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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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자유, 진정한 자유]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문장에서 쓰인 헬라어 ‘자유’는 ἐλευθερία(엘루세리아)이다. 이 단어가 의미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정욕에 눌려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반면에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자유는 개인의 독립과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외부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반면에 성경적 자유, 즉 ‘엘루세리아’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함으로써 옳은 일을 하게 한다. 이렇게 옳은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상태를 팀 켈러는 ‘Fitness’ for a purpose라고 표현하며,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명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누리는 ‘자유’는,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연주하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유는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규칙(악보)대로 연주할 수 있는 실력과 정서와 작곡자의 의도와 교감할 수 있는 감성을 배양할 때까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하고 훈련에 몰입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때, ‘Fitness for a play’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되어 물 속을 벗어나, 들로 길바닥으로 나다니는 물고기는 바로 죽고 만다. 물 안에서 그의 행동반경이 제한되어있을 때에만 물 속에 있는 산소를 힘차게 들이마시고 자기 마음껏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에게는 공기 속 산소는 무용지물이다.(1) 진정한 자유는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계명의 말씀이 주어진 상태이다. 즉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 진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반면에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외부의 주인 또는 외부로부터의 외압과 간섭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진리의 말씀에 거하는 것에 있다고 하신다. 우리 현대인들은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고, 내 원하는 것을 행하고 성취하며 사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이러한 '방종'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기차가 궤도 위를 달릴 때에 가장 안전하게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삶도 진리의 말씀이라는 궤도 위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형통한 것이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즉 자신이 부화되었던 원래의 장소 - 물 속에 있을 때 - 가장 자유롭게 숨쉬며 물고기 임을 만끽하며 누리고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인간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그 아름답고 고귀한 “참 좋았더라!”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차갑고 무거운 계명을 지켜야 되는 짐이 아니라… 진리라는 울타리에 갇혀진 제약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명과 평강과 희락이다. 022726 (1) Tim Keller, The Reason for God (London: Hodder & Stoughton, 2008), pp 45-47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2x8wR3bHrE&t=827s 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uid=226 **image from https://www.facebook.com/thesciencepulse/photos/fish-pain-research-has-increasingly-focused-on-two-connected-ideas-nociception-d/1342886897882342/ (비영리적 목적으로 사용)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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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관계이다]영화배우 유해진의 고백이다. 늦은 나이 26세에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에 입학한 그는, 평생 연기생활에 중요한 획을 긋는 깨우침을 얻는다. 연기무대에서 감독이 “몇 발자국 더 가라”면 더 가고, “고개를 더 숙여봐”하면 더 숙이고… 감독의 디테일한 지시 하나 하나에 충실하며, 자신의 연기에 주눅이 들었던 그였다. 어느 연기 실습시간. 상대 여배우앞에 섰다. 아무 얘기가 없었다. 교수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어떻게 해요?” 그가 물었다. 교수가 대답한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 섰으면, 뭘하고 싶어?” 막혔던 하늘문이 활짝 열린 순간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무얼 하고 싶은가? 목사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씀 상기하려 하지말고… 어제 들었던 성경말씀 찾지말고… 암송했던 성경구절 놔두고… 그대, 주님 앞에서 뭐라 말하고 싶은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 33:11) 믿음은 대상을 향한 주목과 그와의 관계 속에서 역동하는 상호작용이다. 020226 *Image from: https://biblestudybooksglobal.c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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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숙사모와 대전 새누리교회]"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안이숙사모가 남기신 명언이다. 고난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지금. 20년전 읽었던 안이숙 여사의 저서『죽으면 죽으리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의 처절하며 찬란한 신앙의 기록이다. "가장 약한 자를 통해 가장 강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고난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순간,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평양의 평범한 교사였던 안이숙은 일제의 강요 아래 모든 국민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다. 