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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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숨쉬듯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내일은 부활절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생명의 부활로 사망권세를 굴복시켰다. 절망의 어둠을 깨고 소망의 빛으로 나왔다.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종료가 아님이 증명됐다. 부활하시고 위 모든 것을 몸소 증명하신 그분을 따르는 삶은, 단지 우리가 죽으면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확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 미래의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 소망은 그 믿음이 현재의 삶에서 살아 왕성하게 역동하는 것에 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싫은 것 미운 것 많고, 아픔과 고뇌가 쉴 새 없이 요동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에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5-16)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전하고 신실하고 진실하며 천국 백성답게 자부심 가지고 당당하게 천국 시민권을 만끽하는 삶에 있다. 사려 깊고, 배려하며, 약자의 아픔에 민감하며, 친절하며, 용납하며, 용서하며… 자신의 주관과 이기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포스트모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짓밟고 깔아 뭉개는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사랑하며 지키며,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보다 장차 맞이할 영원한 상급을 생각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그러한 삶 말이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금욕과 절제의 기간이며, 고난주간은 그 사순절의 마지막 1주간을 의미한다. 이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짧은 기간의 금식에서 시작하여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40일로 정착됐다. ‘사순절’은 그리스어로 Τεσσαρακοστή (Tessarakostē), 40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Lent’라 하는데, 고대 앵글로색슨어 ‘lencten’(봄철)’에서 유래해 계절적 의미를 반영한다. 참고로 40은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순절은 성경적이라기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사순절하면 경건하고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이 발전하여 중세 수도원의 전통에 의해 ‘절제와 금욕’의 기간으로 자리 잡았다.(6세기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참조) 이 전통이 더 나아가, 평신도 중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주고, 날카로운 쇠못을 박은 채찍질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순절 기간을 보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발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긴 후, 고기와 40일간 이별한다는 의식, 카니발이 유래되기도 했다(1). 사순절이 시작되는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 직전 일주일간 열리는 카니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날, ‘Fat Tuesday’로써 육욕을 기름지게 채우는 최고 절정의 날이다. 사순절을 준비한답시고, 특히 남미와 유럽에서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탕한 향락과 쾌락, 성적 퇴폐에 이르기까지 치닫고 있다. 어차피 회개하고 자중할 시간을 가질 터이니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즐기고 보자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교회의 형식적/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을 외쳤던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정신을 따랐던 존 캘빈은 “사순절은 중세교회의 폐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2)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우리 스스로 피 흘리기를 원하실까? 온갖 탐욕을 드러내며 용서받아야 할 죄를 산더미처럼 쌓는 인간들의 축제를 어떻게 보실까? 특별고난주간이라고 평소에는 담 쌓고 살던 새벽기도로 고행하며, 뼈가 드러나며 살이 찢긴 채 죽으신 예수의 형상을 상상하며 얼굴 찡그리며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어떻게 보실까? 어느 시골할머니에 대한 한 선교사의 일화이다. 시골길을 차로 달리던 그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승차한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지 않은 채 힘들게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 차에 타셨으니 품에 안은 짐도 내려놓으시죠?” “나를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찌 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겠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미 이루신 바를 믿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부활절을 향한 시간들은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시간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과 고행으로 꽉 채워진 시간이 아니다. 종교적 관행이 요구하는 짐을 억지로 지는 기간이 되어선 안된다. 고행, 절제, 금욕 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 중요하다. 새 피조물이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친숙했던 욕망과 이기심은 멀어진다. 익숙지않은 기도와 금식을 참고 버티며 고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 생명이 된 기쁨으로 주를 향한 감사의 찬미와 주 안에 있는 나의 소망이 절로 고백되어지는 시간이다.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은, 일년에 40일, 또는 고난주간 7일간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숨을 쉬며 살아가듯 평생 지키고 호흡해야 될 신자의 자연스런 삶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1) Carnival(카니발)은 라틴어 Carne(카르네; 살, 고기), Vale(발레; 작별)에서 유래되어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이다. (2) John Calvin, 기독교강요, IV. xii 21 *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339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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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야, 고독 겪어나 봤나?]