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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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연약한 이 때가 은혜라]유다의 서쪽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그들의 주요한 성, 가드, 야브네, 아스돗 성들을 접수하고, 블레셋뿐만 아니라 남쪽 구르바알의 아라비아, 마온 사람들을 격퇴시키고, 동쪽의 암몬은 웃시야가 무서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대하 26:6-8). 그의 휘하의 군대가 무려 삼십만 칠천오백 명. 그가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명성을 떨치며…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역대기, 열왕기를 통해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보면 거의 모두 이 패턴을 밟고 있다. 솔로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왕권 초기에는 겸손하여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왕위가 안정되고 국가가 부강해짐에 따라 겸비함을 잃고 하나님을 등지고 실족한다. 다윗도 결코 예외라 할 수 없다. 이제 내가 목사안수받고 교회개척에 나선지 3년. 교회개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회가 세워지고 본격적인 목회를 하는가 했더니만, 본의 아닌 ‘강아지사건’으로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하고있다. 그 당시 주님께서 어느날 새벽에 내게 주신 메시지가 생생하다. “감당치못할 정도로 많은 걸 주면 예외없이 넘어지더라.” “네 원하는 것, 주지 않더라도… 네 바라는 만큼 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나이 16세. 모든 것에 어설프고 서툰 웃시야. 그때의 약함이 겸손함을 낳고, 그 겸손함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을 때가 그에게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시절 아니었을까? 아니면 강성하여 그 강건함이 차고 넘치매 동서남북의 온 열강이 그를 무서워하며 조공을 바쳤던 그 때가 더 행복했을까? 지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작고 연약하여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붙들 수 밖에 없을 때가 바로 귀하고 값지고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형통할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이 잘 풀릴 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항상 조심해야 한다. ‘겸손’이 바로 영적 능력이다. 경건의 형식의 옷을 벗고, 경건의 능력 즉 ‘겸손’으로 내면이 꽉 차올라야 한다. 겸손한 삶, 겸손한 자에게 주님께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에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아직 나의 내면에는 겸손으로 채울 공간이 한없이 넓다. 그래서 작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이 때가 좋다. 101625 *이상은 오늘 새벽설교 말씀 중 일부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qrrJQGlGp420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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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꼬이고 뒤틀어지는 이유]높은 창공을 배회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를 보고 놀란 타조는, 궁둥이를 하늘로 치솟게 하고 머리는 땅속에 파묻은 채 위기의 순간을 외면하고 아예 보지않으려한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모든 신경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이다."(칼 융)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신호가 뚜렷이 감지되었음에도 병원가기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다. 삶이 꼬이고 뒤틀어지고 불행한 이유는,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 직시하기를 애써 피하는데 있다. "문제 직시하기" - 그것 쉽지 않다. 바로 보면 볼수록 아프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보다 덜 아픈 길을 택한다.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애먼 환경탓, 주변탓, 이웃탓... 육신정욕 이끄는대로 쉬운 길을 택하며, 문제의 본질 자체를 아예 외면해 버린다. 좋던 싫던 힘들던 어떠한 환경도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함이 없다.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섭리 아래 있다. 내게 닥친 정황앞에서 불평, 원망, 탓함은 주님께 원망함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의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101125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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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라 사랑하라 용납하라]습기 가득찬 주일 아침. 끕끕한 이불 속 기상 순간부터 불쾌했다. 시들어가는 화병 속 국화는 언제 버릴까? 어젯밤 빨래했던 옷들은 세탁기 안에 여전히 젖은 채 있다. 용기 안 바닥에 몰려있다 왈칵 쏟아진 요거트가 식탁과 바닥을 어지럽힌다. 덥지 않은 날씨인데, 왜 이리 땀은 나는지? 땀과 비로 적셔진 채 빗길을 걷는 육신은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진다. 질퍽한 도로 위, 교회 입구를 막아선 차량 한대에 가뿐 숨이 턱 막힌다. 현관 앞을 막아선 수많은 무리들. 누군 우산을 접고 누군 주보를 나누고 누군 그 손바닥만한 곳에서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고... 예배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내게 따끔한 지적을 하신다. “그들도 너처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지친 몸 겨우 이끌고, 이곳에 나 만나러 왔단다.”