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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칼럼
[매일 숨쉬듯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
등록일
2026-04-04 16:19
조회수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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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생명의 부활로 사망권세를 굴복시켰다.
절망의 어둠을 깨고 소망의 빛으로 나왔다.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종료가 아님이 증명됐다.
부활하시고 위 모든 것을 몸소 증명하신 그분을 따르는 삶은, 단지 우리가 죽으면 이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확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 미래의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 소망은 그 믿음이 현재의 삶에서 살아 왕성하게 역동하는 것에 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싫은 것 미운 것 많고, 아픔과 고뇌가 쉴 새 없이 요동하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에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17:15-16)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전하고 신실하고 진실하며
천국 백성답게 자부심 가지고 당당하게
천국 시민권을 만끽하는 삶에 있다.
사려 깊고, 배려하며, 약자의 아픔에 민감하며, 친절하며, 용납하며, 용서하며…
자신의 주관과 이기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포스트모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짓밟고 깔아 뭉개는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사랑하며 지키며,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보다 장차 맞이할 영원한 상급을 생각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그러한 삶 말이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금욕과 절제의 기간이며, 고난주간은 그 사순절의 마지막 1주간을 의미한다. 이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짧은 기간의 금식에서 시작하여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40일로 정착됐다. ‘사순절’은 그리스어로 Τεσσαρακοστή (Tessarakostē), 40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Lent’라 하는데, 고대 앵글로색슨어 ‘lencten’(봄철)’에서 유래해 계절적 의미를 반영한다. 참고로 40은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순절은 성경적이라기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사순절하면 경건하고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이 발전하여 중세 수도원의 전통에 의해 ‘절제와 금욕’의 기간으로 자리 잡았다.(6세기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참조) 이 전통이 더 나아가, 평신도 중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주고, 날카로운 쇠못을 박은 채찍질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순절 기간을 보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오히려 이에 대한 반발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긴 후, 고기와 40일간 이별한다는 의식, 카니발이 유래되기도 했다(1). 사순절이 시작되는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 직전 일주일간 열리는 카니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날, ‘Fat Tuesday’로써 육욕을 기름지게 채우는 최고 절정의 날이다. 사순절을 준비한답시고, 특히 남미와 유럽에서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탕한 향락과 쾌락, 성적 퇴폐에 이르기까지 치닫고 있다. 어차피 회개하고 자중할 시간을 가질 터이니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즐기고 보자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교회의 형식적/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을 외쳤던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정신을 따랐던 존 캘빈은 “사순절은 중세교회의 폐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2)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받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우리 스스로 피 흘리기를 원하실까? 온갖 탐욕을 드러내며 용서받아야 할 죄를 산더미처럼 쌓는 인간들의 축제를 어떻게 보실까? 특별고난주간이라고 평소에는 담 쌓고 살던 새벽기도로 고행하며, 뼈가 드러나며 살이 찢긴 채 죽으신 예수의 형상을 상상하며 얼굴 찡그리며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어떻게 보실까?
어느 시골할머니에 대한 한 선교사의 일화이다.
시골길을 차로 달리던 그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승차한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지 않은 채 힘들게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 차에 타셨으니 품에 안은 짐도 내려놓으시죠?”
“나를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찌 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겠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미 이루신 바를 믿고 기쁨으로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부활절을 향한 시간들은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시간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과 고행으로 꽉 채워진 시간이 아니다.
종교적 관행이 요구하는 짐을 억지로 지는 기간이 되어선 안된다.
고행, 절제, 금욕 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 중요하다.
새 피조물이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친숙했던 욕망과 이기심은 멀어진다.
익숙지않은 기도와 금식을 참고 버티며 고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 생명이 된 기쁨으로 주를 향한 감사의 찬미와
주 안에 있는 나의 소망이 절로 고백되어지는 시간이다.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은,
일년에 40일, 또는 고난주간 7일간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숨을 쉬며 살아가듯 평생 지키고 호흡해야 될 신자의 자연스런 삶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1) Carnival(카니발)은 라틴어 Carne(카르네; 살, 고기), Vale(발레; 작별)에서 유래되어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이다.
(2) John Calvin, 기독교강요, IV. xii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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