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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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나를 겸손케 한다연분홍 한복 곱게 입고 잔뜩 수줍어 하는 새색씨처럼 새벽의 여명은 그렇게 세상을 찾아 든다. 살포시… 겸손하게… 드러나지 않게… 한낮의 폭염처럼 사납지 않아도 한여름 장대비처럼 목청 높이지 않아도 엄동설한 북풍처럼 날카롭지 않아도 봄날의 햇살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그에겐 힘이 있다. 요지부동 견고한 시멘트 콩크리트처럼, 밤새도록 떡하니 왕처럼 버티고 있던 칠흑 같은 어둠을 내몬다. 소리도 없이, 젠틀하게… 새벽 앞에 나는 겸손해진다. 여전히 졸리고 곤하고 다시 누웠던 자리고 돌아가고픈 내 육신의 연약함을 실감한다. 어젯밤까진 잘 버텼는데, 새벽을 맞이 하니 오늘 살아갈 세상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쿠바산 코히바 시가가 뿜어대는 매운 연기보다 칠십배는 더 진한 인생 수십년간 꾹꾹 눌러온 탄식과 한숨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날숨은 나를 겸손으로 내몬다. 내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내 힘으로는 턱도 없는 산더미 같은 일과 사건들 앞에 나는 땅꼬마다. 내 힘으로 안 된다. 내 능으로 되질 않는다. 절대자를 의지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황혼의 지는 해는 나에게 안식을 주지만 새벽의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082423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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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없는 이유친구로서 으뜸가는 자질은 한결같음이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승승장구할 때는 가깝게 지내다가, 부와 명예가 쇠락해진다 싶으며 슬며시 거리를 두는 반짝 친구는 참다운 벗이라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잠 14:20)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잠 19:4)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찌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잠 19:6-7) 진정한 친구는 형제보다도 더 친밀하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잠 18:24) 이러한 벗들은 항상 우리의 곁을 지켜준다. 진정한 벗은 서로를 세워주며 진실된 관심과 애정이 듬뿍 담긴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때론 필요할 때 권고하며 꾸짖기도 한다. 면책(REBUKE)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wound)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잠 27:5-6)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 진정한 벗은 외과의사처럼 친구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칼을 들기도 한다. 친구 사이의 예리한 권면은 친구를 바로 세워준다. 친구 간 건전하고 건강한 의견 충돌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지혜로와진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 27:17) 그래도 친구 사이에 실망하는 법이 없다. 어떤 생각도 저울질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재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할 이야기를 쏟아내는 편안함이 있다. 쭉정이와 알곡을 한데 섞어 놓은 것처럼 서로 생각이 다름에도 신실한 손이 그것들을 걸러내어 남겨 둘 가치가 있는 것은 챙기게 하시고 나머지는 긍휼의 입김으로 날려 보내신다는 확신이 있다“ But oh! the blessing it is to have a friend to whom one can speak fearlessly on any subject; with whom one's deepest as well as one's most foolish thoughts come out simply and safely. Oh, the comfort - the inexpressible comfort of feeling safe with a person - having neither to weigh thoughts nor measure words, but pouring them all right out, just as they are, chaff and grain together; certain that a faithful hand will take and sift them, keep what is worth keeping, and then with the breath of kindness blow the rest away.”(1) 진정한 우정은 공통의 관심사 또는 동일한 대상을 향한 갈망을 바탕으로 한다. Ralph Waldo Emerson은 이러한 공통점이 서로가 다른 기질을 가졌음에도 서로가 가진 각기 다른 배경, 관계, 나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재지 않고 서로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만든다고 한다.(2) CS Louis도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에세이를 통해, “너도?”라는 탄성에 우정의 핵심이 있다고 말한다. “나눌 만한 것이 전혀 없고 딱히 가고자 하는 곳도 없다면 그는 절대로 여행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그저 친구만 원하는 이들에게 벗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고, 이렇다 할 취미도 없으며, 삶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과 목표가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3) 우정은 오로지 동일한 비전과 열정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남들이 갖지 않은 독특한 동질성이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좇으며 그의 삶을 본받으며 그가 예비하신 영생을 진지하게 준비하고자 하는 비전과 소망이 있다. 성격, 기질, 계층, 문화, 인종, 학력, 인생사 등에서 비롯된 모든 차이를 덮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동질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서로 교제하고 있다. 이는 바로 동일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앙의 여정에서 뜨겁고 진실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서로 솔직하게 자신의 죄에 대해 고백할 뿐 아니라(약 5:16),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허물을 사랑으로 지적해줄 수도 있다(롬 15:14).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신앙의 벗들에게 단호하게 바로잡아 줄 권리를 주고(갈 6:1), 사망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어야 한다(히 10:24). 이따금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래야 한다(히 3:13). 또한 믿음의 벗들은 서로 짐을 나눠지고 있다(갈 6:2). 벗이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면 소유는 물론 생명까지 나누며(살전 5:11, 14-15),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야 한다(히 13:16, 빌 4:14, 고후 9:13). 친구들을 존중하고 인정함으로 서로 세워 주어야 한다(롬 12:3-6, 12:10, 잠 17:2). 상대를 알아보고 은사와 장점, 능력을 끌어내야 한다. 함께 공부하고 더불어 예배하면서 믿음을 키워가야 한다(골 3:16, 엡 5:19). 기질과 성품, 성장 배경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가 너무 달라 인간적으로 보기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아도, ‘서로 세워 주는’ 신실한 우정을 쌓아갈 수 있다. 