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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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거름'과 같다“교회란 거름과 같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더럽고 악취를 풍기지만, 땅에 골고루 뿌려지면 세상을 비옥하게 한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고, 흩어져서 받은 은혜와 사랑 세상에 전하는데 에 있다. 은혜 받았다고 좋아라 자기들끼리 모여서 손뼉치며 기뻐하고, 어디 친교/친목회 클럽처럼 내부지향적 모임으로 오그라들면 안된다. 한 켠에 쌓아둔 냄새 나는 거름처럼, 이웃에게 칭송받기보다 사회에 악취를 풍기는 종교집단, 정치세력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053125 *사진: Luis Palau Jr. (November 27, 1934 – March 11, 2021), Argentine-American international Christian evangelist202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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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인사는 만국의 공통언어이다. 내가 오랜 기간 살아본 영국과 미국에서도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하면 이상한 것으로 느껴진다. ‘저 사람이 오늘 상태가 안좋은가?’ ‘혹시 나에게 안좋은 감정이라도..?’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 청소년, 특히 어릴수록 초등, 미취학아동들 교회에서도 인사를 안한다. 눈에 보이는 웃어른에게도 인사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 하나님께 경배를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상하간의 관계, 수평적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진지한 가르침과 훈육을 오랜 기간에 걸쳐 받아본 적이 없다. 오직 일류대 가면 모두가 손뼉치고, 성질이 좀 못돼도, 성격에 좀 모가 나도,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한다. 하지만 세상은 능력있고, 똑똑한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할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가치가 학벌과 지위와 돈으로 매겨지는 세태에 냄새 난다며 겉으로는 거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부자라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학벌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웃과 사회를 배려하고 품고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지에 그 인간의 고귀함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님의 속성은 '사랑' 이시다.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셨고, 그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존재이신 것이다. 인간의 참가치는 그와 같이, 이웃과 사회에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는데 있다. 교회 본질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나가서 이웃 영혼들을 품고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교회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이웃들과 온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칭송을 받게 되어있다.(행 2:46-47) 그런데 현대를 사는 부모들은 자식이 수학, 영어 잘 하기를 원하지, 남에게서 '사랑'받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해야 친구에게서 이웃에게서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정성을 다해 가르치지 않는다. 영국의 사립학교(중고등학교의 경우)는 학문을 가르치는 Classroom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성/인품/예절을 배우는 House로 나뉘어져 있다. Classroom는 같은 학년 남녀학생들이 한 곳에서 학문을 배우는 곳이지만, House는 각학년생들이 골고루 분포된 전학년생의 생활/학습 공동체이다. 여기에서는 공동체 조직에서의 질서와 예절, 인성을 엄격히 가르치며 몸으로 배우게 한다. 나에겐 일년 학비가 약 6-7천만원(school trip, 유니폼, 책 등 기타 학습관련비용 포함)이 소요되는 것도 경악스러웠지만, 큰 아들 때문에 Housemaster에 불림을 당한 적이 여러 차례 있어서 고통스러웠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학생의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다룬다.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 부모도 불려와 가열차게 한 소리 듣는다. 모두가 타당하고 맞는 말이다. 어느날 또 Housemaster로부터 콜을 받았다. 그토록 눈꼽 뗄 새도 없이 바쁜 주재원의 일과 중에, 헉헉 거리며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니… 이번엔 내 아들이 체육시간에 하급생 체육복을 빼앗아 입고 나갔다는 것이다. 업무로 복귀하는 차안에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초등 5학년을 마치고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된 아이라, 왜 그런지 대충 이해가 갔다. 한국 초등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비슷한 경험을 당해봤기에 별 죄의식을 못느끼고 행동한 것 같았다. “난, 너보다 학년이 높아!” 