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 COLUMN
설교/컬럼
목사 칼럼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나는 군복무를 카투사로서 용산 미8군사령부에서 했다. 지치고 바빴던 일상 중 틈 나는 대로 운동하는 것이 취미였는데, 체육관에서 알게 된 토니라는 흑인병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의 소개로 중대 대표로 플래그풋볼 리그에 함께 나가, 그는 러닝백, 나는 와이드리시버로 뛰었다. 자비로 팀 유니폼을 맞춰야 했는데, 카투사의 뻔한 주머니 사정을 안 토니는 자기 돈으로 내 유니폼 제작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결국 우리 중대는 용산 미8군 플래그풋볼 리그에서 우승을 했고 운동으로 다져진 우리의 우정은 절정에 달했다. 그후에도 우리는 매일 체육관에서 만나, 서로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도우며 같이 체력을 다졌다. 누워서 바벨을 드는 벤치프레스의 경우, 당시 나는 215파운드(약 100kg)를 들었었는데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언감생심(焉敢生心), 생각지도 못할 무게였다. 처음에 토니가 내게 바벨 무게를 215파운드로 올려보라 할 때, “Are you kidding?”하며 코웃음을 쳤다. 재삼재차 권유하는 그의 태도가 하도 진지해서, 결국 나는 벤치에 눕고 토니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내 머리맡에 서있는 채 시도를 했다. 내가 웨이트 바에 손을 대자. 그의 소리가 우렁차게 그칠 줄 몰랐다. “You can make it!” “You can do it, Hun(내 이름)!” “Push it up! Push it up!” 결국 나는 그 무거운 바를 하늘 높이 제쳐 들었고… 그리고 가슴 높이까지 그러나 가슴이 닿지 않을 정도까지 내렸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다시 바를 들어올릴 때가 고통의 클라이맥스인 것이다. 근육 안의 모든 힘을 쥐어짜느라 얼굴은 검붉어진 채, 바를 들어올리는 순간… 토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웨이트 트레이닝 룸을 가득 채워 진동한다. "Come on, two more reps! Pump it up!" “Pump it hard!" “Push it hard, Hun!" 두번째 들어올리는 것은… ‘과연 될까?’ 내 자신 안에 의문이 가득했으며 ‘잘 안될 것 같은데…’ 적지 않은 회의감이 몰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토니의 격려하는 함성은 이 모든 것을 내몰아 패대기치는 것 같았다. 바를 들어올렸다. 약 50% 정도가 들려진 것 같았다. “Pump it up! Pump it hard!” 20% 정도가 더 들려졌다. 그 위치에서 더 올라가지도 않고… 여기서 포기하면 아래로 처진 바는 이내 내 가슴을 짓누를 것이다. 그 때. 그의 양손 검지와 중지는 수직으로 하늘을 향한 채, 내가 거머쥔 바를 아래에서 위로 터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상승이 정체되었던 바가 신기하게 들어 올려졌다. “우 와!”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경이로웠다. 나중에 토니에게 물어봤다. 그때 그가 두 손가락으로 힘을 보탰느냐고? 천만이란다. 자신은 자기 손가락을 바에 대고만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사실은 이렇듯 가공할 힘을 제공한다. 보기만해도 기가 질릴 쇳덩이 215파운드를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 못 할 엄청난 무게를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들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을 함께 하는 동료의 격려하는 고함소리였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혼자서 사역하는 것은 녹록치 않다. 외롭고 고독하고 서럽기조차 하다. 하지만 차가운 정적 속, 무거운 고독 가운데 건네오는 동료의 말 한마디, 지인의 문자 한 줄이 시무룩 어깨 처진 내게 힘을 공급한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나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 누군가의 기도가 있다는 사실이 가슴 울컥한 격려를 준다. Push it up! Pump it hard! 091626 *사진: 군복무시절 미8군 플래그풋볼 리그에 참가했던 나 (선수번호 20번).2026-09-16
-
[내가 나를 보면]주님께서 나를 주목하시는 것처럼 내가 나를 목도하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그것은 파렴치하고 사악한 육신의 죄보다도 주님 앞에서 빳빳이 고개를 치켜 든 내 자아와 자존감이다. 091326 *image from https://clementinefraser.com/(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9-13
-
[영적 쇠퇴는 기도의 쇠퇴에서부터 온다]요즈음 새벽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성도들은 대부분 중장년, 노년층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영국이든 정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 뿐 예외가 없다. 더욱이 영국 교회에는 새벽기도가 없다. 새벽기도라는 말 자체가 없다. 그래도 간혹 깨어있는 교회가 오전 기도의 형식으로 모이는데, 늦은 오전에 시작해서 고작 15분간. 대부분 연로한 성도분들께서 친교 차원에서 참석한다. 기도가 교회 영적 동력의 중심에 있지 못하고, 개인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 주변화되는 현상이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 같다. 