우정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점차 깊어가는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영적인 우정은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여정이다. 목적 자체가 지극히 고상하고 심원하지만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이를 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1) Dinah Maria Mulock Craik, A Life for a Life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877), 169 Dinah Maria Craik (born Dinah Maria Mulock, also often credited as Miss Mulock or Mrs. Craik) was an English novelist and poet. She was born at Stoke-on-Trent and brought up in Newcastle-under-Lyme, Staffordshire. After the death of her mother in 1845, Dinah Maria Mulock settled in London about 1846. She was determined to obtain a livelihood by her pen, and, beginning with fiction for children, advanced steadily until placed in the front rank of the women novelists of her day. She is best known for the novel John Halifax, Gentleman (1856). She followed this with A Life for a Life (1859), which she considered to be the best of her novels, and several other works. She also published some poetry, narratives of tours in Ireland and Cornwall, and A Woman's Thoughts about Women (1858). (2) https://emersoncentral.com/texts/essays-first-series/friendship/ “My friends have come to me unsought(재지않고). The great God gave them to me. By oldest right, by the divine affinity of virtue with itself, I find them, or rather not I, but the Deity in me and in them derides and cancels the thick walls of individual character, relation, age, sex, circumstance, at which he usually connives, and now makes many one. High thanks I owe you, excellent lovers, who carry out the world for me to new and noble depths, and enlarge the meaning of all my thoughts.” (from It’s one of blessing of an old friend) (3) C. S. Lewis, The Four Loves (New York: Mariner Books, 1971), Chapter 4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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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사랑한다면정치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애국애민’이다. 이 점에서만은 보수당도, 진보당도 똑같다. 그것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혹자는 자기 편 잇속을 가능한 배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이루려 하고, 혹자는 애국이란 대의로 포장했지만 실은 자기 것 챙기기 급급한 정치인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 구호뒤에 숨겨있는 그들의 진심을 보고 싶어한다. 우리 크리스찬들도 늘 하는 표현이 있다. 골백번도 더 했을 것이다.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서로 교제하고 하루를 정리한다. 교회마다 작건 크건 갈등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지역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몸이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군상들은 하나같이 하자 많은 인간들인지라, 실수와 문제와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 내의 갈등의 정도가 심할수록, 양쪽 다 심하게 나오는 이유가 똑같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교회의 일에 열심이고, 열심인 만큼 그 갈등도 폭발적으로 강렬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그토록 자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의 속내가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7) 얼마전 TV에서 소년원에 관련된 특집다큐멘타리를 본 적이 있다. 한 소년은 일찍 부모를 잃고 16년간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다. 중죄를 짓고 소년원에 들어왔지만, 출소하면 다시는 죄짓지않고 착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이 꿋꿋하다. 자기만 바라보고 살아오셨던 할머니를 향한 사랑이 남달리 애틋하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삶을 살겠다는 견고한 다짐의 원천은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사지로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소망도 무가치하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다. (고전13:13) 그래서 더욱 큰 은사, 사랑을 사모하라고 하신다. (고전12:31) 수원사업장에 출퇴근하며 직장생활하던 시절, 퇴근버스를 타고 양재역에 내리면 혼잡한 대로보다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서 귀가하곤 했다. 골목길 전봇대에 붙어있던 사채업자 광고스티커. 마른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당장 급전이 필요한 이들을 유혹하는 현란한 문구로 가득찼다. 돈 때문에 딱한 처지에 있는 서민의 약점을 악용하여 무려 연리 8000%에까지 달하는 살인적인 이자를 받아 챙기는 고리대금사채업은 분명히 불법이며 악독하다. 광고문구 맨아래에 이렇게 써있었다. “※주일은 쉽니다.” 수많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권력형비리를 저지른 고위공무원, 정치인들… 검경찰이 작성한 수사일지를 보면 그들의 일요일은 유난히 특별한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교회예배참석”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부흥만 된다면, 거룩에 약간 흠집이 생기더라도 문제 없어들 하는 것 같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사역, 사람들만 꾸역꾸역 모여준다면 거룩에 균열이 가더라도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을 외치며 의연히 제 갈 길 꾸역꾸역 가는 것 같다. 죄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라면서 열심히 갈등하고 마침내 거룩의 질서를 잃고 서로 멱살잡고 싸운다. 결국은 주님앞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법정에 도움을 청한다. 하나님께서 앉으실 거룩한 자리에 어느덧 날이 날카롭게 선 이성과 논리와 비방으로 가득찬 인본의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짠 맛을 잃은 소금, 거룩의 맛을 잃은 성도, 거룩의 빛을 잃은 교회.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가,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지도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면(마5:13-15), 교회를 세우신 그분께 무엇이 될까? 