비뚤어진 서열의식이 그런 행동을 초래한 것이다. 권위에 대한 잘못된 의식이 죄를 죄로 못느끼게 한 것이다. 난 너보다 높아! 내가 너보다 나아! 난 너보다 많은 것을 소유할 능력이 있어! 우리 사회가, 젊을수록 어릴수록 – 휘황찬란한 불빛을 향해 모여드는 불나방처럼 – 병든 서열의식에 몰입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웃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보다…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되기를 몸부림치면서 사모하는 것 같아 슬프다. 그 영국의 사립학교에 방학이 시작되면, 부모가 보낸 헬기를 타고 교정을 떠나는 거부의 자녀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늘 겸손하고 상냥하고 진실되어 보인다. 상대에게 대하는 태도에 가식이 없다. 피부 거무잡잡한 이방인 티 물씬 나는 나에게도 - 처음 보는 사이인데 -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극진하게 인사한다. 높은 상류층일수록, 돈 많은 부자 가문일수록, 평범하고 천한 이에게 대하는 태도는 늘 겸손하다. 나도 오랜 세월 런던 도심지에서 레스토랑업을 해본 경험이 있어 잘 안다. 인근 골드만삭스등 굴지의 금융회사, 딜로이트등 유명 컨설팅회사, 글로벌 로펌에 다니는 직장인들 중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스페인,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명망있는 가문 출신들이 많다. 그들이 내 아래 종업원들에게 대하는 언행을 보면 나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겸손하고 남을 존중한다. 한국의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비정상적 의식이 적지않게 작용하는 것 같다. 직분이 높을수록 상석에 앉기를 즐겨하고, 직분이 높은 자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런 것들보다, 믿음의 성숙도, 하나님과 관계의 깊이, 믿음의 말과 행실의 일치에 그 사람의 고결함이 있는 것 아닌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4:12) 경건의 능력은, 그 사람의 지식과 소유와 신분에 있지 않다. 경건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과 살아있는 건강한 관계에 있다. 날이 갈수록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세태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토록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가 완연한 오늘, 예수께서 거듭 당부하신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052325 *사진: 내 큰아들이 다녔던 그 학교202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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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향한 정서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정글의 맹수는 이런 감정이 없다. 자기 스스로 잡아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면, 가차없이 부모품을 떠난다. 공중의 새도 성년의 때가 되면, 미련없이 둥지를 떠난다. 가정집의 강아지도 다른집으로 분양되면, 그때부터 자기를 먹여주는 인간주인이 바로 부모가 된다. 그동안 젖물리며 핱아주고 품어줬던 어미는 온데간데 없다. 인간만이 부모를 향한 감정과 상념과 사랑이 있다. 세상의 영은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에게서 이 존귀한 마음, 인간의 양심을 빼앗으려 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딤후 3:1-2) 어버이주간이래서 특별히 잘 할 일이 아니다. 날 때부터 품게하셨던 이 존귀한 마음, 항상 붙들어야 한다. 두 양친을 이미 잃은 나로써는 더욱 깨닫고 경각이 되는 마음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2) 051125 *사진설명: 오늘 교회청년에게서 받은 카네이션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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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사는 이의 책무‘함량미달’ 정치지도자가 일으킨 소란을 동일인물 ‘법기술자’가 난장(亂場)으로 악화시킨 모든 과정을 통해 매맞고 피멍든 피해자는 바로… 두 갈래로 찟겨진 국민의 민심이다. 정신차리고 한마음으로 매진해도 힘겨운 형국에 조국의 명운이 이토록 위태로운데 국론의 찢어진 상채기는 깊기만 하다. 국가 경제의 성장동력은 꺼져가고 비혼주의 청년들은 점점 늘어가고 젊은 부부들은 자손을 낳지 않으려하고 국가는 힘빠진 노령국가로 치닫고 있다. 거대국가 중국이, 조국의 자랑 IT산업 등 전방위로 위압하고 있는 상황이 Fact이건만 상대를 경계하고 더욱 분발할 때가 바로 지금인데… 오히려 근거없는 음모설로 상대를 매도하고 여론을 호도하며 국력을 소진케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극심한 분열과 정치적 혼돈을 극복하며 지금까지 선진의 흘린 숭고한 피와 땀으로 일궈낸 조국의 신화적 부흥을 지켜내고 다시 일어서는데 허용된 시간이 많지 않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시간을 아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경제/정치/국방/외교적 상황들이 악질(惡質)처럼 만만치않다. 시간을 아끼려면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한 집중을 훼방하는 ‘산만’을 제거해야한다. 차기 국가지도자는, 지금 대한민국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의제를 도출해야 한다. 