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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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된 사람들]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어둠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좋은 학교일수록 우수학생을 스카우트하려고 학비 면제, 장학금 수여 등을 통하여 학교 수준을 높이려 한다. 선택받아 스카우트된 자들은 동료학생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침으로, 학교는 더 좋은 학교로 거듭나기를 바람에서 이다. 이들이 모범이 되어 보여줄 학문을 향한 진지함, 생활에 성실함, 목표를 향한 숭고한 열정의 빛이, 타학생들의 좀 더 쉬고 싶고, 놀고 싶고, 보고 싶고, 절제 못하게 하는 욕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을 몰아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스카우트한 빛의 자녀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주님은 우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어떤 거금도 필적 못할 엄청난 댓가를 치르셨다. 스카우트받은 자들은 제 몸값을 해야한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4)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빛은 말이 없다. 말보다 존재로써 드러난다. 빛은 소리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 존재를 통하여 어둠의 수치가 드러난다.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 5:12-13) 우리 때문에 세상은 밝게 빛나야 한다. 우리 때문에 어둠은 밝게 드러나 고개 숙이며 퇴장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이웃과 사회는 밝게 빛나는 광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어둠이 아니라 밝은 게 정상이다. 011726202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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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솔티교회 이강헌목사_"목사님, 사람들이 수군거려요" 어느 은퇴 교사의 가슴 아픈 고백[ '창원 개학대 사건' 공식 입장문 ] 창원에서 2년간 교회사역을 하다,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 연고도 없는 곳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인터넷에 널린 왜곡보도 때문이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를 받았지만 여전히 인터넷 도처에 남아있다. 재작년 5월초 인터넷을 통해 떠들썩하게 유포됐던 '개학대 목사'관련 선정적 보도들로 인하여 도저히 목회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호감을 나누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 예외없이 그 다음 대면에서 차갑게 변한 상대 앞에 당황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강헌목사’, ‘쏘솔티교회’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개학대 목사”라는 수많은 주홍 글씨들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같은 해 5대 중앙미디어들에 대해서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여, '왜곡/편파' 보도임이 결정되어 ‘기사삭제’, ‘반론보도’ 등의 중재 결과가 나왔지만 말이다. (확인👉 언론중재위원회 왜곡·편파 보도 결정 및 반론보도 전문) 이래도 저래도 숨막히는 정황이라,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에 한 노인복지거주시설로 삶의 터를 옮겼다. 이제 6개월 됐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이 고착되어있고, 간혹 방문하는 가족들과 어울릴지언정 낯선 이에게는 마음을 잘 열지 않는 노인들의 커뮤니티에 가장 연소한 내가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하지만 서로 담소하며, 같이 식사하며, 웃고 떠드는 관계의 폭이 많이 확장되었다. 며칠전 평소 내가 전도하던 은퇴하신 여교사님께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하신다. 평소에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잘 챙겨주시던 분이라, 귀를 쫑긋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한다고 하신다. ‘개학대 목사’관련 기사에 대한 얘기다. 지금 입주민 대다수가 수군수군 거린다고 한다. 어쩐지… ‘미소 활짝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시던 이 분이, 내 인사도 받지않고 외면하시던데…’ ‘로비에서 신문 읽고 있으면 슬며시 다가오시던 저 분이, 내가 말을 붙여도 퉁명스럽게 반응하시더니…’ ‘항상 만나면 안부를 물어오시던 그 분이, 뭘 물으면 가시돋힌 높은 어조로 단답식으로 대답하시더니…’ 더욱 마음 아픈 것은,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반갑게 대하시던 크리스천 실버들께서 복도에서 나를 마주치면 시선을 딴 데 돌리고 지나치신다. 참으로 하늘 아래 안식할 곳이 없다. 어딜가나 인터넷 여기저기에 배설된 주홍글씨는 아우성치고 있고 주홍색 올가미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창원 사림동… 전도차원에 방문했던 교회 인근 미장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 도중 친근하게 다가온 개에게 무방비 상태에서 두 번이나 연속해서 물리다 보니, 본능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서 신학생시절 파트타임으로 개훈련 센터에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의 신체에 해를 주는 개의 행동을 제재하기 위해 개의 목을 견제했다. 