기도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어느덧 프로그램, 캠페인, 이벤트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반면에 오늘날 성도들에게 말씀을 접할 기회 자체는 사상 유례없이 많아졌다. ‘말씀의 기근’보다 ‘말씀의 과잉’에 가깝다. 주일설교, 수요·금요예배, 성경공부, 큐티, 신앙서적, 유튜브 설교, 온라인 성경강해, 유명 목회자 강의, 각종 기독교 콘텐츠… 영적 쇠퇴는 말씀의 쇠퇴보다 기도의 쇠퇴로부터 온다. 말씀의 풍성함이 영적 풍성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많이 듣는 것과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좋은 설교를 찾아 듣고, 유명 목회자의 설교로 은혜 받고, 신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모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족하여 그친다면 ‘영적성숙’과는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정작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무릎 꿇는 반응이 있어야 한다. “주님, 그래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경건의 습관으로 성경책은 읽었지만, 말씀을 듣고, 은혜의 감동까지 받았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은 없다면, 기도라 불리우는 이 시간이 없다면, 영적 진보는 커녕 영적 퇴보의 내리막길을 경계해야 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성경지식은 많아지는데 순종은 약해지고, 설교는 차고 넘치는데 회개는 부족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아지는데 말씀 앞에 우는 사람은 적어지는… 이 기막힌 상황은 많은 부분 기도의 쇠퇴에서 비롯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말씀은 많이 들어서 머리는 채워졌지만 주님 앞에 무릎은 꿇지 않는다. 아는 성경지식은 바다처럼 깊어졌지만 정작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접시물처럼 얕다. 들은 설교는 쉽게 평가하지만 자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지 않는다. 교회마다 젊은 세대의 참여율이 적다고 한숨이다. 엄마손, 아빠손 잡고 나오는 어린 영혼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은 더 심각하다. 그래서 “다음 세대! 다음 세대!”를 외치면서 건강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려고 힘쓰고 있지 않은가? 다음 세대가 살려면 무엇보다도 기도부터 살아야 한다. 없고 굶주리고 아프고 고칠 의술은 없고 수술받을 경제력도 안되고 모든 것이 빈약하고 가난하고 허기졌던 시절, 갈급함이 있었다. 주님께 나아가 엎드리고 부르짖고 탄원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약하고 다치고 상한 심령이 “주님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부르짖었던 기도의 영성과 영적 유산이 한국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게 했다. 부흥의 원동력은 바로 기도의 회복에 있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초대교회의 영적 불을 지핀 열두 사도들 스스로가 규정한 사역목록 제1호도 바로 ‘기도’였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기도는, 보고 읽고 들은 말씀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관계적 통로이다. 말씀을 읽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보다 “이 본문이 무슨 뜻인가?”에 머물기 십상이다. 기도가 약해지면 말씀은 신앙적 지식, 또는 정보적 콘텐츠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기도를 통한 말씀의 내재화 과정(말씀 → 기도 → 회개 → 순종 → 삶의 변화)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낸다. 동료와 친구와 함께 하여도, 일을 하고 공부를 해도, 내 안의 내 자신과 씨름하며, 생각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이 시간 주님과 얼마나 대면하는가? 이 시간 주님과 얼마나 대화를 나누는가? 얼마나 여쭙고 인도받고자 하는가? 17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로렌스가 남긴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기를 훈련하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거룩하고 필요한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이다.”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그분이 언제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순간순간 어떤 식으로든 그분과 막힘이 없이, 그리고 겸손하면서도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뜻한다.”(1). 꼭 교회나 기도실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모든 장소에서, 어느 순간에도 우리 마음을 예배 처소로 만들어 하나님과 대화하는 훈련을 해나갈 수 있다.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하나님을 자주 그리고 깊이 생각하는 거룩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 처음에는 지속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순전하고 사랑에 찬 시선으로 주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게"(2) 될 것이다. 일상의 모든 장소가 모든 순간이 기도의 골방이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되면 교회의 공적 기도시간이 사모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영적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자신의 영적 단련을 위해서라도 공적 기도시간, 새벽기도시간에 나와야 된다. 기도 않하는 영혼, 기도를 방치하는 영혼은 - 호흡기 질환으로 숨쉬기가 원활하지 못한 환자처럼 - 파리해진다. 082926 (1) Brother Lawrence,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임재 연습, 윤종석 옮김(서울: 두란노서원, 2018), 110-126 (2) Brother Lawrence, 130 *image from https://christiandiscipleshiplibrary.com2026-08-29
