역량 임계치의 끝을 확연하게 체험한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시점에, 그래도 발레리나 커리어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발레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기분이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고, 실의에 빠져도, 발레슈즈(ballet shoes)만 신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것 말이다. 맞딱트린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만, 해결책은 매우 단순하다. 인생 또한 기분 좋게 그것을 즐기는 길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작은 면적에 너무 많은 것을 부착하려 하고, 적재하려고 하고, 이루려 하니, 내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만끽하지 못한다. 항상 불만족의 상태에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것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사로 잡혀 있다. 무언가를 할 때 그것만 하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길이다. 물 마실 때는 물만 마셔야 되는 지혜를 최근에 깨달았다. 물맛을 음미하면서, 물이 마른 목젖을 적시는 감촉을 느끼면서, 목에 넘어가는 소리를 감상하면서… 하지만 우리는 유튜브를 보고, 전화 통화하면서, 물 마시며 식사까지 해치운다. 거기에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거기에 몰입하느라,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에 본드처럼 접착되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현재 나에게 주어진 – 좋은 것으로만 채워도 아까운 - 귀중한 시간을 불평, 원망, 한숨, 자조, 후회, 여러 불순한 것으로 꽉 채운다. 아스팔트에 갈라진 세미한 틈을 비집고 나오는 도로의 풀을 보았는가? 그 풀은 온통 하나에만 집착한다. ‘햇빛’. 그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오로지 ‘햇빛’을 지향하는데 집중하여 사용한다. 결국 연하고 순하기 그지 없는 연두색 새순은 새까맣고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고 만다. 그에게는 이것 하면서 저것도 하는 산만함이 없다. 이것 하면서 저것 못해서 아쉬운 불만족이 없다. 그러다 힘들면 쉰다. 모두가 위축되고 아스팔트도 추위로 수축되어 더욱 단단해지는 엄동설한의 계절이 오면 그도 쉰다.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지 않아야 좋은 사람이란 얘기를 듣는다. 특히 오늘날 가장이라는 무게는 무겁다. 힘들어도 힘든 티, 아파도 아픈 티를 쉽게 내지 못한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어오면 ‘직무유기’와 같은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이 의젓하고 잘 사는 삶이라고 해석하며, 안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나오는 탄식을 이를 악물면서까지 틀어 막는다. 인생을 걷다가 다리가 피곤해지면, 체면, 스타일, 책임감 내려놓고 쉬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길가에 풀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로저 페더러처럼 일류 테니스 선수는 볼을 참으로 쉽게 친다. 어깨에 힘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른 이선희, 임영웅과 같은 가수는 참 쉽게 노래한다. 오만상 안 찡그려도 좋은 발성이 쉽게 나온다. 이들은 뭐 별 다르고 특별한 선수, 가수가 아닌 것처럼 하는데, 그것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렇게 유난히 특별해야 될 필요는 없다. 오늘 주어진 삶 그렇게 힘 주지 않고 그냥 툴툴 살면 된다. 오늘 주어진 present 그것이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만끽하며 살아가는 길이다. 도로 위의 풀처럼 일상의 평범한 삶이 결국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바쁘고 분주하고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의 삶에서 천국을 누리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극복하고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게 된다. 050923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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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믿음은 자라기도 죽기도 한다믿음은 냄비 속 물과 같다. 잔뜩 은혜 받고 밀려오는 뜨거운 감동은 얼마나 지속될까? 각기 믿음의 그릇 재질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열에너지의 지속적 공급이 없다면 바로 식는 냄비 속 물과 같다. 누구는 일 주, 누구는 하루, 누구는 교회 문 나서자 마자 일 것이다. 그나마 영적으로 건강한 환경 속에 있다면 그 온기는 다소 오래갈 것이요, 어둡고 음습한 세상기운이 충만한 곳에 거하면 급속 냉각될 것이다. 믿음은 자라기도 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기도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과거형 신앙도 있다.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그 믿음에 의심이 들어오자 곧 바로 물속에 빠졌다 (마 14:28-31). '나도 성령 충만함으로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가 있었는데…' 그 때의 믿음이 지금의 내 믿음인 양 자족하며 식어진 자신의 영성을 위로한 적이 얼마나 많던가? 어쨌건 저쨌건 지금 내 믿음이 주님의 엄정한 심사의 대상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이 때 주님이 오시지 않기를 기도하라. 제 아무리 2중3중, 특수재질 초강력 보온냄비라도 말씀의 가열이, 기도의 열기가 멈춰지면 식게 되어있다. 