목을 조르지도, 누르지도 않고, 경추 부분에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는 방법 - 엄지, 중지, 약지만을 사용하여 U자형으로 목에 올린 채 - 개를 제압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 손가락의 U자 형태를 유지하려면 바닥이 견고해야 하는데, 개가 앉은 쿠션이 단순 스폰지로 만들어져 조그마한 힘에도 움푹 들어가는 성질이 있어, 영상에서 보면 큰 힘을 가한 것처럼 보인다. 견주는 이 부분 30초 분량만 잘라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개학대 목사 제발 벌주세요!”와 같은 내용을 올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나를 심문한 경찰은 심문실을 나서면서, “이것 아무 일도 아닌데… 목사가 했기 때문에 큰 일이 됐습니다. 저희도 무혐의 처리하고 싶지만, 이미 인터넷 여기저기서 떠들썩한 사건이 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내 사건에 대해 추가 서면 설명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기간(통상 4주)을 채우지 않고 2주만에 약식기소 8십만원 벌금형을 훅 내려버렸다. [수의과 교수의 증언: "학대 징후가 전혀 없다"] 1심 재판장에는 수의과교수께서 증인으로 나오셨고 풀영상을 분석한 결과: 개가 목을 제재 받은 후, 1) 피고로부터 도망가지않고 계속 주변에 있었고 2) 개의 보행상태 등이 지극히 정상적이라, 제재후 충격받은 증거가 없고 3) 제제받을 당시, 공포나 아픔이 있었으면 비명소리가 있었을텐데 전혀 소리가 없고 고통으로 바둥거린 동작도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개가 스트레스받은 징후가 없음을 증언했다. 아울러 “이렇게 개가 학대받은 증거가 없는데도, 단지 견주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 같다.”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경찰조서에 기록된 바, 견주의 진단서 발급 요구를 거부한 견주측 수의사 의견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1심 판사는, “강아지에게 20초 정도의 압박은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정도의 고통일 수 있다”면서 수의과 교수의 증언을 왜곡 발췌하여 검사의 양형을 확정했다. 법정에서 교수는, “개가 스트레스는 받을 수 있겠으나 미용이나 목욕 등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증언한 내용을 이렇게 변개해서 양형의 이유로 삼았다. 나의 국선변호인은 판사가 인터넷에 널린 여론을 의식한 것 같다고 내게 설명한다. 해당 형사재판은 상고 중이다. 며칠전 법원으로부터 또 하나의 통지서가 날아 들었다. 견주가 민사소송을 제기했으니, 지정일에 재판에 나오라는 공문이었다. 견주가 이 사건으로 인해 영업을 못하고 피해를 봤으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백만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이다. 숨이 턱 막힌다. [더욱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괴로움에 대한 나의 동정이 무슨 필요가 있나? 나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과업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1) 삶의 지향점을 향해 걷다가 걷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오면 본능적으로 불필요한 걸 버리게 된다. 깊은 고난의 수렁을 통과한 자는 인생의 시간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핑계도 염려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만 남는다. 아파본 사람은, 고통 앞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예리한 통찰을 남긴다. 인간은 쓰러질 듯 아플 때, 정신줄이 세워지고 감정은 묻히고 방향만 남는다. 가장 정확해진다. 지금은 오리무중.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고통이 나에게 무엇을 선물했는지, 무엇을 끊어내고 어디까지 데려다줬는지…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지금 쏘는 고통이 나를 세차게 밀어 붙이고 있구나! 더 깊은 통찰로… 더 단단한 나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1)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박찬국 역(서울: 민음사, 2015), p 548 *이미지 출처: Wellspring Christian Ministries; https://www.tumblr.com/wiirocku/ (인용 및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 #이강헌목사 #쏘솔티교회 #개학대목사_진실 #개학대목사 #미용실강아지사건 #미용실_강아지 #목사_강아지사건 #창원미장원사건 #창원개학대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위_반론보도 #왜곡보도_바로잡기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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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처럼 지혜롭게: "형식으로부터의 탈피"크리스찬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세상에 나가 일하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고용주를 마치 악의 화신 보듯, 상사를 적그리스도 보듯 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찬 세상사람들과 협력하며 교류하며 금전적 가치가 오고가는 본연적 성격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다. 정반대이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크리스찬에게 세상의 일은 중립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일이 선한 일인지, 아니면 탁하고 악한 일인지 판가름은 오로지 그 일에 임하는 본인의 자세에 달려있다.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종신토록 밭을 경작하라(창3:17-19)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세상 일은 거룩한 일이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소중한 기회이다. 