나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큰 교회를 섬기는 성도일수록, 더욱 더 영적긴장의 고삐를 죄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거룩하신 주님께만 집중해야할 본질적 영적생활에, 본의 아니게 영향을 미치는 기타 비본질적 요소들이 너무 많다. 성장, 부흥, 목표, 달성, 부서, 조직, 위계, 예산, 평가, 계획, 행사, 프로그램, 의전, 보고, 관리, 매입, 투자, 전략... 성경에는 있지않은 생경한 단어들이 교회의 일상 업무가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조직을 관리하려면 당연히 요구되는 세상적 기술(Secular Skills)이 기도제목이 되어버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장 전체를 통틀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권능에 대하여 자세히 열거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행하여도, 주를 향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예언하는 능력을 갖추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고전13:1-3) ‘사랑’이란 단어는 신자들의 입에서 참으로 쉽게 나온다. ‘예수사랑’. 마치 자신이 구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고 입밖에 내어 뱉는 나이 어린 꼬마 철부지처럼, 표현한 말과 실제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벧전1:16) 능력, 헌신, 봉사, 구제, 사역, 부흥… 다 좋지만 이것들 다 놓쳐도 거룩만은 끝까지 붙들어야한다. 아무리 성경을 36독을 하고, 신구약 구석구석을 훤히 꿰뚫고, 당대 최고 의술도 포기한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행하여도, 거룩을 놓치면 주님을 잃는 것이다. 주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히려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1-23) 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자질, 능력 같은 것들과 판이하게 다르다. 오히려 인생에, 심지어 교회 양적성장에 별로 도움 안되는 힘없고 무르고 약하디 약한 속성일 수 있다. 사랑하는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잡고 잘 살겠다는 그 소년원 수감자처럼, 주님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거룩해야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참그리스도인이 내어뿜는 거룩의 향취를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룩하고 봐야한다. 거룩의 끝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야 한다. 할머니를 향한 진정한 사랑 속에 파묻힌 손자는 할머니께서 하신 당부의 말씀, 마음에 새겨 평생 잊지 않고 준행한다. 사랑이 듬뿍 담긴 그녀의 말씀, 마음 속 깊이 새겼기에 그녀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힘쓰고 용쓰지 않아도 된다. 애틋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 하나하나가, 잔소리가 되고 성가신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지켜야지! 지켜야지!”하며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서 지켜야 되는 율법이 된다. 눈부시게 새하얀 웨딩드레스로 거룩히 단장한 신부가 신랑오시기를 기다리며 자신을 순결히 지키듯이, 더러운 곳 멀리하고, 더러운 때 묻히지 않고, 더러운 생각 품지 않으며, 상스러운 세상의 언어 입에 담지않으며, 세상의 화려하고 아름답고 고급스럽고 힘있고 찬란한 정신과 문물에 물들이지 않으며, 지혜로운 다섯 신부처럼 깨어있어서 경건의 기름 넉넉히 준비해서 거룩의 불 꺼뜨리지 않고 신랑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 참성도의 삶이요 참교회의 본질이며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기본이다.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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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현실은 암울해도(톨스토이 ‘부활’에서 도입부분 인용) 땅의 황폐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온통 숲속의 푸른 나무들을 베어내어도 대기에 가득 채워져 가는 미세먼지에도 무관심한 듯,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고 소비하고 무분별하게 버리고 처리해도 봄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소를 머금고 임한다. 새벽 이슬 머금은 개나리는 갓 피어난 새싹을 자랑하듯 피어 오르고 참새와 종달새는 새 봄을 맞은 환희를 노래하며 분주히 날고 있다. 찬란한 봄날에는 식물도 새도 곤충도 어린 아이도 모두 환히 웃는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베어버리는 가혹한 도끼날 앞에서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창조주께서 약속하신 환희의 봄날을 기다리며 그가 세우신 만유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처럼 하나님의 세우신 언약 앞에 잔말 말고 순종하며 앞날의 불확실한 미래 앞에 부질없이 주눅들지 아니하며 그가 약속하신 소망 붙들고 그가 세우신 계획 아래 꿋꿋이 임하리라. 아무일 없던 것처럼…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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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묵과와 포용이 정답인가?성소수자들의 성적 취향을 포용한다는 대학 선배의 의견에 대한 나의 답글이다. 이런 글 쓰기 싫지만, 앞으로 더 자주, 더욱 신중함으로 써야 할 것 같다. 때가 악하다. 모든 영적/육적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지켜야 할 현대의 크리스천들을 너무도 가열차게 흔들어 대는 때이다. ‘진리’보다 ‘이해’와 ‘포용’을 앞세우는 인본적 사고가 ‘자기중심’, ‘자기본위’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하여, 밀 까부르듯 세차게 흔들어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동성애'라는 원색적 이슈보다, 죄를 죄로 인식하는가의 문제이다. 동성애말고, 성경에서 죄로 엄금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성애에 대해 침뱉고 능욕하고 피켓들고 항거하면서, 동시에 힘껏 탐욕하고 서로 미워하며 불평하며 질투나 하고 있진 않은가? 성소수자나 이들을 대하는 기독교인이나, 죄에 대한 인식, 죄를 죄로 여기는 깨달음의 여부가 문제의 핵심이다. 깨닫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이 세상에는 죄를 깨달은 죄인들과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죄인 두 부류가 있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의인 하나도 없다 (롬 3:10).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하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 선배님, 전제가 잘못되면 결론이 이상하게 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누구는 성다수자, 누구는 성소수자 취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창조하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4).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모든 생물의 존재가치, 그 첫 번째는 번성(to increase in number)하는 것입니다(창 8:17).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이 수컷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른 수컷과 싸우는 일은 없습니다. 