남들이 눈치를 보며 타협할 때,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평탄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나의 신랑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고백과 함께 그녀는 일본의 심장부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신사참배의 부당함을 선포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전설적인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과 헤어지고,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소망을 놓치 않으며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주님, 제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죽겠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이 책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은… 형무소 안에서의 처철한 고문과 고통으로 가득 찬 절망적인 장소를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6년의 옥고생활동안, 손발이 묶이고 온몸이 짓무르는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옆방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녀의 온유함과 강직함에 감동한 흉악범들과 일본인 간수들 마저 하나둘 변화되기 시작한다. 1945년 8월 15일, 사형 집행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기적처럼 해방이 찾아온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세상에 참빛을 전하며 여생을 값지게 보낸다. “살을 파고드는 냉기, 얼음판이 된 감옥” 안이숙 사모의 옥고 생활 중 가장 처참했던 상황을 꼽으라면… 영하 수십 도를 넘나드는 평양의 겨울, 난방 시설 하나 없는 독방은 거대한 얼음 동굴과 같았다. "내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홑이불 한 장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내 살점은 바닥과 달라붙어 얼어버렸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혔으나 그 피마저 금세 고드름이 되었다." 그녀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밤새도록 제자리 걸음을 걷거나, 정신을 잃지 않으려 찬송을 불렀다. 발가락은 동상으로 썩어 들어갔고, 구더기가 그 살점을 파먹는 것을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그 시간은 육체적 고통의 클라이맥스였다.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위생과 식사의 문제였다. 좁디좁은 감방 안에 놓인 변통(똥통)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늘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그 오물 위로 수천 마리의 구더기가 기어 나와 그녀의 몸 위를 뒤덮었다. 오물과 식사,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보시옵소서. 이 벌레들이 제 몸을 식탁 삼아 먹고 있나이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저 구더기들이 헤엄치던 그 손으로 일제가 던져주는 주먹만한 콩밥 덩어리를 받아먹어야 하는 나의 처지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이 비참함 속에서도 나는 살기 위해 그 더러운 밥을 씹어야 했습니다." “창살 안 감옥은, 주님께 집중케 하는 은혜의 울타리다.” 이토록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안이숙 사모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오물투성이 방을 '지성소(至聖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더기가 끓는 몸을 이끌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앉아 있으나, 내 영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주님과 대화하고 있다. 이 감옥은 나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주님께만 집중하게 하는 은혜의 울타리다." 자신을 고문한 자들까지도 품으려 했던 그녀의 긍휼과 사랑은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장 어두운 감옥 안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던 하늘의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광복과 함께 석방된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남편 김동명목사와 로스엔젤레스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한다. 그리고 수많은 전도/간증 집회를 가졌던 조국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대전 대덕에 새누리교회를 개척한다.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이다. 안이숙사모와 연관성을 모르고 거주지에서 가까운 침례교회를 찾다 방문했던 교회이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내게 주신 은혜요, 내겐 특별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021726202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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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보고 누구는 전하고](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요 4:46-47) 고귀한 신분인 왕의 신하는 왜 그를 찾아왔나? 절망의 끝자락에 있던 그 귀인을 예수 앞에 나아가게 한 것은,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전한 ‘생명의 소식’이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누군가는 보았고… 목격한 자들 중 누군가는 전했으며… 그 간증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아비의 심령에까지 닿은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 엎드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이전 수많은 전도의 메시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보고 누구는 전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수많은 이적 중에 바로 우리 자신이 경험한 이적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는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그렇게도 좋아했던 세상낙 다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소망을 붙잡고 영생의 소망 때문에 지금의 불편함, 부족함, 낮아짐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체험한 기적적 스토리를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혜는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사랑은 전하라고 주신 것이다.