자제하고 절제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항상 영적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 3:12-14)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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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생각 없는 순종[자기 생각 없는 순종] 책 많이 읽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열심히 읽기만 했지, 그들에게 건강한 비판과 자기 사유가 없음을 보고 자주 실망한다. Ta-Nehisi Coates는 백인 우월주의가 구동하는 미국 사회에 대해 수많은 비평 저널을 집필하는 사회평론가이다. 그의 비평 대상이 되는 구체적 이슈는 다르지만, 자기 생각 없이 주입 받는 사상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유의할 만하다. 수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But a very large number of Americans will do all they can to preserve the Dream(1). 그 드림은, 일반화가 만연한 곳, 가능한 질문의 개수를 제한하는 곳, 즉각적인 응답에 보상이 따르는 곳에서 번성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모든 예술과 용기 있는 생각, 정직한 글쓰기에 대해 적이다. The Dream thrives on generalization, on limiting the number of possible questions, on privileging immediate answers. The Dream is the enemy of all art, courageous thinking, and honest writing(2).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각 없는 맹목적인 순종 또한 교회에 병이 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길은 종교생활이다. 그들이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정, 칭찬, 보상을 위해 한다.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하며 자신들이 순종/헌신/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한 업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소유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영적 탁월함을 인정받는다는 확신, 내가 가진 재능과 모범적 헌신, 도덕적 우월감 등은 나에게 행복, 안정감을 주는 주된 근원이 된다. 그들은 생각은 매우 단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건강한 사유와 비판 없이 그들의 삶과 행동은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맹목적인 무비판적 수용으로 구동된다. 건강한 사유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생활 방식을 향하여, 예수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그것을 뒤집어 엎고자 했다. 선한 사람의 말은 선하다. 선한 말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선한 깨달음이 없는데 어찌 그 마음이 선하겠으며,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선하겠는가? 하나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진지하고 건강한 사유 없는 종교생활인에 대한 예수의 일성(一聲)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바울의 선교가, 그가 시무했던 교회가 건강했던 이유는 성도들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의식으로 깨어있었기 때문이다. 들은 말씀을 늘 ‘과연 그러한가?’하고 성경과 대조하여 확인했던 깨어있는 성도들 사이에서, 바울 또한 항상 거룩한 긴장과 함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기독교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성찰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드러난다. 자기 생각과 자기 대답과 자기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순종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 같지만, 나쁜 명령에도 잘 순종하는 약점을 가진다. 사유하는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생각이 마비된 순종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위태롭게까지 만든다. 062222 (1) Ta-Nehisi Coates, Between the World and Me (NEW YORK: SPIEGEL & GRAU, 2015), p 33 (2) Ibid., p 50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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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틀리지 않은 말씀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이 말씀이 위안이 되어 지금의 신앙생활에서 안주하면 안 된다. 큰 일 난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은 매우 주의 깊게 듣고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변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라서 성숙한 믿음으로 발전하기도, 쇠퇴하기도, 없어져 버리기도, 화석처럼 굳어져 자라지 못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는 것이 있다. 자라지 않는 믿음이다. 그는, 자라지 않는 나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그의 싫어하시는 마음을 표현하셨다.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눅 13:7) 심지어 때가 되었는데 맺어야 할 열매는 맺지 못하고 마치 열매가 있는 양 뽐내는 나무에게는 저주를 퍼붓고 결국 말라 죽게 하셨다. (막 11:12-14, 20-21)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주님으로 처음 영접했을 때,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고, 눈물의 감동으로 넘쳐났었는데… 그 때의 감화와 감동과 희락은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지금은 덤덤하기만 하다. 예수를 체험한다는 것이 그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이 머리 속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박제된 사슴 뿔처럼 현실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실상이 되질 못한다. 