수컷이 암컷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남자인데 남자에게, 여자가 여자의 몸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을 개인적 취향으로 허용한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엄연한 죄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18:22)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6-27) 보수적 신학(신앙)관은, 성경을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 그대로 믿음의 전형으로 삼고 지키려고 하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진보적 또는 자유적 신학(신앙)관은, “똑 같은 말씀이 어찌 2천여년이 지난 현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하며 합리적인 의심에서 비롯됩니다. 시대적/사회적/문화적/관습적 맥락(context)에 따라 다소 융통성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성경해석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할 현대인을 인본주의 신앙으로 이끄는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자기중심, 자기본위의 생각으로 가득 찬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뜨겁게 가열을 하고 있고요.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죄의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죄의 성립에 대한 규정도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습니다. 이들 사이에 인간의 판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모기 턱수염만큼도 없습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자기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해석한 죄(창3:1~6) 아닙니까? 어찌 한 나라의 법을 지켜야 될 백성이, 그 법을 공포한 왕의 권한을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믿음의 성도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배제’와 ‘혐오’가 된다면 또 다른 죄를 잉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겠지요. 죄의 양상과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죄인으로써 이들에게 비판, 비방과 미움의 태도를 갖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영국의 도심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할 때, 자신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젊고(20대 후반), 유능하고(IT회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훤칠하게 잘생기고, 연한 순처럼 온유하고 착해 보이던 그 친구에게 무어라고 얘기해주어야 할까요? “너는 동성애 취향 때문에 교회에 못나가고 있고, 나는 하나님 말씀에 은혜 받고 지금 전도하고 있고… 그런데 너나 나나 그 분 보시기에는 다 같은 죄인이다. 나 또한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탐욕, 자랑, 비판, 불평… 이런 수 많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수도 없이 남에게 들켜가며 또는 남에 들키지 않게 은밀히 마음 속으로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 또한 예외 없이 사랑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지만 네 안에 있는 죄는 미워하신다. 그 죄가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이야. 그만큼 죄의 대가는 치명적이야(롬 6:23).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하시지 않았니?” 진정한 사랑은 포용하고 묵과하는 것과 다르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친구가 사지로 향하는 불못으로 빨려가고 있는데 보고만 있겠습니까? 정서적으로 동감을 표하며 지지만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가고 있는 길에 멈추어 서서, 돌이키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처럼 주님의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인은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행 1:8)이기도 합니다. 능욕과 침뱉음 받고, 갖은 수모와 함께 죽으실 줄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신 뜻을 항상 마음 속에 새기고 그 뜻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 거룩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죄악과 ‘포용’의 이름으로 화평할 수 없습니다. 더러움과 떨어져야 순결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삶과 전문영역에서 귀감이 되어주신 선배님께서,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의 표준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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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 Discovered: 들키지만 않으면민법이든, 형법이든, 율법이든 법률주의(법률에 근거가 없으면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의 맹점은 증거주의에 있다. 죄 지었다는 증거가 없다면 즉 들키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씨뻘건 죄인이라도 무죄로 추정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으로 치명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8) 이 구절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해석도 잘 안되고 이해하기 힘든 난해구절이었다. 가령 엄마가 제과점에서 맛있는 케익을 사와서 냉장고에 보관해두었다고 하자. 엄마는, 서너살 되는 작은 아들에게 “형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 같이 먹을 테니까, 절대로 케익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을 한다(계명이 세워짐). 작은 아들은 “케익 절대 먹지말라!”는 지시 한 마디 때문에 냉장고 안 케익에 온통 신경이 쓰인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냉장고를 살짝 열어본다. 그러자 먹고 싶은 탐심이 불일 듯 일어난다(제1범죄; 롬 7:8-9;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전에 법을 모를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결국, 티가 안나도록 케익 위에 코팅된 쵸코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다(제2범죄; 죄의 확장성; 롬 7:20; 원치 않은 것을 함,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안의 죄이니라).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는 냉장고 문을 자신이 열지 않았고, 케익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제3범죄; 끊임없는 죄의 확장성). 해서는 안될 것을 떨쳐버리려고, “죄짓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에 집착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도리어 얽매이는 형국에 빠진다. 청소년의 경우, “게임 하지 말아야지.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할수록 게임에 빠지게 된다. 음란물에 중독된 청년은, “보지 말아야지. 절대 안봐야지!” 할수록 저속한 그림과 영상에 빠져든다. 죄의 영향력은, “죄 짓지 말라”는 계명을 탑재했을 때, 그 힘이 부스터(booster)된다. 