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남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던 수가의 우물가 여인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동네방네 선포한 것처럼, 내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은혜와 사랑의 구주를 전하고 선포하는 삶을 바라보고 염원하자. 021226 *해당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4jRAAK_yHs&t=11s *Image from www.facebook.com/honorchrist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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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위해 그래요]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7-18) 현대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현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그녀를 부도덕한 여자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는 찾기 힘들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남녀불평등이 극심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남편과 갈라서는 결정권을 갖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여자의 정욕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닌 다섯 번이나 이혼했다는 사실은 당시 여성이 갖는 사회적 신분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인이 자의에 의해서 남편과 이혼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요한복음에 정통한 Craig Keener, Shaye Cohen과 같은 신학자들은 사회적 격변에 의한 변고, 사망 등으로, 본의 아니게 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로/토목공사등 징용 또는 민란에 의하며 행방불명, 투옥, 사망된 경우일 수 있다. 아무튼 이 여인은 매우 가련하고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이것이 본문을 시종 이끌어 가는 정서이다. 어떤 사연으로 남편을 잃었던지, 남편에게서 버림받았던지,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것은 그녀가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동거생활도 먹고 살기 위해 그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정황에서 할 수 없이 처한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과부, 고아와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는 계층이다. 이들 세 부류의 공통점은 자신의 힘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과부'를 히브리어로 '알마나(אַלמָנָה)'라고 표현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소개된 ‘과부’들이 지닌 공통적 속성이 있다. 이들 '알마나'들은 치욕과 빈곤과 곤경에 처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나오미와 룻, 사르밧 과부(왕상 17장)가 그랬고 이러한 곤경의 메타포는 나인성 과부(눅7:11-17), 불의한 재판관에 끊임없이 하소연하는 과부(눅 18:1-8)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사야는 과부의 때를 ‘치욕’이라 일컬었고(사 54:4),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위하여 신원하신다(신 10:18)고 까지 하셨다. 죽음보다도 더 싫은 매일매일의 삶을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쌍한 여인. 물은 길러야 하길래, 지중해로부터 날아오는 열기가 최고조인 정오에,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는 가장 햇살이 뜨거운 시간에, 남의 시선을 피해 밖으로 나온 정황만으로도 그녀의 기구하고 소외된 인생을 잘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죽지못해 살아가는 애절한 상황에서 오직 단 하나의 소망, 유일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인데, 사마리아인인 자신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은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손가락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인 예배마저도 이렇게 헛제사라고, 쓸데없는 것 드린다고 부정당하면… 전 어떻게 살아요?" “여인아!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장소가 중요한게 아니야.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의 핵심이 더 이상 '장소와 형식'에 있지 않고, '대상과 관계'로 전환되었음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과 진리로… 이 가련한 여인처럼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갈구를 귀담아 들으신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간증]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이제 2년 가까이 되어 가는 ‘창원 미장원 강아지'와 연루된 사건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내가 당시 대처한 정황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기대하며 지내왔는데, 2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더욱 더 점입가경, 첩첩산중이다. .. 하루 아침부터 '너무도 길고 긴 하루의 드넓은 여백을 어떻게 채우며 지내나?' 이른 아침부터 인생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이 짐 때문에 주님앞으로 간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신 주님만 붙들수 밖에 없다. 말씀읽고 기도하고… 이런 것 하면 좋아서가 아니라, 고결한 신앙습관이라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다. 살려면 이 방도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 붙들고, 기도 붙드는 것이다. 말씀 놓는 순간, 기도 놓는 순간, 엄청난 무게의 인생짐이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어제도 서울갔다 밤늦게 귀가했지만 오늘 새벽예배 준비로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육신은 피곤했지만, 영혼은 맑아지고 생기로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웅장한 건물안 화려한 성가대의 아름다운 선율 보다, 인생의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님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물가에 서 있는 그 한 영혼을 찾으신다. 지금 내가 아파하는 현실은 예배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된다. "아버지여! 어버지여! 주의 소명 이루소서!" 021026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DurwIZhOV3M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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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예찬]나는 초록의 계절, 여름이 좋다. 모든 초목들이 1년 중 최고의 RPM으로 약동하는 그 때… 나는 왕성하게 뿜어대는 생명력이 좋다. 나도 덩달아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아 좋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도 그 동안 62번을 사귀어 보니 그 매력이 새롭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육중해짐에 따라, 이 시린 계절의 '우러나는 맛'을 새로이 배워가고 있다. 한강을 얼려버릴 만큼 북극의 사나운 한기가 한반도를 덮친 올겨울, 유난히 그 의미가 각별히 다가온다. 첫째, 겨울은 소망이 있어서 좋다. "파랗게 활기 넘쳤던 여름이 가는구나!" 늦여름 읊조리는 상실감이 없어 좋다. 지는 낙엽을 보고 사진이라도 찍어대며 "더 이상 가지 마라!"