예배 전에 주님을 만난다는 설레는 기대도, 간절한 소원의 간구도, 울부짖는 탄원의 외침도 해본 지 오래다. 그 때의 뜨거웠던 믿음의 고백과 열정은, 일상 속 습관적, 형식적, 관념적인 신앙생활로 치환되었다. 주일됐으니 예배하러 가고, 말씀이 좋다니 읽어야 하고, 기도를 놓으면 안 된다니 공적 예배에서라도 간신히 영혼의 호흡을 내쉰다. 하지만 스스로 내켜서 하는 이의 기쁨은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 듬뿍 채워진 속 사람은 영적 기운이 넘치고, 기쁨으로 원기 충만했던 말씀/기도/전도/헌신/믿음 생활은 어느덧 세상에서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분주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거추장스러운 짐, 덤테기가 되어 버렸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8)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에 주를 위하여 뜨겁게 헌신을 하고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믿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자라지 않는 믿음을 세상의 영이 가만히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먼저 내 안에서 묵묵히 가라앉아 있던 육신의 소욕을 소환해내어 부추긴다. 내 안의 잠재된 정욕과 세상을 향한 애착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세상이 들이대는 온갖 영향력에 어깨동무하며 하나가 된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은, 더욱 더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게 하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막 4:18-19). 바울도 예외 없이 자라지 않는 신앙을 경계했다. 성장이 멈춘 신앙은 죄의 유혹과 세상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며 나락에 떨어질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그래서 그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깨어있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꼭 붙들라고 권면한다.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얻어지며 그 믿음은 항상 깨어 있음으로 지킬 수 있다.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이 말씀에 위안을 얻고 안주하면 절대 안 된다. 자라지 않는 믿음은 이내 시들고 파리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도, 믿음이 있어 천국 들어가기를 소망하나 결국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특히 아래 구절이 있는 누가복음 13장은, 예수께서 자라지 않는 신앙에 대하여 특별히 경고하신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3-24) 천국 갈 소망을 이루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항상 깨어 있어 주님께 주목해야 한다.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히 12:2)! 071422 *image from https://www.agnesknowles.ca/category/blog/finding-focus/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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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충만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삶. 내 안에 예수께서 계심을, 그가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체험하면서 사는 기쁨은, 세상에서 얻는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환희로 가득 찬다. 주님으로 인하여 내 영혼이 만족하고, 그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이 없고 위축되는 것이 없다. 낙심하지 않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내 자신 스스로가 동기부여 되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잠시 자신감 가지고 달려 갈 수 있지만, 당장 어려운 환경을 만나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인간 관계로 감정이 상하고, 일이 막히면, 이내 위축되고 의욕을 잃는다.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성령을 경험하며 동행하는 삶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영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 영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힘을 주신다. 나를 지치게 하고 좌절케 하는 환경 속에서, 어떤 인생의 고난의 파도가 밀려와도 꿋꿋하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과 늘 친교하며 동행하는 삶을 누리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벧전 1:16) (레 11:44) 080622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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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지 않아서[간절하지 않아서] 우리는 부부, 자녀들과 가족 간, 친구, 이웃 간에 관계를 맺어 가면서 서로 조언도 구하고, 위로도 받고, 외로움도 이기며,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만약 이러한 관계에 금이 가거나 문제가 생기면, 이내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하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일상의 리듬이 깨지기도 한다. 큰 조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지켜나가는 데에 유난히 뛰어나다. 우리는 이렇게 남들과 관계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우리들 각자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그분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있다. 