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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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지 않아서[간절하지 않아서] 우리는 부부, 자녀들과 가족 간, 친구, 이웃 간에 관계를 맺어 가면서 서로 조언도 구하고, 위로도 받고, 외로움도 이기며,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만약 이러한 관계에 금이 가거나 문제가 생기면, 이내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하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일상의 리듬이 깨지기도 한다. 큰 조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지켜나가는 데에 유난히 뛰어나다. 우리는 이렇게 남들과 관계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우리들 각자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그분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있다. 지금 현재 그가 내게 주신, 내 마음에 걸리는,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씀 한 톨도 생각나는 게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시면서 늘 언약을 주시고 그들과 언약의 관계를 맺어가셨다. 신약에 들어와서는, 아예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자신도 그 안에 거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 안에, 우리 안에 예수께서 계신 것을 우리 스스로가 안다고 하셨다(요 14:20).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 말씀이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의 아들, 딸들은 영적인 말씀을 통해 그를 만나고 교감하고 관계를 맺어간다.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8).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요 1:14)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말씀의 떡, 생명의 떡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을 생각해보라. 육체가 건강 하려면 무엇보다도 잘 먹어야 한다. 잘 먹으려면 음식을 먹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즉 식욕이 있어야 한다. 입맛이 돌아야 한다. ‘입맛이 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 아닌가? 음식을 먹고자 하는 식욕은 건강과 직결되며, 식욕부진은 건강 내리막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특히 노화가 진행될수록, 신체 활동량의 저하, 대사량의 감소,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의 변화, 식도락(食道樂)을 통한 쾌감지수 하락 등으로 인해 식욕을 잃게 된다. 여기에 평소 먹어야 할 약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노년 우울증, 고독감 등이 밀려오면, 식욕부진이 더욱 가속화된다고 전문의들은 강조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영을 통하여 들어오신다. 영이 없는 육신은 생명 없는 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본질이 바로 영이다. 영이 바로 내 자신이다. 육은 잠시 동안, 나의 본질인 영을 감싸고 있다가, 때가 되면 수명이 다하고 떠나고 만다. 하지만 영은 영원히 영원히 남는다. 육신이 하고픈 것 다하고 달콤한 죄의 낙을 즐길 것 다 즐기고 육은 떠나면 그만 이지만, 그 죄의 대가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영이 온통 다 뒤집어 쓴다. 나는 과연 이 고귀하고 소중한 영원한 생명인 영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내게 주어진 육신의 기회 - 이제 10년 남았는지, 30년 남았는지 모를 –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육신이 호흡하고 있는 이 땅에서의 시간을, 나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이 소중한 영을 위하여 매끼니 거르지 않고 생명을 떡을 잘 먹고 있는가? 생명의 양식이 맛깔나는가? 말씀의 밥만 생각하면 영혼의 입에서 군침이 도는가? 영혼의 떡 소리만 들으면 배가 꼬르륵 꼬르륵 아우성 치는가? 한 사발 가득 채워 먹고도, ‘한 그릇 더!’ 하며 왕성한 식욕이 솟구치는가? 식욕은 과연 있는가? 입맛은 과연 당기는가? 입맛 잃은 병약자처럼 먹기는 싫지만 살기는 해야길래, 누가 떠먹여주면 겨우 먹는 연명 수준인가? 좋은 지 알아도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만큼 간절함이 없어서이다. 쵸콜렛, 도너츠, 콜라, 온갖 설탕 덩어리들이 나쁜 지 알아도 끊지 못하는 이유는 간절함이 없어서이다. 그러다가 암 선고라도 받으면 비로소, 살겠다는 간절함이 이들로부터 멀리하게 한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는 잘 알고 있다. 말씀, 기도, 주님과 동행 … 무엇이 중요한 지 몰라서가 아니다. 간절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냉랭한 심령은 도저히 따라주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은 알아도 이 심각한 문제와 한 판 붙을 만큼 간절하지가 않다. 때문에 성경을 더 붙잡고 이전의 뜨거움을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하려니 내키지가 않는다. 간절하지 않아서이다.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회복의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은 마음에 붙들린 심령, 기도를 시작하기 쉽지 않다. 간절함이 없어서이다. 이 간절함의 불을 지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께서 형제요 자매로 부르신 영적 지체가 필요하다. 서로 만나 말씀으로 교제하며 격려하며 신앙의 도전 받으면서 싸늘하게 식은 마음 이내 뜨거워진다. 같이 영적 생활을 나누고 교감하는 형제, 자매를 통해 내 영적 내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을 통해 신앙의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는다. 며칠 있으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먹을 일이 참 갑갑하다. 매일 매끼 혼자서 혼밥에 혼밥… 영 입맛이 돌지 않는다. 겨우 먹는 것이 교회 옆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2개 사면 3개 주는 케익, 빵 그런거다. 그러다 학교가 개강을 하고 클래스 메이트들과 교내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면 입맛이 돈다. 평범한 반찬 몇 가지라도 식사가 즐겁다. 영의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혼자서 혼밥만 지속하면 영의 입맛이 도는데 한계가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냉랭한 심령이 뜨거워지려면 우리에게 영적 이웃, 영적 동료가 필요하다. 얼어붙은 심령을 녹여줄 형제 자매와 뜨거운 영적 교제가 필요하다. 식어진 가슴, 은혜와 성령의 불로 지피는 것이 교회의 기능이다. “크리스천들은 먼저 예수와 연합되어 있으며, 이 연합은 교회 안의 성도들과 서로 연합하게 한다.” “Christians are first joined to Christ. And this connection makes them one with each other.”(1) 만약 뜨거워야 할 교제의 장이 한겨울 냉골방처럼 차갑다면, 내가 먼저 불쏘시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 각자는 그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지켜야 할 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권하시는 사랑과 헌신은, 내가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권하시기 때문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의지적인 사랑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해야 되는 적극적인 헌신이다. 