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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즐길만한 이유
등록일
2025-09-05 19:01
조회수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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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성(恒常性)”: 여러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체의 각 기능이 균형있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런 현상.
뇌과학에 의하면, ‘통증’과 ‘쾌감’은 뇌의 동일한 부위(뇌섬엽,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 등)에서 처리된다고 한다. 통증과 쾌감은 상호작용을 통해 불쾌감/유쾌감에 대한 다양한 감정정보를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1). 눈을 즐겁게 하는 숏츠에 “이것만 보구…”, “5분만 더…” 하면서 한참을 빠진 후 순식간에 불쾌감, 후회감이 마음 속에 작열하지 않는가? 나는 식사후 커피와 함께 빵이나 떡, 스낵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요새 내게 꽂힌 디저트는 ‘열풍으로 구운 양파’이다. 구운 양파의 풍미 가득한 스넥을 아작아작 입안에서 씹어 넘기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중량 110g의 작지 않은 양에다, 나트륨 130mg등 건강상 별로 아름답지 않은 성분들이 함유된 한 봉을 먹어치운 후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꼼작하지 않고 두어시간 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한 책만 바라보는 독서하는 시간도 그다지 즐겁진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시간이 즐겁다는 역설은, 내 안에 무언가로 채워졌다는 포만감, 새로운 생각으로 내 좁은 시야가 넓어졌다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을 헉헉대며 올라가는 등산이 즐거운 것은, 고통 후에 정상에서 외칠 “야호!”가 있기 때문이다.
뇌의 한 영역에서, 고통과 쾌락을 다루고 처리하는 두 기능이 50:50 절대 균형(Equilibrium)을 향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다. 한쪽이 반 이상을 점령하면 다른 한쪽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과 즐거움의 다이내믹한 조합의 연장선이다. 이 둘 간의 균형이 깨져 즐거움의 무게가 바닥을 향해 내려앉으면, 시소처럼 고통이 올라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경고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반작용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자기조정을 위한 ‘작용/반작용’의 정상적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을 ‘권태’라고 지적한다. 삶에 무료함이 들어오면, ‘어디 재미있는 것 없을까?’하고 더 짜릿한 자극을 찾는다. 더 큰 욕구가 밀려온다. 만족시키기 훨씬 더 어려운 욕망이 물밀듯 들어온다. 절대 균형, equilibrium이 무너져버린 상태이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쯤의 고통과 불행을 필요로 한다.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배안에 무거운 물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소원이 마음 속에 생기자마자 바로 충족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소일거리로 삼아 세월을 보내게 되겠는가? 아마도 권태가 밀려 들어올 것이다… 행복에 대한 최대의 적은 무료함, 권태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욕구와 만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이때의 행복은 지극히 짧다. 금세 무료함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2)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근심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명확히 알아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고 불행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행복을 상기하게 된다.”(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의 시기는, 잊고 살아왔던 소중한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감사하게 된다.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클수록 절대주권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돈독해진다. 내게 견디기 힘든 고난의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고전 10:13)”하시는 주권자를 향한 나의 믿음에 철썩 같은 신뢰가 있기에 그러한 상황을 그가 허락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창 22)은, 이를 감당할만한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신뢰하셨기에 그리하신 것이다.하나님의 약속(창 15:4)대로 언약의 자손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자식을 얻었던(창 16:15-16) 그때의 초라한 믿음 정도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시험인 것이다. 욥의 고난도 이와 다름없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 이와 같이 철썩 같은 신뢰가 있었기에, 그 끔찍하고 처참한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자신의 주변을 엄습해올 때,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고난이 해결된 결과보다 잃었던 삶의 균형, 항상성을 되찾아가는 고통 속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곱씹어봐야 성장한다. 성숙해진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너져 내린 ‘항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그만큼 필요하기에 장시간의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낼 믿음을 신뢰하시기에 허락하신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어둠이 짙게 엄습해올수록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으므로…
고통 속 견디어 내는 과정이
내겐 즐길만한 것이요,
주님께 영광이다.
고난의 때에는
무엇을 하려 하지말고
생각하라.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전 7:14)
090525
(1) Soo Ahn Lee, ‘Brain representations of affective valence and intensity in sustained pleasure and pain’, PNAS(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June 11 2024,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0433121
(2)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서울: 동서문화사, 2016), pp 17, 27,
(3)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pp 75-76,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