계명을 통해,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죄성을 흔들어 깨워서 죄에 연약한 육신이 결국 범죄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죄의 속성이다. 투명한 비커 안에 담긴 흙탕물은, 고요 속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 물속의 불순물은 밑으로 가라앉고 물은 맑게 보인다. 하지만 다시 비이커를 세게 흔들면 물 전체는 거무튀튀한 더러운 흙탕물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죄는 계명을 이용하여 내 안에서 숨죽이고 가라앉아있는 죄성을 마구 흔들어대며 용솟음 치도록 자극한다. 율법 계명에 사로잡히면, 죄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고 결국 죄에 무른 육신은 굴복하게 된다. “죄는 사람들에게 각양 악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첫 단계로 계명을 활용한다.”(1) 자신의 의지로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고 힘쓸수록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결국 죄의 덫에 빠지고 만다. 그것에 집착하여 애쓸수록 육신 안에서 내재되어있는 죄성이 용솟음 칠 뿐이다. 그리고 그 죄성이 남으로부터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자위한다. 결국 범죄해도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치부하며 은밀히 죄를 범하는 낙을 즐긴다. 이는 종교생활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 안의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밖에 있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며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기독교는 자신의 내면을 지키는 신앙이다. 자신 안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영과 혼과 마음을 지키는 믿음을 중요시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나님보다 주변 이웃들을 의식하면서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교회 마저 아프게 한다. 자신 안에 죄의 마음이, 예를 들어 미움이 거하고 있으면 이미 구원은 온데 간데 없는 것이다. 그 안에 영생은 없다. 행동으로 살인을 범해서만 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미움을 품어도 참혹한 죄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 3:15) 이것이 현대교회의 아픔이다. 성직자의 은밀한 일탈, 성도들의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에서의 크나 큰 편차, 이를 가정 안에서 보고 자란 자녀들에게 유전되는 종교생활. 양적 부흥, 효율, 외면의 경건, 복된 결과에는 관심을 갖지만 내면의 경건, 관계의 깊이, 거룩성을 가벼이 여기는 형식적이고 외면에 치중하는 종교인 수준의 얕은 영성이 바로 그 아픔이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 5) 비교, 교만, 자랑, 탐심, 원망, 불평, 비판, 비방… 성경에서 분명히 지적한 죄에 대해서는 잘 아는지라 경건의 모양에는 지독히 신경 쓰는 외면적 신자들은 입술 밖으로 그들의 속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유려한 믿음의 언어들로 습관적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잡초처럼 이들 죄의 마음이 자라나고 있어도 아무런 영적 거리낌이 없다. 마음껏 탐욕하고 원껏 비판해도 마음 속 찔림은 별로 없다. 오히려 외면적으로 술 담배 안하고, 때 되면 경건 생활 잘 지키고, 기도, 헌신, 봉사하면 믿음 생활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면서 노래를 은혜롭게(?) 부르며, 이웃에게 “사랑, 사랑”을 외치지만, 형제를 향한 사랑 보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경고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1-2)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고전 13:5)” 라는 말씀이 있는데,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크리스찬으로서 예의를 벗어난 언어와 선을 넘은 태도로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 상대방을 그만큼 사랑하니까, 교회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한다. 이는 상대방과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힘이 작용한 것이다. 이렇듯 “계명-죄-사망이 한 패가 되어 우리를 파멸의 불못으로 몰고 간다.”(2)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1절). 마을 입구에 아담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한 집이 있었다.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누군가가 집 앞 마당에 쓰레기 더미를 몰래 쌓아놓고 사라진다. 집주인은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경고 팻말을 세운다. 그러나 무단투기 문제는 그치지 않는다. “쓰레기 투기 엄금!”, “고발조치 하겠음!” 점점 더 큰 팻말, 강력한 문구로 대응을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그러다 주인이 생각을 바꾸었다. 집 앞을 아주 아름답게 꽃밭으로 가꾼 것이다. 그런 직후, 쓰레기 문제는 깨끗이 사라졌다. 자신을 얽매고 있는, 범죄자에게 형벌을 요구하는 율법의 계명 보다 그 반대편의 아름다운 가치, 살리는 생각,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율법보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계명 자체보다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 그분의 뜻을 새겨야 한다.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원수를 사랑하라. 비판하지 말라. 비교하지 말라. 오래 참으라.” 자신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계명임을 깨닫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그리고 그가 부어주시는 마음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의 초석은 계명의 행함 이전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는 것에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7, 19) 형벌이 두려워 율법 계명의 준수에 마음을 두는 자는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속성을 깨달으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무겁고 진지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믿음의 지향점은 그분의 생각, 뜻, 마음과 나의 그것들이 일치하는 것이다. 인생의 지향점은 남들에게 안 들키고 행위로 인정 받아서 즐겁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속성,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에 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1) Ben Witherington III, Paul’s Letter to the Roman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W. B. Eerdmans, 2004), p. 190 (2) John Stott, The Message of Romans (Leicester: IVP, 1994), p. 200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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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뜨겁지만나의 다섯 형제/자매들 중에 맨 중간에 계신 누님만이 천주교 신자이다. 