맞아. 60대 외롭고 힘들다. 70쯤 되는 형님, 누님들은 고독을 버텨본 경험이 있으나… 우리 새내기 60대 초보는 깊고 희뿌연 고독의 안개 속 겪어나 봤어야지. 앞이 안보여. 평생 열심히 일하고 애들 키우고 바쁘게 지내다가, 문득 맞게 된 고독. 불청객 이 놈한테 한 번 걸리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안 떨어진다. 그러니 도리없지. 이른 아침부터 저녁, 심야에까지 징하고 징할 정도로 안떨어지는 모난 친구처럼 살살 달래며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지. 다들 떠나고 나 혼자 남은 외로운 황혼기에 곁에 있어주는 벗이라 생각하고 고맙다고 해야할지? 여기 실버타운에 와보니까… 말 없고 행동은 느리지만 70대 이상 시니어분들은 이미 이것을 터득하신 것 같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을 깨달은 어르신처럼 삶에 고요함이 느껴져. 아직 고독을 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60대 분들은, 관조의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임박한 소나기를 맞이 할 새들처럼 액티브하지만 평온함은 안느껴져. '수선화' 하면 떠오르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아름다운 시가 있어.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v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워즈워스는 영국의 Lake District 호수길을 고독하게 걷고 있었지. 자신을 언덕 위 떠다니는 '구름'에 비유하며 터벅터벅 외로운 시인의 길이였지. 그러다 갑자기 호숫가 나무 아래서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수선화'를 발견하지. 그리고 그의 ‘외로움’은 곧 '기쁨'으로, 그 ‘기쁨’은 아름다운 시로 승화되지. 고운 바람결 속, 꽃잎을 파들거리며 춤추는 황금빛 수선화처럼 오늘처럼 찬란한 봄날의 기지개가 경쾌한 역동과 생명력이 되길 바래~ 시인의 고독이 위대한 시를 잉태했듯이 고독은 우리에게 집중할 것에 집중케하고 몰입할 것에 몰입케하는 심술궃지만 사귀어보면 쓸모도 있는 괜찮은 친구인 것 같아. Pleasant days in the Lord! 032926 (노년 초입에 대면한 ‘고독’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친구에게 건넨 글) *사진: Lake District의 Grasmere에 있는 워즈워스 집, ‘Dove Cottage’를 방문했을 때. 시인의 고독이 처절히 느껴질 정도로 안은 좁고 황량하고 볼품없었다. 누이 Dorothy Wordsworth가 시커먼 장작연기 내뿜으며 오빠의 끼니를 챙겼을 화덕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쌀쌀하게 앉아있다. 벌써 20년전…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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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근심이 깊을수록 소망은 선명해지고]"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굽이굽이 흐르는 ‘아리랑’의 선율은 단순히 애끊는 비탄의 노래가 아니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발바닥 피멍이 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고갯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님을 향한 애틋함이 드러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얼핏 이 가사는 떠나간 이를 향한 원망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애절한 사랑의 역설이 담겨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책(下策)으로 여겨진다. "제발 가지 마세요. 당신 없으면 난 죽어요!"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대신, “나 없이는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만큼 당신과 나는 하나이기에, 당신은 못 견디고 돌아올거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 즉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님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노래한다. 정말로 떠나간 상대가 미워서 망하기를 바란다면 "천벌 받아라", "죽어버려라"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발병'날 것이라고 표현한다. 발병은 생명에 위태로운 병이 아니다. 잠시 멈춰 쉬어야 할 상태이다. 십 리(약 4km)면 마을 어귀를 겨우 벗어난 거리이다. 나도 산책 겸 조깅 겸, 일상 중에 자주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거리이다. 거기서 발이 아파 멈춰 선다면, 상대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생각하게 된다. ‘발병’은 가던 길을 멈춰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가 어디인지? 곰곰이 숙고하게 하는 고마운 기회이다.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 아리랑 고갯길을 바라보며 님이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여인처럼 - 주님의 간절한 염원이다.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 삶에 찾아온 ‘고통’과 ‘고난’이라는 ‘발병’은, 더 먼 길로 가서 길을 잃기 전에 우리를 멈춰 세우시는 주님의 거룩한 간섭이다. 마음에 통증이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내가 있어야 될 ‘원래 그 자리’가 어딘지 생각하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은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가, 양들이 살 터전을 벗어나지 않도록 높게 펜.스.를 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펜스 주변엔 얼씬 거리지 말라고 담장을 뒤덮은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일상중 겪는 아픔과 시련은 주님 주신 ‘계명’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계명을 주신 주님의 품을 상기하도록 일깨운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세상은 근심을 피하려하고 근심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단지 안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시지 않는다. 고통, 근심 따위 안좋은 것을 좋은 것 - 기쁨과 소망 –으로 변.하.게. 하신다. 주님은 단지 슬픔을 없애버리고 다른 기쁨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아리랑 노래도, 애절함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승화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게 만드는 그 '발병'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비로소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되는 은혜의 지점이다. 내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교만이 꺾이는 그 아픈 자리에서, 역설적이게도 주님 은혜의 빛은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소망으로 치환된다. 시련이 깊을수록 소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이전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진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임한 질병이나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시야를 주님께 집중토록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고통의 병환 중에서 어떻게든 낫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나사로에게 임한 병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4) 우리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아닌가(사 43:7)?