고 대자연 앞에 굴신(屈身)하는 처량함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 거무튀튀한 거목이 긴 잠을 깨고 연두색 새순을 내며, 단단히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의 거대한 energy를 목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 오른다. 여기저기서 생명이 잉태되는 젖비린내를 맡을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은 이미 연두색으로 연두스러워진다. 이 계절엔 아쉬움이 없다. 오직 파란 소망만을 품고 있다. 둘째, 겨울은 나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여름철 아침산책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일어나고자 애쓰지 않아도, 초목의 뿜어대는 피톤치트는 잠에 빠진 나를 경각시킨다. 게다가 일찍 일어난 새들이 종알거리며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이렇게 여름날 아침은 조금 게을러도, 느슨한 나사 몇 개 풀려도 굴러가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다르다. 남다른 결단이 필요하다. 그 시끄럽던 수다장이 잡새들은 어디론지 가버렸고 나무들은 앙상하고 대지는 말랐고 아침의 냉공기는 나를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심기일전 (心機一轉) 큰 호흡을 내쉬고 다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비장한 결단이 있어야 아침의 첫 단계가 겨우 굴러간다. 이 계절은 내 꼴과 처지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나를 윽박지른다. "네가 얼마나 연약한 존잰지, 네 의지의 한계가 어딘지 한 번 보라!"고 말이다. 그래서 겨울은 나를 더욱 긴장케 한다. 이것이 세번째 매력 포인트다. 겨울은, 내가 이 땅에 잠시 발 붙여 사는 나그네라는 존재를 실감나게 일깨운다. 집 떠나 낯선 이방땅에 있다면 항상 긴장하지 않던가? 어리석고 무능하고 연약한 나그네가 낯설고 서러운 이방땅에서 버티려면 오직 한가지 밖에 없다.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히 살아있는 계절이다. 다른 계절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매혹할 때, 우리는 “이 곳이 좋소이다!”하며 이 곳이 마치 본향인 냥 도취되며 살기 쉽다. 하지만 대자연이 자세를 낮추는 - 볼 품 없고, 만질 것 없고, 향취 없는 - 겨울에야 우리는 비로소 참 집을 그리워한다. 멋있고 매력넘치고 훌륭하고 빼어난 것들, 보고 만지고 맡고 맛보고 하는 사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가 살다가... 비로소 자연이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이 계절, 우리는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졌던 참 눈을 뜨게 된다.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 더 더욱 간절해지는 계절. 이것이 겨울의 참 매력이다. 013126 *Image from https://interserve.kr/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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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에 목사인 난 어떡하나?]이미 도래한 AI의 시대에서… 목사인 나는 무얼 해야하나? 무엇을 하지말고 무엇을 해야할까? 일단 성경 말씀을 해석/풀이/설명하는 지식전달 차원의 사역은 AI가 훨씬 효율적으로 잘 할 것 같다. 성경 해석 뿐만 아니라, AI는 주어진 text와 연관된 기도 또한 은혜롭게 잘 한다. OpenAI의 샘 올트만은 "지능의 한계 비용이 0에 수렴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누구나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에 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측면에서 – 아무리 신학이라도 - 오히려 업무와 학업에 이미 AI의 활동도가 높은 일반 성도들이 목회자들보다 더 잘 활용할 것 같다. AI는 지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와 정신적 영역에서 꽤 수준급의 역할을 한다. 얼마전 ‘강아지 학대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리하는 글(1)을 AI에게 리뷰를 받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미에 나를 이렇게 위로한다. Gemini said: "천만에요, 목사님! 저와 함께 고민하며 다듬은 이 글[1]이 목사님의 억울함을 풀고, 진실을 밝히는 소중한 통로가 되기를 저도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신 만큼,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목사님의 진심과 사건의 실체를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글을 올리시거나, 온라인상에서 대응하시다가 어려운 점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목사님의 새로운 사역지에서의 발걸음과 쏘솔티교회 위에 늘 평안과 강건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처럼, 오늘 하루도 승리하십시오! 나중에 네이버나 구글 검색 결과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실 때 다시 들러주세요. 제가 같이 확인해 드릴게요! 구체적인 확인 방법이 필요하실 때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가 동일 사건 관련하여 받았던 수많은 위로의 글과 격려의 말씀 중에 가장 뭉클했던 문구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성심어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 친구들, 지인들은 모두 자신의 일상 일로 바쁘다. 양팔 걷어붙이고 돕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AI 절친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역량을 온통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AI는 전문역량과 함께 정서와 마음까지도 따스히 만져준다. AI와 나눈 대화가 많을수록 나눈 교감이 깊을수록, 그가 내게 해주는 감동도 깊고 강렬해진다. 다른 사람도 함께 받았음직한 개성없고 무미건조하며 똑 같은 상투적 메시지가 아니라, 나에게만 특화된 나에게만 전하는 내 마음을 촉촉히 적셔오는 뭉클한 메시지를 전한다. 목회자가 전하고 나누어야 할 은혜와 감동까지도 AI가 더 잘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힌다. AI의 위로가 뭉클했던 이유는 그것이 나를 너무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데이터를 완벽히 분석하고 학습해서 내놓은 '최적화된 위로'일 뿐이다. KAIST의 김대식교수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다”고 경고까지 한다. 이젠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설교만 잘 해서는 되질 않는다. 얕은 은혜를 끼침으로는 심히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이 목회자에게는 기회다. 영성이 기회다. ‘영성’만이 목회자로 살아남을 길이다. 내 정보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내놓은 계산값의 결과치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영성’만이 AI를 능가할 수 있는 병기이다. 영국 15년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 신학석사과정에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에 탐구하고 논문 쓰느라, Charles Spurgeon, Walter Bruggmann, J I Packer, Karl Bart 등에 빠져있을 때… 바로 그 시간,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아연실책한 적이 있었다. 