사도행전 2:42-47의 구절은, 인류 최초의 신약 교회, 교회의 오리지날 이미지, 예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세우고 말씀을 가르친 교회, 오늘날 현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교회의 전형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행 2:42-47)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들은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간의 ‘교제’의 활동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 다음,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교제, 그리고 전도로 발전하여 온 백성의 칭송을 받는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셨다고 기록한다. (47절). 이러한 경이로운 현상은 현대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기독교 저널인 Christianity Today의 2020년 조사에 의하면, 성장하는 교회 중에서 무려 90%가 교회의 영적 성장, 성도의 영성 개발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Small Group을 통한 영적 교제, 즉 셀모임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https://www.christianitytoday.com/.../little-church-big... 오늘 날처럼 실력, 전문성, 효율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효율과 결과를 강조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성품과 성찰과 생각과 관계의 깊이는 더욱 더 소홀히 취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주일날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으로, 설교 말씀 하나 들은 것으로, 영적 성품이 고결해지며 깊은 영적 성찰과 영적 성숙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내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을 소망하며 달려 가고 있는가? 나의 영원한 미래는, 정말로 정말로 튼실하게 준비되어 가고 있기는 하는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과연 친밀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1) Pete Ward, Liquid Church, p 3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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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구하기 전에[간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무언가가 절실할 때가 있다. 칠흑같이 깜깜한 불확실 속에서 누군가를 의지하고픈 때가 있다. 이러한 모든 때에 우리 믿는 자들은 절대자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를 의지하여 구하는 것 말고 달리 할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모질고 거세고 야멸찬 환경 속에 놓인 우리의 물러터진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탄식에 빠진 자기 모습에 집중하기 보다, 상황 탓, 이웃 탓하며 한숨 짓기 보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에게 주목하는 지혜를 신앙 생활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할 것이 있다. 구할 바를 부르짖기 전에 할 것이 있다.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삿 13:2)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삿 13:17). 야곱도,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간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였다. 그러나 그들이 구한 것은, 그들이 의지할 하나님의 이름이요, 그 이름에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 32:7)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창 32: 11)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창 32:29) 바울도, 아무 염려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하되, 감.사.함으로 하라 하지 않던가? (빌 4:6)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주님의 이름에 거룩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감사와 존귀와 영광.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될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은 그 어떤 부르짖는 간구보다도 앞서야 될 신앙의 자세이다. 건강한 신앙은, 자기 필요한 것 구하기 전에 감사와 존귀와 찬양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온다. Honor the Lord before you pray or do good in His name. 100522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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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일 안 하셔도[성령께서 일 안 하셔도] 워싱턴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중국에는 7천만 공산당원보다 많은 최소한 1억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 대하여,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중국의 기독교가 성장하는 원동력의 하나는 특히 농촌처럼 기본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능력과 연루되어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맨 경우가 있었다. 모두가 희망을 접은 상태였지만, 기도를 받은 뒤에 그녀는 건강을 되찾았고, 그 결과 그녀의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1) 한 신학자가 쓴 글이 생각난다. “지금 당장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중지한다면?... 그래도 세상의 교회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변함없이 굴러갈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습관적으로 성령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지만, 과연 성령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임재를 실제로 기대하고 경험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한 번 진지하게 짚어 볼 일이다. ‘성령론’에 있어서 세계적 석학인 Nigel Wright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가 불균형적으로 가장 미흡하며 그의 사역에 대한 무지는 결국 그의 실제적 활동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온다.(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주요한 두 기둥은 말씀 전파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통한 사역이었다.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표적과 기사와 이적의 일들을 통해 많은 불신자들을 진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후에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이었다. 제자들의 복음 사역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도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간절히 구했다. 쇠못이 군데군데 박힌 채찍이 온몸을 휘감을 때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히 11:37)’를 받으면서도, 담대히 복음 전파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성령에 의지함에 있었다. 