지금 현재 그가 내게 주신, 내 마음에 걸리는,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씀 한 톨도 생각나는 게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시면서 늘 언약을 주시고 그들과 언약의 관계를 맺어가셨다. 신약에 들어와서는, 아예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자신도 그 안에 거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 안에, 우리 안에 예수께서 계신 것을 우리 스스로가 안다고 하셨다(요 14:20).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 말씀이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의 아들, 딸들은 영적인 말씀을 통해 그를 만나고 교감하고 관계를 맺어간다.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8).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요 1:14)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말씀의 떡, 생명의 떡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을 생각해보라. 육체가 건강 하려면 무엇보다도 잘 먹어야 한다. 잘 먹으려면 음식을 먹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즉 식욕이 있어야 한다. 입맛이 돌아야 한다. ‘입맛이 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 아닌가? 음식을 먹고자 하는 식욕은 건강과 직결되며, 식욕부진은 건강 내리막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특히 노화가 진행될수록, 신체 활동량의 저하, 대사량의 감소,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의 변화, 식도락(食道樂)을 통한 쾌감지수 하락 등으로 인해 식욕을 잃게 된다. 여기에 평소 먹어야 할 약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노년 우울증, 고독감 등이 밀려오면, 식욕부진이 더욱 가속화된다고 전문의들은 강조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영을 통하여 들어오신다. 영이 없는 육신은 생명 없는 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본질이 바로 영이다. 영이 바로 내 자신이다. 육은 잠시 동안, 나의 본질인 영을 감싸고 있다가, 때가 되면 수명이 다하고 떠나고 만다. 하지만 영은 영원히 영원히 남는다. 육신이 하고픈 것 다하고 달콤한 죄의 낙을 즐길 것 다 즐기고 육은 떠나면 그만 이지만, 그 죄의 대가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영이 온통 다 뒤집어 쓴다. 나는 과연 이 고귀하고 소중한 영원한 생명인 영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내게 주어진 육신의 기회 - 이제 10년 남았는지, 30년 남았는지 모를 –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육신이 호흡하고 있는 이 땅에서의 시간을, 나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이 소중한 영을 위하여 매끼니 거르지 않고 생명을 떡을 잘 먹고 있는가? 생명의 양식이 맛깔나는가? 말씀의 밥만 생각하면 영혼의 입에서 군침이 도는가? 영혼의 떡 소리만 들으면 배가 꼬르륵 꼬르륵 아우성 치는가? 한 사발 가득 채워 먹고도, ‘한 그릇 더!’ 하며 왕성한 식욕이 솟구치는가? 식욕은 과연 있는가? 입맛은 과연 당기는가? 입맛 잃은 병약자처럼 먹기는 싫지만 살기는 해야길래, 누가 떠먹여주면 겨우 먹는 연명 수준인가? 좋은 지 알아도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만큼 간절함이 없어서이다. 쵸콜렛, 도너츠, 콜라, 온갖 설탕 덩어리들이 나쁜 지 알아도 끊지 못하는 이유는 간절함이 없어서이다. 그러다가 암 선고라도 받으면 비로소, 살겠다는 간절함이 이들로부터 멀리하게 한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는 잘 알고 있다. 말씀, 기도, 주님과 동행 … 무엇이 중요한 지 몰라서가 아니다. 간절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냉랭한 심령은 도저히 따라주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은 알아도 이 심각한 문제와 한 판 붙을 만큼 간절하지가 않다. 때문에 성경을 더 붙잡고 이전의 뜨거움을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하려니 내키지가 않는다. 간절하지 않아서이다.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회복의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은 마음에 붙들린 심령, 기도를 시작하기 쉽지 않다. 간절함이 없어서이다. 이 간절함의 불을 지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께서 형제요 자매로 부르신 영적 지체가 필요하다. 서로 만나 말씀으로 교제하며 격려하며 신앙의 도전 받으면서 싸늘하게 식은 마음 이내 뜨거워진다. 같이 영적 생활을 나누고 교감하는 형제, 자매를 통해 내 영적 내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을 통해 신앙의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는다. 며칠 있으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먹을 일이 참 갑갑하다. 매일 매끼 혼자서 혼밥에 혼밥… 영 입맛이 돌지 않는다. 겨우 먹는 것이 교회 옆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2개 사면 3개 주는 케익, 빵 그런거다. 그러다 학교가 개강을 하고 클래스 메이트들과 교내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면 입맛이 돈다. 평범한 반찬 몇 가지라도 식사가 즐겁다. 영의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혼자서 혼밥만 지속하면 영의 입맛이 도는데 한계가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냉랭한 심령이 뜨거워지려면 우리에게 영적 이웃, 영적 동료가 필요하다. 얼어붙은 심령을 녹여줄 형제 자매와 뜨거운 영적 교제가 필요하다. 식어진 가슴, 은혜와 성령의 불로 지피는 것이 교회의 기능이다. “크리스천들은 먼저 예수와 연합되어 있으며, 이 연합은 교회 안의 성도들과 서로 연합하게 한다.” “Christians are first joined to Christ. And this connection makes them one with each other.”