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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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서 주신 생각[요세미티에서 주신 생각] 언제 다시 갈 기회가 있을 지 몰라, 누님 두 분이 사시는 미국 서부에, 특히 얼마 전에 남편을 잃으신 둘째 누님 위로 차, 최근 두 아들과 함께 다녀 왔다. 이번 미국 여행 중 두 가지를 느끼고 나 혼자 깊게 생각해본 것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인플레이션에 관한 생각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주일간 극심한 감기 몸살,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어느 날 밤, 하도 몸이 쑤시고 으슬으슬 춥고 잠이 안 와서 인근 심야 약국에 가서 시럽으로 된 강력한 타이레놀 감기약과 물 한 병을 샀는데 무려 51불. 여행 오기 전, 아내가 영국 물가가 많이 올라서 장보기가 무섭다고, 전기값 많이 올랐다고, 추워도 가능한 전기난로 켜지 말라고 했는데… 미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세계가 인플레로 신음하고 있다. 이렇게 각 정부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틀어 막으면, 그 다음에 올 불청객은 경기 침체다. 자금이 막힌 기업의 생산과 마케팅 등 제반 경영활동은 위축되고 직원들을 과거처럼 고용할 수 없게 된다. 적지 않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임금 수준은 그대로 인데 물가는 살인적으로 높아서, 실제 구매력이 줄어드니 식당, 상점 등 로칼 비즈니스도 위축된다. 앞으로 다가올 검은 그림자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불황 이라는 아주 큰 위기의 파도이다. 아마도 올 2023년은 영국, 한국 할 것 없이 수 많은 세계 시민들에게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일관되게 경고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가능한 빚지지 말고 현금을 확보하라고 한다. 한편 영적으로도 단단히 긴장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가족, 이웃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진정한 믿음은 위기, 고난의 시기에 드러난다. 잘 나가고 형통할 때는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곤경의 때에는 한숨과 함께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자주 나올 수 있다. 이러한 볼멘 소리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그르치게 한다. 앞으로 다가올 지 모를, 아니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수 차례 닥칠 위기와 위경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고난을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에서 단지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보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영적 근성이 단련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로마서 5:3-4에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연단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쇠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장간에서 어떻게 하나? 그 쇠를 풀무 불 속에서 새빨갛게 달군 다음, 망치로 온 힘을 다해 두드리고 두드리지 않는가? 이렇게 수십 번 반복되는 망치질을 통해, 쇠는 연단 받아서 견고하고 단단해진다. 우리의 영적 근성도 이러한 망치질과 같은 고난과 환란을 통해 연단 받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난의 기간이 너무 길고 아파서,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겐 사실 없다. 되도록 빨리 거기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구호가 위로는 될 수 있지만, 영적 생활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난의 무게가 짓누르는 힘이 가속화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희미해지며 ‘손 놓고 계시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마음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다. 그를 사랑하는 자는 그가 원하시는 바를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 한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내가 미국 여행 중 또 하나 느낀 것은, 요새미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들들과 숙소에서 라면, 우동 등 스넥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family entertainment 룸이라는 데에 가서 모노폴리 게임을 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져서 숙소로 이동하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굵은 빗줄기가 억수로 내린다. 숙소까지는 약 7-80미터. 각자도생(各自圖生) - 각 자 힘 되는 대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아이들과 나의 간격이 점점 멀어져만 가고, 나는 숨이 차오르다 못해 숨이 막혀 더 뛸 수가 없다. 소나기 속에서 걸음을 멈출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고… 겨우 비를 피할 위치에 도착하니,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다리는 후들후들. 큰 대자로 그 자리에 눕고 싶을 지경이었다. 평소에 테니스, 조깅 한다면서 체력을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체질이 이렇게 저질인 줄은 몰랐다. 영성이 저질인 경우도 있다. 영성이 저질이면 어떻게 될까? 영적 체질이 저질이면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산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는다. 앞날이 불확실한데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사람들에게 생각을 구한다. 