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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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이웃이 교회에게 바란다“교회는 자기 구성원이 아닌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이다.”(William Temple, 영국성공회 대주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도록 계획하셨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심지어 그들을 사로잡아간 원수의 나라, 적국 바벨론에 가서도 그 나라 백성들을 위해 평안을 구하라고 명하셨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렘 29:7)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신약에 이르러서도 동일하며, 세세토록 영원무궁 변함이 없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지만, 신앙수준이 성숙한 성도일수록 ‘사회봉사’에 대한 교회사역의 중요도를 가장 낮게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목회데이터연구소, 한국교회 진단 조사: 전국 만 19세 이상 개신교인 남녀 1000명 대상, 23.11.7~11.15; 아래 사진 참조). 위에 언급한 Temple 대주교의 선포가 무색할 정도로, 교회는 날이 갈수록 내부지향적, 자기 구성원을 위한 클럽으로 오므라지는 것같아 안타깝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그리스도 입문층’ 즉 불신자의 생각에 가장 가깝다고 인식되는 부류에서 ‘사회봉사에 대한 교회사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우리 이웃들은 교회에게 사회를 위해 봉사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돌과 같이 단단한 그들의 마음에 복음이 잘 수용되게 하려면 각 교회는 그들의 생각과 기대를 존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교회는 그들의 칭송 받기를 늘 의식하고 사모해야 한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050225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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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적당한 결핍과 고난 속에서 성장한다큰 아들 두살때, 아장아장 걷다가 걸음걸이가 안정화되고 뜀박질에 한창 재미붙일때... 가족 셋이 산책을 나갔다. 그러다 자기뜻을 안받아주면 길바닥에 누워 시위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는 인근 야산 산책길에서 어떤 일로 심사가 뒤틀렸는지 산길 땅바닥에 누워 울면서 땡깡을 또 부린다. 나는, 달려가서 안아주며 달래보려는 아내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놔두고 둘만 산길을 내려와,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거목나무 뒤에 숨어 아들이 어떻게 하는 지 지켜보았다. 시야에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자, 눈물 뚝.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부모가 내려왔던 길을 쏜살같이 달음박질하면서 따라 내려온다. 그 사건이후, 길바닥에 누워 시위하는 행태는 깨끗이 없어졌다. 교회에서 보면 요즘 젊은 엄마, 아빠들 참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돌본다.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여 돌보는지, 주일성수 규칙적으로 잘하던 부부가 출산하고 한동안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일도 적지않게 목격한다. 영국에서 주재시절. 경제적으로 모자람없는 윤택한 시기였다. 회사에서 렌트비 내어주는 큰집에서 살고, 회사에서 학비를 지불해주기에 꽤 좋고 비싼 사립학교에 아이들 보내고… 그러다보니 물질의 풍요속에서 자녀들의 아끼고 저축하는 마인드는 날이 갈수록 사그러드는 것 같아 염려스러웠다. 테스코에 가서 쇼핑한 물건 지불하려고 계산대에서 줄을 서면, 마지막 충동구매를 부추키는 아이템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아이들은 절대 조용히 있지 않는다. 집에 축구공이 이미 두세개가 나뒹굴고 있는데, 매끄럽게 윤이 나는 새공을 사달라고 또 집는다. 안사주면 땡깡부리는 아이들의 시위에 주눅든 아내는 쇼핑 아이템에 그것을 사뿐히 올려 놓는다. ‘저러면 안돼는데…’ ‘저러면 안돼는데…’ ‘경제관념, 절약정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가르쳐야 하는데…’ 나는 속으로만 읊조릴 뿐, 뭐라고 타이를 계제(階梯)가 안된다. 주변 사방팔방 낯선 영국인의 시선들에 압도되어있고, 이미 이런 저런 아빠의 잔소리에 “영국에선 안그래요!”의 항변과 함께 나만 왕따되는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회사를 나와 내 사업(한국음식업)을 시작했다. 투자비도 많이 들었지만 수입도 생각보다 약해서 경제적으로 위축되었다. 인건비를 줄이다보니 아이들도 나와 파트타임으로 일을 돕기 시작했다. 모자람과 결핍속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고, 자기들 스스로 돈을 벌어보고, 용돈을 아껴쓰다 보니, 이들을 향한 나의 묵은 기도가 저절로 응답 되었다. 뭐 하나 사도 허투루 구매하지 않고, 거들떠 보지 않았던 중고제품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결핍을 경험해봐야, 고난을 겪어봐야 평소 잊고 살았던 귀중한 것, 소중한 존재에 감사함을 갖게 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꽃은 달콤한 설탕밭에서 피지 않는다. 