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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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자와 신자의 차이믿는 자와 비신자의 차이는, 자신에게 영생이 있고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영생이 있음을 수긍해도 그 가치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가의 차이에 있다. 이 땅에서 길게 살아봤자 100년 정도의 아주 짧은 삶과 영원한 삶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영생을 설계하고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앙적 입장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신자와 비신자, 즉 양과 염소로 갈린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모르면서 교회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수를 안다”는 의미는 단지 지적으로 알거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를 통한 ‘지/정/의’, 즉 지식, 지혜, 이해, 분별, 성찰(知), 감정, 사랑, 기쁨, 분노, 열정, 애정, 배려(情), 뜻, 의지, 결정, 선택(意)등을 포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 깨달음이다. 나는 결혼 전부터 내 아내를 알고 지금도 잘 알지만, 30년간 한 방을 같이 쓰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살아 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안다. 결혼 전 그녀를 피상적으로 알았던 수준과는 양적/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금과 비교해볼 때, 결혼 전 그녀를 알았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녀와 동반자의 삶을 지속할수록 그 전인격적 깨달음은 점점 숙성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1 2:3) 윗 구절에서 ‘알다’의 의미로 쓰인 헬라어 ‘γνωρίζω(그노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 그와의 관계를 통한 전인격적 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체험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를 체험하고 알게 되면 그를 향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높으시고 위대하신지 깨닫게 되면 그를 경외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을 두렵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듣게 된다. 그이 위대하심 앞에 나의 작고 초라하고 연약함이 보인다. 그가 커짐으로써 나는 작아진다. 내가 커지는 것과 내 능력이 강해지는 것과 정반대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에서 나온다. 순종이 힘들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나는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하지 말라. 사랑한다는 선포에는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주를 향한 경외함과 사랑에서 저절로 나오는 순종의 마음이 퍼부어 지는데 어찌 무덤덤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왔던대로 자기 원대로 자기 힘껏 함부로 살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6-7) 코람데오… 그의 사랑, 긍휼, 희생, 애통함, 당부, 계획 등에 대한 구체적 실체가 내 안으로 쏙쏙 들어와서 요동을 치고 마음을 휘 젖는다. 내 안에 그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알고, 내 삶의 주인이신 그를 믿음으로 내 안에 영접하면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작고 미세한 변화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엄청난 극단의 변화이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뀐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 내 영역, 우리 것에 대한 주장에 익숙하다. 그리고 주인의식, 주권, 책임감을 강조하는 사회는 자기 껏에 분명한 선 긋기를 더더욱 부추기고 있다. 여태껏 내 인생, 내가 살고… 누군가 자기에게 조언 한 마디 하려 하면, “됐어요! 내가 알아서 알게요.” “내 인생, 내가 주인이고 잘 돼도 못 돼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듯 우리는 자기 삶에 주인의식이 투철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권, 민권, 인권의식이 강해지고 강조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자아중심적 사고와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우리의 가치관을 사로잡고 있다. 기존의 전통, 사회규범, 절대적 진리도 자신의 가치관과 관념에 따라 쉽게 허물어진다. 그런데 가진 지식이 아무리 많고, 가진 재물 엄청나게 많고, 주변에 좋은 인맥 수두룩하고, 자신이 수십년간 준비하고 염원했던 계획들, 원하던 대로 빠짐없이 잘 되던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안 되는 일은 안된다. 누구는 절치부심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골백번 다짐을 하고 다시 해도 안되는 일은 안된다. 외부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의 거대함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미약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누구는 점을 보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잃었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본질이요, 믿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삶을 사는 것. 살아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을 해도 주님의 이름에 존귀함을 드리도록 일하고, 누굴 만나도 주님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 그런데 이것이 지적인 이해만 되고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전인격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은 상태가 되면, 가짜 ‘성화’의 상태에 빠진다. 