최우선 순위에 놓인 문제를 풀기위한 여정의 발길을 내딛는데 또 다른 중대하고 시급한 2순위, 3순위 의제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2순위, 3순위 의제 채택으로 이익을 기대했던 국민은 1순위 대의를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젠틀한 성숙미가 있어야 한다. 법기술자의 요설(妖說)로 시간이 너무 많이 탕진되었다. 하나님께서 국가지도자를 세우신 목적은 분명하다. 선을 베풀고 악을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지켜지도록 ‘다스리는 권세’를 세우신 것이다 (롬 13:3-4). 이러한 권세를 위임받은 자로서의 명분을 잊고, 오히려 백성을 근심케하는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부여한 권위를 상실한 것이다. 그가 위법한 것은 여러 보도와 영상과 진술을 통해서 – 밝은 대낮에 해가 떠있는 사실처럼 – 명약관화(明若觀火)한데도 그의 ‘탄핵’을 지켜보기까지 왜 이리도 길고, 밤잠 설치며, 숨죽여 왔는지 모를 일이다. 더 모를 일은 국민의 40%가 그의 탄핵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럴싸한 요설이 단단히 한몫 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반도 남반에서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책무는 바로 ‘분별’이다. 신자나 비신자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분별이다.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는, 물찬 제비처럼 매끈한 날이 세워진 수많은 메시지 중에서 ‘진실’을, 모두가 ‘정의’를 목청껏 부르짖어 ‘정의’가 홍수처럼 사방에서 울려나 너덜너덜해진 지금 이때… 참 정의를 구별하는 그 '분별력' 말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6-17) 040525 * Photo from: www.ministrytostate.org/20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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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이웃이 교회에게 바란다“교회는 자기 구성원이 아닌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이다.”(William Temple, 영국성공회 대주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도록 계획하셨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심지어 그들을 사로잡아간 원수의 나라, 적국 바벨론에 가서도 그 나라 백성들을 위해 평안을 구하라고 명하셨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렘 29:7)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신약에 이르러서도 동일하며, 세세토록 영원무궁 변함이 없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지만, 신앙수준이 성숙한 성도일수록 ‘사회봉사’에 대한 교회사역의 중요도를 가장 낮게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목회데이터연구소, 한국교회 진단 조사: 전국 만 19세 이상 개신교인 남녀 1000명 대상, 23.11.7~11.15; 아래 사진 참조). 위에 언급한 Temple 대주교의 선포가 무색할 정도로, 교회는 날이 갈수록 내부지향적, 자기 구성원을 위한 클럽으로 오므라지는 것같아 안타깝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그리스도 입문층’ 즉 불신자의 생각에 가장 가깝다고 인식되는 부류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교회사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우리 이웃들은 교회에게 사회를 위해 봉사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돌과 같이 단단한 그들의 마음에 복음이 잘 수용되게 하려면 각 교회는 그들의 생각과 기대를 존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교회는 그들의 칭송 받기를 늘 의식하고 사모해야 한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050225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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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적당한 결핍과 고난 속에서 성장한다큰 아들 두살때, 아장아장 걷다가 걸음걸이가 안정화되고 뜀박질에 한창 재미붙일때... 가족 셋이 산책을 나갔다. 그러다 자기뜻을 안받아주면 길바닥에 누워 시위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는 인근 야산 산책길에서 어떤 일로 심사가 뒤틀렸는지 산길 땅바닥에 누워 울면서 땡깡을 또 부린다. 나는, 달려가서 안아주며 달래보려는 아내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놔두고 둘만 산길을 내려와,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거목나무 뒤에 숨어 아들이 어떻게 하는 지 지켜보았다. 시야에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자, 눈물 뚝.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부모가 내려왔던 길을 쏜살같이 달음박질하면서 따라 내려온다. 그 사건이후, 길바닥에 누워 시위하는 행태는 깨끗이 없어졌다. 교회에서 보면 요즘 젊은 엄마, 아빠들 참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돌본다.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여 돌보는지, 주일성수 규칙적으로 잘하던 부부가 출산하고 한동안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일도 적지않게 목격한다. 영국에서 주재시절. 경제적으로 모자람없는 윤택한 시기였다. 