썪은 낙엽, 짐승의 배설물, 곤충의 사체들로 부패된 흙속에서 피어난다. “야단맞지 않고 자라는 세대”. 훈계없고, 꾸지람없는 세대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부숴지고 있다. ‘다정한 부모’라는 환상이 오히려 아이들을 망친다. 부모들의 세심한 배려와 극진한 돌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아이들이 친구 사귀는 일부터 등교시간, 커서도 출근시간 지키는 것까지 기본적인 일을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불안정하고 무기력하고 자기만 아는 '빈껍데기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감정존중 양육'과 '친구같은 부모'라는 환상아래 “안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다정다감한 부모'가 되겠다며 체벌하지 않는다. 스스로 부모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통제권을 잃었고, 자녀에게 약자로 전락했다.[1] “내가 키우는 내 아이는 절대 스트레스 받으면 안돼!” 일상에서 아이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부모들이 먼저 막아서고 나선다. 하지만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은 오히려 적당한 스트레스와 결핍과 좌절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떨어져봐야 내게 “날개가 있음”을 깨닫고 비로소 날 수 있다. 042825 [1] Abigail Shrier , Bad Therapy: Why the Kids Aren't Growing Up (New York: Sentinel, 2024)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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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의지하는가?고통의 시간에 멘탈마저 무너지면.. 건강치 못한 것에 탐닉한다. 술, 사치, 음욕, 마약…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잘 해주는 자에게서 헤어나질 못한다. 쉽게 가스라이팅 당한다.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자는... 의지할 대상이 있기때문이다. 절대 주권자를 믿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력이 특출나게 강한 경우이다. 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족, 친구가 위안은 될지언정 문제해결의 즉답이 되기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면을 고려하면 자신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자는 훌륭하다. 스스로 훌륭하기에 복음이 잘 안들어간다. 오히려 삶의 구렁텅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자는 비교적 쉽게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철썩같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고통의 시간을 극복해낸 자아에 대한 신뢰가 있다. 대견한 자신을 향한 바위같이 굳건해진 ‘자기의’가 바로 견고한 진이 되어, 절대 주권자를 의지해야될 당위성을 떳떳하고 늠름하게 거부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세상 어느 누구가 자신의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가? 바로 당장 내일 일도 모를 일이다. 나이의 무게가 묵직해질수록 인생 파도의 쓰나미앞에서 자신의 알량한 경험/학식/지위/재력/인맥, 이 모든 것의 무력함을 – 머큐로크롬 소독액이 찢어진 상처를 파고드는 것처럼 – 생생하게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세월이 인간에게 주는 지혜는, 자신이 자신의 모든 것으로도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더 크고, 더 진지하고, 더 심각해지는 인생의 문제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누군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겸손함’이 한 인간을 성숙케 한다. 고난의 때에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고난을 이겨내는 참 길일수도, 오히려 자기의 성한 발을 부러트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잠 25:19) 믿음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에 눈을 뜨고 자신 스스로 그 문제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무기력함을 깨달아 그 위경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참 권능자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를 대치하려는 가짜 신, 우상 또는 인간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인생의 문제를 더욱 험악하게 만들 뿐이다. 042725202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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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는미국의 전체 국부에서, 미국 부자 0.1%가 차지하는 부의 비율이 무려 13.8%에 이른다고 한다(1990년 8.5%). 