마음밭은 온통 나, 나에 대한 것으로 꽉 차 있음에도, 입술로는 “주님, 주인님, 주인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준행하는 삶이다. 성화의 목표는 더 나은 인격, 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관계함으로써 그를 체험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은 그와 끊임없는 소통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그 통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다. 가짜 성화는 자신에게 집중하기에 기도를 자신의 영성개발의 용도쯤으로 여긴다. 기도 많이 하면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자부한다. 기도 몇 시간 한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 평상시 그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와 단절된 삶을 갖다고,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을 원 없이 펼쳐 나가다 뭔가 필요하면, 계획 중에 안 풀리는 문제가 생기면 램프의 요정 지니를 찾듯이 예수를 불러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은, 성화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주인되신 그분에 대한 것이다. It’s about God, your Lord.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어도, 그가 주인 된 삶을 과연 내가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는 구원의 여부를 가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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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터에서인간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이것을 한다 밥 먹으면서, 얘기하면서, 일하면서, 컴퓨터게임하면서도… 잠시도 이것을 멈추지 않는다. ‘생각’. 생각이 바로 나다. 지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이를 잘 나타내는 지표는, 자신의 구글 검색 히스토리 또는 유튜브 방문 히스토리를 눌러 보면 잘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관심과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인터넷에서 자신이 검색하고 수용한 정보들의 누적과 기타 다른 방법으로 보고 들은 정보들에 대한 취사선택한 결과치가 자신만의 ‘생각의 틀’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체계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인격(혼)을 세워가며,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결정을 유도하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이것을 잘 아는 마귀도 우리의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힘쓰고 애쓴다. 영적 전쟁은 내 ‘생각’ 밭에서 벌어진다. 가룟 유다도 사단에게 생각의 영토를 내주다가 망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생각은 마음과 연결된다. 생각이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하다. 생각이 선하면 마음도 선하다. 생각과 마음은 어깨동무하며 함께 다닌다. 마음이 악하면 생각도 악하다. 마음이 이기적이면 생각도 자기중심적이다. 창세기 6:5에 의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표현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the thoughts of his heart; KJV)’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우리의 생각과 마음 밭은 지구 최대의 영적 격전장이다. 이 치열한 영적 전장터의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 마귀는 열심히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두루’ 돌아 다닌다. 그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야욕은, 우크라이나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푸틴의 야심보다 2만배는 강력하다. 이를 위해 ‘두루 다니는’ 열심은 그의 특성이다. 신약과 구약에서 일괄되게 표현하는 그의 고유한 특징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마귀가 이리도 열심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졸지 않고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새벽 파숫군의 눈동자처럼,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각의 골격에 그와 비슷한 생각의 살들이 붙어 나가면 사고의 체계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의 틀이라는 패턴(pattern)이 형성되고, 이 패턴을 자신과 친화적인 정보체계라고 인식(pattern recognition)한 정보 알갱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들러붙으며, 이 과정이 지속될수록 서로 끌어 당기는 관성의 힘은 거대해지고 요지부동한 사고 체계, 즉 가치관, 세계관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확립된 가치관은 웬만한 설득과 호소력 있는 읍소에도 요동치 않는다. 크리스천의 신앙 가치관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립되고 견고해진다. 반면에 진리를 대적하는 생각도, 동종의 생각 편린들이 함께 뭉쳐서 사고체계가 형성되고 가치관/세계관으로 자라나면 그것이 견고한 진이 된다. 더 이상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을 보아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마음 속에 세운 - 돌처럼 단단해진 - 가치관대로 취사선택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가치관의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세상 살아가는 상식과 대립되기도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품고 살아가는 말세 시대의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징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분명히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말씀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상반된 가치관, 사고체계가 자신 안에 또아리 틀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집착하게 하는 세상적 가치관, 세상임금 마귀가 집어넣는 생각,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막 4:19)이 자신 안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세의 징후는 배교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 크리스천이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다(딤후 3:5). 