(1) 이른 아침부터 별로 이쁘지 않은 생각들로 야단법썩 요란했던 내 마음을 이렇게 평정하셨다. 평안 속 천국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092825 (1)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John Watson: 스코틀랜드 목사, 소설가, 필명 Ian Maclaren) *사진설명: 교회에서 귀가길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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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것이 사역]"인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불편하고 갑갑한 것에 대한 참음. 덜 중요한 것을 멀리 할 수 있는 절제. 내 생명에 유익하지않은 생각에의 거부. 다들 아니라는 길을 포기하지않는 소신. 10년전 페북에 올렸던 글이다. 오늘 아침 지인 목사님께서 이 글을 소환하셔서, 새롭게 주신 감동을 보태고자 한다. 인내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전투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환경 속에서 그분을 좇으려고 발버둥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런 싸움에서 쉽게 이기도록 해주거나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줄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전투를 계속할 힘을 주길 바랄 뿐이다.(1)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이 세상에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도 이 전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기도는 전투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시간에 그 자신을 지키는 힘이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육신은 곤하고 멍들고 찢기고 지친 나머지 이젠 그만 하고자 하나, 믿음의 인내는 그 시간을 버티게 한다. 그 험악하기 짝이 없는 질고의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도록 죄악 앞에 주저앉지 않도록 붙드시고 도우시고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인내" 견디고 버티는 것. 아무 것도 않하고 허송세월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견디고 버티는 것이 바로 사역이다. 주를 향한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091325 (1) 필립 얀시, '기도', p145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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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즐길만한 이유‘100세’시대라고 한다. 60세가 지나 환갑이 되면, 장수하셨다고 축하하며 온 가족/친지들이 모여 ‘회갑연’이라는 인생 최대의 파티를 베풀었는데… 지금은 ‘회갑연’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인생 한창 때에 무슨 ‘장수’했다고 축하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건강하게 살까?’ 무거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 날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노년건강 전문의들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히 오래 사는 것’, 즉 ‘건강 수명’을 강조한다. 이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먹고, 재정을 관리하며, 노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건강 수명을 오래 유지하기위해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항상성(恒常性)”: 여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체의 각 기능이 균형있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 뇌과학에 의하면, ‘통증’과 ‘쾌감’은 뇌의 동일한 부위(뇌섬엽,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 등)에서 처리된다고 한다. 통증과 쾌감은 상호작용을 통해 불쾌감/유쾌감에 대한 다양한 감정정보를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1). 눈을 즐겁게 하는 숏츠에 “이것만 보구…”, “5분만 더…” 하면서 한참을 빠진 후 순식간에 불쾌감, 후회감이 마음 속에 작열하지 않는가? 나는 식사후 커피와 함께 빵이나 떡, 스낵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요새 내게 꽂힌 디저트는 ‘열풍으로 구운 양파’이다. 구운 양파의 풍미 가득한 스넥을 아작아작 입안에서 씹어 넘기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중량 110g의 작지 않은 양에다, 나트륨 130mg등 건강상 별로 아름답지 않은 성분들이 함유된 한 봉을 먹어치운 후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꼼작하지 않고 두어시간 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한 책만 바라보는 독서하는 시간도 그다지 즐겁진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시간이 즐겁다는 역설은, 내 안에 무언가로 채워졌다는 포만감, 새로운 생각으로 내 좁은 시야가 넓어졌다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을 헉헉대며 올라가는 등산이 즐거운 것은, 고통 후에 정상에서 외칠 “야호!”가 있기 때문이다. 뇌의 한 영역에서, 고통과 쾌락을 다루고 처리하는 두 기능이 50:50 절대 균형(Equilibrium)을 향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다. 한쪽이 반 이상을 점령하면 다른 한쪽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의 다이내믹한 조합의 연장선이다. 이 둘 간의 균형이 깨져 즐거움의 무게가 바닥을 향해 내려앉으면, 시소처럼 고통이 올라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경고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반작용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자기조정을 위한 ‘작용/반작용’의 정상적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을 ‘권태’라고 지적한다. 