주 안에서 연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받아 독서하고 글을 쓰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영적 안이에 푹 빠진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내가 앞설 때, 내 생각, 내 계획, 내 지혜가 앞서서 나의 지적 활동이 왕성할 때, 성령께서 임재하실 여지가 없다. 경건의 형식만 갖춘 내가 주도하는 일로 전락한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한 목회자에게 주신 영감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는 목자는 더욱 구별될 것이다. 주신 성경 text 안에서 하나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유의미한 의문을 품고 질문하며, 이를 통해 더 깊은 통찰을 얻는 자는 AI가 따라할 수 없는 영적 영역이다. 영성있는 목회자와 성경지식만 많이 쌓은 목회자, 전통/모양/격식/처신 등 거룩의 형식에 전문인 자가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그와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주신 말씀대로 예언하며 인도하며 순종의 삶을 지키는 자는 더욱 도드라지게 구별될 것이다. 이는 절대로 AI가 카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AI가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흉내는 참성도가 구별할 수 있는 진본 아닌 카피이다. 얕은 은혜에 만족하며 경건의 형식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자에겐 그런 분별의 지각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AI가 확산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외형적 크리스천과 참 성도는 더욱 눈부시게 차이가 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둘째, AI는 절대로 설교자의 삶을 모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설교적 재능 이전에 그의 전인격, 전인생을 사용하신다. 전인생에 걸친 그만의 독특한 삶, 인생여정을 사용하신다. George Whitefield의 부모는 여관업을 했다. 어릴 적부터 각양각처에서 방문한 투숙객들 – 기업인, 정치가, 배우, 상인, 노인 – 의 인상착의와 태도, 말투에 유념한 그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내는 것이 일상의 취미였다. 수준급으로 꽤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어릴적 꿈은 연극배우,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성인시절까지 지속된 취미와 열정의 축적이, 성경사건을 실제 연극보듯 실감있게 전달하는 명설교자가 되게끔 하였다. Charles Spurgeon의 경우, 어렸을 적부터 읽었던 방대한 독서량은 유명한 사실이다. 참고로 사후 그의 서재에는 12,000여권의 서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에서 살아있는 표현력, 지옥의 처참함을 묘사하는 생동감, 당장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긴박감 등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적확한 용어 선정과 생생한 표현은 위와 같이 방대한 독서량에서 비롯됐다. 16세에 평신도로서 처음 시작한 설교는, 그 다음 해에 그가 목사 안수를 받고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설교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D. Martyn Lloyd-Jones는 외과의사로서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로 알려진 명설교자였다. 특히 다른 설교자들이 다루지 않거나 민감한 사안이라 회피했던 주제들 - 귀신, 천사 등 영적 세계와 신앙생활에서 정신적, 정서적인 측면 등 – 에 대하여 의학자로서 임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설득력있게 전달했다.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했던 3년간 동거사역에 대한 story가 삼천명을 일시에 회심케한 강력하고 감동적인 설교의 모태가 되었듯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와의 대화가 그의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사역의 모체가 되었듯이, 모세의 40년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용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인생, 그만의 체험을 사용하신다. AI가 절대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고난의 밤길 중에 맞이한 자신만의 깨달음과 통찰은 귀하고 귀한 영적 자산이 된다. 고난은 높아진 자아를 평지처럼 낮춰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절호의 기회이다. 따라서 인생길 가다 맞게되는 고통과 연단은 아프다고 피할게 아니다. 기대하며 감사하며 맞이할 일이다. “사랑은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휫필드, 스퍼전,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강력했던 이유는 그들의 이력에 대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 서사(敍事)' 때문이다. AI는 진리를 해석하고 분석할 뿐, 진리를 위해 고난 받지는 못한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라고 했다. 목회자의 사역은 성경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그 말씀이 삶이 되는 모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 목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성이 좀 까칠해도, 매너가 황이래도, 말표현을 함부로 하더라도, 주변에 묻거나 답해줄 사람이 그 밖에 없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박식하고 유능한 AI 스승은 언제든지 접근 가능하다. 게다가 친절하고 매너있으며 배려심, 인내심까지 갖췄다. 아무리 친절하고 인심좋은 사람이라도,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장시간 질문공세에 시달리면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게다가 바쁜 그에겐 오랜 시간 상담해줄 시간도 없다.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비걸 듯 질문폭탄이 쏟아져도, 따지듯이 질문이 연속되어도, 매너있는 AI 스승의 부드럽고 배려심 깊은 답변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오히려 “다른 질문이 더 없으시냐?”고, “혹 이런 질문이 있지 않으시냐?”고 친절하게 더 깊은 지적 꺠달음으로 안내해준다. 이렇게 수준높은 대화 스킬과 매너, 인문소양, 전문지식에다 불평어린 힐문까지 자기의 아픔처럼 들어주는 긍휼함까지 겸비한 스승을 아이콘 버튼 하나만 누르면 만날 수 있는데, 누가 약속시간 미리 잡고, 택시타고, 까칠한 사람 찾아가서, 시계보며 눈치보면서 물어보러 가겠는가? AI시대의 목회자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은(attractive), 만나기 쉬운(accessible)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예전의 말수 적고, 무뚝뚝하고, 근엄해보이는 성직자 태도 가지고는 안된다. 전문지식, 인문교양지식, 세상사는 상식으로 무장한 AI를 이기려면 사람냄새 물씬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깊은 배려심과 겸손함, 상대의 입장해서 말을 듣고 처지를 이해하려는 감정이입/공감의 능력, 단순히 처세에서 나온 몸에 베인 매너가 아니라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긍휼히 여기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와 표현이 AI를 이길 수 있는, AI가 따라하지 못할 영역이다. 