항상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한다(딤후 3:7-8). 이는 가치관의 혼란에서 비롯되어 믿음에 금이 가면서 시작된다.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수 많은 좋은 설교와 성경강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순전해야 될 크리스천의 마음과 태도와 삶은 더욱 더 뿌옇게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외형적으로 분명히 자타가 공인하는 교인인데, 집사인데, 장로인데, 이러한 영적 가치관의 혼란 속에 빠져있어도,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한다.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설교는 수려하고 빼어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올바른 뜻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성도의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마 28:20). 성경은 삶의 참고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되는 매뉴얼이다. 매뉴얼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세월 앞에 쉽게 망가지는 가전제품처럼 망하고 만다. 매뉴얼(성경말씀)대로 자신을 관리하며,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미혹된 자이다(약 1:22). 말로만 “주여! 주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마 7:21). 말로만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그쯤이야 괜찮다”는 생각, “다들 그렇게 하던데…”하며 자위하는 생각을 은밀히 주입하는 마귀를 결박시켜야 한다. 한 번 당하면 계속 당한다. 한 번 양보한 전장터는 더 큰 퇴각을 예고한다. 내 안에 살포시 들어온 조그마한 분이 죄를 잉태한다(엡 4:26-27). 그 조그만 것이 미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을 잉태한다. 부지런하고 열심인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후회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 가던 길을 멈추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바로 멈춰야 한다. 우물쭈물 방치하는 사이, 마귀가 순식간에 부지불식 들어온다.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 혼자 깨어 있기 힘들면, 깨어 있는 자 옷깃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교회의 힘이다. 이러한 영혼의 간절한 몸부림마저도 없으면, 예수 안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진지하게 짚어봐야 한다(고후 13:5). 031124 *image from https://studyandobey.com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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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하루 종일 추적대던 빗줄기처럼 마음 속 상념은 내 심산(心算)을 어수선하게 흔들어 대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물 속에 산을 안고 파르르 떨던 호수처럼… 비가 온 뒤 호수는 아무런 파장도 없고 의연해졌다. 그에게 내비친 메타세콰이어는 일그러지고 굽어짐 없이 쭉쭉 뻗은 자태 그대로이다. 안정을 찾은 호수는 자기를 찾은 나무와 꽃과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고요한 호수는 내게도 평안 가득 선물을 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호수와 자연과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큰 행복이다. - 창원대 산책길에서 09:30pm, 02292420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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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셔도 다 주시지 않는다달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한밤 중,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갑자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계속 말씀을 주신다. ‘꿈이겠지’하며 곤한 육신, 계속 잠자기를 고집하며 비몽사몽 중에 버티면서도 들리는 그의 말씀은 또렷하다. “내가, 네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도 다 주지는 않는다.” “평생 공급이 끊이지 않고 필요가 충족된 상태에는 갈급함이 없다.” “내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한국에 사역하러 나온 지 훌쩍 4년이 가까와온다. 평생 동안 겪어본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갈급과 결핍을 겪는 나에 “들으라!” 하신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필요의 여백이 나를 살린다. 의지하게 한다. 두드리게 한다. 부르짖고 구하게 한다. 오뉴월의 가뭄 끝에 악착같이 살아내려는 마른 뿌리의 간절한 생명력에, 한여름 장대비에 대한 소망으로 꽉 차오른다. 단단한 콘크리트 아스팔트 바닥에 숨이 막힌 채, 생명의 빛 줄기를 향한 여린 싹의 애타는 몸부림은 아스팔트의 초극세 빈틈을 찾아내게 만든다. 결국 그 빈틈을 뚫고 빛을 만나고 만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윗 구절에서 시냇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פֶּלֶג(펠레그). 자연의 상태에 있는 시내가 아니다.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농부가 인공적으로 물을 댄 수로(channel)이다.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돌보는 과실수처럼, 자연 상태에 있는 나무들도 하나님께서 세심히 돌보심으로 철을 따라 과실을 맺는 형통한 나무가 된다는 말씀이다. 습기 하나 없이 메마른 지 꽤 오래된 땅에 서있는 나무도 때가 되면 푸른 잎사귀 내고, 과실을 맺도록 돌보신다는 것이다. 