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분께 어떻게 해야 영광을 드릴지를 알 수 있다. 고난 중에 닥친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인 우리들도, 세상에 속하지않고 주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 됨에 있다.(요 17:11) 십 리도 못가서 돌아올 님과 여인이 하나인 것처럼… 032726 *image fr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https://open.spotify.com/album/3dz6pMBPL9Lbl3ZHmg40LD?uid=977893005025f0cf129e&uri=spotify%3Atrack%3A1sIBQyK6ggfy1ccBB1mODe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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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20-23)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뵈옵고자 하니, 예수님은 상황이나 맥락에 맞지 않게 들리는 뜬금없는 말씀을 하신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윗 구절에서 ‘헬라인’의 그리스원어 표현은Ἕλληνές(헬레네스)이다. 즉 헬라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뵙고자 온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헬라파 유대인은Ἑλληνισταί(헬레니스타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해외에 사는 유대 혈통으로서, 헬라인처럼 헬라어를 말하고 헬라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사는 자들을 일컫는다. 마치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사람 혈통이지만 미국사람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아닌 완전히 다른 민족, 이방인인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주님의 시각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는 그분의 일성(一聲)은, 이제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로 타국에까지 즉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위에서 ‘한 알의 밀”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가 죽으심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온 열방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주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신 말씀을 제 마음 깊숙이 새깁니다. 내 안의 교만과 자아와 이기를 내려놓고, 이들이 썩어져 주님처럼 밀알의 삶을 살기를 결단합니다. 주님 비춰주신 생명이 빛이 저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031326 *관련된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kmwZyXs5j3c **image from https://sbcbeacon.org/recorded-sermons-services/(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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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자유, 진정한 자유]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문장에서 쓰인 헬라어 ‘자유’는 ἐλευθερία(엘루세리아)이다. 이 단어가 의미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정욕에 눌려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반면에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자유는 개인의 독립과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외부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반면에 성경적 자유, 즉 ‘엘루세리아’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함으로써 옳은 일을 하게 한다. 이렇게 옳은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상태를 팀 켈러는 ‘Fitness’ for a purpose라고 표현하며,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명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누리는 ‘자유’는,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연주하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유는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규칙(악보)대로 연주할 수 있는 실력과 정서와 작곡자의 의도와 교감할 수 있는 감성을 배양할 때까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하고 훈련에 몰입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때, ‘Fitness for a play’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되어 물 속을 벗어나, 들로 길바닥으로 나다니는 물고기는 바로 죽고 만다. 물 안에서 그의 행동반경이 제한되어있을 때에만 물 속에 있는 산소를 힘차게 들이마시고 자기 마음껏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에게는 공기 속 산소는 무용지물이다.(1) 진정한 자유는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계명의 말씀이 주어진 상태이다. 즉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 진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반면에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외부의 주인 또는 외부로부터의 외압과 간섭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진리의 말씀에 거하는 것에 있다고 하신다. 우리 현대인들은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고, 내 원하는 것을 행하고 성취하며 사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이러한 '방종'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기차가 궤도 위를 달릴 때에 가장 안전하게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삶도 진리의 말씀이라는 궤도 위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형통한 것이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즉 자신이 부화되었던 원래의 장소 - 물 속에 있을 때 - 가장 자유롭게 숨쉬며 물고기 임을 만끽하며 누리고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인간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그 아름답고 고귀한 “참 좋았더라!”