단순히 성령에 의지함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구한 바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이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 Philip Jenkins에 의하면, 20세기 말부터 제3세계 교회에서 폭발적인 대부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1980년 이래 크리스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의 그리스도인의 수가 비서구보다 두 배쯤 많았다. 그러나 2010년이후 비서구인 크리스천 수가 오히려 일곱 배 정도 많다고 한다. 오늘날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성령의 역사가 표적과 기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Jenkins는 주장한다. 치유, 축귀, 예언 등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표출이 그 현상의 중심에 있다.(3) 지역적으로 다른 위치에 살고,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의 사고와 생활방식, 경제활동, 엔터테인먼트의 수용행태 등은, 사회/문화/경제 여러 측면에서 서구인들의 그것과 점점 간극이 좁아져 간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가 서구에 남긴 정신적 유산이 우리에게도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 합리적 사고를 통과해야만 믿을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을 맹신하는 과학적인 사고와 합리와 이성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수용은 곧, 몰상식, 비 지성, 무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쉽게 치부한다. 자연의 체계를 세우시고 자연이 구동되는 법칙을 만드신 분께서, 때때로 그 체계와 법칙을 스스로 초월하시는 일을 통해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신다는 중요한 관점에 관해, 많은 크리스천들마저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참으로 슬프고 애통한 일임에 틀림없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지만,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그의 비이성적 개입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라는 아주 대담하고 뻔뻔스런 사상으로 견고하게 자리잡으며, 아래 언급한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John Locke의 주장으로 잘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일하심을 간과하거나 무시함은 영적 생활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저 성령 충만하면 영적 생활에 유익한 정도로 치부하면 절대 안 된다. 성령께서는 그를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만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온유(gentle)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를 무시하는 자는 그를 거부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죄와 연결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날이 갈수록 현대교회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탁월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뛰어난 설교, 탁월한 리더쉽, 빼어난 조직 관리… 교회에서 실력, 스킬이 오늘날처럼 중요한 시대는 없던 것 같다.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어 갈수록 결과와 실력을 강조하는 세상의 물결이 교회 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 반면에 성품과 성찰과 영적 깊이는 소홀해져만 가고 있다.(4) 밤을 꼬박 새워가며 왕성한 지적 활동 끝에 빼곡히 써 내려간 설교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여백은 없다. 듣는 이에게 즐거움, 지적 동의와 감동은 미친 것 같은데, 그들의 삶은 여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임했지만 변함은 여전히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롬 8:26), 내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내 안에 계신 그가 항상 내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격려하시고 앞날에 대한 비전으로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과 실감으로 가득 찬 삶이다. 내 자신 스스로가 동기부여 되어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삶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잠시 자신감 가지고 달려 갈 수 있지만, 당장 어려운 환경을 만나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인간 관계로 감정이 상하고, 일이 막히면, 이내 위축되고 의욕을 잃는다.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아버지의 영, 성령을 경험하며 동행하는 삶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 나를 좌절케 하는 환경에 닥쳐보면 내가 성령을 의지하는지, 그 동안 자신의 탁월함을 지향하며 살아 왔는지 바로 분간할 수 있다. 112822 (1) Richard Spencer, ‘Millions all over China convert to Christianity’, Washington Times, August 2, 2005, https://www.washingtontimes.com/.../2/20050802-115449-8165r/ (2) Nigel G. Wright, God on the inside (Oxford: The Bible Reading Fellowship, 2006), pp 6-7 (3)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New York: Oxford Univ Press, 2011), pp 1-3 (4) Timothy Keller, Preaching; '설교', 채경락 옮김 (서울; 두란노, 2016), p 261.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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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이 나왔어요제가 번역한 '구약을 통한 신약의 이해' 신서가 나왔습니다. 저를 통해 구입하시면 정가(2만원)에서 30% 할인된 가격(1만4천원)으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배송료 3천원 별도). 구입을 원하시면 제 이메일(hunlee11@gmail.com)으로 성함, 배송주소, 구입수량을 적어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배송료는 두 권까지 3천원이며, 두 권 단위씩 3천원씩 올라갑니다. (예: 두 권 신청시 배송료 3천원, 세 권 신청시 배송료 6천원) 주문은 12/9(금)까지 해주시고, 해당 구입가 및 배송료는 아래 계좌로 입금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입금되는대로 배송 진행하겠습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하나은 109-890394-27407 (예금주: 이강헌)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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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마주할 때[고난을 마주할 때] 사람에게 어찌 형통한 날만 있겠는가? 고난의 때도 있다. 반드시 있다. 일평생 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마주하기 싫어하는 상황이지만 이 때에는 할 일이 하나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전 7:14)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어떤 상황도 그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 없다. 