오랜 춘궁기에 시달린 깡마른 표범에게는 결핍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날렵함이 있다. 살기 위해 잡아 먹어야 하는 간절함이 있다. 일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그는 말랐지만 민첩하고 사납고 강인하다. 때가 되면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 먹으며 일상을 보내는 동물원 사자는 무기력하다. 매일을 쿨쿨 잠 자는 것으로 꽉 채운다. 그의 졸리운 눈은 2/3 가량 감기운 채, 낙도 희망도 생명력도 없어 보인다. 그를 바라보는 창살 밖 관람객도 축 처진다. 필요할 때 언제나 자기 보다 작고 약한 동물을 잡아 먹고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힘세고 용맹스럽던 동물들은 쉬이 멸종됐다. 지금도 멸종 위기에 있다. 맘모스, 티라노사우르스, 벵갈 호랑이, 골리앗 개구리, 아프리카들개 리카온… 반면에, 작고 미약해서 남에게 쉽게 먹잇감이 되던 동물들은 오랜 시대를 거쳐 종을 이어가고 있다. 사슴, 영양, 새, 벌레들… 덩치 크고, 날렵하고, 사납고, 힘센 자는 빨리 멸하고, 작고, 가녀리고, 약해서, 남에게 쉽게 당하는 자는 오래 간다는 패러독스가 지구 생성 이후 역사를 통해 증명된 진리이다. 가장 오래 사는 종은 가장 약한 것. 살기 위해 항상 깨어있고, 자기 생명을 지키려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가녀린 종들이다. “Winner lives short, loser survives long.”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012424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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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feel small한 해를 마무리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내게 최근 열흘간은 별로 좋지 않았다. A형 독감이 나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특히 밤중에 심했다. 오한에다 머리는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예리한 통증으로 매일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육신의 병마는 쏜살같은 속도로 나의 멘탈까지 무너뜨린다. 속수무책, 이불 속으로 움츠러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력감이 밀려 들어오고, 아무 연고도 없는 창원엔 “왜 왔지?”하는 자조적(自嘲的)인 생각마저 나를 휘감는다. 나쁘고 망할 생각임을 앎에도 쳐들어 오는 적군을 막아낼 힘이 없다. 앉아서 그냥 당하는 형국이다. 영혼마저 파리해져 기도는 하지만 간절함은 없다. 오늘 몸상태가 한결 좋아진 것이 느껴져, 정오의 찬란한 햇살을 잔뜩 품에 안고, 평소에 전도했던 지역 상점, 식당들에 마실갔다. 전도자에겐, 상대방의 무관심이 가장 두렵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든다. 평소 데면데면 했던 컴퓨터수리점 사장님이 오늘은 웬일인지 나를 반긴다. 그 동안 감기 때문에 못 왔다고 하니까, 뜨거운 도라지차를 내놓는다. 개업한 지 반년이 되어가는 국수집 여사장님은, 식당 하기 정말 힘들다며 이것 저것 푸념을 내놓는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상대방에게 토로하면서 푸는 스타일인 것 같다. ‘그래, 들어 주는 것도 전도다!’라는 생각으로 간간히 맞장구를 쳐가며 약 2시간을 귀담아 들었다. 오랜 시간 듣기만 한 후, 복음의 메시지로 반응을 하니, 듣는 이도 이미 부드러운 심령이 되어 있었다. 전도자의 전하는 말씀에 겸손히 경청한다. 올 봄 해군에서 제대한 후 시작한 차량광택서비스점의 젊은 사장님은 주문 들어 온 차량에 필름을 입히는 정교한 작업을 하느라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뜨거운 커피와 도넛을 의자에 놓아두고 나왔다. 그래도 사업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 이렇게 일감이 꼬리 물 듯 들어오니 내가 기뻤다. 30대 중반 아직 미혼인 최사장님은 도넛전문점과 호주식 레스토랑, 두 개의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플랫 화이트를 주문한 내게 커피를 갖다 주면서, 내 앞 빈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그가 대화를 주도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인생, 결혼, 가족 등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오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말미에 자신이 경영하는 도넛전문점 아래의 창고가 비어있는데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출입문 비번을 알려주면서 들어가서 보라고 한다(사진 참조). 오늘 오후, “I will build my church(마 16:18)!” 선포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또렷이 실감케 하셨다. 창원에 내려와 전도를 하면 할수록, “교회가 어디예요?”라는 질문에 대답할게 없었던 전도자에게 큰 위안과 선물을 주셨다. He cares for me even when I feel small.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010324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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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그럼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를 외쳤던 마틴 루터의 구호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롬10:10).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다윗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오직 믿음을 잘 지켜 부활의 날,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핵심아니던가? 사도들과 그들의 무리들이, 채찍질과 결박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던가(히 11장)? 그런데 그보다 더 귀한 가치는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의 좋은 것, 맛난 것, 세상낙 다 즐기지 못하고 절제하며, ‘거룩’이라는 부담되는 옷을 입고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이유는, 소망때문이 아니던가? 믿는 자마다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요3:16). 믿는 크리스천과 믿지 않는 이의 다른 점은 이 소망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가(살전 4:13)? 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 믿는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자 아닌가(고전 15:19)? 