2024년 한 해동안, Elon Musk, Jeff Bezos, Mark Zuckerberg 등 상위 0.00001%에 해당하는 초부자들 패밀리(19개 가구)가 소유한 부는 1조 달러가 늘어, 전체 국부의 1.8%에 육박하여 2.6조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상 https://www.wsj.com/.../1-trillion-richest-families...) 극심한 부의 편중화현상은 미국 못지않게 한국도 끔찍하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무정하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디모데후서 3:1-5에서 경고한 말세의 현상이 완연해진 때이다. 우리안에서 선한 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선을 베풀며 살라고 거듭 – 애원하시듯 - 강조하신다.(사 1:17; 잠 19:17; 약 1:27)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그러나 세상은 이를 비웃으며 더욱 더 가열차게 정반대로 치닫고 있다. 가난한 자, 부당함을 강요받는 자, 연약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자… 사회는 이들을 외면할뿐만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손가락질을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뻔뻔하게 꼿꼿이 뻗쳐대고 있다. 이런 참혹한 추세에 교회다니는 – 부가 가져다주는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 종교인들이 가세하고 있다는 현실에 가뿐 탄식이 나올 뿐이다. 가난하고 연약하고 사회의 그늘에서 한숨짓는 자에게 동정하는 의견이 나오면, ‘좌파’, ‘공산주의’ 운운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적그리도적 발상이다. 동성애 근절이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말세의 때가 다가올수록 완연해질 사회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집회하고 물리력으로 막아섬으로써 다소 시기는 늦출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말세의 징후가 완연해질수록 당연히 임박할 하나님의 섭리앞에 맞서려는 어리석은 구호를 분별해야 한다. 참혹하고 참담한 일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갈수록, 우리가 할 바는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맹목적 순종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지구인에게 임할 그날이 덫과 같이 갑작스레 올 것을 예비하고 주님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4-36) 042525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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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사람과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슬림화한 지금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무 등… 하나님의 작품, 자연과 교감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엊그제 방문했던 시인의 기념관. 학창시절 애송했던 ‘서시’앞에 섰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의 감정을 이입해본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041525202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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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향한 자발적 자기격리‘고독’은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물나게 겪게 하심으로써 그 참맛을 곰곰 음미하도록 단련하신다. 초대교회 사막 교부들이 인정과 존경의 시선이 가득찬 고향을 버려두고 처절하게 외로운 사막으로 왜 자신을 격리했는지 깨닫게 하신다. 그들에게 고독은, 진리를 향한 영적 몸부림, 자발적 자기격리였다. 나의 마음과 관심을 빼앗았던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집착, 내게 위로와 칭찬을 주고 격려가 되었던 벗들과의 만남, 가슴 뭉클하게 힘이 되고 살맛나게 해줬던 수많은 관계들… 이들을 향한 애착과 집착은 미련없이 내려놓고 그분의 임재에 대한 타오르는 갈구로 자발적 의지에서 비롯된 ‘고독’은 즐길만하다. 고독과 적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그분과의 대화가 익어간다. 고독은, 그분과 대면을 향한 영적 몸부림. 자발적 자기격리이다. "Solitude is voluntary isolation toward God." 이 거룩한 ‘자기격리’의 시간을 갈망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영성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19년전 영국 주재원으로 파견되었을 때 어느 새벽, 모두가 집으로 가고 성전 등은 다 소등되고… 그때 서럽도록 차가운 나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신 그의 입김이 너무도 그립다. 040725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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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염려하지말고오늘 저녁예배를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집에 꼭 들려달라고 전화하셨던 집사님 생각이 났다. 