답답한 마음, 억울한 일, 누구로 인하여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하소연하기 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다니며 사람들과 끼리끼리 뒷담화한다. 사랑이 없다. 내 체면, 내 이익, 내 입장 먼저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누구의 입을 통해 인정받고자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한다. 주님이면 족하지 않는가?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면 충분하지 않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3-4) 이 구절을, 내 마음이 가난하고, 내 마음이 애통하면 복이 있는 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틀리지 않은 해석이다. 하지만 그 앞에 두 단어를 넣어서 해석하면 영적으로 은혜가 더욱 깊어진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애통함으로) 애통하는 자는… 다시 말해서 내 입장에서 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읽고 생각하는 자의 영적 깨달음이 더 깊다. 그가 더욱 복 있는 자이며, 영적 체질이 강한 자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 받고, Physical Test를 통하여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영혼이 강건한 자는 자신의 영적 건강을 항상 check-up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믿음 생활 그리 쉬운 거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경고한다. 주일날 데면데면 예배 드리고 만족하고 말 사안이 절대 아니다. 영생이 달려 있는 문제이다. 너희가 너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잊고 살면, 바로 그 시간이 버리운 자의 상태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기본에 충실하다. 기본에 충실한 자는… 주 예수와 함께 하는지 항상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고후 13:5) 자신이 죄에 연약한 육신임을 깨닫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멀리 하며(히 12:1) 인내로써 믿음의 주 예수를 늘 바라봄으로써 (히 12:1-2).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어떠한 어려움, 억울함, 슬픔, 고난 앞에서 참는다(벧전 2:19).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으니 힘써 준행하려 한다(벧전 2:19). 영적 체질이 저질인 경우는 그 반대이다. 자신의 영적 건강 상태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영적 무관심 속에서 세상과 부대끼고 세상의 거친 생각과 언어와 함께 뒹굴며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얽매이기 쉬운 죄의 참혹함에 둔감하다. 회개하라는 경각의 소리에 화부터 낸다. 참고 인내하기 보다 여기저기에 자신의 속마음을 뿌려대며 억울한 자기 입장을 토로하고 다닌다. 대부분 크리스천들은 건강한 성도의 삶을 누리려면, 특히 고난의 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적(知的)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고난이 싫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고, 앞으로 더 큰 고난 속에 휘말릴까 솟구치는 두려움이 우리의 영적 초점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지금 내게 닥친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힘을 달라고 구하기보다, 어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조급하게 구한다. 조급함에는 은혜가 머물 수 없다. 조급함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두려워하는 자,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자이다. 영적 체질이 저질인 자이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이 처한 정황에 몰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원하심에 초점을 맞춘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경주(ἀγών; 아곤): 영적 투쟁 **경주하며(τρέχω; 트레코): 온 힘을 다하며 사력을 다해서 달리다. 끝까지 버티다 이렇게 믿음으로 예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오래 참고 끝까지 견디어 영적 투쟁에서 이겨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이다. 예수의 사랑을 누리는 자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축복을 위해 모이는 그리스도인. 이렇게 자기 입장 때문에 모이다가는 오해와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어린 신앙에 고착된 church-goer들이 교회를 아프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때문에 모여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고 요구만 하는 어린 신앙에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자각하는 장성한 자의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 2023년, 영국 사회가 한국이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한 해가 예상된다. 혹 그리 되지 않을지라도, 앞으로 무거운 인생길을 걸어갈 때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힘든 시기가 올 수 있다. 이러한 고난의 파도를 마주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온 마음과 온 성품과 온 힘을 다해 버티고 견디어, 봄날의 찬란한 햇살처럼 진리의 빛의 비춤을 받아 아름답고 귀한 알곡을 수확하는 올 한 해,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01272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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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애착최근 거듭된 애끊는 사연으로 인해 '자살'을 생각한다는 지인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어느 목사님 관련 기사로 뜨거웠던 적이 기억난다. 자살에 관련된 나의 생각만 나누고 싶다. 