그런데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랑. 예수는 사랑으로 오셨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은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다(요3:16).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때문에(갈2:20) 우리가 비로소 죄로부터 자유하고 영멸의 심판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게 되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사지로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소망도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신약의 산상수훈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건생활에 중요한 계명이 쉐마(Shema), 즉 신명기 6:4-9 구절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는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고, 강론하고,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마을입구 문에 기록하라고 하셨다. 왕과 백성관계라는 단지 계약적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만으로써 하나님의 명하신 사랑을 그들이 지켜낼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뜨거운 감정 없이는 지키기 힘든 계명이다. 나의 영국주재시절,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상사하고 잘 지내라." "넓고 길게 봐라." "어머니께 안부 전화 자주하고..." 그 말씀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명심하고 지키려 힘썼다. 오래 살아보니 맞는 말씀이라서라기보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기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이의 말씀이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당부이기에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부둥켜안고 지키려고 애썼다.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으로 교감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랑없는 믿음은 소리나는 구리요, 사랑없는 소망은 울리는 꽹과리이다. 하나님과 서로 사랑을 주고 나누는 관계가 튼실하면 이웃을 향한 수평적 사랑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믿음은 거짓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이웃사랑은 당연한 태도이요 자연스러운 향기이다(요1 4:20).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이라고 해서, 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건강할거라고는 보증못한다. 평화, 박애, 사랑을 외치고 실천하는 수많은 진보적 교회들이 정작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인본적으로 해석하고 스스로에게 관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그의 계명 앞에 겸손하여 순복할 수 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2024년 새해를 맞이 하며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복 주시길 간구하기보다 내가 주님 사랑으로 더 뜨거워지길 그 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짐한다. 010824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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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때내 마음속에 우러나는 헌신은 나를 뿌듯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와 다른 길을 걷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때가 아니라면 그 틀린 길을 가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오는데 수 년,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6-38) 122123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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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전도자의 깨우침]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 " 이보다 먼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다.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존재로부터 사랑에 대한 기대와 그에게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지 않은 자의 의문은 "Does God really love me?"가 아니라 "Is here God?"에 있다. 전도자에게는 이 의문에 확신을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121423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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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눌려 있을 때타국 땅과 같은 객지에서, 가족을 떠나 홀로 사역 생활을 한 지 3년이 되어 간다. 게다가 이제 이사온 지 한달 정도 된 창원은 내게 꽤나 낯선 이방 땅과 같다. 고독이 이렇게 서럽고 힘든 건 줄 몰랐다. 엊그제 영국서 온 짐들을 풀어 정돈하니, 온갖 상념과 회상이 나를 짓누른다. 마음을 바로 잡고 오늘 늦은 오후에서야 이번 주 주일설교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은 사무엘서의 ‘순종’에 대한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참혹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다. 이렇게 죽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몸이 찢기며 피를 쏟고 피범벅이 되어 죽었으니, 너도 내 희생을 깨닫는다면 나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치른 대가에 대해, 상응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보답해야 하지 않겠니?” 이러실까? “아이구, 주님! 