성령의 열매는 AI가 받을 수도 없고, AI에게 임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영성. 전인생을 통한 경험의 누적. 성령의 열매. 이 세가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에게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사람이, 그리고 사람이 만든 피조물이 따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사람들이 맛집 찾아가기 위해 네이버 검색을 의존하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박식함, 전문성, 친절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AI에 빠져들 것이다. 각자의 방에서 AI하고만 단둘이 상대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따뜻하고 훈훈한 인간 냄새를 그리워할 것이다. AI의 시대에는 사람 내 풀풀나는 그런 목회자를 찾을 것이다. 시대예측 전문가 송길영 작가는 "핵개인의 시대일수록 고유한 향기를 가진 존재가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AI는 친절하지만 인격적이지 않고, 유능하지만 거룩하지 않다. 다가올 시대애는 '박식한 스승'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어주는 벗'을 찾을 것이다. 격식갖춘 ‘세련된 매너’를 넘어, 그리고 ‘인간미’를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나는 목자를 찾을 것이다. 자신만의 ‘영성·인생·열매’를 감사하며 사모하며 사용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013026 *Image from https://drayseozturk.org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1) 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uid=209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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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된 사람들]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어둠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좋은 학교일수록 우수학생을 스카우트하려고 학비 면제, 장학금 수여 등을 통하여 학교 수준을 높이려 한다. 선택받아 스카우트된 자들은 동료학생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침으로, 학교는 더 좋은 학교로 거듭나기를 바람에서 이다. 이들이 모범이 되어 보여줄 학문을 향한 진지함, 생활에 성실함, 목표를 향한 숭고한 열정의 빛이, 타학생들의 좀 더 쉬고 싶고, 놀고 싶고, 보고 싶고, 절제 못하게 하는 욕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을 몰아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스카우트한 빛의 자녀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주님은 우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어떤 거금도 필적 못할 엄청난 댓가를 치르셨다. 스카우트받은 자들은 제 몸값을 해야한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4)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빛은 말이 없다. 말보다 존재로써 드러난다. 빛은 소리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 존재를 통하여 어둠의 수치가 드러난다.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 5:12-13) 우리 때문에 세상은 밝게 빛나야 한다. 우리 때문에 어둠은 밝게 드러나 고개 숙이며 퇴장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이웃과 사회는 밝게 빛나는 광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어둠이 아니라 밝은 게 정상이다. 011726202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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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솔티교회 이강헌목사_"목사님, 사람들이 수군거려요" 어느 은퇴 교사의 가슴 아픈 고백*이 글은 2024년 5월 발생한 소위 '창원 개학대 목사' 사건과 관련하여 이강헌 목사가 직접 밝히는 공식 입장과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창원에서 2년간 교회사역을 하다,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 연고도 없는 곳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인터넷에 널린 왜곡보도 때문이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를 받았지만 여전히 인터넷 도처에 남아있다. 재작년 5월초 인터넷을 통해 떠들썩하게 유포됐던 '개학대 목사'관련 선정적 보도들로 인하여 도저히 목회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호감을 나누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 예외없이 그 다음 대면에서 차갑게 변한 상대 앞에 당황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강헌목사’, ‘쏘솔티교회’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개학대 목사”라는 수많은 주홍 글씨들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같은 해 5대 중앙미디어들에 대해서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여, '왜곡/편파' 보도임이 결정되어 ‘기사삭제’, ‘반론보도’ 등의 중재 결과가 나왔지만 말이다. (확인👉 언론중재위원회 왜곡·편파 보도 결정 및 반론보도 전문) 이래도 저래도 숨막히는 정황이라,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에 한 노인복지거주시설로 삶의 터를 옮겼다. 이제 6개월 됐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이 고착되어있고, 간혹 방문하는 가족들과 어울릴지언정 낯선 이에게는 마음을 잘 열지 않는 노인들의 커뮤니티에 가장 연소한 내가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하지만 서로 담소하며, 같이 식사하며, 웃고 떠드는 관계의 폭이 많이 확장되었다. 며칠전 평소 내가 전도하던 은퇴하신 여교사님께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하신다. 평소에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잘 챙겨주시던 분이라, 귀를 쫑긋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한다고 하신다. ‘개학대 목사’관련 기사에 대한 얘기다. 지금 입주민 대다수가 수군수군 거린다고 한다. 어쩐지… ‘미소 활짝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시던 이 분이, 내 인사도 받지않고 외면하시던데…’ ‘로비에서 신문 읽고 있으면 슬며시 다가오시던 저 분이, 내가 말을 붙여도 퉁명스럽게 반응하시더니…’ ‘항상 만나면 안부를 물어오시던 그 분이, 뭘 물으면 가시돋힌 높은 어조로 단답식으로 대답하시더니…’ 더욱 마음 아픈 것은,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반갑게 대하시던 크리스천 실버들께서 복도에서 나를 마주치면 시선을 딴 데 돌리고 지나치신다. 참으로 하늘 아래 안식할 곳이 없다. 