삶에 무료함이 들어오면, ‘어디 재미있는 것 없을까?’하고 더 짜릿한 자극을 찾는다. 더 큰 욕구가 밀려온다. 만족시키기 훨씬 더 어려운 욕망이 물밀듯 들어온다. 절대 균형, equilibrium이 무너져버린 상태이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쯤의 고통과 불행을 필요로 한다.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배안에 무거운 물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소원이 마음 속에 생기자마자 바로 충족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소일거리로 삼아 세월을 보내게 되겠는가? 아마도 권태가 밀려 들어올 것이다… 행복에 대한 최대의 적은 무료함, 권태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욕구와 만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이때의 행복은 지극히 짧다. 금세 무료함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2)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근심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명확히 알아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고 불행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행복을 상기하게 된다.”(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의 시기는, 잊고 살아왔던 소중한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감사하게 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클수록 절대주권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돈독해진다. 내게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하시는 주권자를 향한 나의 믿음에 철썩 같은 신뢰가 있기에 그러한 상황을 그가 허락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창 22)은, 이를 감당할만한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신뢰하셨기에 그리하신 것이다.하나님의 약속(창 15:4)대로 언약의 자손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자식을 얻었던(창 16:15-16) 그때의 초라한 믿음 정도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시험인 것이다. 욥의 고난도 이와 다름없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 이와 같이 철썩 같은 신뢰가 있었기에, 그 끔찍하고 처참한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자신의 주변을 엄습해올 때,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고난이 해결된 결과보다 잃었던 삶의 균형, 항상성을 되찾아가는 고통 속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곱씹어봐야 성장한다. 성숙해진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너져 내린 ‘항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그만큼 필요하기에 장시간의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낼 믿음을 신뢰하시기에 허락하신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어둠이 짙게 엄습해올수록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으므로… 고통 속 견디어 내는 과정이 내겐 즐길만한 것이요, 주님께 영광이다. 고난의 때에는 무엇을 하려 하지말고 생각하라.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전 7:14) 090525 (1) Soo Ahn Lee, ‘Brain representations of affective valence and intensity in sustained pleasure and pain’, PNAS(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June 11 2024,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0433121 (2)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서울: 동서문화사, 2016), pp 17, 27, (3)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pp 75-76, 84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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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ease me간밤에 비가 왔다. 번개와 뇌성이 동반했다. 하늘의 꾸짖음에 무더위는 고개를 숙였다. 아침 식당안에는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Release Me’가 흘러나오고 비에 흠뻑 젖은 수풀내를 맡고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더위에 뜨겁게 달궈졌던 산책로는 박하사탕처럼 “화아~”하고 상큼한 내음을 뿜으며 나를 반긴다. 지난 50일간 이사와 정착과 나름 세운 계획대로 일정을 소화하다 무리한 것 같다. 특히 어제는… 방에 있으면 덥고, 냉방 잘 된 도서실로 가면 춥고, 누우면 땀나서 싫고, 앉아서 책 읽으면 집중이 안되고, 무얼해도 불편하다. 피지컬과 멘탈이 모두 바닥이다. 나의 영혼과 육에 관심을 쏟는 친한 벗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상념 한 조각, 조각마다 그냥 지나가질 않는다. 그 뭐가 대단하다고 ‘회상(回想)’이라는 구덩이를 내 마음 여기저기에 깊숙이 파놓는다. 심란하다. Release me! 육신의 연약함, 죄성, 회상속 침륜(沈淪), 사람의 인정…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082625202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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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30%가 죽어나가도 여전히가장 참혹한 질병 중 하나는 문둥병(한센병, leprosy)이다. 말초신경계에 나균이 침범하여 감각이 소실되는 끔직한 병이다. 불에 데여도 뜨겁지가 않고, 살이 썪어져 가는데 아픔이 없고, 발가락이 괴사되어 떨어져 나가도 통증이 없다. 영혼에 치명적인 유혹이 밀려들어와도, 달콤한 죄악의 낙을 은밀히 음미하여도, 탐욕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도, 영혼의 감각이 소실된 환자처럼 ‘나는 문제 없어!’