(1) 만약 뜨거워야 할 교제의 장이 한겨울 냉골방처럼 차갑다면, 내가 먼저 불쏘시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 각자는 그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지켜야 할 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권하시는 사랑과 헌신은, 내가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권하시기 때문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의지적인 사랑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해야 되는 적극적인 헌신이다. 사도행전 2:42-47의 구절은, 인류 최초의 신약 교회, 교회의 오리지날 이미지, 예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세우고 말씀을 가르친 교회, 오늘날 현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교회의 전형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행 2:42-47)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들은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간의 ‘교제’의 활동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 다음,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교제, 그리고 전도로 발전하여 온 백성의 칭송을 받는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셨다고 기록한다. (47절). 이러한 경이로운 현상은 현대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기독교 저널인 Christianity Today의 2020년 조사에 의하면, 성장하는 교회 중에서 무려 90%가 교회의 영적 성장, 성도의 영성 개발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Small Group을 통한 영적 교제, 즉 셀모임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https://www.christianitytoday.com/.../little-church-big... 오늘 날처럼 실력, 전문성, 효율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효율과 결과를 강조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성품과 성찰과 생각과 관계의 깊이는 더욱 더 소홀히 취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주일날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으로, 설교 말씀 하나 들은 것으로, 영적 성품이 고결해지며 깊은 영적 성찰과 영적 성숙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내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을 소망하며 달려 가고 있는가? 나의 영원한 미래는, 정말로 정말로 튼실하게 준비되어 가고 있기는 하는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과연 친밀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1) Pete Ward, Liquid Church, p 3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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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구하기 전에[간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무언가가 절실할 때가 있다. 칠흑같이 깜깜한 불확실 속에서 누군가를 의지하고픈 때가 있다. 이러한 모든 때에 우리 믿는 자들은 절대자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를 의지하여 구하는 것 말고 달리 할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모질고 거세고 야멸찬 환경 속에 놓인 우리의 물러터진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탄식에 빠진 자기 모습에 집중하기 보다, 상황 탓, 이웃 탓하며 한숨 짓기 보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에게 주목하는 지혜를 신앙 생활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할 것이 있다. 구할 바를 부르짖기 전에 할 것이 있다.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삿 13:2)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삿 13:17). 야곱도,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간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였다. 그러나 그들이 구한 것은, 그들이 의지할 하나님의 이름이요, 그 이름에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 32:7)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창 32: 11)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창 32:29) 바울도, 아무 염려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하되, 감.사.함으로 하라 하지 않던가? (빌 4:6)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주님의 이름에 거룩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감사와 존귀와 영광.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될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은 그 어떤 부르짖는 간구보다도 앞서야 될 신앙의 자세이다. 건강한 신앙은, 자기 필요한 것 구하기 전에 감사와 존귀와 찬양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온다. Honor the Lord before you pray or do good in His name. 100522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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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일 안 하셔도[성령께서 일 안 하셔도] 워싱턴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중국에는 7천만 공산당원보다 많은 최소한 1억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 대하여,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중국의 기독교가 성장하는 원동력의 하나는 특히 농촌처럼 기본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능력과 연루되어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맨 경우가 있었다. 