특별히 고난 속에서 울부짖는 신음을 토하도록 환경을 허락하신 그 분의 뜻은 무엇일까? 나에게 이 고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빼먹고 살았길래? 아무 생각할 힘도 사고할 여력도 여의치 않는 곤고한 시간이지만 생각해야 한다. 있는 힘 다 끌어 내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내게 약이 되고, 성장의 발판이 되며, 나중에 비슷한 놈 만났을 때 이겨낼 근성이 생긴다. 생각이 안 나면 일부러 용 쓸 필요는 없다. 마음의 고요 속에서 잠잠히 구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그의 영이 찾아 오셔서 깨닫게 해주신다. 하지만 이 고난의 시간이 너무 길고 아파서,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되도록 빨리 거기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렇게 해결에 급급한 마음은 곰곰이 주 안에서 사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구호가 위로는 될 수 있지만, 나의 경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난의 무게가 짓누르는 힘이 가속화될수록, 그에 대한 신뢰가 희미해지며 ‘손 놓고 계시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마음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를 사랑하는 자는 그가 원하시는 바를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에서 단지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보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영적 근성이 단련 되기를 원하신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그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욥 23:10). 우리가 참고, 견디고, 훈련 받고, 단련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를 사랑하는 자'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일이지만,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여기서 ‘참다’의 의미로 쓰인 헬라어는 στέγω(스테고)로써, ‘무엇을 덮거나 보호하다’는 원래 뜻을 갖는다. 따라서 ‘허물을 덮다’(Philip Doddridge, John Gill), 또는 ‘억제하다’, ‘자제하다’(Walter Bauer) 의미에 가깝다. 오히려 문장 뒤에 ‘견디다’의 표현으로 쓰인 ὑπομένω(휘포메노)가 고난 속에서 ‘견고히 서다’, ‘참다’의 뜻에 더 가깝다. 그러면, 윗 구절의 주어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주어로 채택하고 싶다. 그렇게 해석하니 오늘 주시는 은혜가 특별하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게 하느니라. 왜 그런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그로부터 ‘사랑 받.는. 자’라고 외치기 전에, 내가 그를 ‘사랑 하.는. 자’라는 영적 정체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영적 자각이, 이웃의 허물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덮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주신 약속을 굳게 믿으며, 믿음이 끝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주는 소망을 꼭 붙들며, 모든 고난과 결핍과 좌절의 상황을 끝까지 견디어 내게 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그 고통과 억울함을 참을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벧전 2:19). 고난이 싫고, 그 속에서 질퍽대는 시간이 너무 힘들고, 앞으로 더 큰 고난 속에 휘말릴까 솟구치는 두려움이 우리의 영적 초점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힘을 달라고 구하기보다, 어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조급하게 구한다. 조급함에는 은혜가 머물 수 없다. 조급함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두려워 하는 자,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이 처한 정황에 몰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원하심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누리는 자이다. 122222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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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다드 그리고 일본[글로벌 스탠다드 그리고 일본] 90년대 초 DMB&B라는 글로벌 광고회사에서 일할 때, P&G라는 다국적 기업의 광고를 담당했었다. 세계 top수준의 광고비를 투자하는 소비재 회사라 대륙 별로 광고 캠페인도 다르고 전략도 달랐다. 한국은 중국, 동남아와 함께 Asia Pacific 지역에 속했는데, 유독 일본만 대륙도 아닌 것이 별도 지역으로 분리되어 별도의 광고 전략을 집행했다. 2000년대 초 삼성전자 무선 사업부에서 근무할 때. 핸드폰은 대륙마다 소프트웨어도 다르고 디자인 전략도 달랐다. 대륙 정도 크기의 시장이 아닌데도, 일본만 그 시장에 먹히는 일본향을 만들어 수출해야 했다. 한 모델을 만들면 미주향, 유럽향 등으로 개발하여 꽤 많은 매출을 꾀하는 데, 좁쌀만한 시장 규모에서 돈 벌겠다고 이 모델, 저 모델 만드는 것이 개발비도 못 건지는 형국이라 일본 시장을 포기할 생각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2009년 일본에 홀로 배낭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대중교통과 도보로 도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 하나. 도로 표지판, 안내판에 일본어/한자만 있었다는 것. 까막눈 외국인 여행객은 불편하다 못해 짜증마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영어로 길을 물어봐도 도통 대화가 되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자, 일본어로도 표기하여 여행객에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데, 지금 일본은 어떻게 개선되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아래 기사는 BBC의 일본 특파원이, 지난 30년 동안 일인당 실제 소득도, 경제도, 정치도, 글로벌 마인드도 변하지 않은 일본의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한 글이다. 그는,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공헌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영향력이 지대한 정치 엘리트 집단에 주목한다. 그들은 국수주의, 남성 정치인으로 요약된다. 기자는, 아베 전총리와 같은 이를 전형적인 예로 삼는다. 도시 젊은이들의 결혼율과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고, 시골 노인들의 인구 비중은 늘어가고,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이들 정치 엘리트 세력이 롱런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그들의 부모, 조부모 세대들보다도 외국어 구사 능력도, 유학 비중도 적다고 한다.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2023년에 일본을 추월한다는 전망이 일본 연구기관에서 나왔다. 이 연구기관은 당초 2027년 역전을 예상했으나, 엔저의 급격한 변동에 따라 시기가 4년이나 앞당겨진다고 예상했다. 한번 역전되면 재역전은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덧붙였다. 2027년 이후엔 줄곧 한국이 높고,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것으로 예측됐다. (*조선일보 2022.12.15자) 해외에 체류하다 간만에 한국을 방문하면, 조국의 변화 속도에 깜짝 깜짝 놀란다. 그만큼 유연하고, 역동적이며,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에 오픈 마인드 되어있다. 