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도 거룩하지도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주여! 주여!”하면서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실체 없는 텅빈 고백을 습관적으로 외친다. 영혼의 생살에 나균이 덕지덕지 눌러붙어있는데도 애통함이 없다. 영적 몸부림이 없다. 말세의 때에는 독특한 징후가 있다. 자신의 행위가 더러워도 구역질 나질 않고, 징계를 당해도 돌아봄이 없고, 죄를 자행해도 뉘우침이 없다. 한마디로 뻔뻔하기가 그지 없다. 바로 옆사람이 죽어나가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여섯째 천사의 말로 말미암은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류의 1/3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죽지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에게 절하며 죄짓기를 즐겨한다(계 9:18-21). 오히려 심판의 예언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두 선지자의 죽음을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축하한다(계11:1-10). 이들에게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10:9)” 꿀송이같이 단 말씀을 먹는 자들이다. 문제는 달아서 삼키기 쉬운 말씀이 배 속으로 내려가니 쓰디 쓰다. 곤한 육신을 위로하며, 지적 욕구를 채워주며, 인본적 자아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설교말씀은 육과 혼을 즐겁게 해주었지만… 듣고 읽은 말씀을 순종으로 행하려 하니, 자신의 익숙했던 생활, 습관, 인생관, 가치관, 쌓아 놓은 소유들과 여러모로 부딪친다. 더욱이 믿음의 길을 가려면, 이 귀한 것들의 포기뿐만 아니라 고난이 따른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믿는 길을 따르자니, 세상의 상식과 처세와 배치될 때 닥칠 왕따와 어려움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쓰다. 몹시 쓰다. 고통이 극심한 환란 가운데…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계 9:6)’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류의 1/3이 죽어나가도…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경시되고 외면된다. 선지자의 경고 메시지마저 배 속에 쓰리다고 배척하며 그들을 미워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뻐한다. 지금 한국 교회 상황이 그렇다. 스마트폰 속 붉은색 유튜브 아이콘이 불이 나도록 당대의 쟁쟁한 설교말씀 즐겨듣고 좋아서 “아멘, 아멘!” 하지만, 정작 순종의 행함 앞에서, 넉넉한 포기의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 배가 쓰리다고 말씀 앞에서 돌아선다. 이것이 불순종, 불신앙, 엄연한 죄임에도 끄떡없다. 목은 곧고 뻣뻣해서 수그러지지 않는다.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생활의 염려 가운데 실질적 도움이 되는 힘, 능력, 인맥, 돈의 우상에 영적 초점이 산만해진 시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경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경시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삶을 부정하는 시대이다. 귀를 즐겁게하는 인본의 소리, 혼과 육을 즐겁게 하는 지성과 교양과 인문의 소리,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각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에는 귀를 틀어막고 돌아선다. 참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는 싫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교회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눅 12:49) 예수의 가르침을 적절히 편집하여, 세상의 정신과 타협하고 있다. 세상적 관점에서 규모와 크기로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거룩한 성직의 자리가 남용되고 있다. 세상에 예수가 필요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오로지 사는 길은,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문제있는 죄인임을 경각하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참 목자는 성도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죄성을 드러내고 깨닫도록 하여 예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설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유모어와 위트도 섞어가며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성경 난제를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원어문헌을 신학적으로 해박하게 해석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인품이 온화하고 고상한 도덕자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성도들을 예수 앞으로 데려다 놓는 사람이다. 바로 베드로가 삼천명의 영혼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이들이 탄식하며 내뱉은 반응이 무엇이었던가?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행 2:37 )” 이 죄인된 삶, 앞으로 어찌 살꼬? 이들의 의문에 베드로는 뭐라고 했는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복 받고 은혜 받으라는 격려 이전에 “죄의 문제부터 해결받으라!” 하지 않았던가? 그 베드로도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반응이 무엇이던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우리는 조국과 북한,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여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과 자녀의 죄를 놓고 울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08232520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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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하나되기에 충분한 교회의 규모어제 인근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도수 100명 정도 참석하는 주일예배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드리는 교회다. 