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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칼럼
비신자와 신자의 차이
등록일
2024-04-26 23:34
조회수
440
믿는 자와 비신자의 차이는, 자신에게 영생이 있고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영생이 있음을 수긍해도 그 가치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가의 차이에 있다. 이 땅에서 길게 살아봤자 100년 정도의 아주 짧은 삶과 영원한 삶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영생을 설계하고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앙적 입장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신자와 비신자, 즉 양과 염소로 갈린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모르면서 교회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수를 안다”는 의미는 단지 지적으로 알거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를 통한 ‘지/정/의’, 즉 지식, 지혜, 이해, 분별, 성찰(知), 감정, 사랑, 기쁨, 분노, 열정, 애정, 배려(情), 뜻, 의지, 결정, 선택(意)등을 포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 깨달음이다. 나는 결혼 전부터 내 아내를 알고 지금도 잘 알지만, 30년간 한 방을 같이 쓰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살아 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안다. 결혼 전 그녀를 피상적으로 알았던 수준과는 양적/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금과 비교해볼 때, 결혼 전 그녀를 알았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녀와 동반자의 삶을 지속할수록 그 전인격적 깨달음은 점점 숙성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1 2:3)
윗 구절에서 ‘알다’의 의미로 쓰인 헬라어 ‘γνωρίζω(그노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 그와의 관계를 통한 전인격적 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체험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를 체험하고 알게 되면 그를 향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높으시고 위대하신지 깨닫게 되면 그를 경외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을 두렵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듣게 된다. 그이 위대하심 앞에 나의 작고 초라하고 연약함이 보인다. 그가 커짐으로써 나는 작아진다. 내가 커지는 것과 내 능력이 강해지는 것과 정반대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에서 나온다. 순종이 힘들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나는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하지 말라. 사랑한다는 선포에는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주를 향한 경외함과 사랑에서 저절로 나오는 순종의 마음이 퍼부어 지는데 어찌 무덤덤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왔던대로 자기 원대로 자기 힘껏 함부로 살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6-7)
코람데오… 그의 사랑, 긍휼, 희생, 애통함, 당부, 계획 등에 대한 구체적 실체가 내 안으로 쏙쏙 들어와서 요동을 치고 마음을 휘 젖는다. 내 안에 그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알고, 내 삶의 주인이신 그를 믿음으로 내 안에 영접하면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작고 미세한 변화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엄청난 극단의 변화이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뀐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 내 영역, 우리 것에 대한 주장에 익숙하다. 그리고 주인의식, 주권, 책임감을 강조하는 사회는 자기 껏에 분명한 선 긋기를 더더욱 부추기고 있다. 여태껏 내 인생, 내가 살고… 누군가 자기에게 조언 한 마디 하려 하면, “됐어요! 내가 알아서 알게요.” “내 인생, 내가 주인이고 잘 돼도 못 돼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듯 우리는 자기 삶에 주인의식이 투철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권, 민권, 인권의식이 강해지고 강조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자아중심적 사고와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우리의 가치관을 사로잡고 있다. 기존의 전통, 사회규범, 절대적 진리도 자신의 가치관과 관념에 따라 쉽게 허물어진다.
그런데 가진 지식이 아무리 많고, 가진 재물 엄청나게 많고, 주변에 좋은 인맥 수두룩하고, 자신이 수십년간 준비하고 염원했던 계획들, 원하던 대로 빠짐없이 잘 되던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안 되는 일은 안된다. 누구는 절치부심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골백번 다짐을 하고 다시 해도 안되는 일은 안된다. 외부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의 거대함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미약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누구는 점을 보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잃었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본질이요, 믿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삶을 사는 것. 살아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을 해도 주님의 이름에 존귀함을 드리도록 일하고, 누굴 만나도 주님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 그런데 이것이 지적인 이해만 되고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전인격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은 상태가 되면, 가짜 ‘성화’의 상태에 빠진다. 마음밭은 온통 나, 나에 대한 것으로 꽉 차 있음에도, 입술로는 “주님, 주인님, 주인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준행하는 삶이다. 성화의 목표는 더 나은 인격, 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관계함으로써 그를 체험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은 그와 끊임없는 소통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그 통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다. 가짜 성화는 자신에게 집중하기에 기도를 자신의 영성개발의 용도쯤으로 여긴다. 기도 많이 하면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자부한다. 기도 몇 시간 한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 평상시 그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와 단절된 삶을 갖다고,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을 원 없이 펼쳐 나가다 뭔가 필요하면, 계획 중에 안 풀리는 문제가 생기면 램프의 요정 지니를 찾듯이 예수를 불러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은,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주인되신 그분에 대한 것이다. It’s about God, your Lord.