위의 연구 전망에 그리 놀랄 일도 없다. 정치만 빼고 말이다. 국수주의, 기득권 지키기 일본 정치 닮아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01212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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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서 주신 생각[요세미티에서 주신 생각] 언제 다시 갈 기회가 있을 지 몰라, 누님 두 분이 사시는 미국 서부에, 특히 얼마 전에 남편을 잃으신 둘째 누님 위로 차, 최근 두 아들과 함께 다녀 왔다. 이번 미국 여행 중 두 가지를 느끼고 나 혼자 깊게 생각해본 것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인플레이션에 관한 생각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주일간 극심한 감기 몸살,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어느 날 밤, 하도 몸이 쑤시고 으슬으슬 춥고 잠이 안 와서 인근 심야 약국에 가서 시럽으로 된 강력한 타이레놀 감기약과 물 한 병을 샀는데 무려 51불. 여행 오기 전, 아내가 영국 물가가 많이 올라서 장보기가 무섭다고, 전기값 많이 올랐다고, 추워도 가능한 전기난로 켜지 말라고 했는데… 미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세계가 인플레로 신음하고 있다. 이렇게 각 정부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틀어 막으면, 그 다음에 올 불청객은 경기 침체다. 자금이 막힌 기업의 생산과 마케팅 등 제반 경영활동은 위축되고 직원들을 과거처럼 고용할 수 없게 된다. 적지 않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임금 수준은 그대로 인데 물가는 살인적으로 높아서, 실제 구매력이 줄어드니 식당, 상점 등 로칼 비즈니스도 위축된다. 앞으로 다가올 검은 그림자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불황 이라는 아주 큰 위기의 파도이다. 아마도 올 2023년은 영국, 한국 할 것 없이 수 많은 세계 시민들에게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일관되게 경고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가능한 빚지지 말고 현금을 확보하라고 한다. 한편 영적으로도 단단히 긴장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가족, 이웃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진정한 믿음은 위기, 고난의 시기에 드러난다. 잘 나가고 형통할 때는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곤경의 때에는 한숨과 함께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자주 나올 수 있다. 이러한 볼멘 소리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그르치게 한다. 앞으로 다가올 지 모를, 아니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수 차례 닥칠 위기와 위경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고난을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에서 단지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보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영적 근성이 단련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로마서 5:3-4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연단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쇠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장간에서 어떻게 하나? 그 쇠를 풀무 불 속에서 새빨갛게 달군 다음, 망치로 온 힘을 다해 두드리고 두드리지 않는가? 이렇게 수십 번 반복되는 망치질을 통해, 쇠는 연단 받아서 견고하고 단단해진다. 우리의 영적 근성도 이러한 망치질과 같은 고난과 환란을 통해 연단 받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난의 기간이 너무 길고 아파서,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겐 사실 없다. 되도록 빨리 거기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구호가 위로는 될 수 있지만, 영적 생활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난의 무게가 짓누르는 힘이 가속화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희미해지며 ‘손 놓고 계시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마음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다. 그를 사랑하는 자는 그가 원하시는 바를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 한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내가 미국 여행 중 또 하나 느낀 것은, 요새미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들들과 숙소에서 라면, 우동 등 스넥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family entertainment 룸이라는 데에 가서 모노폴리 게임을 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져서 숙소로 이동하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굵은 빗줄기가 억수로 내린다. 숙소까지는 약 7-80미터. 각자도생(各自圖生) - 각 자 힘 되는 대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아이들과 나의 간격이 점점 멀어져만 가고, 나는 숨이 차오르다 못해 숨이 막혀 더 뛸 수가 없다. 소나기 속에서 걸음을 멈출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고… 겨우 비를 피할 위치에 도착하니,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다리는 후들후들. 큰 대자로 그 자리에 눕고 싶을 지경이었다. 평소에 테니스, 조깅 한다면서 체력을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체질이 이렇게 저질인 줄은 몰랐다. 영성이 저질인 경우도 있다. 영성이 저질이면 어떻게 될까? 영적 체질이 저질이면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산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는다. 앞날이 불확실한데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사람들에게 생각을 구한다. 답답한 마음, 억울한 일, 누구로 인하여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하소연하기 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다니며 사람들과 끼리끼리 뒷담화한다. 사랑이 없다. 내 체면, 내 이익, 내 입장 먼저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누구의 입을 통해 인정받고자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한다. 주님이면 족하지 않는가?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면 충분하지 않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3-4) 이 구절을, 내 마음이 가난하고, 내 마음이 애통하면 복이 있는 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틀리지 않은 해석이다. 하지만 그 앞에 두 단어를 넣어서 해석하면 영적으로 은혜가 더욱 깊어진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애통함으로) 애통하는 자는… 다시 말해서 내 입장에서 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읽고 생각하는 자의 영적 깨달음이 더 깊다. 그가 더욱 복 있는 자이며, 영적 체질이 강한 자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 받고, Physical Test를 통하여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영혼이 강건한 자는 자신의 영적 건강을 항상 check-up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믿음 생활 그리 쉬운 거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경고한다. 