모두가 희망을 접은 상태였지만, 기도를 받은 뒤에 그녀는 건강을 되찾았고, 그 결과 그녀의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1) 한 신학자가 쓴 글이 생각난다. “지금 당장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중지한다면?... 그래도 세상의 교회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변함없이 굴러갈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습관적으로 성령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지만, 과연 성령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임재를 실제로 기대하고 경험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한 번 진지하게 짚어 볼 일이다. ‘성령론’에 있어서 세계적 석학인 Nigel Wright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가 불균형적으로 가장 미흡하며 그의 사역에 대한 무지는 결국 그의 실제적 활동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온다.(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주요한 두 기둥은 말씀 전파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통한 사역이었다.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표적과 기사와 이적의 일들을 통해 많은 불신자들을 진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후에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이었다. 제자들의 복음 사역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도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간절히 구했다. 쇠못이 군데군데 박힌 채찍이 온몸을 휘감을 때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히 11:37)’를 받으면서도, 담대히 복음 전파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성령에 의지함에 있었다. 단순히 성령에 의지함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구한 바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이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 Philip Jenkins에 의하면, 20세기 말부터 제3세계 교회에서 폭발적인 대부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1980년 이래 크리스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의 그리스도인의 수가 비서구보다 두 배쯤 많았다. 그러나 2010년이후 비서구인 크리스천 수가 오히려 일곱 배 정도 많다고 한다. 오늘날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성령의 역사가 표적과 기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Jenkins는 주장한다. 치유, 축귀, 예언 등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표출이 그 현상의 중심에 있다.(3) 지역적으로 다른 위치에 살고,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의 사고와 생활방식, 경제활동, 엔터테인먼트의 수용행태 등은, 사회/문화/경제 여러 측면에서 서구인들의 그것과 점점 간극이 좁아져 간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가 서구에 남긴 정신적 유산이 우리에게도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 합리적 사고를 통과해야만 믿을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을 맹신하는 과학적인 사고와 합리와 이성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수용은 곧, 몰상식, 비 지성, 무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쉽게 치부한다. 자연의 체계를 세우시고 자연이 구동되는 법칙을 만드신 분께서, 때때로 그 체계와 법칙을 스스로 초월하시는 일을 통해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신다는 중요한 관점에 관해, 많은 크리스천들마저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참으로 슬프고 애통한 일임에 틀림없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지만,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그의 비이성적 개입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라는 아주 대담하고 뻔뻔스런 사상으로 견고하게 자리잡으며, 아래 언급한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John Locke의 주장으로 잘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일하심을 간과하거나 무시함은 영적 생활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저 성령 충만하면 영적 생활에 유익한 정도로 치부하면 절대 안 된다. 성령께서는 그를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만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온유(gentle)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를 무시하는 자는 그를 거부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죄와 연결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날이 갈수록 현대교회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탁월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뛰어난 설교, 탁월한 리더쉽, 빼어난 조직 관리… 교회에서 실력, 스킬이 오늘날처럼 중요한 시대는 없던 것 같다.