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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칼럼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등록일
2025-05-23 16:42
조회수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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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는 만국의 공통언어이다. 내가 오랜 기간 살아본 영국과 미국에서도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하면 이상한 것으로 느껴진다. ‘저 사람이 오늘 상태가 안좋은가?’ ‘혹시 나에게 안좋은 감정이라도..?’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 청소년, 특히 어릴수록 초등, 미취학아동들 교회에서도 인사를 안한다. 눈에 보이는 웃어른에게도 인사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 하나님께 경배를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상하간의 관계, 수평적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진지한 가르침과 훈육을 오랜 기간에 걸쳐 받아본 적이 없다. 오직 일류대 가면 모두가 손뼉치고, 성질이 좀 못돼도, 성격에 좀 모가 나도,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한다. 하지만 세상은 능력있고, 똑똑한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할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가치가 학벌과 지위와 돈으로 매겨지는 세태에 냄새 난다며 겉으로는 거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부자라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학벌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웃과 사회를 배려하고 품고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지에 그 인간의 고귀함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님의 속성은 '사랑' 이시다.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셨고, 그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존재이신 것이다. 인간의 참가치는 그와 같이, 이웃과 사회에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는데 있다. 교회 본질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나가서 이웃 영혼들을 품고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교회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이웃들과 온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칭송을 받게 되어있다.(행 2:46-47)
그런데 현대를 사는 부모들은 자식이 수학, 영어 잘 하기를 원하지, 남에게서 '사랑'받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해야 친구에게서 이웃에게서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정성을 다해 가르치지 않는다. 영국의 사립학교(중고등학교의 경우)는 학문을 가르치는 Classroom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성/인품/예절을 배우는 House로 나뉘어져 있다. Classroom는 같은 학년 남녀학생들이 한 곳에서 학문을 배우는 곳이지만, House는 각학년생들이 골고루 분포된 전학년생의 생활/학습 공동체이다. 여기에서는 공동체 조직에서의 질서와 예절, 인성을 엄격히 가르치며 몸으로 배우게 한다. 나에겐 일년 학비가 약 6-7천만원(school trip, 유니폼, 책 등 기타 학습관련비용 포함)이 소요되는 것도 경악스러웠지만, 큰 아들 때문에 Housemaster에 불림을 당한 적이 여러 차례 있어서 고통스러웠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학생의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다룬다.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 부모도 불려와 가열차게 한 소리 듣는다. 모두가 타당하고 맞는 말이다.
어느날 또 Housemaster로부터 콜을 받았다. 그토록 눈꼽 뗄 새도 없이 바쁜 주재원의 일과 중에, 헉헉 거리며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니… 이번엔 내 아들이 체육시간에 하급생 체육복을 빼앗아 입고 나갔다는 것이다. 업무로 복귀하는 차안에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초등 5학년을 마치고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된 아이라, 왜 그런지 대충 이해가 갔다. 한국 초등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비슷한 경험을 당해봤기에 별 죄의식을 못느끼고 행동한 것 같았다. “난, 너보다 학년이 높아!” 비뚤어진 서열의식이 그런 행동을 초래한 것이다. 권위에 대한 잘못된 의식이 죄를 죄로 못느끼게 한 것이다.
난 너보다 높아!
내가 너보다 나아!
난 너보다 많은 것을 소유할 능력이 있어!
우리 사회가, 젊을수록 어릴수록 – 휘황찬란한 불빛을 향해 모여드는 불나방처럼 – 병든 서열의식에 몰입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웃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보다…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되기를 몸부림치면서 사모하는 것 같아 슬프다. 그 영국의 사립학교에 방학이 시작되면, 부모가 보낸 헬기를 타고 교정을 떠나는 거부의 자녀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늘 겸손하고 상냥하고 진실되어 보인다. 상대에게 대하는 태도에 가식이 없다. 피부 거무잡잡한 이방인 티 물씬 나는 나에게도 - 처음 보는 사이인데 -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극진하게 인사한다. 높은 상류층일수록, 돈 많은 부자 가문일수록, 평범하고 천한 이에게 대하는 태도는 늘 겸손하다. 나도 오랜 세월 런던 도심지에서 레스토랑업을 해본 경험이 있어 잘 안다. 인근 골드만삭스등 굴지의 금융회사, 딜로이트등 유명 컨설팅회사, 글로벌 로펌에 다니는 직장인들 중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스페인,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명망있는 가문 출신들이 많다. 그들이 내 아래 종업원들에게 대하는 언행을 보면 나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겸손하고 남을 존중한다. 한국의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비정상적 의식이 적지않게 작용하는 것 같다. 직분이 높을수록 상석에 앉기를 즐겨하고, 직분이 높은 자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런 것들보다, 믿음의 성숙도, 하나님과 관계의 깊이, 믿음의 말과 행실의 일치에 그 사람의 고결함이 있는 것 아닌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4:12)
경건의 능력은, 그 사람의 지식과 소유와 신분에 있지 않다. 경건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과 살아있는 건강한 관계에 있다. 날이 갈수록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세태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토록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징후가 완연한 오늘, 예수께서 거듭 당부하신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052325
*사진: 내 큰아들이 다녔던 그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