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차갑고 무거운 계명을 지켜야 되는 짐이 아니라… 진리라는 울타리에 갇혀진 제약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명과 평강과 희락이다. 022726 (1) Tim Keller, The Reason for God (London: Hodder & Stoughton, 2008), pp 45-47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2x8wR3bHrE&t=827s 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uid=226 **image from https://www.facebook.com/thesciencepulse/photos/fish-pain-research-has-increasingly-focused-on-two-connected-ideas-nociception-d/1342886897882342/ (비영리적 목적으로 사용)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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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관계이다]영화배우 유해진의 고백이다. 늦은 나이 26세에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에 입학한 그는, 평생 연기생활에 중요한 획을 긋는 깨우침을 얻는다. 연기무대에서 감독이 “몇 발자국 더 가라”면 더 가고, “고개를 더 숙여봐”하면 더 숙이고… 감독의 디테일한 지시 하나 하나에 충실하며, 자신의 연기에 주눅이 들었던 그였다. 어느 연기 실습시간. 상대 여배우앞에 섰다. 아무 얘기가 없었다. 교수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어떻게 해요?” 그가 물었다. 교수가 대답한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 섰으면, 뭘하고 싶어?” 막혔던 하늘문이 활짝 열린 순간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무얼 하고 싶은가? 목사님께서 강조하셨던 말씀 상기하려 하지말고… 어제 들었던 성경말씀 찾지말고… 암송했던 성경구절 놔두고… 그대, 주님 앞에서 뭐라 말하고 싶은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 33:11) 믿음은 대상을 향한 주목과 그와의 관계 속에서 역동하는 상호작용이다. 020226 *Image from: https://biblestudybooksglobal.c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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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숙사모와 대전 새누리교회]"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안이숙사모가 남기신 명언이다. 고난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지금. 20년전 읽었던 안이숙 여사의 저서『죽으면 죽으리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의 처절하며 찬란한 신앙의 기록이다. "가장 약한 자를 통해 가장 강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고난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순간,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평양의 평범한 교사였던 안이숙은 일제의 강요 아래 모든 국민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다. 남들이 눈치를 보며 타협할 때,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평탄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나의 신랑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고백과 함께 그녀는 일본의 심장부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신사참배의 부당함을 선포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전설적인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과 헤어지고,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소망을 놓치 않으며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주님, 제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죽겠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이 책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은… 형무소 안에서의 처철한 고문과 고통으로 가득 찬 절망적인 장소를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6년의 옥고생활동안, 손발이 묶이고 온몸이 짓무르는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옆방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녀의 온유함과 강직함에 감동한 흉악범들과 일본인 간수들 마저 하나둘 변화되기 시작한다. 1945년 8월 15일, 사형 집행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기적처럼 해방이 찾아온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세상에 참빛을 전하며 여생을 값지게 보낸다. “살을 파고드는 냉기, 얼음판이 된 감옥” 안이숙 사모의 옥고 생활 중 가장 처참했던 상황을 꼽으라면… 영하 수십 도를 넘나드는 평양의 겨울, 난방 시설 하나 없는 독방은 거대한 얼음 동굴과 같았다. "내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홑이불 한 장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내 살점은 바닥과 달라붙어 얼어버렸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혔으나 그 피마저 금세 고드름이 되었다." 그녀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밤새도록 제자리 걸음을 걷거나, 정신을 잃지 않으려 찬송을 불렀다. 발가락은 동상으로 썩어 들어갔고, 구더기가 그 살점을 파먹는 것을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그 시간은 육체적 고통의 클라이맥스였다.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위생과 식사의 문제였다. 좁디좁은 감방 안에 놓인 변통(똥통)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늘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그 오물 위로 수천 마리의 구더기가 기어 나와 그녀의 몸 위를 뒤덮었다. 오물과 식사,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보시옵소서. 이 벌레들이 제 몸을 식탁 삼아 먹고 있나이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저 구더기들이 헤엄치던 그 손으로 일제가 던져주는 주먹만한 콩밥 덩어리를 받아먹어야 하는 나의 처지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이 비참함 속에서도 나는 살기 위해 그 더러운 밥을 씹어야 했습니다." “창살 안 감옥은, 주님께 집중케 하는 은혜의 울타리다.” 이토록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안이숙 사모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오물투성이 방을 '지성소(至聖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더기가 끓는 몸을 이끌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앉아 있으나, 내 영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주님과 대화하고 있다. 이 감옥은 나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주님께만 집중하게 하는 은혜의 울타리다." 