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어 갈수록 결과와 실력을 강조하는 세상의 물결이 교회 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 반면에 성품과 성찰과 영적 깊이는 소홀해져만 가고 있다.(4) 밤을 꼬박 새워가며 왕성한 지적 활동 끝에 빼곡히 써 내려간 설교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여백은 없다. 듣는 이에게 즐거움, 지적 동의와 감동은 미친 것 같은데, 그들의 삶은 여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임했지만 변함은 여전히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롬 8:26), 내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내 안에 계신 그가 항상 내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격려하시고 앞날에 대한 비전으로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과 실감으로 가득 찬 삶이다. 내 자신 스스로가 동기부여 되어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잠시 자신감 가지고 달려 갈 수 있지만, 당장 어려운 환경을 만나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인간 관계로 감정이 상하고, 일이 막히면, 이내 위축되고 의욕을 잃는다.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아버지의 영, 성령을 경험하며 동행하는 삶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나를 좌절케 하는 환경에 닥쳐보면 내가 성령을 의지하는지, 그 동안 자신의 탁월함을 지향하며 살아 왔는지 바로 분간할 수 있다. 112822 (1) Richard Spencer, ‘Millions all over China convert to Christianity’, Washington Times, August 2, 2005, https://www.washingtontimes.com/.../2/20050802-115449-8165r/ (2) Nigel G. Wright, God on the inside (Oxford: The Bible Reading Fellowship, 2006), pp 6-7 (3)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New York: Oxford Univ Press, 2011), pp 1-3 (4) Timothy Keller, Preaching; '설교', 채경락 옮김 (서울; 두란노, 2016), p 261.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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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이 나왔어요제가 번역한 '구약을 통한 신약의 이해' 신서가 나왔습니다. 저를 통해 구입하시면 정가(2만원)에서 30% 할인된 가격(1만4천원)으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배송료 3천원 별도). 구입을 원하시면 제 이메일(hunlee11@gmail.com)으로 성함, 배송주소, 구입수량을 적어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배송료는 두 권까지 3천원이며, 두 권 단위씩 3천원씩 올라갑니다. (예: 두 권 신청시 배송료 3천원, 세 권 신청시 배송료 6천원) 주문은 12/9(금)까지 해주시고, 해당 구입가 및 배송료는 아래 계좌로 입금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입금되는대로 배송 진행하겠습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하나은 109-890394-27407 (예금주: 이강헌)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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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마주할 때[고난을 마주할 때] 사람에게 어찌 형통한 날만 있겠는가? 고난의 때도 있다. 반드시 있다. 일평생 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마주하기 싫어하는 상황이지만 이 때에는 할 일이 하나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전 7:14)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어떤 상황도 그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 없다. 특별히 고난 속에서 울부짖는 신음을 토하도록 환경을 허락하신 그 분의 뜻은 무엇일까? 나에게 이 고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빼먹고 살았길래? 아무 생각할 힘도 사고할 여력도 여의치 않는 곤고한 시간이지만 생각해야 한다. 있는 힘 다 끌어 내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내게 약이 되고, 성장의 발판이 되며, 나중에 비슷한 놈 만났을 때 이겨낼 근성이 생긴다. 생각이 안 나면 일부러 용 쓸 필요는 없다. 마음의 고요 속에서 잠잠히 구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그의 영이 찾아 오셔서 깨닫게 해주신다. 하지만 이 고난의 시간이 너무 길고 아파서,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되도록 빨리 거기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렇게 해결에 급급한 마음은 곰곰이 주 안에서 사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구호가 위로는 될 수 있지만, 나의 경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난의 무게가 짓누르는 힘이 가속화될수록, 그에 대한 신뢰가 희미해지며 ‘손 놓고 계시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마음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를 사랑하는 자는 그가 원하시는 바를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에서 단지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보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영적 근성이 단련 되기를 원하신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그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욥 23:10). 