-
[신자든 비신자든 똑같이 아프다]망치로 손가락을 내리치면 아무리 믿음 좋은 신자라도 아프다. 지금 외출하면 밖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은 신자나 비신자나 똑같다. 한국의 50대미만 남성의 대장암 발병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하지만 신자와 비신자간 유병율 차이가 있다는 보고는 전무후무하다. 비신자에게 고난이 임하듯 신자에게도 고난이 임한다. 다만 당한 고난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첫째, 신자에겐 믿음이 있다. 고통 속 고군분투(孤軍奮鬪) 하는 중에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자기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분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다. 둘째, 투덜대지 않는다. 핑계대지 않는다. 주목할 것에만 주목한다. 오직 견디어 이겨낼 길, 바로 그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한다. 셋째, 고난의 소낙비가 멈춘 뒤 더 한층 성장할 기대가 충만하다. 이렇게 가슴 뿌듯한 기대가 있기에 닥친 고난을 능히 극복할 힘이 몽글몽글 솟는다. 그래서 고난을 만나면 믿음의 실체가 바닥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내. 믿음. 소망. (주를 향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신자라고 고난으로부터 면제해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성숙으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음이로다(롬 5:3~4) 따라서 성숙한 신앙은 고난을 비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고난을 피하여 형통한 삶을 구하기보다, 고난 앞에서 담담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얻은 것, 받은 것, 이룬 것, 누리게 된 것으로 품어지는 감사보다, 시련과 역경을 극복한 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사가 더 맹렬하다. 죽은 자처럼 숨죽이고 버티고 견디고 승리하게 해 주신 은혜를 누린 자의 감사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감사는 무엇을 하려고 한다. 인본의 마음이 앞서 갚으려 한다. 하지만 뼛속 깊숙이 전율케 한 감사로 흠뻑 젖은 이는 의지한다. 더욱 의지한다. 주님을 의지함이 주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시 115:11) 082426 *image from https://regionalhand.c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8-24
-
[머큐로크롬에 반응 없는 상처처럼]“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루 종일 내 뜻과 의지와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나에게 물어 오신 질문에… 같은 물음 앞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베드로(요 21:17)처럼 쉽게 대답이 안나온다. 정답은 아는데, 그 말이 쉽게 안 나온다. 그 순간 나는 주를 사랑하지 않았다. 주님보다 더 마음에 품고 염원하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대상이었기에 난 두 손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주님 말씀에 꼿꼿이 맞선 반항자였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주님의 물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데시벨로 잔잔한 호수에 떨구어진 조약돌의 낭랑한 소리처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것으로 꽉 찬 경황없는 와중에 들렸다. 움찔했다. 아팠다. 고통이 밀려왔다. 진리의 말씀에 찔리면 아프다. 하나님의 말씀은 …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 자신이 주인이 되어… 말씀의 내 안에서 일하심을 막아서고 방해를 해도...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이 내 심령의 문을 쾅쾅 두드려도… 듣지를 못한 채 내 영혼의 감각은 이미 무디어져 있다. 상하고 찢겨 있음에도 상처가 벌써 부패되고 무신경해져서 소독액이 뿌려져도 쓰라리지 않다. 들을 것을 듣게 해도 반응이 없다. 좋은 것을 먹여줘도 무신경, 무반응이다. 주님께서 던지신 물음에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말씀에 아파해야 할 것이 아프다니 희소식이다. 이 아픈 말씀이 들릴 때야 비로소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주를 향한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난다. 해처럼 높아졌던 나의 뜻과 생각 부끄럽게 하시고 주님의 임재 앞에 겸손히 바로 서게 하옵소서! 081226 *image from Antipolo City Gov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8-12