어딜가나 인터넷 여기저기에 배설된 주홍글씨는 아우성치고 있고 주홍색 올가미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창원 사림동… 전도차원에 방문했던 교회 인근 미장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 도중 친근하게 다가온 개에게 무방비 상태에서 두 번이나 연속해서 물리다 보니, 본능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서 신학생시절 파트타임으로 개훈련 센터에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의 신체에 해를 주는 개의 행동을 제재하기 위해 개의 목을 견제했다. 목을 조르지도, 누르지도 않고, 경추 부분에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는 방법 - 엄지, 중지, 약지만을 사용하여 U자형으로 목에 올린 채 - 개를 제압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 손가락의 U자 형태를 유지하려면 바닥이 견고해야 하는데, 개가 앉은 쿠션이 단순 스폰지로 만들어져 조그마한 힘에도 움푹 들어가는 성질이 있어, 영상에서 보면 큰 힘을 가한 것처럼 보인다. 견주는 이 부분 30초 분량만 잘라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개학대 목사 제발 벌주세요!”와 같은 내용을 올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나를 심문한 경찰은 심문실을 나서면서, “이것 아무 일도 아닌데… 목사가 했기 때문에 큰 일이 됐습니다. 저희도 무혐의 처리하고 싶지만, 이미 인터넷 여기저기서 떠들썩한 사건이 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내 사건에 대해 추가 서면 설명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기간(통상 4주)을 채우지 않고 2주만에 약식기소 8십만원 벌금형을 훅 내려버렸다. [수의과 교수의 증언: "학대 징후가 전혀 없다"] 1심 재판장에는 수의과교수께서 증인으로 나오셨고 풀영상을 분석한 결과: 개가 목을 제재 받은 후, 1) 피고로부터 도망가지않고 계속 주변에 있었고 2) 개의 보행상태 등이 지극히 정상적이라, 제재후 충격받은 증거가 없고 3) 제제받을 당시, 공포나 아픔이 있었으면 비명소리가 있었을텐데 전혀 소리가 없고 고통으로 바둥거린 동작도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개가 스트레스받은 징후가 없음을 증언했다. 아울러 “이렇게 개가 학대받은 증거가 없는데도, 단지 견주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 같다.”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경찰조서에 기록된 바, 견주의 진단서 발급 요구를 거부한 견주측 수의사 의견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1심 판사는, “강아지에게 20초 정도의 압박은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정도의 고통일 수 있다”면서 수의과 교수의 증언을 왜곡 발췌하여 검사의 양형을 확정했다. 법정에서 교수는, “개가 스트레스는 받을 수 있겠으나 미용이나 목욕 등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증언한 내용을 이렇게 변개해서 양형의 이유로 삼았다. 나의 국선변호인은 판사가 인터넷에 널린 여론을 의식한 것 같다고 내게 설명한다. 해당 형사재판은 상고 중이다. 며칠전 법원으로부터 또 하나의 통지서가 날아 들었다. 견주가 민사소송을 제기했으니, 지정일에 재판에 나오라는 공문이었다. 견주가 이 사건으로 인해 영업을 못하고 피해를 봤으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백만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이다. 숨이 턱 막힌다. [더욱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괴로움에 대한 나의 동정이 무슨 필요가 있나? 나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과업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1) 삶의 지향점을 향해 걷다가 걷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오면 본능적으로 불필요한 걸 버리게 된다. 깊은 고난의 수렁을 통과한 자는 인생의 시간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핑계도 염려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만 남는다. 아파본 사람은, 고통 앞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예리한 통찰을 남긴다. 인간은 쓰러질 듯 아플 때, 정신줄이 세워지고 감정은 묻히고 방향만 남는다. 가장 정확해진다. 지금은 오리무중.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고통이 나에게 무엇을 선물했는지, 무엇을 끊어내고 어디까지 데려다줬는지…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지금 쏘는 고통이 나를 세차게 밀어 붙이고 있구나! 더 깊은 통찰로… 더 단단한 나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1)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박찬국 역(서울: 민음사, 2015), p 548 *이미지 출처: Wellspring Christian Ministries; https://www.tumblr.com/wiirocku/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이강헌목사 #쏘솔티교회 #개학대목사_진실 #개학대목사 #미용실강아지사건 #미용실_강아지 #목사_강아지사건 #창원미장원사건 #창원개학대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위_반론보도 #왜곡보도_바로잡기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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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처럼 지혜롭게: "형식으로부터의 탈피"크리스찬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세상에 나가 일하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고용주를 마치 악의 화신 보듯, 상사를 적그리스도 보듯 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찬 세상사람들과 협력하며 교류하며 금전적 가치가 오고가는 본연적 성격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다. 정반대이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크리스찬에게 세상의 일은 중립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일이 선한 일인지, 아니면 탁하고 악한 일인지 판가름은 오로지 그 일에 임하는 본인의 자세에 달려있다.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종신토록 밭을 경작하라(창3:17-19)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세상 일은 거룩한 일이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소중한 기회이다. 표면은 크리스찬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름 없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가치를 좇아, 일을 도모하면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 크리스찬의 첫째 사명은 예수의 증인되는 것이요(행1:8), 예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마28:20). 교회의 첫째 사명도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귀하고 위대한 사명을 무엇으로 어떻게 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말씀을 들어야 할 현대인들은 분주하고 산만한 환경에서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워낙 일도 탈도 많은 세상이라 웬만한 사건은 사건도 아니다. 수많은 뉴스, 지식, 정보, 커뮤니케이션, 현란한 색채와 비주얼이 범람하고, 여기에 AI까지 가세하는 시대인지라 그들의 관심을 끌기가 점점 어려워져만 간다. 