예배후 담임목사님과 오찬을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예수의 증인으로서 복음전파와 선교에 사명의 초점을 두며, 그동안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며 성도수 200명이 되면 분리 개척해오고 있는 교회라고 소개하셨다. 주님께서 애당초 쏘솔티교회에 주셨던 비전과 너무나 흡사해서 표현은 않했지만 속으론 짜릿한 흥분과 함께 경청했다. 당대의 제일 가는 율법학자요, 학문 높은 최고의 지식인이요, 귀품있는 로마장교로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삶이 180도 달라졌다. 핍박과 능욕과 고난과 침뱉음으로 가득한 삶으로 바뀌었다.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수가 많아지면 그곳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사도행전의 대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두세 페이지 분량으로만 채워졌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루스드라, 더베, 빌립보로… 그리고 데살로니가, 고린도, 그 다음 에베소… 이렇게 한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면 또 다른 생경한 도시로 달려가 목베임과 채찍질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를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형극이 기다리고 있는 낯선 곳으로 달려갔다.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연단받고 단련된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부터 해이해지고 안이해졌다. 삶이 안정되고 부가 쌓이고 이웃나라와 교역을 통해 풍요로와짐에따라, 그들의 영성에 낀 기름기는 두터워만 갔다. 성직자들, 성경교사들은 모임의 상석에 관심을 두고 직분의 높이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다가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며,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던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에 눈이 멀어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다. 성전은 화려해지고 예식은 더욱 거대해지고 제사장의 수효는 많아졌지만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의 순수함은 날이 갈수록, 외면의 화려함과 규모에 촛점을 잃고 탁해져갔다. 신앙의 본질은 외면되고 비본질에 사로잡혀갔다. 영국땅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운 사람은, 토마스 헬위 목사(Thomas Helwys; 1575–1616)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침례교회는 존 스미스 목사(John Smyth; 1554 – 1612)가 영국의 국가교회인 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망명했던 암스텔담에서 세운 가정교회이다. 스미스 목사와 그곳에서 동역하던 헬위는 런던으로 귀환하면서, 당시 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국가가 통치하던 기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자신의 진술을 정리한 ’A Short Declaration of the Mystery of Iniquity’책을 보냈다. 괘씸히 여긴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헬위는 4년후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이 책을 헌정하기 직전 저술한 책, ‘A Declaration of Faith of English People Remaining at Amsterdam in Holland’에서 헬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적절한 규모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한다. 화려한 예식과 웅장한 규모를 뽐내는 성공회의 교회시스템과 비교하며, 아래와 같이 밝힌다. “교회는, 구성원이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리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모든 성도들은 서로를 잘 알아야 하며, 그리함으로 영혼과 육신에 관련된 서로를 향한 모든 사랑의 의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직분자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지도자로 세우신 뜻을 깨달아 온 양 떼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A church ought not to consist of such a multitude as cannot have particular knowledge one of another... The members of every church or congregation ought to know one another, so that they may perform all the duties of love one towards another, both to soul and body. And especially the elders ought to know the whole flock, whereof the Holy Ghost hath made them overseers.” (1) 엊그제 큰매형과 누님이 오셔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서울의 대형교회에서 두 분 다 직분자로서 성실히 섬기신 분들이다. 유려한 설교, 실력 쟁쟁한 사역자들의 수준 높은 케어, 무얼 하든 규모와 위엄을 자랑하는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들, 촘촘한 직분제도, 수많은 교제와 만남들… 이러한 대형교회의 시스템에 오랜 기간 익숙해져서인지, 세종시로 내려와 많은 해가 바뀌었음에도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했다.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간만에 만나면 신앙이야기로 대화의 장을 대부분 채우지만, 온전히 영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2%의 부족함이 서로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최근 교회를 정하고 정착한 지 꽤 되었다고 한다. 