-
[해 아래의 권세는 마른풀처럼 시든다]이사야서는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바벨론과 앗수르, 그리고 주변 강국인 블레셋과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단순히 정리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드러낸다.(사 14-15장)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폐하며..."(사 14:27) 당시 하늘을 찌를 것 같이 강성했던 앗수르, 바벨론. 그들은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대적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세상의 어떤 권세도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흥할 수도, 존속할 수도 없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 국제 정치, 세계 정세에서도 극소수 강대국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좌지우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국제 정세의 최종 주권자가, 역사의 최종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어느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지는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사 14:32) 세계 최강국 미국의 쇠락을 보라. 우크라이나 전쟁 - 자신의 영향력이면 금방 끝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전쟁이 발발한 지 4년 반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계의 지탄을 받으며 미국이 시작한 이란전쟁으로 유럽 강대국들과 같은 오랜 혈맹들조차 미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이 나날이 약해짐에 따라, 큰 나라의 위용과 여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천박한 이기심의 바닥을 쉽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날이 갈수록 무리수를 두는 그들의 국제적 행보는 자신의 쇠락과 국제적 따돌림의 속도를 부채질 하고 있다. 해 아래의 영화와 권세는 마른 풀처럼 시든다. 하지만 세상을 비추는 햇살, 진리의 빛은 영원하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영하심 앞에 우리 인간이, 국가들이 처신해야 할 바는 경외와 겸손이다. 주님! 교만하여 자신의 힘을 자랑했던 열방의 길을 따르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여 주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게 하옵소서. 어떤 시대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시온을 세우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주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게 하시며,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서도 주님만을 피난처 삼아 소망을 품고 의지하게 하옵소서.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적 정세와 이에 따른 실익과 치밀한 전략적 계산을 따르기 전에, 먼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080326 *관련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dmQ_bq1DOsU **관련기사: https://www.aljazeera.com/video/newsfeed/2026/7/31/analyst-the-us-faces-a-strategic-dead-end-in-iran2026-08-03
-
[가르치지 않는 죄]얼마전 “스타벅스 가야지!”하며 광주시민운동을 조롱/폄하하는 응원으로 배재고 야구부가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적이 있었다. 누구는 그들의 프로야구 진출을 금해야 한다며 엄한 처벌을 주장하고, 누구는 정치적 공방의 소재로 삼기도 하고, 지난 한 시대의 역사적 아픔을 광고/응원의 소재로 웃고 즐기자고 희화화(戱畵化) 하는 풍조를 개탄하는 소리 또한 여기저기에서 빗발쳤었다. 어떠한 사실이나 정황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반응, 올바른 처신, 바른 태도에 대해 배울 기회도 없었고 가르치는 이도 없어서, 실수했던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수년동안 진지하게 준비해왔던 인생의 진로를 가로막는 것은 분명히 가혹한 처벌 맞다. 문제의 근원은 이들을 바른 길로 계도하고 가르치지 않은 어른들에게 있다고 본다. 각자가 보는 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만나고, 임의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 사회의 관습과 도덕과 윤리관, 상호 배려에 대한 입장은 각자 마다 이에 대한 기준과 생각이 다르다며 먹다 남은 닭뼈다귀 취급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각기 다를 수 있는 각자의 사고체계와 세계관이 사회적 규범과 예절과 매너보다 훨씬 높은 상석에서 대접받는다. 성인이 되기 전 청소년기는 아직 여물지 않은 시기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전 미성숙한 상태이다. 이미 성숙에 도달한 자는, 부모로서, 교사로서, 이웃 어른으로서, 주변의 미성숙한 자에게 성숙할 기회를 제공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 상황과 시기에 맞는 가르침과 계도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미성숙자가 성숙으로 나아갈 기회를 어른의 안이한 무책임으로 박탈해선 안된다. 