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어도, 그가 주인 된 삶을 과연 내가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는 구원의 여부를 가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신자와 비신자, 즉 양과 염소로 갈린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모르면서 교회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수를 안다”는 의미는 단지 지적으로 알거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를 통한 ‘지/정/의’, 즉 지식, 지혜, 이해, 분별, 성찰(知), 감정, 사랑, 기쁨, 분노, 열정, 애정, 배려(情), 뜻, 의지, 결정, 선택(意)등을 포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 깨달음이다. 나는 결혼 전부터 내 아내를 알고 지금도 잘 알지만, 30년간 한 방을 같이 쓰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살아 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안다. 결혼 전 그녀를 피상적으로 알았던 수준과는 양적/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금과 비교해볼 때, 결혼 전 그녀를 알았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녀와 동반자의 삶을 지속할수록 그 전인격적 깨달음은 점점 숙성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1 2:3)
윗 구절에서 ‘알다’의 의미로 쓰인 헬라어 ‘γνωρίζω(그노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 그와의 관계를 통한 전인격적 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체험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를 체험하고 알게 되면 그를 향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높으시고 위대하신지 깨닫게 되면 그를 경외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을 두렵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듣게 된다. 그이 위대하심 앞에 나의 작고 초라하고 연약함이 보인다. 그가 커짐으로써 나는 작아진다. 내가 커지는 것과 내 능력이 강해지는 것과 정반대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에서 나온다. 순종이 힘들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나는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하지 말라. 사랑한다는 선포에는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주를 향한 경외함과 사랑에서 저절로 나오는 순종의 마음이 퍼부어 지는데 어찌 무덤덤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왔던대로 자기 원대로 자기 힘껏 함부로 살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6-7)
코람데오… 그의 사랑, 긍휼, 희생, 애통함, 당부, 계획 등에 대한 구체적 실체가 내 안으로 쏙쏙 들어와서 요동을 치고 마음을 휘 젖는다. 내 안에 그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알고, 내 삶의 주인이신 그를 믿음으로 내 안에 영접하면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작고 미세한 변화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엄청난 극단의 변화이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뀐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 내 영역, 우리 것에 대한 주장에 익숙하다. 그리고 주인의식, 주권, 책임감을 강조하는 사회는 자기 껏에 분명한 선 긋기를 더더욱 부추기고 있다. 여태껏 내 인생, 내가 살고… 누군가 자기에게 조언 한 마디 하려 하면, “됐어요! 내가 알아서 알게요.” “내 인생, 내가 주인이고 잘 돼도 못 돼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듯 우리는 자기 삶에 주인의식이 투철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권, 민권, 인권의식이 강해지고 강조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자아중심적 사고와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우리의 가치관을 사로잡고 있다. 기존의 전통, 사회규범, 절대적 진리도 자신의 가치관과 관념에 따라 쉽게 허물어진다.
그런데 가진 지식이 아무리 많고, 가진 재물 엄청나게 많고, 주변에 좋은 인맥 수두룩하고, 자신이 수십년간 준비하고 염원했던 계획들, 원하던 대로 빠짐없이 잘 되던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안 되는 일은 안된다. 누구는 절치부심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골백번 다짐을 하고 다시 해도 안되는 일은 안된다. 외부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의 거대함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미약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누구는 점을 보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잃었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본질이요, 믿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삶을 사는 것. 살아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을 해도 주님의 이름에 존귀함을 드리도록 일하고, 누굴 만나도 주님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 그런데 이것이 지적인 이해만 되고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전인격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은 상태가 되면, 가짜 ‘성화’의 상태에 빠진다. 마음밭은 온통 나, 나에 대한 것으로 꽉 차 있음에도, 입술로는 “주님, 주인님, 주인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준행하는 삶이다. 성화의 목표는 더 나은 인격, 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관계함으로써 그를 체험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은 그와 끊임없는 소통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그 통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다. 가짜 성화는 자신에게 집중하기에 기도를 자신의 영성개발의 용도쯤으로 여긴다. 기도 많이 하면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자부한다. 기도 몇 시간 한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 평상시 그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와 단절된 삶을 갖다고,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을 원 없이 펼쳐 나가다 뭔가 필요하면, 계획 중에 안 풀리는 문제가 생기면 램프의 요정 지니를 찾듯이 예수를 불러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은,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주인되신 그분에 대한 것이다. It’s about God, your Lord.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어도, 그가 주인 된 삶을 과연 내가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는 구원의 여부를 가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