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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컬럼
목사 칼럼
전장터에서
등록일
2024-03-19 21:55
조회수
99
인간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이것을 한다
밥 먹으면서, 얘기하면서, 일하면서, 컴퓨터게임하면서도…
잠시도 이것을 멈추지 않는다.
‘생각’.
생각이 바로 나다.
지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이를 잘 나타내는 지표는, 자신의 구글 검색 히스토리 또는 유튜브 방문 히스토리를 눌러 보면 잘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관심과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인터넷에서 자신이 검색하고 수용한 정보들의 누적과 기타 다른 방법으로 보고 들은 정보들에 대한 취사선택한 결과치가 자신만의 ‘생각의 틀’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체계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인격(혼)을 세워가며,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결정을 유도하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이것을 잘 아는 마귀도 우리의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힘쓰고 애쓴다. 영적 전쟁은 내 ‘생각’ 밭에서 벌어진다. 가룟 유다도 사단에게 생각의 영토를 내주다가 망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생각은 마음과 연결된다. 생각이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하다. 생각이 선하면 마음도 선하다. 생각과 마음은 어깨동무하며 함께 다닌다. 마음이 악하면 생각도 악하다. 마음이 이기적이면 생각도 자기중심적이다. 창세기 6:5에 의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표현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the thoughts of his heart; KJV)’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우리의 생각과 마음 밭은 지구 최대의 영적 격전장이다. 이 치열한 영적 전장터의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 마귀는 열심히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두루’ 돌아 다닌다. 그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야욕은, 우크라이나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푸틴의 야심보다 2만배는 강력하다. 이를 위해 ‘두루 다니는’ 열심은 그의 특성이다. 신약과 구약에서 일괄되게 표현하는 그의 고유한 특징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마귀가 이리도 열심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졸지 않고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새벽 파숫군의 눈동자처럼,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각의 골격에 그와 비슷한 생각의 살들이 붙어 나가면 사고의 체계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의 틀이라는 패턴(pattern)이 형성되고, 이 패턴을 자신과 친화적인 정보체계라고 인식(pattern recognition)한 정보 알갱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러붙으며, 이 과정이 지속될수록 서로 끌어 당기는 관성의 힘은 거대해지고 요지부동한 사고 체계, 즉 가치관, 세계관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확립된 가치관은 웬만한 설득과 호소력 있는 읍소에도 요동치 않는다. 크리스천의 신앙 가치관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립되고 견고해진다.
반면에 진리를 대적하는 생각도, 동종의 생각 편린들이 함께 뭉쳐서 사고체계가 형성되고 가치관/세계관으로 자라나면 그것이 견고한 진이 된다. 더 이상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을 보아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마음 속에 세운 - 돌처럼 단단해진 - 가치관대로 취사선택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가치관의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세상 살아가는 상식과 대립되기도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품고 살아가는 말세 시대의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징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분명히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말씀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상반된 가치관, 사고체계가 자신 안에 또아리 틀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집착하게 하는 세상적 가치관, 세상임금 마귀가 집어넣는 생각,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막 4:19)이 자신 안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세의 징후는 배교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 크리스천이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다(딤후 3:5). 항상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한다(딤후 3:7-8). 이는 가치관의 혼란에서 비롯되어 믿음에 금이 가면서 시작된다.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수 많은 좋은 설교와 성경강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순전해야 될 크리스천의 마음과 태도와 삶은 더욱 더 뿌옇게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외형적으로 분명히 자타가 공인하는 교인인데, 집사인데, 장로인데, 이러한 영적 가치관의 혼란 속에 빠져있어도,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한다.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설교는 수려하고 빼어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올바른 뜻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성도의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마 28:20).
성경은 삶의 참고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되는 매뉴얼이다. 매뉴얼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세월 앞에 쉽게 망가지는 가전제품처럼 망하고 만다. 매뉴얼(성경말씀)대로 자신을 관리하며,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미혹된 자이다(약 1:22). 말로만 “주여! 주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마 7:21). 말로만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그쯤이야 괜찮다”는 생각, “다들 그렇게 하던데…”하며 자위하는 생각을 은밀히 주입하는 마귀를 결박시켜야 한다. 한 번 당하면 계속 당한다. 한 번 양보한 전장터는 더 큰 퇴각을 예고한다. 내 안에 살포시 들어온 조그마한 분이 죄를 잉태한다(엡 4:26-27). 그 조그만 것이 미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을 잉태한다. 부지런하고 열심인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후회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바로 멈춰야 한다. 우물쭈물 방치하는 사이, 마귀가 순식간에 부지불식 들어온다.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 혼자 깨어 있기 힘들면, 깨어 있는 자 옷깃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교회의 힘이다.
이러한 영혼의 간절한 몸부림마저도 없으면, 예수 안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진지하게 짚어봐야 한다(고후 13:5).
