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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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간만에 서울에 왔다. 고등 절친의 장녀 결혼식이 있어서다. 고교졸업 이후 영국 주재 떠날 때까지 자주 뭉쳤던 친구 셋과 덕담 나눌 요량으로 돌아갈 차표는 넉넉하게 늦은 시각으로 끊었다. 그런데 예식후 식사를 마치니 죄다 선약이 있다고 일어선다. '어쩐다? 여섯시간이나 남았는데...' 꽤나 많이 걸었다. 그 옛날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잠실의 아파트단지. 젊은 날 열정적으로 땀을 뿌리며 테니스 쳤던 코트. 가죽세무 카페트처럼 습기 먹은 낙엽들이 잔뜩 쌓인 길. 숨가쁘게 달렸던 그때의 스트레스와 푸념과 파란 꿈을 다 받아줬던 푸근한 모습 그대로다. 그러다가 이윽고 잠실역에 이르렀고. 롯데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무려 1시간 반이나 남았다. 그러나 무료하진 않았다. 많이 들려주시고 생각하게 해주신 분과 줄곧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신 말씀 적지 않을 수가 없다. 120625 ---------- [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 글을 쓰는 시간은 즐겁다. 특히 주신 말씀을 기록하는 시간은 늘 기쁘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살펴보고 콜론보다 세미콜론이 적합한지 글 쓴 맥락에 더 적확한 표현을 궁리하는 시간은 충분히 즐길만하다. 그렇게 해서 말쑥하게 단장된 글 한 편이 나온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어디 한 곳 체증되지 않고, 부사는 제 위치에서 제 할 일 하고 있는 지 형용사는 과하지 않은 지 점검하는 시간은 넉넉히 누릴만하다. “그대! 적은 대로 살고 있나?” 글 쓰는 이의 짧지 않은 삶에는 수많은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 그에 못지 않은 만큼 수많은 중단들이 있었고. 예기치 않은 사건과 힘 쑥 빠지게 하는 훼방으로 포기가 잇달아 속출하던 적도 적지 않았다. 이것들과 함께 동반하는 낙심과 좌절과 후회에 눌린 적도 많았다. 푸념, 불평, 분노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자기 안의 확신과 주변의 동조에 힘입어, 그 위에 핑계와 미움과 정죄를 배설해도 떳떳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Devil is in the detail. 삶의 사소한 조각 하나 하나 디테일에 경각하지 않고, 일거수 일투족 정신차려 깨어있지 않으면, 굶주려 우는 사자 세상임금 마귀 앞의 먹이다(벧전 5:8).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에서 유체이탈하여, 기록한 글과 들은 말씀과 읽은 말씀에 동감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삶은 위태롭다. 거대한 담론과 위대한 사상과 숭고한 비전이 이슈가 아니다.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반응하고 받고 베푸는 일상의 사소한 디테일에 생명의 경각이 달려있다. 하나님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1). “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 (1) Mies van der Rohe(1886-1969), German Architect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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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환히 비추는 날]햇살 환히 비추면 눈물이 난다. 한기에 움추린 뒷목을 따사로운 온기가 감싸오면 복받친 어깨가 들썩인다. 아픈게 일상이었는데 틀린게 정상이었는데 외롭고 쓸쓸한게 익숙한 매일이었는데 어둡고 비바람 세찬 날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푸르고 맑고 높은 하늘 눈부시게 햇살 환히 비추면 눈물이 난다. 111825 *사진: ‘햇살 좋은 날’, 박진성, ‘대전 아트페어 25’ 에서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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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토마토로 만들어 줘]“망했다. 실수로 박은해를 토마토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1) 상대방을 미워하면 토마토로 변하게 하는 중학생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춘기 학창 시절, 싫든 좋든 여러 부류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일상에 치이다보면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주인공은 아무도 토마토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어딜 가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친구들에게도 인기 많은 미도를 질투하지만, 주인공은 그가 가진 요상한 능력 때문에 미도에 대한 험담을 블로그에 올려도 결국 “그래도 난 유미도가 좋다”는 말로 순간적으로 치솟는 미운 마음을 억제하며, 친구를 토마토로 만들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한다. 알게 모르게 내 안에서 솟구쳤던 ‘미움’들이 상대를 토마토로 변하게 할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참 많은 사람들을 붉은 토마토가 만들었겠구나!’ ‘참 많이도 미움의 생각에 자주 사로 잡히는구나’ 상대의 부주의한 말에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면 될 것을… 옆사람의 경우없는 태도에 고개 돌리고 신경 끄면 될 것을… 내 앞에 선 사람의 무리한 요구에, 차분히 내 입장을 표현하면 될 것을… 참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무절제함으로 쉽게 ‘미움’이란 비수를 꽂았구나! 참아도 마음 속 깊숙히 그 비수를 품은 채 참는 체 하는구나! 