저 때문에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모진 수모와 조롱 속에서 죽으셨는데, 이 한 몸 주를 위해 바치겠나이다.” 이렇게 뜨겁게 헌신하는 태도도 귀하지만… 주님께서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정작 원하시는 바는 ‘순종’이다. 당신의 바람, 당신의 당부, 당신의 명령에 대한 순전한 순종. 앞서 말한 가족에 대한 상념이 주는 무게도 만만치 않지만, 교회개척에 대한 부담감 또한 적지 않다. 매일 아침 창원극동방송을 듣는데, 당당히 자신들이 담임하는 교회이름을 내걸고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부럽다. ‘언제 수많은 우리교회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그 날이 올까?’ 불확실한 앞날에 한숨이 나올 뿐이다.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힘없고 나약한 자신의 손에 의탁해봤자 탄식이 나오고, 푸석한 환경만 바라보다 의기소침해진다. 이것이 지난 화요일 영국 이삿짐 도착 후 3박4일간의 일기(日記)이다. 내가 아무리 산과 같은 고민에 눌려 있어도 내 안에는 여전히 빛이 비추고 있으며 외딴 섬 등대지기와 같은 고독이 밀려와도 주님은 여전히 나를 눈여겨 보고 계시다. 주님께서 하신다고 하시지 않는가?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자신이 세우신다고 하시지 않던가(마 16:18)? 나의 주인, 나의 대장(大將), 멘토이신 그 분을 신뢰하여 순종하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주일 설교 때문에 거룩한 부담감 때문에 성경을 펼쳤지만, 말씀이 심령에 들어오니 내 안의 빛이 안아주는 포근함이 밀려든다. 이것이 말씀 전하는 자의 유익 아닌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112423 *사진: 오늘 오후 창원대에서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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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17년전 영국에 주재 나온 후, 첫 해외출장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연이은 회의와 식사 미팅 등으로 피곤과 스트레스로 지친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으로 간절했다. 내 ‘집’은 한국에 있는데… 그 집은 남에게 전세주고 나왔지만 그 집이 바로 그리운 내 집인데… 한국을 떠나 영국에 부임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렌트로 살고 있는 런던 집이 내 ‘집’이라니… 그 곳이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내 ‘집’이라니… 실소(失笑)가 절로 나왔다. 세계 어느 도시에 있던, 어떤 장소에 있던, 보고픈 아내와 아들들이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다. 그 곳에는 참 쉼이 있고, 비빌 언덕이 있고, 가족들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훈훈한 곳이다. 평안과 안식을 주는 물리적 공간이자, 위안과 포근함을 주는 정서적 공간이다. 경제적 거래가 주는 가치를 중심으로 일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무관심과 냉담, 이기와 경쟁이 가득한 곳으로부터 이동하여 깊은 안식의 숨을 들이킬 수 있는 마음의 쉼터이다. 한 부잣집 아들이 집을 떠나,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하며 세월을 보내다 결국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며 돼지 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에게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허락되지 않았다. 늘 허기지고 처량하고 고독한 신세. 어찌 아버지의 사랑과 위로와 보살핌이 있는 ‘집’이 사무치게 그립지 않겠는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17-20) 영국에 15년 살면서, 나에게 그런 집이 또 하나 있었다. 분당에 부모님께서 사시던 집. 객지생활이 오랠수록, 심신이 지쳐갈수록, 위로와 충전이 필요할수록 그 집이 그립다. 어머니 밥이 그립다. 내 아버지는 부자는 아니셨지만, 절제의 사랑은 누구 못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달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본가에 찾아 뵈면, 그 분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자신하는 말씀들을 적당한 때에 적당한 빈도로 하셨다. 경황없다는 이유로 처신과 처세의 천박한 습관에 발을 담그려 할 때면, 육중한 인생의 무게 아래 그 분의 말씀이 기본으로 나를 돌려놓았다. 그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는 서울 형님댁 인근으로 이사하셨다. 영국에서 그녀의 소천 소식을 듣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한여름 서울, 작열하는 햇살은 독수리 부리마냥 내 살을 사정없이 쪼아댔다. 온몸을 땀으로 적신 나는, 어머님댁 아파트 문밖에 섰다. 벨을 눌렀다. “강헌이 왔니?” 그 날 따라, 그 정겨운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러도… 부모께서 생존해 계시지 않으니, 이제 그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조금 더 있으면 나에게, 아내와 아들들이 살고 있는 ‘집’의 개념이 달라질 것 같다. 내년 2월이면 아내도 한국으로 돌아와 같이 교회개척을 위하여 동역하게 된다. 아들 둘은 런던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자신들의 ‘집’을 세우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지? 이젠 아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다. 가급적 아들들이 자주 연락하고 소식도 전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 Photo taken in Praha, Aug 2007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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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시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 고백(confess), 탄원(lament), 찬양(praise), 감사(thanksgiving)의 형식을 통하여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 찬양, 예배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이 납득하기 쉽지 않는 ‘저주시’들도 있다. 시인은, 억압하는 자들 아래서 고통 받는 자신의 아픔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악인들을 심판해달라고 간구한다. 