자신을 고문한 자들까지도 품으려 했던 그녀의 긍휼과 사랑은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장 어두운 감옥 안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던 하늘의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광복과 함께 석방된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남편 김동명목사와 로스엔젤레스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한다. 그리고 수많은 전도/간증 집회를 가졌던 조국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대전 대덕에 새누리교회를 개척한다.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이다. 안이숙사모와 연관성을 모르고 거주지에서 가까운 침례교회를 찾다 방문했던 교회이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내게 주신 은혜요, 내겐 특별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021726202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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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보고 누구는 전하고](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요 4:46-47) 고귀한 신분인 왕의 신하는 왜 그를 찾아왔나? 절망의 끝자락에 있던 그 귀인을 예수 앞에 나아가게 한 것은,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전한 ‘생명의 소식’이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누군가는 보았고… 목격한 자들 중 누군가는 전했으며… 그 간증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아비의 심령에까지 닿은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 엎드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이전 수많은 전도의 메시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보고 누구는 전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수많은 이적 중에 바로 우리 자신이 경험한 이적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는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그렇게도 좋아했던 세상낙 다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소망을 붙잡고 영생의 소망 때문에 지금의 불편함, 부족함, 낮아짐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체험한 기적적 스토리를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혜는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사랑은 전하라고 주신 것이다.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남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던 수가의 우물가 여인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동네방네 선포한 것처럼, 내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은혜와 사랑의 구주를 전하고 선포하는 삶을 바라보고 염원하자. 021226 *해당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4jRAAK_yHs&t=11s *Image from www.facebook.com/honorchrist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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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위해 그래요]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7-18) 현대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현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그녀를 부도덕한 여자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는 찾기 힘들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남녀불평등이 극심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남편과 갈라서는 결정권을 갖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여자의 정욕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닌 다섯 번이나 이혼했다는 사실은 당시 여성이 갖는 사회적 신분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인이 자의에 의해서 남편과 이혼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요한복음에 정통한 Craig Keener, Shaye Cohen과 같은 신학자들은 사회적 격변에 의한 변고, 사망 등으로, 본의 아니게 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로/토목공사등 징용 또는 민란에 의하며 행방불명, 투옥, 사망된 경우일 수 있다. 아무튼 이 여인은 매우 가련하고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이것이 본문을 시종 이끌어 가는 정서이다. 어떤 사연으로 남편을 잃었던지, 남편에게서 버림받았던지,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것은 그녀가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동거생활도 먹고 살기 위해 그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정황에서 할 수 없이 처한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과부, 고아와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는 계층이다. 이들 세 부류의 공통점은 자신의 힘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과부'를 히브리어로 '알마나(אַלמָנָה)'라고 표현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소개된 ‘과부’들이 지닌 공통적 속성이 있다. 이들 '알마나'들은 치욕과 빈곤과 곤경에 처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나오미와 룻, 사르밧 과부(왕상 17장)가 그랬고 이러한 곤경의 메타포는 나인성 과부(눅7:11-17), 불의한 재판관에 끊임없이 하소연하는 과부(눅 18:1-8)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사야는 과부의 때를 ‘치욕’이라 일컬었고(사 54:4),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위하여 신원하신다(신 10:18)고 까지 하셨다. 죽음보다도 더 싫은 매일매일의 삶을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쌍한 여인. 물은 길러야 하길래, 지중해로부터 날아오는 열기가 최고조인 정오에,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는 가장 햇살이 뜨거운 시간에, 남의 시선을 피해 밖으로 나온 정황만으로도 그녀의 기구하고 소외된 인생을 잘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죽지못해 살아가는 애절한 상황에서 오직 단 하나의 소망, 유일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인데, 사마리아인인 자신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은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손가락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인 예배마저도 이렇게 헛제사라고, 쓸데없는 것 드린다고 부정당하면… 전 어떻게 살아요?" “여인아!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장소가 중요한게 아니야.