비수에 찔린 내 심령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비수에 찔린 자신의 심령이 바로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 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요일 2:9)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111425 (1) 조예은 소설 (서울: 창비, 2025), p 720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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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굿]물이 든다. 노랗고 빨간 물이 든다. 단풍이 든다. "Bloodgood" 선혈처럼 붉은... 단풍나무들중 대표 품종이다. 블러드 굿.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씻었다. 그 피가 나를 적셨다. 그 피로 내게 생기가 충만하다. 그의 성품이 나를 적신다. 못된 성품이 좋은 성품으로... 블러드 굿! 110625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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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보다 삶의 루틴대로]삶의 무게추가 인생 후반기로 급격히 기울어지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마음 속에 품어진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왜 이리 떠오르는 옛날에 대한 상념들이 맘 속으로 쇄도하는지? 현실 속에서도, 꿈 속에서도, 어릴 적의 일들, 장난기 넘쳤던 중고등시절, 패기/혈기/총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던 청년의 때, 바로 몇주 전 서운했던 일… 그리고 모든 기억의 조각들에는 감정의 꼬리표가 붙어있다. 해야 할 일을 놓고 축 쳐진 채, 그 꼬리표를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 많은 시간이 소모됐음을 깨닫는다. 내 마음을 장악한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할 일을 못할 때가 있다. 그 감정에 권위를 주면 만사가 귀찮을 때가 있다. 감정에 눌리다보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오래 누워있어서 머리가 무겁고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갑갑해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질 못한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그래서 회고할 일들이 많아질수록, 경각하여 뒤 돌아보는 일을 절제해야 됨을 깨닫는다. 지금(present)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present)라 하지 않던가? 누리고 즐겨야 할 지금 이 순간, 난 뭐하고 있는가? 과거에 대한 회상, 상념, 그리움과 회한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할 때가 아님은 분명하다. 멀리 있어 애가 탈 정도로 그리운 오랜 벗보다 매일 만날 수 있는 이웃이 더 고맙다. 멀리 떨어져 있어 가슴에 품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든 가족보다 오늘 내 끼니에 관심 가져주는 옆집 아줌마가 더 실감있게 다가오는 감사의 대상이다. 반평생 학업/취미/경조사를 함께 했던 오랜 친구보다 오늘 내게 탁구치자고 꼬시는(?) 앞집 액티브 시니어가 더 나를 흐뭇하게 한다. 은혜 받을 만할 때 은혜 받아야 한다. 과거에 주홍빛 비단 카페트를 깔고 아무리 기대 가득 찾아 나선다 하더라도 얻을게 별로 없다.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때이다. 지금이 바로 누리고 견디고 이기고 체험하고 얻을 때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미 지나버린 일에 대한 감정에 사무칠 때, 더 이상 그 감정에 권위를 주지말고 일어나라! 어제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던 삶의 루틴대로 세수하고 이를 닦고 신을 신고 아침햇살 아래 활보하라. 삶의 루틴(routine)대로 오늘을 살자! 바로 오늘,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이웃에게 친절하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102325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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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연약한 이 때가 은혜라]유다의 서쪽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그들의 주요한 성, 가드, 야브네, 아스돗 성들을 접수하고, 블레셋뿐만 아니라 남쪽 구르바알의 아라비아, 마온 사람들을 격퇴시키고, 동쪽의 암몬은 웃시야가 무서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대하 26:6-8). 그의 휘하의 군대가 무려 삼십만 칠천오백 명. 그가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명성을 떨치며…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역대기, 열왕기를 통해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보면 거의 모두 이 패턴을 밟고 있다. 솔로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왕권 초기에는 겸손하여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왕위가 안정되고 국가가 부강해짐에 따라 겸비함을 잃고 하나님을 등지고 실족한다. 다윗도 결코 예외라 할 수 없다. 이제 내가 목사안수받고 교회개척에 나선지 3년. 교회개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회가 세워지고 본격적인 목회를 하는가 했더니만, 본의 아닌 ‘강아지사건’으로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하고있다. 그 당시 주님께서 어느날 새벽에 내게 주신 메시지가 생생하다. “감당치못할 정도로 많은 걸 주면 예외없이 넘어지더라.” “네 원하는 것, 주지 않더라도… 네 바라는 만큼 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나이 16세. 