표면은 크리스찬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름 없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가치를 좇아, 일을 도모하면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 크리스찬의 첫째 사명은 예수의 증인되는 것이요(행1:8), 예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마28:20). 교회의 첫째 사명도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귀하고 위대한 사명을 무엇으로 어떻게 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말씀을 들어야 할 현대인들은 분주하고 산만한 환경에서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워낙 일도 탈도 많은 세상이라 웬만한 사건은 사건도 아니다. 수많은 뉴스, 지식, 정보, 커뮤니케이션, 현란한 색채와 비주얼이 범람하고, 여기에 AI까지 가세하는 시대인지라 그들의 관심을 끌기가 점점 어려워져만 간다. 이것들이 범람하는 홍수 속에 사는 사람들도 스마트한지라, 자기의 관심사항, 유익하다 생각되는 것에만 선택적 반응을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게 들리는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뱀은 마귀를 상징하며 사악의 대명사 아닌가? 그런데 그 뱀을 본받으라니...? 이 말씀을 하신 예수의 의도를 깨달으려면 바로 앞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KBS 동물의 왕국, BBC Planet Earth 등에서 봤음직한, 이리보다 더 강력한 맹수와 싸우는 뱀의 민첩하고 현란한 움직임을 기억하는가? 온갖 맹수들처럼 욕망/정욕/탐심/이기/유혹/비방/비교/자랑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거룩의 순결을 지켜서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보다 더 지혜로와야 한다는 뜻이다.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은 세상 못지않게 지혜롭고 유능하라는 뜻이다. 세상에 나아가 크리스찬의 가치, 생명의 복음, 진리의 빛을 전하기 위하여, 거룩의 능력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이다. 복음전파의 일에 - 세상의 유능한 자들처럼 - 해야 할 바에 집중하여, 자기관리 철저하고, 사유하고, 분석하고, 깊게 연구하며, 전문적이고, 완성도 높게 일하라는 말씀이다. 국가 경제가 어려웠던 60, 70년대의 한국의 교회는 TV, 스피커, 환등기, OHP projector 등 첨단기자재를 도입하는데 어느 기관 보다도 앞섰다. 경제선진국들에서 파견된 선교단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국이 IT 강국이 된 현대에 와서는, 첨단기술, 정보통신을 수용하는 것에 교회가 많이 뒤쳐진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세상적 방법’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경직(硬直)이, 지체(遲滯)현상을 더 심화시키는 것 같다. 선진대학들은 AI를 활용하여 전문분야에서 해결능력을 향상시키는 교육 혁신을 이미 실행 중에 있다. 미국 조지아텍은, AI가 하드웨어를 설계/코딩하고 학생들은 검증 및 디버깅에 집중하여, 개발시간 단축과 설계의 정확도를 높이는 훈련을 한다. 하버드 의과대학은, 환자 수만명의 수십만장되는 엑스레이(X-ray), MRI, CT 영상을 AI가 판독하도록 하고, AI가 잡아낸 이상 징후를 인간 의사가 어떻게 검증하고 최종 판단해야 하는지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한다. 스탠포드 법학대학원은, AI가 방대한 증거 자료를 읽고 핵심을 요약하고, 학생과 함께 관련 판례를 찾도록 하여 승소 확률을 높이는 훈련을 한다. 한국의 신학대, 교회도 AI를 활용하여 어떻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거룩한 사유없이 습관적으로 반사적으로 판단하고 예전에 했던 방법에 안주하는 것이 오히려 비성경적이다. 관습과 형식의 틀에 교회를 가둔다면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요 8:32)"는 하나님 말씀에 불신앙이다. 세상의 지혜들을 활용하여 복음의 정수를 전하기에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면에, 우리가 전해야 할 실체, 복음의 메시지는 세상적 가치관, 현대인의 관심사에 영합하며 인본적인 관점/태도/사상과 자유롭고 담대하게 악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형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심각하게 되새겨볼 때이다. ‘Biblical Absolutes’ and ‘Freedom of Forms’ 010326 * 위 이미지는 "Freedom of Form"에 대한 장 자크 루소의 어록: "자유는 국가의 형태와 같은 고정된 틀에서가 아니라, 자유주권을 가진 국민의 마음에서 나온다." (The Social Contract, 1762)202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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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간만에 서울에 왔다. 고등 절친의 장녀 결혼식이 있어서다. 고교졸업 이후 영국 주재 떠날 때까지 자주 뭉쳤던 친구 셋과 덕담 나눌 요량으로 돌아갈 차표는 넉넉하게 늦은 시각으로 끊었다. 그런데 예식후 식사를 마치니 죄다 선약이 있다고 일어선다. '어쩐다? 여섯시간이나 남았는데...' 꽤나 많이 걸었다. 그 옛날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잠실의 아파트단지. 젊은 날 열정적으로 땀을 뿌리며 테니스 쳤던 코트. 가죽세무 카페트처럼 습기 먹은 낙엽들이 잔뜩 쌓인 길. 숨가쁘게 달렸던 그때의 스트레스와 푸념과 파란 꿈을 다 받아줬던 푸근한 모습 그대로다. 그러다가 이윽고 잠실역에 이르렀고. 롯데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무려 1시간 반이나 남았다. 그러나 무료하진 않았다. 많이 들려주시고 생각하게 해주신 분과 줄곧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신 말씀 적지 않을 수가 없다. 120625 ---------- [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 글을 쓰는 시간은 즐겁다. 