댁에 갔더니만, “호박죽을 끓였는데 ‘목사님’ 생각이 나서 조금 챙겼다”고 하시며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호박죽을 내어 오신다. 그러시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으니 잘 될 것이라”고 격려하신다. (실은 1년전 ‘강아지 학대’ 사건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다.) ‘이번주 토요일 점심까지 밖에서 식사 일정으로 꽉 찼는데…’ ‘언제 이걸 먹나?’ ‘토요일 저녁까지 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보관하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집에 오는데,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몰려든다. 1년반 전에 낯선 창원땅에 왔을 때, 끼니 제때 챙겨먹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만남들을 허락하셨고, 복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끼니는 저절로 해결되게 하셨다. 발달지체아동센터, 메밀국수집, 전주콩나물국밥집, 구포국수집, 사림동기사식당, 가정식백반집… 집처럼, 누님처럼, 여동생처럼… 나를 생각해주시고 끼니를 챙겨주시는 분들이 이리도 창원에 꽉 차게 해주셨다. 이미 떡과 물을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라(왕상 17:2-6). 역시 하나님 말씀이 지극히 맞다. 괜한 걱정했었다.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040125 *사진: 위에 얘기한 바로 그 호박죽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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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길 편의점 간판처럼비록 느끼지 못해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눈앞 큼직한 산처럼 떠억 버티고 있는 고난의 벽에 놀라 기도의 숨조차 멈춰버릴 때가 있다.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러,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을(눅 5:31-32) 보지 못했다면 ‘고난의 때’가 절호의 기회이다. 내가 병약하고 죄악으로 눌린 짐에 힘겨워 할 때… 비바람은 커녕 살랑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양어깨에 머금은 따사로운 햇살이 밀어주고 청명한 하늘이 환하게 인도해주는 산행길에선 ‘피난대피소’가 눈에 띄질 않는다. 정오에서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어두워지고 소낙비는 세찬 바람과 합세하며 맹공을 퍼붓고 경악으로 가득 찬 등산길에서 ‘대피소’ 세 글자가 골목 밤길을 환하게 비추는 편의점 간판처럼 눈에 확 들어온다. 고난의 어둔 터널에 갇혀 있을 때, 우린 자주 자신의 실수, 한계, 실망, 좌절을 목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르고 연약함을 묵상하며 한숨을 내쉰다. 설상가상 상황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기울어져만 가고… 한숨은, 자신 안에 꼬인 창자를 토해낼 정도로 깊은 탄식이 되어 뿜어져 나온다. ‘이게 인생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버텨야지!’ 내면의 구호와 함께 ‘믿음’이란 두 글자를 수도 없이 되뇌며 두 손 땅에 짚고 힘없던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일어난다. .. .. ‘이게 아닌데…’ 박제된 화석처럼 내가 토로했던 믿음의 구호로는 실제로 힘이 생기질 않는다. 생기가 여전히 없다. 자신안에 습관화된 내면의 구호로 버틸 일이 아니다. 인내로 혀를 깨물고 일어나 상황을 꾸역꾸역 버틸 일이 아니다. 부르짖을 일이다. 한 장 크리넥스 티슈처럼 연약한 자신의 바닥을 알았으니, 자신의 온 몸과 혼과 영을 그분께 맡길 일이다.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고, 부르짖는 자에게 더욱 큰 일을 보이시고 도우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할 일이다. “강헌아! 하나님의 은혜를 너 같이 얻은 아들이 누구냐?”(신 33:29) 이 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 믿음으로 부르짖으라고 내게 세찬 바람과 퍼붓는 소나기와 어둠의 불확실을 허락하셨다. 그분께서 내게 허락하신 고난이 - 우리 동네 사림동 골목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연두색 네온 ‘CU’간판 처럼 – 나를 ‘돕는 방패’시요, 나를 위해 일하시는 ‘영광의 칼’을 환하게 비춘다. 033025 *사진: 우리 동네 밤길을 환히 비취는 씨유편의점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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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점이다 선이 아니다가슴이 벅차오르는 지금의 뜨거운 믿음이 십년후의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뜨겁게 헌신한 지금의 봉사와 희생이 앞으로 5년후, 30년후의 믿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구원의 전제조건은 바로 믿음이다. 내게 임한 구원이 영원한 구원으로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우선 내 믿음이 온전해야 한다. 내가 얻은 구원, 확고하게 확실하게 내 것이 되려면 믿음이 확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생명체처럼 변한다. 