그 목사님을 잘 모르므로, 지금 쓰는 글이 특정한 개인에 관련된 추측, 견해로 해석이 안되었으면 한다. 내 어머니도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다가 식욕부진에서 비롯된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객관적 사인(死因)은 대장암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울증'이었음을 나는 잘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죄가 있어도 살려고 하는 자는 산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니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어 살려주셨다. 평생 강도 짓만 일삼은 십자가에 달린 그도 생명애착을 외쳤을 때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창녀도, 세리도, 혈루병 여인도 삶에 간절한 애착을 보였을 때 살려주셨다. 하나님은 도피성을 왜 만드셨을까? (신4:41-3) 도피성을 향하여 뜀박질하는 살인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뒤에는 “저 놈 잡아라!” 외치며 달려오는 살인 당한 자의 배우자, 혈기왕성한 남동생들, 동네 장정들, 그리고 병졸들이 따라오고 있다. “잡히면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라는 일념으로 달린다. 추격하는 자들과 간격은 좁혀오는데 도피성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숨은 가빠오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그래도 달리는 수밖에 없다. 심장은 터져 나갈 것 같고...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고.. 복수하려는 자의 창 끝은 이제 도망자의 그림자를 밟고 있고... 그래도 달린다. 죽기는 싫다. 더 힘을 내자. 그럼 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죄의 삯인 사망이 끔찍하기 때문에, 사망의 원인인 죄를 두고 뉘우치는 회개가 그리도 중요하다. 죄가 가져올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발가벗기우고 몸이 찢기고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피를 쏟으며 죽게 할 수 밖에 없었던가? 그렇게 흘리신 피의 은혜가 죄에서, 사망에서, 영멸에서 우리를 살리셨다. 자살은 그 은혜를 무가치하게 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내 안에 계신 주인분 말고는 그 누구도 맘대로 할 수 없다. 주인이 아닌 내가 주인 소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불신앙이다. 물론 세상사는 것 만만치 않다. 잘 안 풀리고, 분통 터지고, 집어치우고 싶고... 이런 생각 하루 수십 번도 더 하는 성질 있고, 연약한 우리들이다. 그 버거운 인생의 수많은 숙제들을 혼자 풀어 나가야 되고 역부족임을 느낄 때… 삶의 고충, 사람으로부터의 상처, 드러낼 수 없는 문제들 가슴 터놓고 얘기할 상대도 없고, 고독과 우울의 검은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진다. 한 사람의 자살 원인을 돌아보면 그 사람이 왜 그리 했는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해는 정도(degree)의 차원이고 심판은 많고/적고의 정도가 없다. 차갑거나 덥거나, 좌냐 우냐, 영멸인가 영생인가?의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래서 정신병, 우울증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질병이다. 생명을 지향하는 마음을 자신 스스로 품고 지키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문둥병의 경우, 몸은 썩어도 영혼은 지킬 수가 있다. 우울증은 영혼 간수하기가 정말로 어려워진다. 더 이상 커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 육신이 썩거나 암이 생기면 야단법석인데, 우울증에는 겉보기 멀쩡하다고 손 놓고 있으면 절대 안된다. 본인과 가족과 주변이 사랑과 관심의 생난리를 펴야 한다. 022623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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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도가 바라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이런 성도가 바라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아니 그리 되지 못하면 나의 사역은 끝이라는 각오로 영혼의 어금니를 꽉 문다. ---‐---‐----‐----- 목사님, 이런 요청 드린지 꽤 되었네요. 제 영혼은 곤고하고 안식이 필요해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말씀을 듣고파요. 마음 깊숙한 데서 우러나오는 확신으로 인도하는 설교. Preacher, I′d say its been a while since you heard this request, But my spirit is tired, and I need rest. I want to hear from Heaven a clear word from God, A sermon of conviction straight from the heart. 많은 목사님들로부터 이런 설교 들어왔어요. 저는 변할 필요 없다고. 유창한 설교자들은 제가 문제없다고들 말씀하시죠. 그런데 솔직히 제 속마음은 편하질 않아요. 그것이 진리가 아닌 걸 알겠어요. I've been hearin′ other preachers say I don't have to change, The most eloquent of speakers tell me I'm okay, But it hasn′t eased my conscience, and I know it′s not truth. 그런데 말이죠. 당신이 우리 앞에 섰을 때, 당신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 일전에 저의 친한 벗이 되겠다고 얘기하셨죠? 그 보다도, 저의 죄가 무엇인지 말씀하기를 겁내지 마세요. 오로지 어린 양의 피로 그것이 해결될 수 있음을 선포해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 듣기 바라는 거 설교 마시고 진리 그대로 말씀해주세요. So when you stand before us, can I count on you? O Preacher, you say you want to be my friend, Don't be afraid to call my sin what it is. And Preacher, tell me I can overcome, But it′s only by the blood of the Lamb. Don't tell me like I wish it was, Preacher, tell me like it is. 그래서 간청드려요. 진리를 알게 해주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말씀을 선포해주세요. 