특히 주신 말씀을 기록하는 시간은 늘 기쁘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살펴보고 콜론보다 세미콜론이 적합한지 글 쓴 맥락에 더 적확한 표현을 궁리하는 시간은 충분히 즐길만하다. 그렇게 해서 말쑥하게 단장된 글 한 편이 나온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어디 한 곳 체증되지 않고, 부사는 제 위치에서 제 할 일 하고 있는 지 형용사는 과하지 않은 지 점검하는 시간은 넉넉히 누릴만하다. “그대! 적은 대로 살고 있나?” 글 쓰는 이의 짧지 않은 삶에는 수많은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 그에 못지 않은 만큼 수많은 중단들이 있었고. 예기치 않은 사건과 힘 쑥 빠지게 하는 훼방으로 포기가 잇달아 속출하던 적도 적지 않았다. 이것들과 함께 동반하는 낙심과 좌절과 후회에 눌린 적도 많았다. 푸념, 불평, 분노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자기 안의 확신과 주변의 동조에 힘입어, 그 위에 핑계와 미움과 정죄를 배설해도 떳떳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Devil is in the detail. 삶의 사소한 조각 하나 하나 디테일에 경각하지 않고, 일거수 일투족 정신차려 깨어있지 않으면, 굶주려 우는 사자 세상임금 마귀 앞의 먹이다(벧전 5:8).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에서 유체이탈하여, 기록한 글과 들은 말씀과 읽은 말씀에 동감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삶은 위태롭다. 거대한 담론과 위대한 사상과 숭고한 비전이 이슈가 아니다.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반응하고 받고 베푸는 일상의 사소한 디테일에 생명의 경각이 달려있다. 하나님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1). “그대, 말한 대로 살고 있나?” (1) Mies van der Rohe(1886-1969), German Architect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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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환히 비추는 날]햇살 환히 비추면 눈물이 난다. 한기에 움추린 뒷목을 따사로운 온기가 감싸오면 복받친 어깨가 들썩인다. 아픈게 일상이었는데 틀린게 정상이었는데 외롭고 쓸쓸한게 익숙한 매일이었는데 어둡고 비바람 세찬 날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푸르고 맑고 높은 하늘 눈부시게 햇살 환히 비추면 눈물이 난다. 111825 *사진: ‘햇살 좋은 날’, 박진성, ‘대전 아트페어 25’ 에서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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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토마토로 만들어 줘]“망했다. 실수로 박은해를 토마토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1) 상대방을 미워하면 토마토로 변하게 하는 중학생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춘기 학창 시절, 싫든 좋든 여러 부류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일상에 치이다보면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주인공은 아무도 토마토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어딜 가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친구들에게도 인기 많은 미도를 질투하지만, 주인공은 그가 가진 요상한 능력 때문에 미도에 대한 험담을 블로그에 올려도 결국 “그래도 난 유미도가 좋다”는 말로 순간적으로 치솟는 미운 마음을 억제하며, 친구를 토마토로 만들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한다. 알게 모르게 내 안에서 솟구쳤던 ‘미움’들이 상대를 토마토로 변하게 할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참 많은 사람들을 붉은 토마토가 만들었겠구나!’ ‘참 많이도 미움의 생각에 자주 사로 잡히는구나’ 상대의 부주의한 말에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면 될 것을… 옆사람의 경우없는 태도에 고개 돌리고 신경 끄면 될 것을… 내 앞에 선 사람의 무리한 요구에, 차분히 내 입장을 표현하면 될 것을… 참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무절제함으로 쉽게 ‘미움’이란 비수를 꽂았구나! 참아도 마음 속 깊숙히 그 비수를 품은 채 참는 체 하는구나! 비수에 찔린 내 심령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비수에 찔린 자신의 심령이 바로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 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요일 2:9)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111425 (1) 조예은 소설 (서울: 창비, 2025), p 720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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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굿]물이 든다. 노랗고 빨간 물이 든다. 단풍이 든다. "Bloodgood" 선혈처럼 붉은... 단풍나무들중 대표 품종이다. 블러드 굿.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씻었다. 그 피가 나를 적셨다. 그 피로 내게 생기가 충만하다. 그의 성품이 나를 적신다. 못된 성품이 좋은 성품으로... 블러드 굿! 110625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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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보다 삶의 루틴대로]삶의 무게추가 인생 후반기로 급격히 기울어지니, 여러가지 생각들이 마음 속에 품어진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왜 이리 떠오르는 옛날에 대한 상념들이 맘 속으로 쇄도하는지? 