모든 것에 어설프고 서툰 웃시야. 그때의 약함이 겸손함을 낳고, 그 겸손함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을 때가 그에게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시절 아니었을까? 아니면 강성하여 그 강건함이 차고 넘치매 동서남북의 온 열강이 그를 무서워하며 조공을 바쳤던 그 때가 더 행복했을까? 지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작고 연약하여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붙들 수 밖에 없을 때가 바로 귀하고 값지고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형통할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이 잘 풀릴 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항상 조심해야 한다. ‘겸손’이 바로 영적 능력이다. 경건의 형식의 옷을 벗고, 경건의 능력 즉 ‘겸손’으로 내면이 꽉 차올라야 한다. 겸손한 삶, 겸손한 자에게 주님께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에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아직 나의 내면에는 겸손으로 채울 공간이 한없이 넓다. 그래서 작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이 때가 좋다. 101625 *이상은 오늘 새벽설교 말씀 중 일부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qrrJQGlGp420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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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꼬이고 뒤틀어지는 이유]높은 창공을 배회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를 보고 놀란 타조는, 궁둥이를 하늘로 치솟게 하고 머리는 땅속에 파묻은 채 위기의 순간을 외면하고 아예 보지않으려한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모든 신경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이다."(칼 융)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신호가 뚜렷이 감지되었음에도 병원가기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다. 삶이 꼬이고 뒤틀어지고 불행한 이유는,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 직시하기를 애써 피하는데 있다. "문제 직시하기" - 그것 쉽지 않다. 바로 보면 볼수록 아프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보다 덜 아픈 길을 택한다.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애먼 환경탓, 주변탓, 이웃탓... 육신정욕 이끄는대로 쉬운 길을 택하며, 문제의 본질 자체를 아예 외면해 버린다. 좋던 싫던 힘들던 어떠한 환경도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함이 없다.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섭리 아래 있다. 내게 닥친 정황앞에서 불평, 원망, 탓함은 주님께 원망함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의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101125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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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라 사랑하라 용납하라]습기 가득찬 주일 아침. 끕끕한 이불 속 기상 순간부터 불쾌했다. 시들어가는 화병 속 국화는 언제 버릴까? 어젯밤 빨래했던 옷들은 세탁기 안에 여전히 젖은 채 있다. 용기 안 바닥에 몰려있다 왈칵 쏟아진 요거트가 식탁과 바닥을 어지럽힌다. 덥지 않은 날씨인데, 왜 이리 땀은 나는지? 땀과 비로 적셔진 채 빗길을 걷는 육신은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진다. 질퍽한 도로 위, 교회 입구를 막아선 차량 한대에 가뿐 숨이 턱 막힌다. 현관 앞을 막아선 수많은 무리들. 누군 우산을 접고 누군 주보를 나누고 누군 그 손바닥만한 곳에서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고... 예배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내게 따끔한 지적을 하신다. “그들도 너처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지친 몸 겨우 이끌고, 이곳에 나 만나러 왔단다.”(1) 이른 아침부터 별로 이쁘지 않은 생각들로 야단법썩 요란했던 내 마음을 이렇게 평정하셨다. 평안 속 천국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092825 (1)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John Watson: 스코틀랜드 목사, 소설가, 필명 Ian Maclaren) *사진설명: 교회에서 귀가길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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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것이 사역]"인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불편하고 갑갑한 것에 대한 참음. 덜 중요한 것을 멀리 할 수 있는 절제. 내 생명에 유익하지않은 생각에의 거부. 다들 아니라는 길을 포기하지않는 소신. 10년전 페북에 올렸던 글이다. 오늘 아침 지인 목사님께서 이 글을 소환하셔서, 새롭게 주신 감동을 보태고자 한다. 인내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전투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환경 속에서 그분을 좇으려고 발버둥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런 싸움에서 쉽게 이기도록 해주거나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줄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전투를 계속할 힘을 주길 바랄 뿐이다.