애써서 한 마디 했는데 듣지 않고 무시하는 청소년의 반응에 주눅이 들어서, 아이들에게 “꼰대” 소리 듣기가 두려워, 미성숙한 그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자유와 자의의 칼을 쥐어 주고 방임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아픔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직 배워야 할 시기이고, 유혹에 약하고, 뭐가 옳고 그른 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나이임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경험 있는, 신뢰 가고, 책임감 있는 선배, 어른으로부터 듣고 싶어 한다. 조언과 팁을 듣고 싶어 한다. 문제는 그들이 어른으로부터 들어야 할 가르침의 내용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좋은 내용의 얘기를 그들이 경청하게끔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꼰대”소리 듣는 것이다. 한 인격체로서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처한 상황, 나이, 시기에 맞게끔 예화와 적절한 비유를 가지고 수용하기 쉽게 전하려고 애쓰고, 사전에 심사숙고하여 말하기 보다, 감정껏 막 말한다. 그들이 정작 싫어하는 것은 전하는 이의 말투, 태도이다. 상대방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 혼내는 말투,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 글로벌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일을 잘 시킨다. 지시 받는 이가 기분 나쁘지 않게 일을 받도록, 지시를 하더라도 듣기 좋게 말한다. 지시 받은 이는 가슴이 벌렁벌렁하며 그 일을 하고프게 끔 일을 잘 시킨다. 얼마전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주일예배는 전세대가 다 함께 드리는 특별한 예배였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라 다소 산만했다. 더욱이 내 옆에 앉은 남중학생 두 명은, 노골적으로 설교말씀에 관심을 끄고, 종이에 그림 그리고 그린 낙서에 서로 낄낄거리고, 스마트폰 채팅에 여념이 없으며, 그들이 발산하는 높은 데시벨의 소음은 나를 포함한 주변 성도들을 산만케 했다. 예배가 끝났다. ‘이들이 예배의 중요성에 대한 한마디는 듣고 가게 하리라’는 목적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들에게 친근히 다가가야 한다.’ 굳게 작정하고 그들과 내가 교감할 첫 단어를 찾았다. “와~ 그림 잘 그리는데…” “그거 그린 것 좀 봐두 돼?” “난 이렇게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부럽더라!” “넌 운동 잘하게 생겼다. 뭐 특별히 운동하는 것 있니?” “저 테니스 쳐요!” “와! 테니스… 그럼 레슨도 받고 있니?” “네. 근데 무지 힘들어요.” “너 테니스레슨, 힘든데 왜 하니?” “테니스, 더 잘 치려구요.” “넌, 테니스에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까 좋은 선수가 될 것 같다.” “그럼, 오늘 교회에는 왜 왔니?” “예배 드리려구요…” “오늘 예배 잘 드린 것 같니?” “ … …” “예배 잘 드리고 싶은데, 옆에 친구가 자꾸 말 걸어요.” “네가 교회 온 목적이 분명한 것처럼 예배를 잘 드리려는데, 친구가 방해되면 예배시간에만 잠시 따로 떨어져 앉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이렇게 대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교회학교부장, 담당 사역자, 사모님 등 많은 어른들이 주변에 모여 들었다.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다시 산만해졌다. “자, 밥먹으로 가자!”하며 나는 서둘러 대화를 종결 지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0730262026-07-30
-
[런던 금융중심가에서 한식업을 시작한 이유]삼성전자 유럽총괄 마케팅디렉터로서 직임을 정리하고, 내가 한식업을 시작한 것은 답답하고 억울해서였다. 당시 한식당에서 비빔밥 한 그릇은 5파운드였다. 손님은, 따라 나오는 반찬과 함께 한 그릇을 비운 후 셀프로 따른 물로 입가심하고 먹은 숫자대로 “5 곱하기 사람수” 해서 식대를 지불하면 그만이다. 일식, 프렌치, 이태리식에 다 있는 up-sell, cross-sell(1) 개념이 없다. 더 팔아서 이문을 남기기가 어려운 메뉴 구조이다. 그래서 평균 객단가 5파운드가 당시 런던에서 한식 경쟁력의 현주소였다. 반면에 up-sell, cross-sell 개념이 찬란하게 발달한 일식을 런던에서 즐기려면 15파운드 이상은 지불해야 했다. 고객의 심리적 지불가치(2) 측면에서 아시아 음식 중에서 한식은 일식, 인도, 태국, 인도차이나, 중국 음식에도 뒤처지는 싸구려 low-end로써 자리매김 받고 있었다. 한식에 대한 지불가치가 일식의 1/3정도로 형성되면, 한식은 싸구려가 가야만 하는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다. 빈한 자의 악순환의 고리를 밟을 수밖에 없다. 밝고 화려하고 분주한 거리보다, 임대료가 저렴한 어둡고 칙칙한 골목길에 위치하거나, 매장 외관과 인테리어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가고 싶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맛깔내게하고 고급 진 용기와 멋진 로고가 선명히 박힌 포장재를 쓸 수도 없다. 고객의 선택과 입맛을 북돋도록 상냥하고 영어에 능통한 능력 있는 스태프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신선하고 좋은 식자재를 선별해서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렇게 사업할 여건이 위축되면, 이것은 일개 식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지 한식업계 전체의 문제가 된다. 