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의 핵심이 더 이상 '장소와 형식'에 있지 않고, '대상과 관계'로 전환되었음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과 진리로… 이 가련한 여인처럼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갈구를 귀담아 들으신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간증]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이제 2년 가까이 되어 가는 ‘창원 미장원 강아지'와 연루된 사건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내가 당시 대처한 정황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기대하며 지내왔는데, 2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더욱 더 점입가경, 첩첩산중이다. .. 하루 아침부터 '너무도 길고 긴 하루의 드넓은 여백을 어떻게 채우며 지내나?' 이른 아침부터 인생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이 짐 때문에 주님앞으로 간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신 주님만 붙들수 밖에 없다. 말씀읽고 기도하고… 이런 것 하면 좋아서가 아니라, 고결한 신앙습관이라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다. 살려면 이 방도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 붙들고, 기도 붙드는 것이다. 말씀 놓는 순간, 기도 놓는 순간, 엄청난 무게의 인생짐이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어제도 서울갔다 밤늦게 귀가했지만 오늘 새벽예배 준비로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육신은 피곤했지만, 영혼은 맑아지고 생기로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웅장한 건물안 화려한 성가대의 아름다운 선율 보다, 인생의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님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물가에 서 있는 그 한 영혼을 찾으신다. 지금 내가 아파하는 현실은 예배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된다. "아버지여! 어버지여! 주의 소명 이루소서!" 021026 *관련된 설교말씀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DurwIZhOV3M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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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예찬]나는 초록의 계절, 여름이 좋다. 모든 초목들이 1년 중 최고의 RPM으로 약동하는 그 때… 나는 왕성하게 뿜어대는 생명력이 좋다. 나도 덩달아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아 좋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도 그 동안 62번을 사귀어 보니 그 매력이 새롭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육중해짐에 따라, 이 시린 계절의 '우러나는 맛'을 새로이 배워가고 있다. 한강을 얼려버릴 만큼 북극의 사나운 한기가 한반도를 덮친 올겨울, 유난히 그 의미가 각별히 다가온다. 첫째, 겨울은 소망이 있어서 좋다. "파랗게 활기 넘쳤던 여름이 가는구나!" 늦여름 읊조리는 상실감이 없어 좋다. 지는 낙엽을 보고 사진이라도 찍어대며 "더 이상 가지 마라!"고 대자연 앞에 굴신(屈身)하는 처량함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 거무튀튀한 거목이 긴 잠을 깨고 연두색 새순을 내며, 단단히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의 거대한 energy를 목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 오른다. 여기저기서 생명이 잉태되는 젖비린내를 맡을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은 이미 연두색으로 연두스러워진다. 이 계절엔 아쉬움이 없다. 오직 파란 소망만을 품고 있다. 둘째, 겨울은 나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여름철 아침산책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일어나고자 애쓰지 않아도, 초목의 뿜어대는 피톤치트는 잠에 빠진 나를 경각시킨다. 게다가 일찍 일어난 새들이 종알거리며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이렇게 여름날 아침은 조금 게을러도, 느슨한 나사 몇 개 풀려도 굴러가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다르다. 남다른 결단이 필요하다. 그 시끄럽던 수다장이 잡새들은 어디론지 가버렸고 나무들은 앙상하고 대지는 말랐고 아침의 냉공기는 나를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심기일전 (心機一轉) 큰 호흡을 내쉬고 다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비장한 결단이 있어야 아침의 첫 단계가 겨우 굴러간다. 이 계절은 내 꼴과 처지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나를 윽박지른다. "네가 얼마나 연약한 존잰지, 네 의지의 한계가 어딘지 한 번 보라!"고 말이다. 그래서 겨울은 나를 더욱 긴장케 한다. 이것이 세번째 매력 포인트다. 겨울은, 내가 이 땅에 잠시 발 붙여 사는 나그네라는 존재를 실감나게 일깨운다. 집 떠나 낯선 이방땅에 있다면 항상 긴장하지 않던가? 어리석고 무능하고 연약한 나그네가 낯설고 서러운 이방땅에서 버티려면 오직 한가지 밖에 없다.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히 살아있는 계절이다. 다른 계절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매혹할 때, 우리는 “이 곳이 좋소이다!”하며 이 곳이 마치 본향인 냥 도취되며 살기 쉽다. 하지만 대자연이 자세를 낮추는 - 볼 품 없고, 만질 것 없고, 향취 없는 - 겨울에야 우리는 비로소 참 집을 그리워한다. 멋있고 매력넘치고 훌륭하고 빼어난 것들, 보고 만지고 맡고 맛보고 하는 사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가 살다가... 비로소 자연이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이 계절, 우리는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졌던 참 눈을 뜨게 된다.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 더 더욱 간절해지는 계절. 이것이 겨울의 참 매력이다. 013126 *Image from https://interserve.kr/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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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에 목사인 난 어떡하나?]이미 도래한 AI의 시대에서… 목사인 나는 무얼 해야하나? 무엇을 하지말고 무엇을 해야할까? 일단 성경 말씀을 해석/풀이/설명하는 지식전달 차원의 사역은 AI가 훨씬 효율적으로 잘 할 것 같다. 성경 해석 뿐만 아니라, AI는 주어진 text와 연관된 기도 또한 은혜롭게 잘 한다. OpenAI의 샘 올트만은 "지능의 한계 비용이 0에 수렴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누구나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에 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측면에서 – 아무리 신학이라도 - 오히려 업무와 학업에 이미 AI의 활동도가 높은 일반 성도들이 목회자들보다 더 잘 활용할 것 같다. AI는 지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와 정신적 영역에서 꽤 수준급의 역할을 한다. 