(1)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이 세상에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도 이 전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기도는 전투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시간에 그 자신을 지키는 힘이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육신은 곤하고 멍들고 찢기고 지친 나머지 이젠 그만 하고자 하나, 믿음의 인내는 그 시간을 버티게 한다. 그 험악하기 짝이 없는 질고의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도록 죄악 앞에 주저앉지 않도록 붙드시고 도우시고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인내" 견디고 버티는 것. 아무 것도 않하고 허송세월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견디고 버티는 것이 바로 사역이다. 주를 향한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091325 (1) 필립 얀시, '기도', p145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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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즐길만한 이유‘100세’시대라고 한다. 60세가 지나 환갑이 되면, 장수하셨다고 축하하며 온 가족/친지들이 모여 ‘회갑연’이라는 인생 최대의 파티를 베풀었는데… 지금은 ‘회갑연’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인생 한창 때에 무슨 ‘장수’했다고 축하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건강하게 살까?’ 무거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 날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노년건강 전문의들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히 오래 사는 것’, 즉 ‘건강 수명’을 강조한다. 이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먹고, 재정을 관리하며, 노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건강 수명을 오래 유지하기위해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항상성(恒常性)”: 여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체의 각 기능이 균형있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 뇌과학에 의하면, ‘통증’과 ‘쾌감’은 뇌의 동일한 부위(뇌섬엽,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 등)에서 처리된다고 한다. 통증과 쾌감은 상호작용을 통해 불쾌감/유쾌감에 대한 다양한 감정정보를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1). 눈을 즐겁게 하는 숏츠에 “이것만 보구…”, “5분만 더…” 하면서 한참을 빠진 후 순식간에 불쾌감, 후회감이 마음 속에 작열하지 않는가? 나는 식사후 커피와 함께 빵이나 떡, 스낵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요새 내게 꽂힌 디저트는 ‘열풍으로 구운 양파’이다. 구운 양파의 풍미 가득한 스넥을 아작아작 입안에서 씹어 넘기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중량 110g의 작지 않은 양에다, 나트륨 130mg등 건강상 별로 아름답지 않은 성분들이 함유된 한 봉을 먹어치운 후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꼼작하지 않고 두어시간 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한 책만 바라보는 독서하는 시간도 그다지 즐겁진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시간이 즐겁다는 역설은, 내 안에 무언가로 채워졌다는 포만감, 새로운 생각으로 내 좁은 시야가 넓어졌다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을 헉헉대며 올라가는 등산이 즐거운 것은, 고통 후에 정상에서 외칠 “야호!”가 있기 때문이다. 뇌의 한 영역에서, 고통과 쾌락을 다루고 처리하는 두 기능이 50:50 절대 균형(Equilibrium)을 향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다. 한쪽이 반 이상을 점령하면 다른 한쪽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의 다이내믹한 조합의 연장선이다. 이 둘 간의 균형이 깨져 즐거움의 무게가 바닥을 향해 내려앉으면, 시소처럼 고통이 올라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경고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반작용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자기조정을 위한 ‘작용/반작용’의 정상적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을 ‘권태’라고 지적한다. 삶에 무료함이 들어오면, ‘어디 재미있는 것 없을까?’하고 더 짜릿한 자극을 찾는다. 더 큰 욕구가 밀려온다. 만족시키기 훨씬 더 어려운 욕망이 물밀듯 들어온다. 절대 균형, equilibrium이 무너져버린 상태이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쯤의 고통과 불행을 필요로 한다.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배안에 무거운 물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소원이 마음 속에 생기자마자 바로 충족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소일거리로 삼아 세월을 보내게 되겠는가? 아마도 권태가 밀려 들어올 것이다… 행복에 대한 최대의 적은 무료함, 권태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욕구와 만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이때의 행복은 지극히 짧다. 