멋들어진 한글 간판을 뽑아 달려고 해도, 그만큼 큰 크기의 한글 폰트를 전문적으로 실크스크린 인쇄해서 톰슨 가공하는 업체를 구할 수가 없다. 시장 수요가 미미하기 때문에 이들 전문가들이 런던에서 사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면 규모의 경제가 발동하기에, 현지에서 일식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업할 여건이 좋아진다. 생선, 식초, 저린 랏쿄, 베니쇼가 같은 식재료를 현지에서 만든 신선한 식품으로 좀 더 싼 가격에 현지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한식의 기초 식재료인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모두 한국에서 들여와야 한다. 오랜 기간을 거쳐 바다 건너온 제품을 비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런던 현지에서 하는 한식업은, 파는 가격은 낮은 반면에 음식 만들어 팔기까지 소요되는 비용은 많이 드는 사업구조이다. 게다가 음식을 생산하는 과정 또한 간단하지 않다. 비빔밥만 하더라도 5 종류나 되는 엄청난 양의 야채를 씻고 다듬고 자르고 채 썰고 대치는 세심하고 긴장된 작업을 반나절동안 해야 한다. 고추장 또한 구입한 제품 그대로가 아니라 식당 고유의 맛을 내기위해 별도의 작업을 한다. 김치를 만들기 위해 배추를 소금물에 저리고, 배추 속 양념을 만들고… 하는 정성 어린 장시간의 수고를 잘 알지 않는가? 게다가 비빔밥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불고기(불고기비빔밥), 연어(연어비빔밥)를 정성껏 구워 내는 것은 또 하나의 숭고한 작업이다. 스시 전문집을 가봤지 않은가? 그들의 음식 만드는 프로세스가 얼마나 단순한가? 그런데 우리보다 가격을 3배나 비싸게 받다니… 그래서 현지의 손맛 좋은 쉐프 출신 한식 사업가들은 한식을 그만 두고, 일식업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한식당의 메뉴에 스시를 추가하여 수익성을 증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식당의 정체성이 애매해지는” 뼈아픈 순간이다.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 속, 깊고 정갈한 맛, 수준 높은 한식이 이렇게 폄훼(貶毁)되어, 아무렇지 않게 이종, 잡종들과 함께 섞여 팔리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한식업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계수적 목표를 분명히 했다. “5년 내에 객단가를 최소한 런던 도심 일식당 수준으로 올려서” 한식의 지불가치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한식의 이미지(Perceived Image)를 격상시키겠다는 목표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고객에게 내놓을 음식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아래 슬로건과 함께 고객에게 약속을 걸고 시작을 했다. “We offer genuine Korean food in a healthy, sizzling and environmentally friendly way.” - ‘순전한 한식”을 - 프레쉬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 ‘지글지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한국식 바베큐와 함께 - ‘환경친화적’으로 즐기세요. 순수한 한식만을 제공하기 위해, 쉐프들의 입에서 퓨전의 “ㅍ”도 나오지 않게 했으며, 새벽 4시반 청과도매시장에 가서 가장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받았으며, 고객의 바로 눈앞에서 고기를 지글지글 굽고, 지나가는 행인을 매혹적인 갈비연기로 자극하는 마케팅 기법으로 고객을 유인하고, 가장 환경친화적인 용기(100% 자연분해되는 생분해성 용기, 재생펄프로 만든 패키지, 친환경 잉크로 인쇄된 쇼핑백 등)에 담아 고객에게 건넨다.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인기있는 ‘Beef BBQ with Rice’(테이크아웃 버전)가 4.95파운드에서 시작해서 9.50파운드까지 올려 받았다. 이것도 성에 차지 않아 Galbi BBQ with Rice(테이크아웃)를 내놓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비싼 갈비를 테이크아웃 메뉴로 내놓을 수 있느냐?”며 만류했다. 테이크아웃 메뉴는 항상 저렴해야 하는가? 나는 편협한 편견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비싸게 받으면 되지!” 그래서 10.50 파운드에 출시했고, 3년도 지나지 않아 13.50까지 올려 받았다. 식당 안에 앉아 먹는 고객(Dine-in)은 최소한 손님당 15파운드 이상은 기꺼이 지불하며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주방장과 신메뉴 개발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Korean BBQ와 매치되는 Cross-sell을 위해 영국에서 가장 큰 와인 유통업체인 ‘Laithwaites’의 Sales Director를 우리집 바비큐 파티에 초청해서, 각종 바베큐를 맛보게 한 후에, 엄선된 8종의 와인을 2주 후에 추천받았다. 그 중 베스트 셀러 와인의 경우, 4잔 나오는 병 하나에 6.90파운드 주고 구매해서 잔당 4.95씩 팔아 200% 이문을 남겼으니, 손님 좋고 나도 좋고 기가 막힌 장사였다. 게다가 이 효자 와인으로 말미암아 고객은 바비큐를 더 시킨다. 이것이 cross-sell의 묘미이다. 같은 목적으로 개발한 ‘호떡 위 아이스크림’은 특히 직장 여성들에게 비빔밥 먹은 후 입가심으로 최고의 인기 품목이었다. Up-sell을 위해서 시도한 메뉴들도 많이 있었으나, 매출에 최고 일등 공신은 ‘BBQ 도시락’으로 16.95로 출시했다. 여기에 맥주 한 병(330ml) 곁들이면 22파운드를 훌쩍 넘는다. 이미 나의 계수적 목표 - 일식의 객단가 15파운드를 뛰어 넘는 것 -를 달성한 환희의 미소가 입술 방긋 넘친다. 