내 생각엔 우리 다섯 중 그 누님의 사랑이 가장 많으신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그 딸의 효심과 마음 씀씀이가 가장 낫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5년전 남편을 여의고, 그 무거운 나이에도 직장일을 지속하며, 혼자 힘겨운 삶을 살아가시면서도 이웃과 혈육에 퍼주는 그녀의 사랑은 각별하다. 올 겨울 미국의 그녀 집에 방문했을 때,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은 저녁에 귀가하는 고된 삶에도 매끼니 빠짐없이 뜨겁고 신선한 음식으로 든든하게 챙겨주시고, 돌아올 때는 그 없는 살림에 2천불을 내 손에 꼬옥 쥐어주셨다. 지인분들의 초청으로 인근 학교와 체육공원에 가서 테니스를 즐긴 지 꽤 되었다. 간혹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부터 신앙배경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만남을 지속하다 보면 그들의 겸손한 언어와 배려의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교회, 믿음, 말씀, oo목사 등등을 언급하면서 큰 소리로 통성명하는 – 어떨 때에는 그것이 믿음의 과시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 개신교신자들과 결이 다소 다르다. 내가 일생 동안 만나본 개신교신자와 천주교신자의 숫자가 너무나 한정적이라, 일반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나의 주관과 편견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인정한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주변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정체성에 대해 그렇게 강변하지도 시끄럽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하지만 만나보면 만나볼수록 괜찮은 사람, 향기 나는 사람, 같이 있고픈 사람, 배우고 싶은 사람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주변에 그에 못지않은 개신교 신자, 사역자들도 많이 만났고 만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편차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는 나의 영적 정체성, 영적 지향성과 관련된, 오랜 동안 내 안에서 무겁게 묵어왔던 내적 질문이었다. 아직도 끝 없이 내가 내게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엊그제 팀 켈러가 주창한 ‘City to City 교회개척운동’ 3박4일 세미나에 다녀왔다. 신학교 시절부터 팀 켈러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지도 받고, 지금은 뉴욕에서 사역하시고 계신 한 목사님으로부터 그를 회고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평생 동안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에 초점을 맞춰 사역을 해오셨다고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 우리는 ‘열매’라 하면 성과, 유형 무형의 결과치를 자연스럽게 연상하는데, 이 모든 성령의 열매는 ‘성품’에 관련된 것이다. 제 아무리 큰 사역을 하고, 큰 존경과 인정을 받는 신앙의 결과치를 얻더라도,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의 향기, 예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 11:45) “내가 행복하니 너희도 행복할지니라”하시지 않았다. “내가 성공했으니 너희도 성공하라”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비신자나 신자 할 것 없이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행복’, ‘성공’, ‘능력’은 매우 중요한 가치 덕목이 되어왔다. 이것들을 보유한 크기에 따라 자리의 상석이 정해지고, 존경의 질과 크기가 달라진다. 심지어 교회개척세미나에 참석한 많은 목사님들도 ‘교회개척 성공’, ‘성공한 목회’ 등의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만큼 거룩을 향한 뜨거운 몸부림, 거룩하신 그분과의 관계, 관계의 깊이, 성찰의 깊이는 얕아만 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중세 유럽에는 ‘수도원(monastery)’이란 영적 공동체가 있었다.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사적이고 인격적인 일대일 관계 속에서 성찰의 깊은 우물을 파면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곳이다. 영국에는 카톨릭이나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그러한 곳이 아직도 있다. 인생의 어둔 골짜기를 지날 때, 몹시도 그분과 사적인 교감이 간절할 때, 그 곳은 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이러한 곳은, retreats라고 한다. 한국에 홀로 나온 지 이제 삼 년. 그 수도원, retreats 가 그립다.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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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풀처럼 평범한 삶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발레리나의 길은 험하고 어렵다고들 말한다. 수백 번 수천 번에 이르는 같은 동작의 반복에 반복, 점프에 점프, 더 높게, 더 가볍게, 더 사뿐이, 다이어트의 압박감, 감량에 감량 … 발레리나 강수진의 부르트고 망가진 발이 생각난다. 발레리나의 최종 완성은 표정에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면 안 된다. 항상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이 고난의 연속인 발레리나의 경력에 찾아오는 절대 위기는 자기보다 잘 하는 사람, 라이벌을 만났을 때 엄습해 오는 좌절감에 있다. 그리고 이어서 슬럼프라는 불청객이 찾아온다. 겨우 이 슬럼프를 벗어나면 이전 보다 더 수준 높은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극심한 좌절감에 빠진다. 더 이상 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낭패감 -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역량 임계치의 끝을 확연하게 체험한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시점에, 그래도 발레리나 커리어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발레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기분이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고, 실의에 빠져도, 발레슈즈(ballet shoes)만 신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것 말이다. 맞딱트린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만, 해결책은 매우 단순하다. 인생 또한 기분 좋게 그것을 즐기는 길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작은 면적에 너무 많은 것을 부착하려 하고, 적재하려고 하고, 이루려 하니, 내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만끽하지 못한다. 항상 불만족의 상태에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것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사로 잡혀 있다. 무언가를 할 때 그것만 하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길이다. 물 마실 때는 물만 마셔야 되는 지혜를 최근에 깨달았다. 물맛을 음미하면서, 물이 마른 목젖을 적시는 감촉을 느끼면서, 목에 넘어가는 소리를 감상하면서… 하지만 우리는 유튜브를 보고, 전화 통화하면서, 물 마시며 식사까지 해치운다. 거기에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거기에 몰입하느라,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에 본드처럼 접착되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현재 나에게 주어진 – 좋은 것으로만 채워도 아까운 - 귀중한 시간을 불평, 원망, 한숨, 자조, 후회, 여러 불순한 것으로 꽉 채운다. 아스팔트에 갈라진 세미한 틈을 비집고 나오는 도로의 풀을 보았는가? 그 풀은 온통 하나에만 집착한다. ‘햇빛’. 