대표적으로 시편 109편은 크리스천으로서 참으로 입에 주어 담긴 힘든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 찼다.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7)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8)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9)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0)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11)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12)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13)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14) …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가르침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접하기 힘든, 원망, 불평과 상대의 저주를 구하는 시편들도 우리에게 교훈적인 측면이 있다. 시편 3:1-2를 예로 든다면, 저자는 자신의 주변에 적들이 너무 많으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도 소용없다면서 좌절케 하는 이들이 많다며, 참으로 무엇인가 잘 못 되었다고 탄식을 한다. 그러나 결론으로써,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를 신뢰한다. 시편 109편도, 예외 없이 상대가 잘못되기를 기도했지만, 주님을 신뢰하며 그의 구원을 향한 갈구와 함께 종결된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30)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31) Singer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나는 기도할 뿐이다”(1) 고 고백했듯이 시편에서의 투덜댐, 불평, 분노, 탄원들은 더 이상 나쁜 쪽으로 발전되지 않고, 오히려 절대자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확신으로 승화되는 전환을 가져온다.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들을 도와주신다”는 사실에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뢰가 있다. 시편에서 다루는 ‘고통의 문제’는, 우리에게 고통 앞에서 그저 참고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처리하는 다른 방법도 있음을 제시한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불평, 미움, 저주의 감정을 주님 앞에 벌거벗고 다 드러낸다. 종교적으로 습관에 밴 거룩의 치장이 전혀 없다. 솔직히 나도 가끔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쌍시옷 소리가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누구를 OO하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적도 있다. 단지, 신앙심으로 그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내뱉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다 아뢴다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시편의 시인은 다른 방법으로 그 더럽고 악하고 추한 감정을 배설한다. 그 악한 저주의 말을 사람 앞으로 가져가지 않고, 주님 앞에서 솔직히 거리낌 없이 토해낸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구한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는 신약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시인처럼 원수를 향한 거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편에서 최소한 도전 받는 것이 있다. 나의 답답한 하소연, 끝까지 들어줄 사람 이 세상에 누가 있으랴? 답이 없는 갑갑한 사연일수록 아무리 친한 친구도 오랜 시간 인내하며 들어주는데도 한계가 있다. 시인에게는 절대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솔직히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교제가 있다(2). 그리고 그 거친 마음, 악한 말이라도 끊지 않고 다 들어 주시는 친한 벗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다. 이것이 시편의 ‘저주시’가 우리에게 참 신앙에 대한 도전을 주는 이유이다. (1) Issac Bashevis Singer의 말을 Eugene A. Peterson, Answering God: The Psalms as Tools for Prayer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9), 36에서 재인용. (2) 이에 대한 나의 심정을 기록한 글은 아래 참조: https://www.facebook.com/kanghun.lee/posts/pfbid09a7LQwgTXEVPv3FbUFsWCzyJgXvmmPqWLYVQPQGp3Tws2jJQ1ASb94abcMppKjzzl * image from https://bibleversestogo.com/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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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나를 겸손케 한다연분홍 한복 곱게 입고 잔뜩 수줍어 하는 새색씨처럼 새벽의 여명은 그렇게 세상을 찾아 든다. 살포시… 겸손하게… 드러나지 않게… 한낮의 폭염처럼 사납지 않아도 한여름 장대비처럼 목청 높이지 않아도 엄동설한 북풍처럼 날카롭지 않아도 봄날의 햇살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그에겐 힘이 있다. 요지부동 견고한 시멘트 콩크리트처럼, 밤새도록 떡하니 왕처럼 버티고 있던 칠흑 같은 어둠을 내몬다. 소리도 없이, 젠틀하게… 새벽 앞에 나는 겸손해진다. 여전히 졸리고 곤하고 다시 누웠던 자리고 돌아가고픈 내 육신의 연약함을 실감한다. 어젯밤까진 잘 버텼는데, 새벽을 맞이 하니 오늘 살아갈 세상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쿠바산 코히바 시가가 뿜어대는 매운 연기보다 칠십배는 더 진한 인생 수십년간 꾹꾹 눌러온 탄식과 한숨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날숨은 나를 겸손으로 내몬다. 내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내 힘으로는 턱도 없는 산더미 같은 일과 사건들 앞에 나는 땅꼬마다. 내 힘으로 안 된다. 내 능으로 되질 않는다. 절대자를 의지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황혼의 지는 해는 나에게 안식을 주지만 새벽의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082423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