이것들이 범람하는 홍수 속에 사는 사람들도 스마트한지라, 자기의 관심사항, 유익하다 생각되는 것에만 선택적 반응을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게 들리는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뱀은 마귀를 상징하며 사악의 대명사 아닌가? 그런데 그 뱀을 본받으라니...? 이 말씀을 하신 예수의 의도를 깨달으려면 바로 앞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KBS 동물의 왕국, BBC Planet Earth 등에서 봤음직한, 이리보다 더 강력한 맹수와 싸우는 뱀의 민첩하고 현란한 움직임을 기억하는가? 온갖 맹수들처럼 욕망/정욕/탐심/이기/유혹/비방/비교/자랑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거룩의 순결을 지켜서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보다 더 지혜로와야 한다는 뜻이다.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은 세상 못지않게 지혜롭고 유능하라는 뜻이다. 세상에 나아가 크리스찬의 가치, 생명의 복음, 진리의 빛을 전하기 위하여, 거룩의 능력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이다. 복음전파의 일에 - 세상의 유능한 자들처럼 - 해야 할 바에 집중하여, 자기관리 철저하고, 사유하고, 분석하고, 깊게 연구하며, 전문적이고, 완성도 높게 일하라는 말씀이다. 국가 경제가 어려웠던 60, 70년대의 한국의 교회는 TV, 스피커, 환등기, OHP projector 등 첨단기자재를 도입하는데 어느 기관 보다도 앞섰다. 경제선진국들에서 파견된 선교단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국이 IT 강국이 된 현대에 와서는, 첨단기술, 정보통신을 수용하는 것에 교회가 많이 뒤쳐진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세상적 방법’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경직(硬直)이, 지체(遲滯)현상을 더 심화시키는 것 같다. 선진대학들은 AI를 활용하여 전문분야에서 해결능력을 향상시키는 교육 혁신을 이미 실행 중에 있다. 미국 조지아텍은, AI가 하드웨어를 설계/코딩하고 학생들은 검증 및 디버깅에 집중하여, 개발시간 단축과 설계의 정확도를 높이는 훈련을 한다. 하버드 의과대학은, 환자 수만명의 수십만장되는 엑스레이(X-ray), MRI, CT 영상을 AI가 판독하도록 하고, AI가 잡아낸 이상 징후를 인간 의사가 어떻게 검증하고 최종 판단해야 하는지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한다. 스탠포드 법학대학원은, AI가 방대한 증거 자료를 읽고 핵심을 요약하고, 학생과 함께 관련 판례를 찾도록 하여 승소 확률을 높이는 훈련을 한다. 한국의 신학대, 교회도 AI를 활용하여 어떻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거룩한 사유없이 습관적으로 반사적으로 판단하고 예전에 했던 방법에 안주하는 것이 오히려 비성경적이다. 관습과 형식의 틀에 교회를 가둔다면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요 8:32)"는 하나님 말씀에 불신앙이다. 세상의 지혜들을 활용하여 복음의 정수를 전하기에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면에, 우리가 전해야 할 실체, 복음의 메시지는 세상적 가치관, 현대인의 관심사에 영합하며 인본적인 관점/태도/사상과 자유롭고 담대하게 악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형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심각하게 되새겨볼 때이다. ‘Biblical Absolutes’ and ‘Freedom of Forms’ 010326 * 위 이미지는 "Freedom of Form"에 대한 장 자크 루소의 어록: "자유는 국가의 형태와 같은 고정된 틀에서가 아니라, 자유주권을 가진 국민의 마음에서 나온다." (The Social Contract, 1762)202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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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간만에 서울에 왔다. 고등 절친의 장녀 결혼식이 있어서다. 고교졸업 이후 영국 주재 떠날 때까지 자주 뭉쳤던 친구 셋과 덕담 나눌 요량으로 돌아갈 차표는 넉넉하게 늦은 시각으로 끊었다. 그런데 예식후 식사를 마치니 죄다 선약이 있다고 일어선다. '어쩐다? 여섯시간이나 남았는데...' 꽤나 많이 걸었다. 그 옛날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잠실의 아파트단지. 젊은 날 열정적으로 땀을 뿌리며 테니스 쳤던 코트. 가죽세무 카페트처럼 습기 먹은 낙엽들이 잔뜩 쌓인 길. 숨가쁘게 달렸던 그때의 스트레스와 푸념과 파란 꿈을 다 받아줬던 푸근한 모습 그대로다. 그러다가 이윽고 잠실역에 이르렀고. 롯데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무려 1시간 반이나 남았다. 그러나 무료하진 않았다. 많이 들려주시고 생각하게 해주신 분과 줄곧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신 말씀 적지 않을 수가 없다. 120625 ---------- [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 글을 쓰는 시간은 즐겁다. 특히 주신 말씀을 기록하는 시간은 늘 기쁘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살펴보고 콜론보다 세미콜론이 적합한지 글 쓴 맥락에 더 적확한 표현을 궁리하는 시간은 충분히 즐길만하다. 그렇게 해서 말쑥하게 단장된 글 한 편이 나온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어디 한 곳 체증되지 않고, 부사는 제 위치에서 제 할 일 하고 있는 지 형용사는 과하지 않은 지 점검하는 시간은 넉넉히 누릴만하다. “그대! 적은 대로 살고 있나?” 글 쓰는 이의 짧지 않은 삶에는 수많은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 그에 못지 않은 만큼 수많은 중단들이 있었고. 예기치 않은 사건과 힘 쑥 빠지게 하는 훼방으로 포기가 잇달아 속출하던 적도 적지 않았다. 이것들과 함께 동반하는 낙심과 좌절과 후회에 눌린 적도 많았다. 푸념, 불평, 분노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자기 안의 확신과 주변의 동조에 힘입어, 그 위에 핑계와 미움과 정죄를 배설해도 떳떳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Devil is in the detail. 삶의 사소한 조각 하나 하나 디테일에 경각하지 않고, 일거수 일투족 정신차려 깨어있지 않으면, 굶주려 우는 사자 세상임금 마귀 앞의 먹이다(벧전 5:8).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에서 유체이탈하여, 기록한 글과 들은 말씀과 읽은 말씀에 동감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삶은 위태롭다. 거대한 담론과 위대한 사상과 숭고한 비전이 이슈가 아니다.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반응하고 받고 베푸는 일상의 사소한 디테일에 생명의 경각이 달려있다. 하나님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1). “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 (1) Mies van der Rohe(1886-1969), German Architect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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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환히 비추는 날]햇살 환히 비추면 눈물이 난다. 한기에 움추린 뒷목을 따사로운 온기가 감싸오면 복받친 어깨가 들썩인다. 아픈게 일상이었는데 틀린게 정상이었는데 외롭고 쓸쓸한게 익숙한 매일이었는데 어둡고 비바람 세찬 날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푸르고 맑고 높은 하늘 눈부시게 햇살 환히 비추면 눈물이 난다. 111825 *사진: ‘햇살 좋은 날’, 박진성, ‘대전 아트페어 25’ 에서2025-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