자라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고 식어 없어지기도 한다. 그날 그때 하나님께서 보실 믿음은 한 순간, 한 정점의 신앙 상태를 일컫는다. 한 시대, 한 인생, 긴 기간의 상태가 아니다. 한 순간, 한 '정점(定點)’이지, 기나긴 기간, 세월을 의미하는 ‘선’이 아니다. 물론 그 동안 봉사하고 헌신했던 것 상급으로 보상받는다. 하지만 우선 심판을 통과해야지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일단 학교에 합격해서 입학해야지 공부 잘해서 우등상 받고, 조퇴/결석 않해서 개근상도 받고 할 것 아닌가? 따라서 오늘 바로 이 순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I affirm, I am not a Christian now. […] For a Christian is one who has the fruits of the Spirit of Christ, which are love, peace, joy. But these I have not. […] And I feel this moment I do not love God; which therefore I know, because I feel it. There is no word more proper, more clear, or more strong.”(1) 존 웨슬리가 1739년 1월 4일 일기에 기록했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신랄한 고백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만큼 순간순간 자신의 신앙 상태에 민감하며, 거룩한 신자로서 믿음 지키기에 영적 발버둥을 쳤으며, 이를 위해 매 순간 깨어있어 자신의 영적 상태에 엄격했다. 12제자 중 가장 지척에서 예수를 섬겼던 제자는 베드로로 알려져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의 기사와 이적을 가까이서 많이 목격했으며, 자신 스스로도 물위를 걷는 이적을 경험했으며(마 14:27-31),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귀담아 마음에 새긴 제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실” 예언을 듣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항변하며(마 16:21-22) 예수를 향한 뜨거운 믿음에서 나온 결기(決起)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앞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예수를 세번이나 연거푸 부인했다. 나의 석사 공부를 위해, 우리 가족은 미시간에 2년여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때 큰아들은 서너살 때였다. 미시간의 여름은 꽤 덥고 햇살은 매우 뜨거웠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들을 데리고 야외풀장에 자주 갔다. 그런데 수심 150cm가 넘는 풀안으로 내 아들, 그 조그만 꼬마가 겁도 없이 당찬 점프와 함께 뛰어드는 것이다. 왜? 그 풀안에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팔 벌리고 있는 아빠가 보듬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3년 동안 매일매일 한 지붕밑에서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고 했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관계가 믿음을 만든다. 관계의 단절은 믿음의 생명력을 앗아 버린다. 신자로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이 관계의 단절이다.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과거 아니 바로 어제까지 힘쓰고 애쓰며 눈물 흘리며 봉사/헌신하고 인내했던 그 위대한 과거 믿음이 이 참혹함을 덮어주지 못한다. 다섯 처녀가 아무리 신랑을 사랑하며, 그가 오실 날을 소망하며 정결하게 20년 평생을 준비해왔더라도, 신랑이 생각보다 더디게 온다 생각하여 신랑과 관계된 신부의 신분을 점차 잊어버리고 신랑맞을 등불 밝히기를 띄엄띄엄 까먹다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준비 안된 신부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 25:1-12). 다시 강조하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보실 믿음은 한 순간, 한 정점의 신앙 상태를 일컫는다. 한 시대, 한 인생, 긴 기간의 상태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보실 그 시점에서의 믿음 상태이다(눅 12:40-48). 영적으로 해이해져서 하나님과 단절의 상태가 있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 구절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어로 ‘κατεργάζομαι(카테르가조마이)’로써, ‘이루다’ 또는 ‘완수하다’는 의미로써, 성도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을 일생의 삶을 통해 살아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한다. ‘두렵고(φόβος; 포보스)’의 의미는 무섭고 공포에 질린 상태라기 보다, 존경하는 상대를 향한 경외심을 의미한다. 떨림(τρόμος; 트로모스)은 무서워 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분에 대한 진지한 자각으로 인한 영적 긴장 상태를 일컫는다. 032325 참조 (1): John Wesley, The Works of John Wesley: Journal and Diaries II (1738-1743), ed. by W. Ward and R. Heitzenrater, Vol. 19 (Nashville: Abingdon, 1990), pp. 29-30. *사진 설명: 수영장에 겁없이 풍덩풍덩 뛰어들던 시절의 큰아들, 우재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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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과 권력의 역학“OO을 보낸다”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보내는 자는 무언가를 가진 자이다. 