세종시 구석 산자락 아래 소재한 작은 침례교회라고 한다. 겸손하신 목사님은 어눌하신 말주변으로 설교만 담당하시고, 모든 봉사와 사역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모든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음식을 나누”(행 2:42-47)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과거에는 아쉽게도 직분에 대한 의식, 주변에 대한 의식, 드러내려는 영성 등이 나의 영적 예민함에 감지되었다면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 ‘주안에서 하나되는 교제’와 같은 신앙의 본질에 흡족히 적셔 있었다. 교회의 물리적 크기가 커짐에 따라 서로 관계하는 구성원수가 많아지면, 관계의 깊이와 질이 양보되어질 수 밖에 없다. 본질만을 향한 영적 초점이 여기저기서 들이닥치는 비본질에 대한 관심들로 산만해진다. 현대교회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가지 재원과 인재를 확보하여 시스템으로 보강하려하지만, 시스템에 익숙해진 연약한 성도만 양산시킬 뿐이다. 081825 (1) Thomas Helwys, A Declaration of Faith of English People Remaining at Amsterdam in Holland, quoted in William L. Lumpkin, ed., Baptist Confessions of Faith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69), 120–121.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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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방주 UFO를 타야 하는가?몇 년전 꿈속에서 대형 씨네마스코프 4K 총천연색 화질로 내게 보여주신 이미지는 매우 충격적이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세상은 죄악과 음란과 탐욕으로 여기저기가 소란스럽고 경쟁과 갈등과 다툼으로 어지럽기가 그지없다. 한치앞이 안보이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별도 달도 없는 칠흑 같은 하늘로부터 붉은 빛 초대형 비행물체가 내려앉는다. 지상에 착륙한 비행선에서, 서두르지 않는 저음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임박한 종말을 피하시오! 서둘러 비행선에 탑승하시오. 조금 있으면 떠납니다.” 넓은 광장은 비행선이 뿜어내는 붉은 빛으로 피처럼 붉어졌고… 구원의 희망을 잡고자 사람들은 비행선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연로한 노인들은 밀려 길바닥에 나뒹굴고.. 넘어진 자들은 뒤에서 쇄도하는 발걸음에 밟히고... 종말을 피해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조선을 향해 내딛는 길은 기쁨도 평안도 없었다. 광경을 목격하는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타야 되나? 말아야 하나? 수년동안 이 꿈이 나를 수차례 소환했지만, 오랜 기간 나는 이 질문에 답을 못했다. 그러다 얼마전 이 성경구절이 명징(明澄)한 답을 줬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나만 구원의 방주 UFO 타고, 이 구차하고 무겁고 힘든 인생, 광폭하고 이기적이고 비열한 세상 떠나면 그만… 이 아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값없이 주신 주님께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이루기를 요구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使臣)이 되어(고후 5:20),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이땅에 남기를 원하신다. 구원받고 갱생의 축복이 임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기뻐서 전하고자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양심에서 나오는 발로이다.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 안의 양심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삶에 한 줄기 기쁨도 희망도 없는 기구한 인생,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직후 했던 반응이 그렇지 않은가? (요 4:28-30) 중병을 고생고생하며 앓아 왔던자가 나음을 입게되면, 그 의원, 그 약 소개하고 싶지않은가? 이 단계, 즉 복음을, 영혼에 좋은 의원을 소개하고픈 마음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단계에 이르면, 이렇게 기도하게된다. “지경을 넓혀주옵소서.”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의 영적 성장의 단계를 기도문의 형식으로 아주 잘보여주고 있다. 정말 아쉬운 것은… 아베스의 기도(대상 4:10)에서 (1)내게 복에 복을 주시고 (2)(복음전파할 수 있도록)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3)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4)나로 환난을 벗어나 (5)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것이 영적 성장의 순서인데, 제2단계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이웃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함을 몹시 사모하는 단계를 쏙 빼고, “주님 도와주소서, 고난이 없고 근심이 없게 해주세요.” 이 부분만 열심히 간구한다. 왜 그런가? 복음전파에는 방해세력들의 훼방과 위협이 따른다. 그래서 특별히 부름받은 사역자, 전도자들만의 책무라고 착각하고 전도하지 않는 자기를 자위한다. 목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교회 전도자들에게도 이러한 물리적 핍박과 목베임, 채찍맞음과 같은 형벌이 함께 했다. 그래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는 공회의 명령과 함께 풀려난 사도들은 다시 담대히 복음전도를 재개하면서 무엇을 간청했는가?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9-30) 전도에 따라오는 고난은 영광의 면류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당연히 따라오는 고난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 믿음이 더 장성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이 연단의 과정을 경험하도록, 우리 주변에 악이 활동하도록 놔두시며 아픔과 고난과 참소와 치욕을 겪도록 환경을 허락하신다. 