주일날 데면데면 예배 드리고 만족하고 말 사안이 절대 아니다. 영생이 달려 있는 문제이다. 너희가 너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잊고 살면, 바로 그 시간이 버리운 자의 상태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기본에 충실하다. 기본에 충실한 자는… 주 예수와 함께 하는지 항상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고후 13:5) 자신이 죄에 연약한 육신임을 깨닫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멀리 하며(히 12:1) 인내로써 믿음의 주 예수를 늘 바라봄으로써 (히 12:1-2).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어떠한 어려움, 억울함, 슬픔, 고난 앞에서 참는다(벧전 2:19).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으니 힘써 준행하려 한다(벧전 2:19). 영적 체질이 저질인 경우는 그 반대이다. 자신의 영적 건강 상태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영적 무관심 속에서 세상과 부대끼고 세상의 거친 생각과 언어와 함께 뒹굴며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얽매이기 쉬운 죄의 참혹함에 둔감하다. 회개하라는 경각의 소리에 화부터 낸다. 참고 인내하기 보다 여기저기에 자신의 속마음을 뿌려대며 억울한 자기 입장을 토로하고 다닌다. 대부분 크리스천들은 건강한 성도의 삶을 누리려면, 특히 고난의 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적(知的)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고난이 싫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고, 앞으로 더 큰 고난 속에 휘말릴까 솟구치는 두려움이 우리의 영적 초점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지금 내게 닥친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힘을 달라고 구하기보다, 어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조급하게 구한다. 조급함에는 은혜가 머물 수 없다. 조급함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두려워하는 자,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자이다. 영적 체질이 저질인 자이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이 처한 정황에 몰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원하심에 초점을 맞춘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경주(ἀγών; 아곤): 영적 투쟁 **경주하며(τρέχω; 트레코): 온 힘을 다하며 사력을 다해서 달리다. 끝까지 버티다 이렇게 믿음으로 예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오래 참고 끝까지 견디어 영적 투쟁에서 이겨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이다. 예수의 사랑을 누리는 자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축복을 위해 모이는 그리스도인. 이렇게 자기 입장 때문에 모이다가는 오해와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어린 신앙에 고착된 church-goer들이 교회를 아프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때문에 모여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고 요구만 하는 어린 신앙에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는 장성한 자의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 2023년, 영국 사회가 한국이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한 해가 예상된다. 혹 그리 되지 않을지라도, 앞으로 무거운 인생길을 걸어갈 때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힘든 시기가 올 수 있다. 이러한 고난의 파도를 마주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온 마음과 온 성품과 온 힘을 다해 버티고 견디어, 봄날의 찬란한 햇살처럼 진리의 빛의 비춤을 받아 아름답고 귀한 알곡을 수확하는 올 한 해,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01272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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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애착최근 거듭된 애끊는 사연으로 인해 '자살'을 생각한다는 지인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어느 목사님 관련 기사로 뜨거웠던 적이 기억난다. 자살에 관련된 나의 생각만 나누고 싶다. 그 목사님을 잘 모르므로, 지금 쓰는 글이 특정한 개인에 관련된 추측, 견해로 해석이 안되었으면 한다. 내 어머니도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다가 식욕부진에서 비롯된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객관적 사인(死因)은 대장암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울증'이었음을 나는 잘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죄가 있어도 살려고 하는 자는 산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니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어 살려주셨다. 평생 강도 짓만 일삼은 십자가에 달린 그도 생명애착을 외쳤을 때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창녀도, 세리도, 혈루병 여인도 삶에 간절한 애착을 보였을 때 살려주셨다. 하나님은 도피성을 왜 만드셨을까? (신4:41-3) 도피성을 향하여 뜀박질하는 살인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뒤에는 “저 놈 잡아라!” 외치며 달려오는 살인 당한 자의 배우자, 혈기왕성한 남동생들, 동네 장정들, 그리고 병졸들이 따라오고 있다. “잡히면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라는 일념으로 달린다. 추격하는 자들과 간격은 좁혀오는데 도피성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숨은 가빠오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그래도 달리는 수밖에 없다. 심장은 터져 나갈 것 같고...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고.. 복수하려는 자의 창 끝은 이제 도망자의 그림자를 밟고 있고... 그래도 달린다. 죽기는 싫다. 더 힘을 내자. 그럼 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죄의 삯인 사망이 끔찍하기 때문에, 사망의 원인인 죄를 두고 뉘우치는 회개가 그리도 중요하다. 죄가 가져올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발가벗기우고 몸이 찢기고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피를 쏟으며 죽게 할 수 밖에 없었던가? 그렇게 흘리신 피의 은혜가 죄에서, 사망에서, 영멸에서 우리를 살리셨다. 자살은 그 은혜를 무가치하게 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내 안에 계신 주인분 말고는 그 누구도 맘대로 할 수 없다. 주인이 아닌 내가 주인 소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불신앙이다. 물론 세상사는 것 만만치 않다. 잘 안 풀리고, 분통 터지고, 집어치우고 싶고... 이런 생각 하루 수십 번도 더 하는 성질 있고, 연약한 우리들이다. 그 버거운 인생의 수많은 숙제들을 혼자 풀어 나가야 되고 역부족임을 느낄 때… 삶의 고충, 사람으로부터의 상처, 드러낼 수 없는 문제들 가슴 터놓고 얘기할 상대도 없고, 고독과 우울의 검은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진다. 한 사람의 자살 원인을 돌아보면 그 사람이 왜 그리 했는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해는 정도(degree)의 차원이고 심판은 많고/적고의 정도가 없다. 