보내는 그것이 값나가는 선물이라면 그것을 살 수 있는 경제력, 사람이라면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권위,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열이면 열 모두가 다, 보냄받는 자의 처지보다 보내는 자의 자리에 앉고자 한다. 글로벌 광고회사 DMB&B에서 근무하던 시절. 내가 맡은 팀에는 뉴욕본사에서 파견나온 Mattew라는 주재원이 있었는데, 나는 팀장으로서 그와 파트너 또는 동료격이었다. 어느날 그가 클라이언트인 한국P&G 이사와 통화하던 중, 이런 말이 내게 들려왔다. “I will send him to you.” 업무협의 하도록 나를 그 이사에게로 보낸다는 말이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그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Watch your words! You are not my boss.” 이와 같이 “보내다”의 단어에는 권력의 역학이 내재해있다. 사무엘하 11, 12에 의하면 왕국의 왕 다윗의 ‘보내고’ ‘보내서’ ‘보내게’하는 동사 표현이 무수하게 반복되어있다. 밧세바, 우리아, 요압과의 역학관계에서 보내는 자로서 최고권력자의 권력을 만끽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기간 그는 겸손을 놓치고 죄악의 심연에 빠져든다. 결국 참 권력자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을 통해 비로소 다윗의 탈선은 중단된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만왕의 왕, 지존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냄을 받고 이 땅에서 온갖 수모, 모욕, 침뱉음과 고난을 당하신 후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은 바로 ‘보냄받은 자”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시고, 자신도 연약한 육신인지라 십자가 형극을 피하고 싶었지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구하시며 ‘보냄받은 자’의 사명을 결국 이루어내셨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명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누구를 보내는 것에 맛들이면 겸손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보내는 자의 입장을 지향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모된다. 권력, 금력, 명예, 높은 지위에 따라오는 고급주택, 고급차, 고급옷… 눈에 보이는 것에 내 마음이 밟히게 되면 영성을 잃게 된다. 영적 감수성이 무디어진다. 좌우에 날이 선 검처럼 영적 감각을 예리하게 유지하려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늘 의식해야 한다. 그가 ‘보내신 자’의 신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전도 또한 무엇보다도 이 경각심이 우선되어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운차게 할 수 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보내심을 받은 자’의 신분을 깨달음이 주님과 뜻을 이루며 동행하는 자의 특권이다. 이것으로 내 안이 채워지지 않으면 ‘보내는 자’의 자리를 흠모하는 세상의 영성이 순식간에 빈 자리를 가득 차지한다. 031425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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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익으로 엮인 관계손실과 이익의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 이를 영어로 Transactional Relationship(거래적 관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생를 살다보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손익으로 엮인 관계는 바로 갈라선다. 뒤도 안돌아본다. 여유가 바닥난 상황에서 관계의 순수성이 드러난다.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있는 관계선상에 있는 지인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고약한 인생 파도의 높고낮은 싸이클을 겪으면서, 오랜 시간 묵은 관계가 극히 드물다면 자신이 이웃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방식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그저 좋고 싫음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순수하다. 관계가 세월과 함께 묵어갈수록 상대방의 험악한 상황도 내 것이 된다. 피하고 싶은 정황이 아니라 같이 껴안고 기도하고픈 주제가 된다. 그가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나는 과연 그를 안아줄 수 있을까?"