런던 도심에서 임대료가 최고로 비싼 프리미엄 상권(바로 옆건물이 골드만삭스 유럽본사였음)에서 시작한 이유도, 수준 높은 한식에 걸맞는 가격을 받으려면 가격민감성이 덜한 고위 연봉소득자들을 타겟으로 하는 것이 타당했다. 그리고 사회의 Opinion Leader격인 이들의 만족한 입은, 고급 이미지 한식을 소개하고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업체의 이름을 왜 씨나(Ceena)로 했는지 이유를 밝히며 글을 맺고자 한다. 씨나는 시편 1:3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로고도 같은 교회를 섬기는 그래픽디자이너 자매가 시냇가와 나무를 형상화하여 개발했다. 당시 마음속 목청이 쉬도록 묵상했던 성경 말씀은 바로 이사야 43:18-19 말씀이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18-19)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풀타임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딱 7년 하고 종료한 사업이었지만 광야같이 척박하고 사막같이 메마른 사업 환경에서 강을 내어 전진하게 하시고 길을 내어 다음에 현지에서 한식사업을 하는 이들에게 선도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1) 업셀(up-sell): 먹으려 했던 것 보다 비싼 메뉴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 예를 들어 세트메뉴. 크로스셀(cross-sell): 메인 메뉴에 어울리는 음식을 추가로 시키는 것, 예를 들어 스시에 사케. (2) 지불가치(Perceived Value): 소비자가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는 가격대. 심리적 지불가치가 높은 상품일수록 고급재(high-end)라 부른다. (사진1) 여행방문객을 위한 영국 유명잡지 ‘Timeout’ 2012에 선정된 한식당 Ceena (영상1) KBS ‘세계는 지금’에 방영된 내용(2013년 7월)2026-07-07
-
[갈 길을 예비해두신 하나님]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처음 만났을 때는 2차 전도여행 중이었으며, 육체적·정신적·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행 18장). 여러 다신을 숭배하는 아테네에서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채, 바울은 홀로 외롭게 고린도로 이동했다. 당시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합류하지 않은 상태였고(행 18:5),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기에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기록되고 있다(행 18:2-3). 당시 이 상황을, 고전 2:3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회상하며, 자신이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심약해져 있음을 고백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도, 그는 빌립보에서 투옥당하고,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났으며, 베뢰아에서도 박해와 핍박을 모질게 받았고, 아테네에서는 기대 만큼의 열매를 보지 못하고, 잇따른 실패에 패잔병처럼 고린도로 혼자 외롭게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돕는 동역자로서, 그를 회복시키는 친한 벗으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예비해두신 것이다. 코로나가 기세를 떨쳤던 2020년 영국생활을 정리하고 나 홀로 한국으로 사역길을 떠났다. 꽉 찬 6년동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배우게 하셨다. 특히 잇따른 낙심과 좌절과 실패 속에서, 이 눈에 아무 열매 보이지 않고, 황무지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모질게도 오래 지속될지라도, 예비해두신 작은 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게 하신 특별한 은혜가 도처에 있었다. 전도사 시절, 육체적/경제적/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하고 위축된 시절이었다. 난생 처음 실신을 경험하고 아직도 신경과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그 후유증은 강력했다. 심각한 불면증에, 전립선염과 한달 간 지속된 고열과 몸살(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코로나였다고…)로 불면의 밤을 나홀로 서럽게 보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역류성 식도염으로 약 6개월간 죽과 연한 음식만 먹어야 했다. 그 시절 가족처럼 돌봐 주신 서서울성서침례교회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성도분들의 세심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그 모질고 힘들었던 시간… 숨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모님과 자매님들께서 정성껏 끓여다 주신 흑임자죽, 잣죽, 염소탕…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반신이 불수 되어 요양병원에서 치료중인 아내를 돌보랴 노동일 하랴 바쁘고 지친 일상으로 꽉 찬 70대 집사님은 때마다 정성껏 끓인 죽과 직접 만드신 간식을 들고, 내가 기거한 교회 옥탑방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찾아오셨다. 2년간 창원 개척교회 시절에 받았던 ‘강아지 학대 목사’라는 오명과 굴욕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고아처럼 헤매고 있을 때, 창원하늘교회를 만나게 해 주셨다. 