제가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끔 설교해주세요. 저의 감정일랑 괘념치 마세요. 저의 구겨진 자존심이랑 염두치 마세요. 그저 저의 죄와 예수의 십자가를 선포해주세요. So open up the Word, and let the Spirit lead, Preach until I′ve heard God speak to me. Don't worry ′bout my feelings; Don't worry 'bout my shame, Just preach the cross of Jesus and that I′m to blame! 인생은 빨리 흘러가고 세상은 급속히 저물어가고 있어요. 세상이 미련하게 보는 진리의 말씀,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예요. Life is quickly passing; the world is fading fast, And the foolishness of preaching is the only hope we have. * from 'Preacher, Tell Me Like It Is' Lyrics, by Greater Vision 032323 When leaving rainy Jeju for Seoul...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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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배의 순항은 위태로와지고 결국 침몰하고 만다. 전도자가 또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거룩의 영향력을 미치려면 세상과 교류해야 한다. 세상 속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센스와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물결이 전도자의 삶에 파고 든다면 그것은 아주 다른 차원이다. 그의 삶에 세상물이 들어오고 세상을 닮아 가기 시작하면, 침몰하는 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형국이다. 세상의 갖고 싶고, 보고 싶고, 맛보고 싶은 것 좇다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잃는다면... 예수의 성품을 닮아야 할 교회가 거룩성을 잃는다면... 이미 다 잃은 것이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팬데믹을 지나며 최근에 와서, 교회가 사회적으로 이렇게 지탄을 받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세상 사는 방식, 가치관과 대조되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다 욕 먹고 핍박 받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잘못에서 비롯된 문제라 더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교회를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기와 탐욕을 가득 실은 채 점점 가속화된 속도로 치닫는 열차에 탑승한 세상은 "과연 그 끝은 어딜까?" 하며 스스로 두려워 하고 있다. 누군가가 와서 그 미친 속도에 브레이크를 밟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며, 탐욕과 분쟁과 소동과 음란으로 가득한 이 곳에 빛과 소금이 되어 정상과 제 정신의 표준을 제시해주길 원한다. 교회 개척을 준비 중인 나는 지금 웹사이트를 구축 중이다. 이 쪽 분야에서는 꽤 경쟁력 있는 회사가 도와주고 있는데, 교회 개척을 위한 일임을 인지하신 대표이사로부터 견적가에서 상당히 할인된 금액을 제시받았다. 엊그제, 너무 자주 오래 입다 팔꿈치 부분이 헤어진 상의 두 벌을 교회 인근 수선집에 맡겼다. 오늘 옷을 찾으려니 너무도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을 청구하신다. 바느질 잘 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20여년 동안 품고 살아왔던 역류성식도염이 요새와서 나를 힘들게 하는 정도가 정점에 다다랐다. 위장병을 전문으로 하는 한방병원을 다닌 지 이제 한 달이 되어 간다. 보험이 안되는 약값은, 목회 수업중인 전도사에게는 부담이 되는 가격이다. 오늘 약값을 지불하려니 평소보다 많이 할인된 가격을 내라고 한다. 원장님이 그러라 하셨단다. 내 행색이 그렇게 초라해보였나? 일전에 약을 택배 신청할 때 교회 주소 알려준 것 밖에 없는데... 교회를 향한 세상의 기대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이들을 더 이상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 하시지 않았는가? 생명의 양식... (마 24:44-45)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032823 *Image from https://www.facebook.com/.../gospel.../1765197870212385/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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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둔 밤길을 지날 때‘시편 저자도 별 수 없구나.’ ‘믿음 좋다던 그도 별 수가 없네!’ 저자가 한숨을 몰아 쉬며 지었던 ‘시편 88편’은 그래서 내게 위안이 된다. 특별히 인생의 어둔 밤길을 지날 때 더욱이 위로가 된다. 믿음의 거장 그도 그랬다니…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의 기도 또한 그러한 면에서 위로가 된다(왕상 19:1-4). 그는 무기력하고 힘 없기가, 죽어서 이미 무덤에 묻힌 자와 같다고 자신을 비하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들 죽은 자들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관심과 기억에서 지워진 자처럼 느껴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시 88:4-5) 우리 믿음의 모범이 되는 시편 기자가 썼다고 보기에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다소 실망스러운 이 시는, 힘들고 두렵기 짝이 없는 인생의 어둠 가운데 고난과 좌절의 소낙비 속에 갇혀진 자신의 속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에서 시작하여 비탄으로 끝난다. 주로부터 버려진 인생이라고 자학까지 한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6-18절). 최소한 시의 도입부는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숨과 탄식으로 시작할 수 있겠지만, 유달리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수사가 없다.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와 같은 믿음의 결단 같은 것이 없다. 경건의 형식에 사로 잡힌 입 바른 신앙고백 같은 미사여구가 없다. 거칠지만 자신의 속 마음을 그대로 토해낸다.