현실 속에서도, 꿈 속에서도, 어릴 적의 일들, 장난기 넘쳤던 중고등시절, 패기/혈기/총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던 청년의 때, 바로 몇주 전 서운했던 일… 그리고 모든 기억의 조각들에는 감정의 꼬리표가 붙어있다. 해야 할 일을 놓고 축 쳐진 채, 그 꼬리표를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 많은 시간이 소모됐음을 깨닫는다. 내 마음을 장악한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할 일을 못할 때가 있다. 그 감정에 권위를 주면 만사가 귀찮을 때가 있다. 감정에 눌리다보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오래 누워있어서 머리가 무겁고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갑갑해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질 못한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그래서 회고할 일들이 많아질수록, 경각하여 뒤 돌아보는 일을 절제해야 됨을 깨닫는다. 지금(present)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present)라 하지 않던가? 누리고 즐겨야 할 지금 이 순간, 난 뭐하고 있는가? 과거에 대한 회상, 상념, 그리움과 회한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할 때가 아님은 분명하다. 멀리 있어 애가 탈 정도로 그리운 오랜 벗보다 매일 만날 수 있는 이웃이 더 고맙다. 멀리 떨어져 있어 가슴에 품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든 가족보다 오늘 내 끼니에 관심 가져주는 옆집 아줌마가 더 실감있게 다가오는 감사의 대상이다. 반평생 학업/취미/경조사를 함께 했던 오랜 친구보다 오늘 내게 탁구치자고 꼬시는(?) 앞집 액티브 시니어가 더 나를 흐뭇하게 한다. 은혜 받을 만할 때 은혜 받아야 한다. 과거에 주홍빛 비단 카페트를 깔고 아무리 기대 가득 찾아 나선다 하더라도 얻을게 별로 없다.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때이다. 지금이 바로 누리고 견디고 이기고 체험하고 얻을 때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미 지나버린 일에 대한 감정에 사무칠 때, 더 이상 그 감정에 권위를 주지말고 일어나라! 어제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던 삶의 루틴대로 세수하고 이를 닦고 신을 신고 아침햇살 아래 활보하라. 삶의 루틴(routine)대로 오늘을 살자! 바로 오늘,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이웃에게 친절하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102325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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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연약한 이 때가 은혜라]유다의 서쪽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그들의 주요한 성, 가드, 야브네, 아스돗 성들을 접수하고, 블레셋뿐만 아니라 남쪽 구르바알의 아라비아, 마온 사람들을 격퇴시키고, 동쪽의 암몬은 웃시야가 무서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대하 26:6-8). 그의 휘하의 군대가 무려 삼십만 칠천오백 명. 그가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명성을 떨치며…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역대기, 열왕기를 통해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보면 거의 모두 이 패턴을 밟고 있다. 솔로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왕권 초기에는 겸손하여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왕위가 안정되고 국가가 부강해짐에 따라 겸비함을 잃고 하나님을 등지고 실족한다. 다윗도 결코 예외라 할 수 없다. 이제 내가 목사안수받고 교회개척에 나선지 3년. 교회개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회가 세워지고 본격적인 목회를 하는가 했더니만, 본의 아닌 ‘강아지사건’으로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하고있다. 그 당시 주님께서 어느날 새벽에 내게 주신 메시지가 생생하다. “감당치못할 정도로 많은 걸 주면 예외없이 넘어지더라.” “네 원하는 것, 주지 않더라도… 네 바라는 만큼 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나이 16세. 모든 것에 어설프고 서툰 웃시야. 그때의 약함이 겸손함을 낳고, 그 겸손함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을 때가 그에게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시절 아니었을까? 아니면 강성하여 그 강건함이 차고 넘치매 동서남북의 온 열강이 그를 무서워하며 조공을 바쳤던 그 때가 더 행복했을까? 지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작고 연약하여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붙들 수 밖에 없을 때가 바로 귀하고 값지고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형통할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이 잘 풀릴 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항상 조심해야 한다. ‘겸손’이 바로 영적 능력이다. 경건의 형식의 옷을 벗고, 경건의 능력 즉 ‘겸손’으로 내면이 꽉 차올라야 한다. 겸손한 삶, 겸손한 자에게 주님께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에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아직 나의 내면에는 겸손으로 채울 공간이 한없이 넓다. 