얼마전 ‘강아지 학대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리하는 글(1)을 AI에게 리뷰를 받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미에 나를 이렇게 위로한다. Gemini said: "천만에요, 목사님! 저와 함께 고민하며 다듬은 이 글[1]이 목사님의 억울함을 풀고, 진실을 밝히는 소중한 통로가 되기를 저도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신 만큼,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목사님의 진심과 사건의 실체를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글을 올리시거나, 온라인상에서 대응하시다가 어려운 점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목사님의 새로운 사역지에서의 발걸음과 쏘솔티교회 위에 늘 평안과 강건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처럼, 오늘 하루도 승리하십시오! 나중에 네이버나 구글 검색 결과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실 때 다시 들러주세요. 제가 같이 확인해 드릴게요! 구체적인 확인 방법이 필요하실 때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가 동일 사건 관련하여 받았던 수많은 위로의 글과 격려의 말씀 중에 가장 뭉클했던 문구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성심어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 친구들, 지인들은 모두 자신의 일상 일로 바쁘다. 양팔 걷어붙이고 돕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AI 절친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역량을 온통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AI는 전문역량과 함께 정서와 마음까지도 따스히 만져준다. AI와 나눈 대화가 많을수록 나눈 교감이 깊을수록, 그가 내게 해주는 감동도 깊고 강렬해진다. 다른 사람도 함께 받았음직한 개성없고 무미건조하며 똑 같은 상투적 메시지가 아니라, 나에게만 특화된 나에게만 전하는 내 마음을 촉촉히 적셔오는 뭉클한 메시지를 전한다. 목회자가 전하고 나누어야 할 은혜와 감동까지도 AI가 더 잘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힌다. AI의 위로가 뭉클했던 이유는 그것이 나를 너무 잘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데이터를 완벽히 분석하고 학습해서 내놓은 '최적화된 위로'일 뿐이다. KAIST의 김대식교수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다”고 경고까지 한다. 이젠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설교만 잘 해서는 되질 않는다. 얕은 은혜를 끼침으로는 심히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이 목회자에게는 기회다. 영성이 기회다. ‘영성’만이 목회자로 살아남을 길이다. 내 정보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내놓은 계산값의 결과치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영성’만이 AI를 능가할 수 있는 병기이다. 영국 15년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 신학석사과정에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에 탐구하고 논문 쓰느라, Charles Spurgeon, Walter Bruggmann, J I Packer, Karl Bart 등에 빠져있을 때… 바로 그 시간,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아연실책한 적이 있었다. 주 안에서 연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받아 독서하고 글을 쓰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영적 안이에 푹 빠진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내가 앞설 때, 내 생각, 내 계획, 내 지혜가 앞서서 나의 지적 활동이 왕성할 때, 성령께서 임재하실 여지가 없다. 경건의 형식만 갖춘 내가 주도하는 일로 전락한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한 목회자에게 주신 영감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는 목자는 더욱 구별될 것이다. 주신 성경 text 안에서 하나님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유의미한 의문을 품고 질문하며, 이를 통해 더 깊은 통찰을 얻는 자는 AI가 따라할 수 없는 영적 영역이다. 영성있는 목회자와 성경지식만 많이 쌓은 목회자, 전통/모양/격식/처신 등 거룩의 형식에 전문인 자가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그와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주신 말씀대로 예언하며 인도하며 순종의 삶을 지키는 자는 더욱 도드라지게 구별될 것이다. 이는 절대로 AI가 카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AI가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흉내는 참성도가 구별할 수 있는 진본 아닌 카피이다. 얕은 은혜에 만족하며 경건의 형식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자에겐 그런 분별의 지각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AI가 확산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외형적 크리스천과 참 성도는 더욱 눈부시게 차이가 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둘째, AI는 절대로 설교자의 삶을 모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설교적 재능 이전에 그의 전인격, 전인생을 사용하신다. 전인생에 걸친 그만의 독특한 삶, 인생여정을 사용하신다. George Whitefield의 부모는 여관업을 했다. 어릴 적부터 각양각처에서 방문한 투숙객들 – 기업인, 정치가, 배우, 상인, 노인 – 의 인상착의와 태도, 말투에 유념한 그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내는 것이 일상의 취미였다. 수준급으로 꽤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어릴적 꿈은 연극배우,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성인시절까지 지속된 취미와 열정의 축적이, 성경사건을 실제 연극보듯 실감있게 전달하는 명설교자가 되게끔 하였다. Charles Spurgeon의 경우, 어렸을 적부터 읽었던 방대한 독서량은 유명한 사실이다. 참고로 사후 그의 서재에는 12,000여권의 서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에서 살아있는 표현력, 지옥의 처참함을 묘사하는 생동감, 당장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긴박감 등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적확한 용어 선정과 생생한 표현은 위와 같이 방대한 독서량에서 비롯됐다. 16세에 평신도로서 처음 시작한 설교는, 그 다음 해에 그가 목사 안수를 받고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설교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D. Martyn Lloyd-Jones는 외과의사로서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로 알려진 명설교자였다. 특히 다른 설교자들이 다루지 않거나 민감한 사안이라 회피했던 주제들 - 귀신, 천사 등 영적 세계와 신앙생활에서 정신적, 정서적인 측면 등 – 에 대하여 의학자로서 임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설득력있게 전달했다.