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말이다. When forming human relationships based on “gains and losses”, as referred as a "transactional relationship", its true nature is easily revealed in a time of hardship. As we go through life, things don’t always go as planned or desired. Whe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relationships built on “gains and losses” quickly fall apart—they end without a second thought. How many acquaintances do you have to whom you can make a "difficult request" when you're in a tough and painful time? If you have very few or no relationships that have been aged for very long years throughout your life tides of highs and lows, you need to have a time to seriously reflect on your attitude and approach toward others. Building relationships purely based on likes and dislikes is genuine. As relationships deepen over time, the hardships of the other person also become your broken heart. His struggles are not something to avoid but rather agonies you embrace together in prayer. When he hits rock bottom, can I truly embrace him simply because I like him? 03132520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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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지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오늘은 뼈속 사무치게 ‘어머니’가 생각나는 날이다. 세상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내 말에 의구심을 품어도, 어머니만은 내편이셨다. 내가 실수해도, 어디서 문제를 일으키고 집에 들어와도… 자식 때문에 상대방의 퍼붓는 강공에 수많은 수모의 말을 이미 들으셨어도… 항상 “강헌이가 그런 건 이유가 있겠지”하셨다. 꾸지람이나 추궁보다, 기가 푹 죽어 집에 들어온 어린 나를 다독거려주셨다. “나는 널 믿는다.”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밟고 누르는 것 같은 중압감 속에 질식하던 나를 이렇게 격려하고 믿어주셨다. 어머니의 나를 향한 믿음은, 고난 속에 내 머리에 씌워진 무겁디 무거운 철모를 환하게 벗겨주신 구원의 손길이었다. 고등시절 학기말 시험 때, 내 뒤에 앉은 친구에게 답을 가르쳐주다 감독 선생님께 걸려 근신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풀이 죽어 귀가할 때는, 이미 어머니께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자초지종 설명을 다 듣고 나신 이후였다. 어머니께서 상심하신 것은 내가 부정행위 한 것보다, 담임선생님의 나에 대한 표현에 대해서 였다. “강헌이가 모범생인줄 알았는데, 부정행위나 저지르고 이중인격자인줄 몰랐다”고. 그 다음날 지적(知的)으로 차분하게 말씀 잘 하시는 어머니 친구 한 분을 대동하여, 그 분 집을 찾아 가셨다고 한다. 그러셨던 어머니께서 대장암으로 투병하시고 돌아가신지 이제 7년이 된다. 영국에서 사업한다고 신학한다고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다가, 신학교 여름방학 중에 2개월간 간병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지 몇주만에 돌아가셨다. 가까이서 뵙지 못한 자식이 가장 큰 불효임을 깨닫고, 평생 죄송함으로 살고 있다. 어머니는, 수년간의 긴 투병생활에서도 멀리 있는 막내아들 나에게 많이 의지하셨다. 회복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연로하신 분께서 얼마나 서럽고 서운하신게 많으셨는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전화를 드렸는데 한 번 통화하면 평균 2시간 이상 걸린다. 한 말씀 또 하시고 또 반복하시고. 어쩌다 내가 무심코 지나친 일에 대해 하나 하나 세심히 지적하시면서 그 서운함을 가지신 어휘력을 총동원하여 질책하신다 - 2시간 동안. 듣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전화기를 슬며시 내려놓고 싶지만, 그 섭섭하신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꾹 경청하면서 중간중간 ‘추임새’ 반응을 해야지 당신께서 서운해하지 않으신다. 교회개척하러 창원에 내려오기전, 어머니의 아래되시는 외삼촌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같이 식사하시면서 어머니를 회고하셨다.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니와 외삼촌 두 분, 이모 이렇게 네 분이서 식사 모임을 하시면, 자주 이러셨다고 한다. “강헌이 영국서 오면, 다 일러줄거야.” 듣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는 일에, 참 예민하셔서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을 그렇게 토로하셨다고 한다. 그 말씀을 전해듣고 내 숙소로 돌아가 참으로 서럽게 눈물 콧물 쏟으며 울었다. 더 전화할걸… 더 들어드릴걸… 그런 엄마가 이젠 없다. 지금 내 편이 절실한 이 때 없다. 지구인 99%가 내게 침을 뱉어도, 나를 끝까지 믿어주시던 그분이 없다. … … 어제 주일 예배 때, “네 부모를 공경하라”시는 설교말씀을 듣고 생각이 나서 적어봤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2-3) 051324 *작년 5월 기록한 글입니다.202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