그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오로지 ‘햇빛’을 지향하는데 집중하여 사용한다. 결국 연하고 순하기 그지 없는 연두색 새순은 새까맣고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고 만다. 그에게는 이것 하면서 저것도 하는 산만함이 없다. 이것 하면서 저것 못해서 아쉬운 불만족이 없다. 그러다 힘들면 쉰다. 모두가 위축되고 아스팔트도 추위로 수축되어 더욱 단단해지는 엄동설한의 계절이 오면 그도 쉰다.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지 않아야 좋은 사람이란 얘기를 듣는다. 특히 오늘날 가장이라는 무게는 무겁다. 힘들어도 힘든 티, 아파도 아픈 티를 쉽게 내지 못한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어오면 ‘직무유기’와 같은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이 의젓하고 잘 사는 삶이라고 해석하며, 안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나오는 탄식을 이를 악물면서까지 틀어 막는다. 인생을 걷다가 다리가 피곤해지면, 체면, 스타일, 책임감 내려놓고 쉬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길가에 풀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로저 페더러처럼 일류 테니스 선수는 볼을 참으로 쉽게 친다. 어깨에 힘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른 이선희, 임영웅과 같은 가수는 참 쉽게 노래한다. 오만상 안 찡그려도 좋은 발성이 쉽게 나온다. 이들은 뭐 별 다르고 특별한 선수, 가수가 아닌 것처럼 하는데, 그것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렇게 유난히 특별해야 될 필요는 없다. 오늘 주어진 삶 그렇게 힘 주지 않고 그냥 툴툴 살면 된다. 오늘 주어진 present 그것이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만끽하며 살아가는 길이다. 도로 위의 풀처럼 일상의 평범한 삶이 결국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바쁘고 분주하고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의 삶에서 천국을 누리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극복하고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게 된다. 050923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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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믿음은 자라기도 죽기도 한다믿음은 냄비 속 물과 같다. 잔뜩 은혜 받고 밀려오는 뜨거운 감동은 얼마나 지속될까? 각기 믿음의 그릇 재질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열에너지의 지속적 공급이 없다면 바로 식는 냄비 속 물과 같다. 누구는 일 주, 누구는 하루, 누구는 교회 문 나서자 마자 일 것이다. 그나마 영적으로 건강한 환경 속에 있다면 그 온기는 다소 오래갈 것이요, 어둡고 음습한 세상기운이 충만한 곳에 거하면 급속 냉각될 것이다. 믿음은 자라기도 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기도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과거형 신앙도 있다.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그 믿음에 의심이 들어오자 곧 바로 물속에 빠졌다 (마 14:28-31). '나도 성령 충만함으로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가 있었는데…' 그 때의 믿음이 지금의 내 믿음인 양 자족하며 식어진 자신의 영성을 위로한 적이 얼마나 많던가? 어쨌건 저쨌건 지금 내 믿음이 주님의 엄정한 심사의 대상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이 때 주님이 오시지 않기를 기도하라. 제 아무리 2중3중, 특수재질 초강력 보온냄비라도 말씀의 가열이, 기도의 열기가 멈춰지면 식게 되어있다. 자제하고 절제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항상 영적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 3:12-14)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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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생각 없는 순종[자기 생각 없는 순종] 책 많이 읽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열심히 읽기만 했지, 그들에게 건강한 비판과 자기 사유가 없음을 보고 자주 실망한다. Ta-Nehisi Coates는 백인 우월주의가 구동하는 미국 사회에 대해 수많은 비평 저널을 집필하는 사회평론가이다. 그의 비평 대상이 되는 구체적 이슈는 다르지만, 자기 생각 없이 주입 받는 사상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유의할 만하다. 수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But a very large number of Americans will do all they can to preserve the Dream(1). 그 드림은, 일반화가 만연한 곳, 가능한 질문의 개수를 제한하는 곳, 즉각적인 응답에 보상이 따르는 곳에서 번성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모든 예술과 용기 있는 생각, 정직한 글쓰기에 대해 적이다. The Dream thrives on generalization, on limiting the number of possible questions, on privileging immediate answers. The Dream is the enemy of all art, courageous thinking, and honest writing(2).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각 없는 맹목적인 순종 또한 교회에 병이 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는 길은 종교생활이다. 그들이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정, 칭찬, 보상을 위해 한다.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하며 자신들이 순종/헌신/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한 업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소유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영적 탁월함을 인정받는다는 확신, 내가 가진 재능과 모범적 헌신, 도덕적 우월감 등은 나에게 행복, 안정감을 주는 주된 근원이 된다. 그들은 생각은 매우 단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건강한 사유와 비판 없이 그들의 삶과 행동은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맹목적인 무비판적 수용으로 구동된다. 건강한 사유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생활 방식을 향하여, 예수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그것을 뒤집어 엎고자 했다. 선한 사람의 말은 선하다. 선한 말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선한 깨달음이 없는데 어찌 그 마음이 선하겠으며,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선하겠는가? 하나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진지하고 건강한 사유 없는 종교생활인에 대한 예수의 일성(一聲)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바울의 선교가, 그가 시무했던 교회가 건강했던 이유는 성도들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의식으로 깨어있었기 때문이다. 들은 말씀을 늘 ‘과연 그러한가?’하고 성경과 대조하여 확인했던 깨어있는 성도들 사이에서, 바울 또한 항상 거룩한 긴장과 함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기독교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성찰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드러난다. 