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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칼럼
[정치와 교회주의]
등록일
2025-07-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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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확연히 달리, 기독교적 신앙관은 성경적 진리에서 비롯된다. 즉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 사람을 만드신 사실과, 그가 사람과 관계하고자 계시한 진리가 우리 사회와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가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말씀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정치와 교회의 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소 행하심이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 이적후, 자신을 정치적 지도자로 삼고자하는 대중을 떠나 산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5)
성경을 통한 예수의 몸소 가르침과는 달리, 오늘날 교회는 정치와 가까워지려 한다. 서로 너무 친하다. 그 대표적 실상이 '국가조찬기도회'이다. 성경적 인물에 빚대어 최고권력자를 찬양하고, 현실 정치를 두둔하는 발언을 기도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정황앞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듯 심히 아프다. 열심히 기도하고 일했으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니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이 점은 국가의 법과 하나님의 가르침이 상충될 때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국가의 뜻을 저버리게도 했다. [...] 로마군대의 사령관이었던 마우리티우스(250-287)의 행동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기독교인의 학대와 박해를 주동하라"는 국가의 명령앞에, 자신의 휘장을 부관에게 넘겨주고 신자로서 당당히 죽음을 택했다(1).
캘빈(John Calvin)의 저서 중에 ‘기독교 강요(綱要)’라는 책이 있다. 종교개혁를 통해 태생한 개신교회의 신앙(Protestant Theology)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프랑수아 1세에게 저자가 헌정하는 내용, “Serenissimo ac Potentissimo Principi Francisco Regi Francorum”(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프랑스 왕 프랑수아에게)이 나온다. 프랑수아 1세는 당시 로마제국과 앙숙이었으며, 르네상스의 아이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데려온 인물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프랑스가 강성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럼 왜 캘빈은 자신의 저서를 프랑스왕에게 헌정했을까?
로마교황 정도는 아니지만 프랑스왕들도 자신의 왕국의 안정을 위해 개신교도들을 탄압했다. 개신교 신앙을 대변하는 캘빈에게는, 프랑스왕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개신교도들에 대한 오해를 씻고 박해를 멈춰달라고 탄원하는 것이 ‘기독교 강요’의 1차 저술 목적이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전하려는 주제와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은 당신이 염려하는 정치적 분파(political faction)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는데 유일한 목적을 두고 있는 순수한 신앙인들입니다. 종교개혁은, 나라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운동과 전혀 다른 영적 재각성 운동입니다.”
세상권력은, 종교가 ‘정치적 세력’이 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잠재력을 두려워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때로는 어르고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2천년 교회사를 통해 일관적으로 증명된 역사적 사실이다.
1)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했던 관점은 “과연 그가 로마정부에 위협이 될 만한 범죄를 범했는가?”에 있었다. 심문이후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라고 말했으나, 정치세력이 되어 저항할 유대인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마 27:24), 결국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2) 예수의 사후, 로마정부가 크리스천들을 탄압한 이유 중 하나는 로마제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하고 합법화 한 이유는, 점점 확장되어가는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시스템으로써 기독교만한 효율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세상과 악수할 때 세상의 수단이 되고, 순수한 신앙의 길을 갈 때에 모여드는 숫자로 인하여 세상은 주목하고 경계한다. 많은 이가 모이는 곳일수록 사람들이 주목하고 정치적 파장의 잠재력이 있기에 - 예수님께서 조용히 산으로 피신하신 것처럼 - 오해 살 일을 경계하고 조심하고 멀리 해야한다.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은 “정치적 분파가 아니라 순수한 신앙인”의 자세를 순전히 지켜야 한다.
그런데 현대 교회들은, 특히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큰 교회들은 오히려 정치와 가까와지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 사실이든 아니든 과장이든 – ‘종교세력의 정치세력화’라는 오명과 낙인을 받고도, 예수의 가르침을 소개해야될 대상이 되는 이웃과 사회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라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1) Francis A. Schaeffer, How should we then live?: 프랜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 인가?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22), 49-50
*사진설명: ‘기독교 강요’ 초판본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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