그래서 작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이 때가 좋다. 101625 *이상은 오늘 새벽설교 말씀 중 일부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qrrJQGlGp420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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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꼬이고 뒤틀어지는 이유]높은 창공을 배회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를 보고 놀란 타조는, 궁둥이를 하늘로 치솟게 하고 머리는 땅속에 파묻은 채 위기의 순간을 외면하고 아예 보지않으려한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모든 신경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이다."(칼 융)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신호가 뚜렷이 감지되었음에도 병원가기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다. 삶이 꼬이고 뒤틀어지고 불행한 이유는,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 직시하기를 애써 피하는데 있다. "문제 직시하기" - 그것 쉽지 않다. 바로 보면 볼수록 아프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보다 덜 아픈 길을 택한다.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애먼 환경탓, 주변탓, 이웃탓... 육신정욕 이끄는대로 쉬운 길을 택하며, 문제의 본질 자체를 아예 외면해 버린다. 좋던 싫던 힘들던 어떠한 환경도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함이 없다.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섭리 아래 있다. 내게 닥친 정황앞에서 불평, 원망, 탓함은 주님께 원망함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의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101125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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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라 사랑하라 용납하라]습기 가득찬 주일 아침. 끕끕한 이불 속 기상 순간부터 불쾌했다. 시들어가는 화병 속 국화는 언제 버릴까? 어젯밤 빨래했던 옷들은 세탁기 안에 여전히 젖은 채 있다. 용기 안 바닥에 몰려있다 왈칵 쏟아진 요거트가 식탁과 바닥을 어지럽힌다. 덥지 않은 날씨인데, 왜 이리 땀은 나는지? 땀과 비로 적셔진 채 빗길을 걷는 육신은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진다. 질퍽한 도로 위, 교회 입구를 막아선 차량 한대에 가뿐 숨이 턱 막힌다. 현관 앞을 막아선 수많은 무리들. 누군 우산을 접고 누군 주보를 나누고 누군 그 손바닥만한 곳에서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고... 예배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내게 따끔한 지적을 하신다. “그들도 너처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지친 몸 겨우 이끌고, 이곳에 나 만나러 왔단다.”(1) 이른 아침부터 별로 이쁘지 않은 생각들로 야단법썩 요란했던 내 마음을 이렇게 평정하셨다. 평안 속 천국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092825 (1)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John Watson: 스코틀랜드 목사, 소설가, 필명 Ian Maclaren) *사진설명: 교회에서 귀가길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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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것이 사역]"인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불편하고 갑갑한 것에 대한 참음. 덜 중요한 것을 멀리 할 수 있는 절제. 내 생명에 유익하지않은 생각에의 거부. 다들 아니라는 길을 포기하지않는 소신. 10년전 페북에 올렸던 글이다. 오늘 아침 지인 목사님께서 이 글을 소환하셔서, 새롭게 주신 감동을 보태고자 한다. 인내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전투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환경 속에서 그분을 좇으려고 발버둥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그런 싸움에서 쉽게 이기도록 해주거나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줄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전투를 계속할 힘을 주길 바랄 뿐이다.(1)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이 세상에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도 이 전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기도는 전투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시간에 그 자신을 지키는 힘이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육신은 곤하고 멍들고 찢기고 지친 나머지 이젠 그만 하고자 하나, 믿음의 인내는 그 시간을 버티게 한다. 그 험악하기 짝이 없는 질고의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도록 죄악 앞에 주저앉지 않도록 붙드시고 도우시고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인내" 견디고 버티는 것. 아무 것도 않하고 허송세월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견디고 버티는 것이 바로 사역이다. 주를 향한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091325 (1) 필립 얀시, '기도', p145202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