회사에서 렌트비 내어주는 큰집에서 살고, 회사에서 학비를 지불해주기에 꽤 좋고 비싼 사립학교에 아이들 보내고… 그러다보니 물질의 풍요속에서 자녀들의 아끼고 저축하는 마인드는 날이 갈수록 사그러드는 것 같아 염려스러웠다. 테스코에 가서 쇼핑한 물건 지불하려고 계산대에서 줄을 서면, 마지막 충동구매를 부추키는 아이템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아이들은 절대 조용히 있지 않는다. 집에 축구공이 이미 두세개가 나뒹굴고 있는데, 매끄럽게 윤이 나는 새공을 사달라고 또 집는다. 안사주면 땡깡부리는 아이들의 시위에 주눅든 아내는 쇼핑 아이템에 그것을 사뿐히 올려 놓는다. ‘저러면 안돼는데…’ ‘저러면 안돼는데…’ ‘경제관념, 절약정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가르쳐야 하는데…’ 나는 속으로만 읊조릴 뿐, 뭐라고 타이를 계제(階梯)가 안된다. 주변 사방팔방 낯선 영국인의 시선들에 압도되어있고, 이미 이런 저런 아빠의 잔소리에 “영국에선 안그래요!”의 항변과 함께 나만 왕따되는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회사를 나와 내 사업(한국음식업)을 시작했다. 투자비도 많이 들었지만 수입도 생각보다 약해서 경제적으로 위축되었다. 인건비를 줄이다보니 아이들도 나와 파트타임으로 일을 돕기 시작했다. 모자람과 결핍속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고, 자기들 스스로 돈을 벌어보고, 용돈을 아껴쓰다 보니, 이들을 향한 나의 묵은 기도가 저절로 응답 되었다. 뭐 하나 사도 허투루 구매하지 않고, 거들떠 보지 않았던 중고제품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결핍을 경험해봐야, 고난을 겪어봐야 평소 잊고 살았던 귀중한 것, 소중한 존재에 감사함을 갖게 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꽃은 달콤한 설탕밭에서 피지 않는다. 썪은 낙엽, 짐승의 배설물, 곤충의 사체들로 부패된 흙속에서 피어난다. “야단맞지 않고 자라는 세대”. 훈계없고, 꾸지람없는 세대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부숴지고 있다. ‘다정한 부모’라는 환상이 오히려 아이들을 망친다. 부모들의 세심한 배려와 극진한 돌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아이들이 친구 사귀는 일부터 등교시간, 커서도 출근시간 지키는 것까지 기본적인 일을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불안정하고 무기력하고 자기만 아는 '빈껍데기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감정존중 양육'과 '친구같은 부모'라는 환상아래 “안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다정다감한 부모'가 되겠다며 체벌하지 않는다. 스스로 부모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통제권을 잃었고, 자녀에게 약자로 전락했다.[1] “내가 키우는 내 아이는 절대 스트레스 받으면 안돼!” 일상에서 아이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부모들이 먼저 막아서고 나선다. 하지만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은 오히려 적당한 스트레스와 결핍과 좌절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떨어져봐야 내게 “날개가 있음”을 깨닫고 비로소 날 수 있다. 042825 [1] Abigail Shrier , Bad Therapy: Why the Kids Aren't Growing Up (New York: Sentinel, 2024)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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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의지하는가?고통의 시간에 멘탈마저 무너지면.. 건강치 못한 것에 탐닉한다. 술, 사치, 음욕, 마약…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잘 해주는 자에게서 헤어나질 못한다. 쉽게 가스라이팅 당한다.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자는... 의지할 대상이 있기때문이다. 절대 주권자를 믿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력이 특출나게 강한 경우이다. 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족, 친구가 위안은 될지언정 문제해결의 즉답이 되기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면을 고려하면 자신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자는 훌륭하다. 스스로 훌륭하기에 복음이 잘 안들어간다. 오히려 삶의 구렁텅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자는 비교적 쉽게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철썩같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고통의 시간을 극복해낸 자아에 대한 신뢰가 있다. 대견한 자신을 향한 바위같이 굳건해진 ‘자기의’가 바로 견고한 진이 되어, 절대 주권자를 의지해야될 당위성을 떳떳하고 늠름하게 거부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세상 어느 누구가 자신의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가? 바로 당장 내일 일도 모를 일이다. 나이의 무게가 묵직해질수록 인생 파도의 쓰나미앞에서 자신의 알량한 경험/학식/지위/재력/인맥, 이 모든 것의 무력함을 – 머큐로크롬 소독액이 찢어진 상처를 파고드는 것처럼 – 생생하게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세월이 인간에게 주는 지혜는, 자신이 자신의 모든 것으로도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더 크고, 더 진지하고, 더 심각해지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누군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겸손함’이 한 인간을 성숙케 한다. 