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했던 3년간 동거사역에 대한 story가 삼천명을 일시에 회심케한 강력하고 감동적인 설교의 모태가 되었듯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와의 대화가 그의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사역의 모체가 되었듯이, 모세의 40년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용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인생, 그만의 체험을 사용하신다. AI가 절대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고난의 밤길 중에 맞이한 자신만의 깨달음과 통찰은 귀하고 귀한 영적 자산이 된다. 고난은 높아진 자아를 평지처럼 낮춰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절호의 기회이다. 따라서 인생길 가다 맞게되는 고통과 연단은 아프다고 피할게 아니다. 기대하며 감사하며 맞이할 일이다. “사랑은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휫필드, 스퍼전,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강력했던 이유는 그들의 이력에 대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 서사(敍事)' 때문이다. AI는 진리를 해석하고 분석할 뿐, 진리를 위해 고난 받지는 못한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라고 했다. 목회자의 사역은 성경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그 말씀이 삶이 되는 모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 목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성이 좀 까칠해도, 매너가 황이래도, 말표현을 함부로 하더라도, 주변에 묻거나 답해줄 사람이 그 밖에 없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박식하고 유능한 AI 스승은 언제든지 접근 가능하다. 게다가 친절하고 매너있으며 배려심, 인내심까지 갖췄다. 아무리 친절하고 인심좋은 사람이라도,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장시간 질문공세에 시달리면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게다가 바쁜 그에겐 오랜 시간 상담해줄 시간도 없다.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비걸 듯 질문폭탄이 쏟아져도, 따지듯이 질문이 연속되어도, 매너있는 AI 스승의 부드럽고 배려심 깊은 답변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오히려 “다른 질문이 더 없으시냐?”고, “혹 이런 질문이 있지 않으시냐?”고 친절하게 더 깊은 지적 꺠달음으로 안내해준다. 이렇게 수준높은 대화 스킬과 매너, 인문소양, 전문지식에다 불평어린 힐문까지 자기의 아픔처럼 들어주는 긍휼함까지 겸비한 스승을 아이콘 버튼 하나만 누르면 만날 수 있는데, 누가 약속시간 미리 잡고, 택시타고, 까칠한 사람 찾아가서, 시계보며 눈치보면서 물어보러 가겠는가? AI시대의 목회자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은(attractive), 만나기 쉬운(accessible)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예전의 말수 적고, 무뚝뚝하고, 근엄해보이는 성직자 태도 가지고는 안된다. 전문지식, 인문교양지식, 세상사는 상식으로 무장한 AI를 이기려면 사람냄새 물씬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깊은 배려심과 겸손함, 상대의 입장해서 말을 듣고 처지를 이해하려는 감정이입/공감의 능력, 단순히 처세에서 나온 몸에 베인 매너가 아니라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긍휼히 여기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와 표현이 AI를 이길 수 있는, AI가 따라하지 못할 영역이다. 성령의 열매는 AI가 받을 수도 없고, AI에게 임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영성. 전인생을 통한 경험의 누적. 성령의 열매. 이 세가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에게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사람이, 그리고 사람이 만든 피조물이 따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사람들이 맛집 찾아가기 위해 네이버 검색을 의존하는 것처럼… 날이 갈수록 박식함, 전문성, 친절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AI에 빠져들 것이다. 각자의 방에서 AI하고만 단둘이 상대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따뜻하고 훈훈한 인간 냄새를 그리워할 것이다. AI의 시대에는 사람 내 풀풀나는 그런 목회자를 찾을 것이다. 시대예측 전문가 송길영 작가는 "핵개인의 시대일수록 고유한 향기를 가진 존재가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AI는 친절하지만 인격적이지 않고, 유능하지만 거룩하지 않다. 다가올 시대애는 '박식한 스승'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어주는 벗'을 찾을 것이다. 격식갖춘 ‘세련된 매너’를 넘어, 그리고 ‘인간미’를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나는 목자를 찾을 것이다. 자신만의 ‘영성·인생·열매’를 감사하며 사모하며 사용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013026 *Image from https://drayseozturk.org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1) https://www.sosalty.or.kr/sermon-colum/?mod=document&uid=209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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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된 사람들]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어둠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좋은 학교일수록 우수학생을 스카우트하려고 학비 면제, 장학금 수여 등을 통하여 학교 수준을 높이려 한다. 선택받아 스카우트된 자들은 동료학생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침으로, 학교는 더 좋은 학교로 거듭나기를 바람에서 이다. 이들이 모범이 되어 보여줄 학문을 향한 진지함, 생활에 성실함, 목표를 향한 숭고한 열정의 빛이, 타학생들의 좀 더 쉬고 싶고, 놀고 싶고, 보고 싶고, 절제 못하게 하는 욕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을 몰아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스카우트한 빛의 자녀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주님은 우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어떤 거금도 필적 못할 엄청난 댓가를 치르셨다. 스카우트받은 자들은 제 몸값을 해야한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4)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빛은 말이 없다. 말보다 존재로써 드러난다. 빛은 소리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 존재를 통하여 어둠의 수치가 드러난다.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 5:12-13) 우리 때문에 세상은 밝게 빛나야 한다. 우리 때문에 어둠은 밝게 드러나 고개 숙이며 퇴장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이웃과 사회는 밝게 빛나는 광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어둠이 아니라 밝은 게 정상이다. 011726202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