금세 무료함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2)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근심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명확히 알아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고 불행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행복을 상기하게 된다.”(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의 시기는, 잊고 살아왔던 소중한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감사하게 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클수록 절대주권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돈독해진다. 내게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하시는 주권자를 향한 나의 믿음에 철썩 같은 신뢰가 있기에 그러한 상황을 그가 허락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창 22)은, 이를 감당할만한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신뢰하셨기에 그리하신 것이다.하나님의 약속(창 15:4)대로 언약의 자손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자식을 얻었던(창 16:15-16) 그때의 초라한 믿음 정도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시험인 것이다. 욥의 고난도 이와 다름없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 이와 같이 철썩 같은 신뢰가 있었기에, 그 끔찍하고 처참한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자신의 주변을 엄습해올 때,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고난이 해결된 결과보다 잃었던 삶의 균형, 항상성을 되찾아가는 고통 속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곱씹어봐야 성장한다. 성숙해진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너져 내린 ‘항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그만큼 필요하기에 장시간의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낼 믿음을 신뢰하시기에 허락하신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어둠이 짙게 엄습해올수록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으므로… 고통 속 견디어 내는 과정이 내겐 즐길만한 것이요, 주님께 영광이다. 고난의 때에는 무엇을 하려 하지말고 생각하라.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전 7:14) 090525 (1) Soo Ahn Lee, ‘Brain representations of affective valence and intensity in sustained pleasure and pain’, PNAS(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June 11 2024,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0433121 (2)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서울: 동서문화사, 2016), pp 17, 27, (3)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pp 75-76, 84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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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ease me간밤에 비가 왔다. 번개와 뇌성이 동반했다. 하늘의 꾸짖음에 무더위는 고개를 숙였다. 아침 식당안에는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Release Me’가 흘러나오고 비에 흠뻑 젖은 수풀내를 맡고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더위에 뜨겁게 달궈졌던 산책로는 박하사탕처럼 “화아~”하고 상큼한 내음을 뿜으며 나를 반긴다. 지난 50일간 이사와 정착과 나름 세운 계획대로 일정을 소화하다 무리한 것 같다. 특히 어제는… 방에 있으면 덥고, 냉방 잘 된 도서실로 가면 춥고, 누우면 땀나서 싫고, 앉아서 책 읽으면 집중이 안되고, 무얼해도 불편하다. 피지컬과 멘탈이 모두 바닥이다. 나의 영혼과 육에 관심을 쏟는 친한 벗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상념 한 조각, 조각마다 그냥 지나가질 않는다. 그 뭐가 대단하다고 ‘회상(回想)’이라는 구덩이를 내 마음 여기저기에 깊숙이 파놓는다. 심란하다. Release me! 육신의 연약함, 죄성, 회상속 침륜(沈淪), 사람의 인정…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082625202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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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30%가 죽어나가도 여전히가장 참혹한 질병 중 하나는 문둥병(한센병, leprosy)이다. 말초신경계에 나균이 침범하여 감각이 소실되는 끔직한 병이다. 불에 데여도 뜨겁지가 않고, 살이 썪어져 가는데 아픔이 없고, 발가락이 괴사되어 떨어져 나가도 통증이 없다. 영혼에 치명적인 유혹이 밀려들어와도, 달콤한 죄악의 낙을 은밀히 음미하여도, 탐욕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도, 영혼의 감각이 소실된 환자처럼 ‘나는 문제 없어!’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도 거룩하지도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주여! 주여!”하면서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실체 없는 텅빈 고백을 습관적으로 외친다. 