고난의 때에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고난을 이겨내는 참 길일수도, 오히려 자기의 성한 발을 부러트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잠 25:19) 믿음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에 눈을 뜨고 자신 스스로 그 문제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무기력함을 깨달아 그 위경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참 권능자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를 대치하려는 가짜 신, 우상 또는 인간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인생의 문제를 더욱 험악하게 만들 뿐이다. 042725202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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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는미국의 전체 국부에서, 미국 부자 0.1%가 차지하는 부의 비율이 무려 13.8%에 이른다고 한다(1990년 8.5%). 2024년 한 해동안, Elon Musk, Jeff Bezos, Mark Zuckerberg 등 상위 0.00001%에 해당하는 초부자들 패밀리(19개 가구)가 소유한 부는 1조 달러가 늘어, 전체 국부의 1.8%에 육박하여 2.6조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상 https://www.wsj.com/.../1-trillion-richest-families...) 극심한 부의 편중화현상은 미국 못지않게 한국도 끔찍하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무정하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디모데후서 3:1-5에서 경고한 말세의 현상이 완연해진 때이다. 우리안에서 선한 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선을 베풀며 살라고 거듭 – 애원하시듯 - 강조하신다.(사 1:17; 잠 19:17; 약 1:27)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그러나 세상은 이를 비웃으며 더욱 더 가열차게 정반대로 치닫고 있다. 가난한 자, 부당함을 강요받는 자, 연약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자… 사회는 이들을 외면할뿐만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손가락질을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뻔뻔하게 꼿꼿이 뻗쳐대고 있다. 이런 참혹한 추세에 교회다니는 – 부가 가져다주는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 종교인들이 가세하고 있다는 현실에 가뿐 탄식이 나올 뿐이다. 가난하고 연약하고 사회의 그늘에서 한숨짓는 자에게 동정하는 의견이 나오면, ‘좌파’, ‘공산주의’ 운운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적그리도적 발상이다. 동성애 근절이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말세의 때가 다가올수록 완연해질 사회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집회하고 물리력으로 막아섬으로써 다소 시기는 늦출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말세의 징후가 완연해질수록 당연히 임박할 하나님의 섭리앞에 맞서려는 어리석은 구호를 분별해야 한다. 참혹하고 참담한 일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갈수록, 우리가 할 바는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맹목적 순종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지구인에게 임할 그날이 덫과 같이 갑작스레 올 것을 예비하고 주님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4-36) 042525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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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사람과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슬림화한 지금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무 등… 하나님의 작품, 자연과 교감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엊그제 방문했던 시인의 기념관. 학창시절 애송했던 ‘서시’앞에 섰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의 감정을 이입해본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041525202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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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향한 자발적 자기격리‘고독’은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물나게 겪게 하심으로써 그 참맛을 곰곰 음미하도록 단련하신다. 초대교회 사막 교부들이 인정과 존경의 시선이 가득찬 고향을 버려두고 처절하게 외로운 사막으로 왜 자신을 격리했는지 깨닫게 하신다. 그들에게 고독은, 진리를 향한 영적 몸부림, 자발적 자기격리였다. 나의 마음과 관심을 빼앗았던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집착, 내게 위로와 칭찬을 주고 격려가 되었던 벗들과의 만남, 가슴 뭉클하게 힘이 되고 살맛나게 해줬던 수많은 관계들… 이들을 향한 애착과 집착은 미련없이 내려놓고 그분의 임재에 대한 타오르는 갈구로 자발적 의지에서 비롯된 ‘고독’은 즐길만하다. 