031124
*image from https://studyandobey.com
밥 먹으면서, 얘기하면서, 일하면서, 컴퓨터게임하면서도…
잠시도 이것을 멈추지 않는다.
‘생각’.
생각이 바로 나다.
지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이를 잘 나타내는 지표는, 자신의 구글 검색 히스토리 또는 유튜브 방문 히스토리를 눌러 보면 잘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관심과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인터넷에서 자신이 검색하고 수용한 정보들의 누적과 기타 다른 방법으로 보고 들은 정보들에 대한 취사선택한 결과치가 자신만의 ‘생각의 틀’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체계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인격(혼)을 세워가며,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결정을 유도하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이것을 잘 아는 마귀도 우리의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힘쓰고 애쓴다. 영적 전쟁은 내 ‘생각’ 밭에서 벌어진다. 가룟 유다도 사단에게 생각의 영토를 내주다가 망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생각은 마음과 연결된다. 생각이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하다. 생각이 선하면 마음도 선하다. 생각과 마음은 어깨동무하며 함께 다닌다. 마음이 악하면 생각도 악하다. 마음이 이기적이면 생각도 자기중심적이다. 창세기 6:5에 의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표현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the thoughts of his heart; KJV)’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우리의 생각과 마음 밭은 지구 최대의 영적 격전장이다. 이 치열한 영적 전장터의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 마귀는 열심히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두루’ 돌아 다닌다. 그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야욕은, 우크라이나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푸틴의 야심보다 2만배는 강력하다. 이를 위해 ‘두루 다니는’ 열심은 그의 특성이다. 신약과 구약에서 일괄되게 표현하는 그의 고유한 특징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마귀가 이리도 열심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졸지 않고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새벽 파숫군의 눈동자처럼,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각의 골격에 그와 비슷한 생각의 살들이 붙어 나가면 사고의 체계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의 틀이라는 패턴(pattern)이 형성되고, 이 패턴을 자신과 친화적인 정보체계라고 인식(pattern recognition)한 정보 알갱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러붙으며, 이 과정이 지속될수록 서로 끌어 당기는 관성의 힘은 거대해지고 요지부동한 사고 체계, 즉 가치관, 세계관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확립된 가치관은 웬만한 설득과 호소력 있는 읍소에도 요동치 않는다. 크리스천의 신앙 가치관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립되고 견고해진다.
반면에 진리를 대적하는 생각도, 동종의 생각 편린들이 함께 뭉쳐서 사고체계가 형성되고 가치관/세계관으로 자라나면 그것이 견고한 진이 된다. 더 이상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을 보아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마음 속에 세운 - 돌처럼 단단해진 - 가치관대로 취사선택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가치관의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세상 살아가는 상식과 대립되기도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품고 살아가는 말세 시대의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징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분명히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말씀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상반된 가치관, 사고체계가 자신 안에 또아리 틀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집착하게 하는 세상적 가치관, 세상임금 마귀가 집어넣는 생각,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막 4:19)이 자신 안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세의 징후는 배교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 크리스천이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다(딤후 3:5). 항상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한다(딤후 3:7-8). 이는 가치관의 혼란에서 비롯되어 믿음에 금이 가면서 시작된다.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수 많은 좋은 설교와 성경강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순전해야 될 크리스천의 마음과 태도와 삶은 더욱 더 뿌옇게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외형적으로 분명히 자타가 공인하는 교인인데, 집사인데, 장로인데, 이러한 영적 가치관의 혼란 속에 빠져있어도,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한다.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설교는 수려하고 빼어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올바른 뜻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성도의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마 28:20).
성경은 삶의 참고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되는 매뉴얼이다. 매뉴얼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세월 앞에 쉽게 망가지는 가전제품처럼 망하고 만다. 매뉴얼(성경말씀)대로 자신을 관리하며,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미혹된 자이다(약 1:22). 말로만 “주여! 주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마 7:21). 말로만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그쯤이야 괜찮다”는 생각, “다들 그렇게 하던데…”하며 자위하는 생각을 은밀히 주입하는 마귀를 결박시켜야 한다. 한 번 당하면 계속 당한다. 한 번 양보한 전장터는 더 큰 퇴각을 예고한다. 내 안에 살포시 들어온 조그마한 분이 죄를 잉태한다(엡 4:26-27). 그 조그만 것이 미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을 잉태한다. 부지런하고 열심인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후회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바로 멈춰야 한다. 우물쭈물 방치하는 사이, 마귀가 순식간에 부지불식 들어온다.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 혼자 깨어 있기 힘들면, 깨어 있는 자 옷깃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교회의 힘이다.
이러한 영혼의 간절한 몸부림마저도 없으면, 예수 안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진지하게 짚어봐야 한다(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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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from https://studyandobe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