차갑거나 덥거나, 좌냐 우냐, 영멸인가 영생인가?의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래서 정신병, 우울증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질병이다. 생명을 지향하는 마음을 자신 스스로 품고 지키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문둥병의 경우, 몸은 썩어도 영혼은 지킬 수가 있다. 우울증은 영혼 간수하기가 정말로 어려워진다. 더 이상 커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 육신이 썩거나 암이 생기면 야단법석인데, 우울증에는 겉보기 멀쩡하다고 손 놓고 있으면 절대 안된다. 본인과 가족과 주변이 사랑과 관심의 생난리를 펴야 한다. 02262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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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도가 바라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이런 성도가 바라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아니 그리 되지 못하면 나의 사역은 끝이라는 각오로 영혼의 어금니를 꽉 문다. ---‐---‐----‐----- 목사님, 이런 요청 드린지 꽤 되었네요. 제 영혼은 곤고하고 안식이 필요해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말씀을 듣고파요. 마음 깊숙한 데서 우러나오는 확신으로 인도하는 설교. Preacher, I′d say its been a while since you heard this request, But my spirit is tired, and I need rest. I want to hear from Heaven a clear word from God, A sermon of conviction straight from the heart. 많은 목사님들로부터 이런 설교 들어왔어요. 저는 변할 필요 없다고. 유창한 설교자들은 제가 문제없다고들 말씀하시죠. 그런데 솔직히 제 속마음은 편하질 않아요. 그것이 진리가 아닌 걸 알겠어요. I've been hearin′ other preachers say I don't have to change, The most eloquent of speakers tell me I'm okay, But it hasn′t eased my conscience, and I know it′s not truth. 그런데 말이죠. 당신이 우리 앞에 섰을 때, 당신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 일전에 저의 친한 벗이 되겠다고 얘기하셨죠? 그 보다도, 저의 죄가 무엇인지 말씀하기를 겁내지 마세요. 오로지 어린 양의 피로 그것이 해결될 수 있음을 선포해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 듣기 바라는 거 설교 마시고 진리 그대로 말씀해주세요. So when you stand before us, can I count on you? O Preacher, you say you want to be my friend, Don't be afraid to call my sin what it is. And Preacher, tell me I can overcome, But it′s only by the blood of the Lamb. Don't tell me like I wish it was, Preacher, tell me like it is. 그래서 간청드려요. 진리를 알게 해주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말씀을 선포해주세요. 제가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끔 설교해주세요. 저의 감정일랑 괘념치 마세요. 저의 구겨진 자존심이랑 염두치 마세요. 그저 저의 죄와 예수의 십자가를 선포해주세요. So open up the Word, and let the Spirit lead, Preach until I′ve heard God speak to me. Don't worry ′bout my feelings; Don't worry 'bout my shame, Just preach the cross of Jesus and that I′m to blame! 인생은 빨리 흘러가고 세상은 급속히 저물어가고 있어요. 세상이 미련하게 보는 진리의 말씀,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예요. Life is quickly passing; the world is fading fast, And the foolishness of preaching is the only hope we have. * from 'Preacher, Tell Me Like It Is' Lyrics, by Greater Vision 032323 When leaving rainy Jeju for Seoul...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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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배의 순항은 위태로와지고 결국 침몰하고 만다. 전도자가 또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거룩의 영향력을 미치려면 세상과 교류해야 한다. 세상 속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센스와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물결이 전도자의 삶에 파고 든다면 그것은 아주 다른 차원이다. 그의 삶에 세상물이 들어오고 세상을 닮아 가기 시작하면, 침몰하는 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형국이다. 세상의 갖고 싶고, 보고 싶고, 맛보고 싶은 것 좇다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잃는다면... 예수의 성품을 닮아야 할 교회가 거룩성을 잃는다면... 이미 다 잃은 것이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팬데믹을 지나며 최근에 와서, 교회가 사회적으로 이렇게 지탄을 받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세상 사는 방식, 가치관과 대조되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다 욕 먹고 핍박 받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잘못에서 비롯된 문제라 더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교회를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기와 탐욕을 가득 실은 채 점점 가속화된 속도로 치닫는 열차에 탑승한 세상은 "과연 그 끝은 어딜까?" 하며 스스로 두려워 하고 있다. 누군가가 와서 그 미친 속도에 브레이크를 밟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며, 탐욕과 분쟁과 소동과 음란으로 가득한 이 곳에 빛과 소금이 되어 정상과 제 정신의 표준을 제시해주길 원한다. 교회 개척을 준비 중인 나는 지금 웹사이트를 구축 중이다. 이 쪽 분야에서는 꽤 경쟁력 있는 회사가 도와주고 있는데, 교회 개척을 위한 일임을 인지하신 대표이사로부터 견적가에서 상당히 할인된 금액을 제시받았다. 엊그제, 너무 자주 오래 입다 팔꿈치 부분이 헤어진 상의 두 벌을 교회 인근 수선집에 맡겼다. 오늘 옷을 찾으려니 너무도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을 청구하신다. 바느질 잘 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20여년 동안 품고 살아왔던 역류성식도염이 요새와서 나를 힘들게 하는 정도가 정점에 다다랐다. 위장병을 전문으로 하는 한방병원을 다닌 지 이제 한 달이 되어 간다. 보험이 안되는 약값은, 목회 수업중인 전도사에게는 부담이 되는 가격이다. 오늘 약값을 지불하려니 평소보다 많이 할인된 가격을 내라고 한다. 원장님이 그러라 하셨단다. 내 행색이 그렇게 초라해보였나? 일전에 약을 택배 신청할 때 교회 주소 알려준 것 밖에 없는데... 교회를 향한 세상의 기대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이들을 더 이상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 하시지 않았는가? 생명의 양식... (마 24:44-45)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032823 *Image from https://www.facebook.com/.../gospel.../1765197870212385/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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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둔 밤길을 지날 때‘시편 저자도 별 수 없구나.’ ‘믿음 좋다던 그도 별 수가 없네!’ 저자가 한숨을 몰아 쉬며 지었던 ‘시편 88편’은 그래서 내게 위안이 된다. 특별히 인생의 어둔 밤길을 지날 때 더욱이 위로가 된다. 믿음의 거장 그도 그랬다니…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의 기도 또한 그러한 면에서 위로가 된다(왕상 19:1-4). 그는 무기력하고 힘 없기가, 죽어서 이미 무덤에 묻힌 자와 같다고 자신을 비하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들 죽은 자들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관심과 기억에서 지워진 자처럼 느껴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시 88:4-5) 우리 믿음의 모범이 되는 시편 기자가 썼다고 보기에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다소 실망스러운 이 시는, 힘들고 두렵기 짝이 없는 인생의 어둠 가운데 고난과 좌절의 소낙비 속에 갇혀진 자신의 속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에서 시작하여 비탄으로 끝난다. 주로부터 버려진 인생이라고 자학까지 한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6-18절). 최소한 시의 도입부는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숨과 탄식으로 시작할 수 있겠지만, 유달리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수사가 없다.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와 같은 믿음의 결단 같은 것이 없다. 경건의 형식에 사로 잡힌 입 바른 신앙고백 같은 미사여구가 없다. 거칠지만 자신의 속 마음을 그대로 토해낸다.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와 은혜로부터 내던져진 인생임을 토로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4절) 그러나 우리는, 그의 믿음이 예사롭지 않음을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가벗긴 채 그대로 드러내지만, 이러한 진솔한 고백은 사람들에게 하는 뒷담화가 아니다. 다른 연약한 인생들 들으라고 하는 푸념이나 한탄이 아니다.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의 진심은 하나님께 향하는 순전한 고백이다. 그만큼 순수하기에 아름다운 치장과 수식이 필요 없다. 고난 속 고통에 따른 아픔과 실망과 낙심이 자포자기와 같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는 절망하는 대신, 구원의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아마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선하시고 신실하신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울부짖는 이러한 기도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신앙 고백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한다. 이는 신세 한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회복하고자 부르짖는 절규이다.”(1)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13절) 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기도였다. 아침은 전형적으로 회복, 건강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저자는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2) 첫째, 시편 88편은 성도의 인생이 항상 행복하기보다, 고통과 낙심이 따를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어도 여전히 고난이 함께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죽음으로도 인도될 수 있다. 둘째, 참된 신자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상황 속에서 지속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고난 당하는 성도에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믿는 자에게 이러한 고난은 전혀 희망이 없는 고난이 아니다.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고난의 밤을 지나면서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것과 그들에게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이유와 지속적으로 기도할 이유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겹도록 기나긴 고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빨리 그 아픔의 형극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이 순간 우리는 주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Solution provider로서 찾는다. 자신의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문제 해결’에 대한 갈망이 앞선 채, 우리의 기도도 이러한 갈증이 주도하는 간구로 시작되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부르짖는 자의 절실함에서 나오는 힘이 없다. 온통 자신이 처한 문제에 집중하니, 내가 ‘이 위경의 수렁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골몰한다. 자신의 노력이 수반되는 여러가지 궁리 중에,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도 그들 중 하나의 장치로 마련해둘 뿐이다. 이 시편 저자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그를 의지한다. 그에게 남은 소망은 부르짖는 기도 밖에 없다(1-2절). 부르짖으니 자신이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처럼 주의 손길이 간절함을 흐느낀다(5절). 그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푸념이나 원망이 아니다. 주의 도우심에 대한 절실한 간구이다. 한탄과 푸념처럼 들리는 그의 하소연은, 그 만큼 주의 간섭하심에 대한 간절함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솔직함을 원하신다. 경건의 형식에 맞추어진 정돈되고 정제된 언어보다도, 거르지 않고 거칠지만 진솔하고 투명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아울러 문제 해결을 바라는 성급한 기도보다, 그 문제를 그냥 방치하지 않으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확신을 듣기 원하신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고난의 터널 속이라도 항상 함께 하시고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의 재확신을 원하신다. ‘문제 해결’은 그 다음에 따라 올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따라서 고난의 밤을 지날 때, ‘문제 해결’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에 마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끈질긴 기도는 오랜 기간 지속되는 고난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끝까지 견디면서 기도하는 자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8:7) 시편 저자의 믿음이 귀감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강하고 센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처리해야 될 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050423 ------------------- (1) Tremper Longman III, Psalm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Westmont, Il.: InterVarsity Press, 2014), p 300 (2) Allen P. Ross, A Commentary on the Psalms (Grand Rapids: Kregel, 2011); 예배와 영성: 시편 강해를 위한 주석, 김수영 옮김 (서울: 디모데, 2018), p 872-8732023-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