고독과 적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그분과의 대화가 익어간다. 고독은, 그분과 대면을 향한 영적 몸부림. 자발적 자기격리이다. "Solitude is voluntary isolation toward God." 이 거룩한 ‘자기격리’의 시간을 갈망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영성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19년전 영국 주재원으로 파견되었을 때 어느 새벽, 모두가 집으로 가고 성전 등은 다 소등되고… 그때 서럽도록 차가운 나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신 그의 입김이 너무도 그립다. 040725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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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염려하지말고오늘 저녁예배를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집에 꼭 들려달라고 전화하셨던 집사님 생각이 났다. 댁에 갔더니만, “호박죽을 끓였는데 ‘목사님’ 생각이 나서 조금 챙겼다”고 하시며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호박죽을 내어 오신다. 그러시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으니 잘 될 것이라”고 격려하신다. (실은 1년전 ‘강아지 학대’ 사건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다.) ‘이번주 토요일 점심까지 밖에서 식사 일정으로 꽉 찼는데…’ ‘언제 이걸 먹나?’ ‘토요일 저녁까지 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보관하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집에 오는데,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몰려든다. 1년반 전에 낯선 창원땅에 왔을 때, 끼니 제때 챙겨먹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만남들을 허락하셨고, 복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끼니는 저절로 해결되게 하셨다. 발달지체아동센터, 메밀국수집, 전주콩나물국밥집, 구포국수집, 사림동기사식당, 가정식백반집… 집처럼, 누님처럼, 여동생처럼… 나를 생각해주시고 끼니를 챙겨주시는 분들이 이리도 창원에 꽉 차게 해주셨다. 이미 떡과 물을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라(왕상 17:2-6). 역시 하나님 말씀이 지극히 맞다. 괜한 걱정했었다.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040125 *사진: 위에 얘기한 바로 그 호박죽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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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길 편의점 간판처럼비록 느끼지 못해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눈앞 큼직한 산처럼 떠억 버티고 있는 고난의 벽에 놀라 기도의 숨조차 멈춰버릴 때가 있다.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러,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을(눅 5:31-32) 보지 못했다면 ‘고난의 때’가 절호의 기회이다. 내가 병약하고 죄악으로 눌린 짐에 힘겨워 할 때… 비바람은 커녕 살랑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양어깨에 머금은 따사로운 햇살이 밀어주고 청명한 하늘이 환하게 인도해주는 산행길에선 ‘피난대피소’가 눈에 띄질 않는다. 정오에서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어두워지고 소낙비는 세찬 바람과 합세하며 맹공을 퍼붓고 경악으로 가득 찬 등산길에서 ‘대피소’ 세 글자가 골목 밤길을 환하게 비추는 편의점 간판처럼 눈에 확 들어온다. 고난의 어둔 터널에 갇혀 있을 때, 우린 자주 자신의 실수, 한계, 실망, 좌절을 목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르고 연약함을 묵상하며 한숨을 내쉰다. 설상가상 상황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기울어져만 가고… 한숨은, 자신 안에 꼬인 창자를 토해낼 정도로 깊은 탄식이 되어 뿜어져 나온다. ‘이게 인생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버텨야지!’ 내면의 구호와 함께 ‘믿음’이란 두 글자를 수도 없이 되뇌며 두 손 땅에 짚고 힘없던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일어난다. .. .. ‘이게 아닌데…’ 박제된 화석처럼 내가 토로했던 믿음의 구호로는 실제로 힘이 생기질 않는다. 생기가 여전히 없다. 자신안에 습관화된 내면의 구호로 버틸 일이 아니다. 인내로 혀를 깨물고 일어나 상황을 꾸역꾸역 버틸 일이 아니다. 부르짖을 일이다. 한 장 크리넥스 티슈처럼 연약한 자신의 바닥을 알았으니, 자신의 온 몸과 혼과 영을 그분께 맡길 일이다.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고, 부르짖는 자에게 더욱 큰 일을 보이시고 도우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할 일이다. “강헌아! 하나님의 은혜를 너 같이 얻은 아들이 누구냐?”(신 33:29) 이 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 믿음으로 부르짖으라고 내게 세찬 바람과 퍼붓는 소나기와 어둠의 불확실을 허락하셨다. 그분께서 내게 허락하신 고난이 - 우리 동네 사림동 골목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연두색 네온 ‘CU’간판 처럼 – 나를 ‘돕는 방패’시요, 나를 위해 일하시는 ‘영광의 칼’을 환하게 비춘다. 033025 *사진: 우리 동네 밤길을 환히 비취는 씨유편의점2025-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