영혼의 생살에 나균이 덕지덕지 눌러붙어있는데도 애통함이 없다. 영적 몸부림이 없다. 말세의 때에는 독특한 징후가 있다. 자신의 행위가 더러워도 구역질 나질 않고, 징계를 당해도 돌아봄이 없고, 죄를 자행해도 뉘우침이 없다. 한마디로 뻔뻔하기가 그지 없다. 바로 옆사람이 죽어나가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여섯째 천사의 말로 말미암은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류의 1/3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죽지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에게 절하며 죄짓기를 즐겨한다(계 9:18-21). 오히려 심판의 예언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두 선지자의 죽음을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축하한다(계11:1-10). 이들에게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10:9)” 꿀송이같이 단 말씀을 먹는 자들이다. 문제는 달아서 삼키기 쉬운 말씀이 배 속으로 내려가니 쓰디 쓰다. 곤한 육신을 위로하며, 지적 욕구를 채워주며, 인본적 자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설교말씀은 육과 혼을 즐겁게 해주었지만… 듣고 읽은 말씀을 순종으로 행하려 하니, 자신의 익숙했던 생활, 습관, 인생관, 가치관, 쌓아 놓은 소유들과 여러모로 부딪친다. 더욱이 믿음의 길을 가려면, 이 귀한 것들의 포기뿐만 아니라 고난이 따른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믿는 길을 따르자니, 세상의 상식과 처세와 배치될 때 닥칠 왕따와 어려움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쓰다. 몹시 쓰다. 고통이 극심한 환란 가운데…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계 9:6)’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류의 1/3이 죽어나가도…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경시되고 외면된다. 선지자의 경고 메시지마저 배 속에 쓰리다고 배척하며 그들을 미워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뻐한다. 지금 한국 교회 상황이 그렇다. 스마트폰 속 붉은색 유튜브 아이콘이 불이 나도록 당대의 쟁쟁한 설교말씀 즐겨듣고 좋아서 “아멘, 아멘!” 하지만, 정작 순종의 행함 앞에서, 넉넉한 포기의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 배가 쓰리다고 말씀 앞에서 돌아선다. 이것이 불순종, 불신앙, 엄연한 죄임에도 끄떡없다. 목은 곧고 뻣뻣해서 수그러지지 않는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생활의 염려 가운데 실질적 도움이 되는 힘, 능력, 인맥, 돈의 우상에 영적 초점이 산만해진 시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경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경시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삶을 부정하는 시대이다. 귀를 즐겁게하는 인본의 소리, 혼과 육을 즐겁게 하는 지성과 교양과 인문의 소리,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각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에는 귀를 틀어막고 돌아선다. 참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는 싫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교회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눅 12:49) 예수의 가르침을 적절히 편집하여, 세상의 정신과 타협하고 있다. 세상적 관점에서 규모와 크기로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거룩한 성직의 자리가 남용되고 있다. 세상에 예수가 필요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오로지 사는 길은,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문제있는 죄인임을 경각하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참 목자는 성도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죄성을 드러내고 깨닫도록 하여 예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설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유모어와 위트도 섞어가며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성경 난제를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원어문헌을 신학적으로 해박하게 해석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인품이 온화하고 고상한 도덕자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성도들을 예수 앞으로 데려다 놓는 사람이다. 바로 베드로가 삼천명의 영혼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이들이 탄식하며 내뱉은 반응이 무엇이었던가?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행 2:37 )” 이 죄인된 삶, 앞으로 어찌 살꼬? 이들의 의문에 베드로는 뭐라고 했는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복 받고 은혜 받으라는 격려 이전에 “죄의 문제부터 해결받으라!” 하지 않았던가? 그 베드로도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반응이 무엇이던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우리는 조국과 북한,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여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과 자녀의 죄를 놓고 울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082325202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