우리가 참고, 견디고, 훈련 받고, 단련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를 사랑하는 자'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일이지만,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여기서 ‘참다’의 의미로 쓰인 헬라어는 στέγω(스테고)로써, ‘무엇을 덮거나 보호하다’는 원래 뜻을 갖는다. 따라서 ‘허물을 덮다’(Philip Doddridge, John Gill), 또는 ‘억제하다’, ‘자제하다’(Walter Bauer) 의미에 가깝다. 오히려 문장 뒤에 ‘견디다’의 표현으로 쓰인 ὑπομένω(휘포메노)가 고난 속에서 ‘견고히 서다’, ‘참다’의 뜻에 더 가깝다. 그러면, 윗 구절의 주어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주어로 채택하고 싶다. 그렇게 해석하니 오늘 주시는 은혜가 특별하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게 하느니라. 왜 그런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그로부터 ‘사랑 받.는. 자’라고 외치기 전에, 내가 그를 ‘사랑 하.는. 자’라는 영적 정체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영적 자각이, 이웃의 허물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덮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주신 약속을 굳게 믿으며, 믿음이 끝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주는 소망을 꼭 붙들며, 모든 고난과 결핍과 좌절의 상황을 끝까지 견디어 내게 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그 고통과 억울함을 참을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벧전 2:19). 고난이 싫고, 그 속에서 질퍽대는 시간이 너무 힘들고, 앞으로 더 큰 고난 속에 휘말릴까 솟구치는 두려움이 우리의 영적 초점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힘을 달라고 구하기보다, 어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조급하게 구한다. 조급함에는 은혜가 머물 수 없다. 조급함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두려워 하는 자,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이 처한 정황에 몰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원하심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누리는 자이다. 122222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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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다드 그리고 일본[글로벌 스탠다드 그리고 일본] 90년대 초 DMB&B라는 글로벌 광고회사에서 일할 때, P&G라는 다국적 기업의 광고를 담당했었다. 세계 top수준의 광고비를 투자하는 소비재 회사라 대륙 별로 광고 캠페인도 다르고 전략도 달랐다. 한국은 중국, 동남아와 함께 Asia Pacific 지역에 속했는데, 유독 일본만 대륙도 아닌 것이 별도 지역으로 분리되어 별도의 광고 전략을 집행했다. 2000년대 초 삼성전자 무선 사업부에서 근무할 때. 핸드폰은 대륙마다 소프트웨어도 다르고 디자인 전략도 달랐다. 대륙 정도 크기의 시장이 아닌데도, 일본만 그 시장에 먹히는 일본향을 만들어 수출해야 했다. 한 모델을 만들면 미주향, 유럽향 등으로 개발하여 꽤 많은 매출을 꾀하는 데, 좁쌀만한 시장 규모에서 돈 벌겠다고 이 모델, 저 모델 만드는 것이 개발비도 못 건지는 형국이라 일본 시장을 포기할 생각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2009년 일본에 홀로 배낭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대중교통과 도보로 도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 하나. 도로 표지판, 안내판에 일본어/한자만 있었다는 것. 까막눈 외국인 여행객은 불편하다 못해 짜증마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영어로 길을 물어봐도 도통 대화가 되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자, 일본어로도 표기하여 여행객에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데, 지금 일본은 어떻게 개선되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아래 기사는 BBC의 일본 특파원이, 지난 30년 동안 일인당 실제 소득도, 경제도, 정치도, 글로벌 마인드도 변하지 않은 일본의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한 글이다. 그는,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공헌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영향력이 지대한 정치 엘리트 집단에 주목한다. 그들은 국수주의, 남성 정치인으로 요약된다. 기자는, 아베 전총리와 같은 이를 전형적인 예로 삼는다. 도시 젊은이들의 결혼율과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고, 시골 노인들의 인구 비중은 늘어가고,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이들 정치 엘리트 세력이 롱런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그들의 부모, 조부모 세대들보다도 외국어 구사 능력도, 유학 비중도 적다고 한다.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2023년에 일본을 추월한다는 전망이 일본 연구기관에서 나왔다. 이 연구기관은 당초 2027년 역전을 예상했으나, 엔저의 급격한 변동에 따라 시기가 4년이나 앞당겨진다고 예상했다. 한번 역전되면 재역전은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덧붙였다. 2027년 이후엔 줄곧 한국이 높고,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것으로 예측됐다. (*조선일보 2022.12.15자) 해외에 체류하다 간만에 한국을 방문하면, 조국의 변화 속도에 깜짝 깜짝 놀란다. 그만큼 유연하고, 역동적이며,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에 오픈 마인드 되어있다. 위의 연구 전망에 그리 놀랄 일도 없다. 정치만 빼고 말이다. 국수주의, 기득권 지키기 일본 정치 닮아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012123202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