믿기만 하면 그냥 거저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그 과정에서 악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My prayer is not that you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protect them from the evil one. 081325 *image from https://ymi.today/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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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교회가 하나님 계획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절대 과거 교회가 범했던 오만과 교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자기만족에 빠져서 소위 세련된 설교와 박식한 언변을 자랑하고 즐기면서 그런 일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십시오. 번영한 빅토리아 여왕시대 사람들이 편안하게 예배를 즐기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학을 믿고 계시를 철학으로 대체하는 모습을 주목하십시오.”(1) 60여년전 마틴 로이드목사가 진단했던 현상이 그대로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역사는 반복한다.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목적이 있다. 지금 21세기에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분의 때에 그분의 계획대로 일을 하신다.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실 때와 징계를 주실 때를 분명히 구별하셨듯이… 영국에게 빅토리아시대의 부국강병 태평성대 축복의 때와 세속주의에 만신창이 되고 세상권세에 수탈된 영적 암울기를 주셨듯이… 숫자와 외형적 크기에 눈먼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상기하여 영적 안이와 나태와 교만의 잠에서 어서 깨어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081025 * Image from https://www.gotquestions.org/little-sleep-slumber-poverty.html202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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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관계이다진정한 관계는 친구가 뭘 해줘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기에 같이 있고 싶어진다. 이것 달라고 보채고 저것 해결해달라고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과 함께 시간을 갖고 싶어서 그 앞에 무릎 꿇은 적이 얼마나 되던가? 그가 주신 평안 속에서, 길을 걸으며, 버스를 타며, 산책을 하면서 말이다. 내쪽에서 뭘 좀 하면 그 다음 저쪽으로부터 돌아올 대가를 기대하는 식의 기도는 일종의 거래다. ‘관계’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거래’로써의 기복으로 변질된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1)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이 내 안에 계시는가 또는 부재하시는가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 다만 내가 인식하지 못해서 부재 중으로 느낄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를 주어로 치환해서 문구를 바꾼다면, ‘하나님을 향한 나의 몰입’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맥도날드매장에서 종달새처럼 친구들과 웃음꽃 함박, 깔깔 호호 떠드는 여중생들을 보라.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친구와의 대화, 몸짓, 표정에 즐겁게 열중한다. 그들의 서로에대한 몰입력은 경이롭다. 주님과 대화하면서… 옆사람 통성기도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든지,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표현상의 문제에 지나친 신경을 쓴다든지, 오랜 시간 응답이 없어 낙망하여 돌아서려 할 때마다… 특별히 이 부분, 즉 친한 벗을 향한 ‘몰입’에 문제가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대부분이 여기에서 비롯됐음을 깨닫는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항상 살피시고(시 33:18) 우리에게 온통 관심을 쏟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 수양의 기름이 필요없다.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기복적 의식, 종교적 군더더기가 필요없다. 친구처럼 친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 필립 얀시, 기도 (서울: 청림출판, 2007), 86; Philip D. Yancey, Prayers: Does It Make Any Difference? (Grand Rapids, Zondervan, 2006) *사진: 지난 3월 창원대 산책길에서20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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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받는 설교자오늘, 영국영화 'Emma 2020'를 봤다. 지극히 영국적이다. 영국의 자연, 캐슬, 가든, 인테리어, 예술과 색상... 부와 신분에 민감한 속물적 근성을 애써 감추려는 예의로 치장한 언어들... 영국에 15년 살고, 그곳을 떠나온지 4년된 내게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주인공의 친구 Harriet Smith가 한 말이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몸이 아파, 엘튼목사의 크리스마스 설교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에서 나온 표현이다. "Mr. Elton will be there... And Mr. Elton's sermon. A sermon on Christmas Day." 이런 아쉬움과 사모함을 받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080225 *image from https://www.habituallychic.luxury/2020/02/a-look-at-the-emma-film-location-firle-place/2025-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