자기 생각과 자기 대답과 자기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순종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 같지만, 나쁜 명령에도 잘 순종하는 약점을 가진다. 사유하는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생각이 마비된 순종은 교회를 아프게 한다. 위태롭게까지 만든다. 062222 (1) Ta-Nehisi Coates, Between the World and Me (NEW YORK: SPIEGEL & GRAU, 2015), p 33 (2) Ibid., p 50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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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틀리지 않은 말씀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이 말씀이 위안이 되어 지금의 신앙생활에서 안주하면 안 된다. 큰 일 난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은 매우 주의 깊게 듣고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변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라서 성숙한 믿음으로 발전하기도, 쇠퇴하기도, 없어져 버리기도, 화석처럼 굳어져 자라지 못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는 것이 있다. 자라지 않는 믿음이다. 그는, 자라지 않는 나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의 비유를 들어, 이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그의 싫어하시는 마음을 표현하셨다.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눅 13:7) 심지어 때가 되었는데 맺어야 할 열매는 맺지 못하고 마치 열매가 있는 양 뽐내는 나무에게는 저주를 퍼붓고 결국 말라 죽게 하셨다. (막 11:12-14, 20-21)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주님으로 처음 영접했을 때,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고, 눈물의 감동으로 넘쳐났었는데… 그 때의 감화와 감동과 희락은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지금은 덤덤하기만 하다. 예수를 체험한다는 것이 그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이 머리 속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박제된 사슴 뿔처럼 현실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실상이 되질 못한다. 예배 전에 주님을 만난다는 설레는 기대도, 간절한 소원의 간구도, 울부짖는 탄원의 외침도 해본 지 오래다. 그 때의 뜨거웠던 믿음의 고백과 열정은, 일상 속 습관적, 형식적, 관념적인 신앙생활로 치환되었다. 주일됐으니 예배하러 가고, 말씀이 좋다니 읽어야 하고, 기도를 놓으면 안 된다니 공적 예배에서라도 간신히 영혼의 호흡을 내쉰다. 하지만 스스로 내켜서 하는 이의 기쁨은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 듬뿍 채워진 속 사람은 영적 기운이 넘치고, 기쁨으로 원기 충만했던 말씀/기도/전도/헌신/믿음 생활은 어느덧 세상에서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분주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거추장스러운 짐, 덤테기가 되어 버렸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8)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에 주를 위하여 뜨겁게 헌신을 하고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믿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자라지 않는 믿음을 세상의 영이 가만히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먼저 내 안에서 묵묵히 가라앉아 있던 육신의 소욕을 소환해내어 부추긴다. 내 안의 잠재된 정욕과 세상을 향한 애착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세상이 들이대는 온갖 영향력에 어깨동무하며 하나가 된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은, 더욱 더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게 하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막 4:18-19). 바울도 예외 없이 자라지 않는 신앙을 경계했다. 성장이 멈춘 신앙은 죄의 유혹과 세상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며 나락에 떨어질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그래서 그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깨어있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꼭 붙들라고 권면한다.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얻어지며 그 믿음은 항상 깨어 있음으로 지킬 수 있다.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이 말씀에 위안을 얻고 안주하면 절대 안 된다. 자라지 않는 믿음은 이내 시들고 파리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도, 믿음이 있어 천국 들어가기를 소망하나 결국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특히 아래 구절이 있는 누가복음 13장은, 예수께서 자라지 않는 신앙에 대하여 특별히 경고하신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3-24) 천국 갈 소망을 이루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항상 깨어 있어 주님께 주목해야 한다.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히 12:2)! 071422 *image from https://www.agnesknowles.ca/category/blog/finding-focus/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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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충만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삶. 내 안에 예수께서 계심을, 그가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체험하면서 사는 기쁨은, 세상에서 얻는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환희로 가득 찬다. 주님으로 인하여 내 영혼이 만족하고, 그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이 없고 위축되는 것이 없다. 낙심하지 않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내 자신 스스로가 동기부여 되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잠시 자신감 가지고 달려 갈 수 있지만, 당장 어려운 환경을 만나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인간 관계로 감정이 상하고, 일이 막히면, 이내 위축되고 의욕을 잃는다.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성령을 경험하며 동행하는 삶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영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 영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힘을 주신다. 나를 지치게 하고 좌절케 하는 환경 속에서, 어떤 인생의 고난의 파도가 밀려와도 꿋꿋하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과 늘 친교하며 동행하는 삶을 누리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벧전 1:16) (레 11:44) 080622202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