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와 은혜로부터 내던져진 인생임을 토로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4절) 그러나 우리는, 그의 믿음이 예사롭지 않음을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가벗긴 채 그대로 드러내지만, 이러한 진솔한 고백은 사람들에게 하는 뒷담화가 아니다. 다른 연약한 인생들 들으라고 하는 푸념이나 한탄이 아니다.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의 진심은 하나님께 향하는 순전한 고백이다. 그만큼 순수하기에 아름다운 치장과 수식이 필요 없다. 고난 속 고통에 따른 아픔과 실망과 낙심이 자포자기와 같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는 절망하는 대신, 구원의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아마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선하시고 신실하신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울부짖는 이러한 기도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신앙 고백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한다. 이는 신세 한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회복하고자 부르짖는 절규이다.”(1)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13절) 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기도였다. 아침은 전형적으로 회복, 건강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저자는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2) 첫째, 시편 88편은 성도의 인생이 항상 행복하기보다, 고통과 낙심이 따를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어도 여전히 고난이 함께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죽음으로도 인도될 수 있다. 둘째, 참된 신자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상황 속에서 지속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고난 당하는 성도에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믿는 자에게 이러한 고난은 전혀 희망이 없는 고난이 아니다.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고난의 밤을 지나면서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것과 그들에게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이유와 지속적으로 기도할 이유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겹도록 기나긴 고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빨리 그 아픔의 형극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이 순간 우리는 주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Solution provider로서 찾는다. 자신의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문제 해결’에 대한 갈망이 앞선 채, 우리의 기도도 이러한 갈증이 주도하는 간구로 시작되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부르짖는 자의 절실함에서 나오는 힘이 없다. 온통 자신이 처한 문제에 집중하니, 내가 ‘이 위경의 수렁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골몰한다. 자신의 노력이 수반되는 여러가지 궁리 중에,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도 그들 중 하나의 장치로 마련해둘 뿐이다. 이 시편 저자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그를 의지한다. 그에게 남은 소망은 부르짖는 기도 밖에 없다(1-2절). 부르짖으니 자신이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처럼 주의 손길이 간절함을 흐느낀다(5절). 그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푸념이나 원망이 아니다. 주의 도우심에 대한 절실한 간구이다. 한탄과 푸념처럼 들리는 그의 하소연은, 그 만큼 주의 간섭하심에 대한 간절함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솔직함을 원하신다. 경건의 형식에 맞추어진 정돈되고 정제된 언어보다도, 거르지 않고 거칠지만 진솔하고 투명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아울러 문제 해결을 바라는 성급한 기도보다, 그 문제를 그냥 방치하지 않으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확신을 듣기 원하신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고난의 터널 속이라도 항상 함께 하시고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의 재확신을 원하신다. ‘문제 해결’은 그 다음에 따라 올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따라서 고난의 밤을 지날 때, ‘문제 해결’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에 마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끈질긴 기도는 오랜 기간 지속되는 고난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끝까지 견디면서 기도하는 자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8:7) 시편 저자의 믿음이 귀감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강하고 센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처리해야 될 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050423 ------------------- (1) Tremper Longman III, Psalm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Westmont, Il.: InterVarsity Press, 2014), p 300 (2) Allen P. Ross, A Commentary on the Psalms (Grand Rapids: Kregel, 2011); 예배와 영성: 시편 강해를 위한 주석, 김수영 옮김 (서울: 디모데, 2018), p 872-8732023-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