형님과 같은 목사님과 사모님의 격려와 응원, 성도분들의 위로가 아니었으면, 그 형극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지? 1년전 대전으로 옮긴 이 곳은 실버타운이라, 때 맞춰 밥 챙겨 먹는 상황은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혼자서 외롭게 사역을 해 나가야 하는 정황은 변함이 없다. 교회개척을 준비하며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죽으면 죽으리라’ 간증 서적의 저자로 유명하신 안이숙사모와 남편께서 세우신 새누리교회이다. 안이숙사모와 연관성을 모르고 거주지에서 가까운 침례교회를 찾다 방문했던 교회이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담임목사님은 바쁘신 일정 중에 내게 별도의 시간을 내주셔서 사역과 신학에 대한 토론을 즐기시는, 내게 친한 영적 동역자요 벗이다. 최근 외국인 사역을 맡겨 주셔서, 전도와 양육에 귀한 헌신을 할 수 있어서 너무도 감사하다. 주님! 연이은 실패, 박해와 잇따른 굴욕에 지치고, 약하고 두려워 떨던 바울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가장 필요한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예비하여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베푸심을 상기합니다. 저 또한 낙심과 외로움, 삶의 곤경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주께서 이미 가장 선한 길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이 믿음 항상 견고하게 붙들게 하옵소서. 황무지처럼 아무 열매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모질게도 오래 지속될지라도,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임을 마음에 굳게 새기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저 역시 누군가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되어,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지친 영혼을 일으켜 세워 함께 주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신실한 동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견디어 주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게 하소서. 063026 관련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G98Bt05CPsQ *Image from https://anastpaul.com/ (비영리 목적으로 사용)2026-06-30
-
[옳음이냐? 평온이냐?]곧아야 할 것이 굽어지고, 속이는 저울을 보면 몹시 불편하다. 어릴 적부터 태생 때부터 그래왔던 것 같다. 어떤 저항이 있더라도 틀린 것은 바로잡기를 원했다. 마땅히 그에 따라오는 대가도 많이 감수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정당함을 향한 나의 순정을 훼손할 순 없었다. 그래야만 내가 숨쉬는 주변과 사회가 좀 더 바르고 청정해질 것 같았다. 여기 대전 실버타운에 입주한 지, 1년이 되어간다. 급식용역업체가 안정되게 양질의 음식을 공급할 수 있도록, 입주자는 한 달에 60식을 의무적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거둔 돈은 그대로 업체에게 지불되는 것이 공지된 계약사항이다. 그런데 올해초 그 돈이 전부 업체에게 가지 않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입주자 대표측은 관리실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며칠 전 주민 공청회 자리를 통해 해명을 했다. 그 해명도 입주자 대표위원 중 한 명이, 마치 관리실을 변호하듯 해명을 했다. 더욱이 못마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설명해왔던 급식비 구조를 식단가제에서 복잡한 운영원가제로 갑자기 바꾸어 설명을 했다. 그렇게 계산체계를 바꾸니 오히려 적자를 봤다는 것이다. 많은 회의와 의심이 갔으나, 질문하는 입주민은 나를 포함해 두 세명뿐. 그리고 “앞으로 식대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입주자 대표의 강성발언으로 공청회는 끝났다. 근거도 입증 자료도 없는 허무맹랑한 관리실이 만든 자료를, 관리실의 예산집행업무를 감독해야 할 입주자 대표위원이 해명한답시고 나서고, 입주자 대표가 관리실을 두둔하는 형국.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조용했다. 대노 (大怒)한 내 가슴만 쿵쾅거리며 시끄러웠을 뿐. 회의가 끝나고 오늘까지 많은 분들이 내게 “수고하셨어요.” “속이 상하시겠어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대다수는 이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조용한 평안을 원했던 것 같다. 입주자 대표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문제의 디테일을 파헤칠 시간도,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지적한 ‘옳음이 주는 즐거움(The Joy of Being Right)’ 에 내가 갇혀 있지는 않았는지 숙고해본다. 에고는 오직 '옳음'을 먹고 살아간다. 옳다는 것은 머릿속의 특정한 입장, 즉 하나의 관점이나 의견, 판단, 혹은 스스로의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내가 옳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틀려야 하기에, 에고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풀리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지적하길 원한다. 내가 옳아야만 한다는 그 갈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당신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깃든 평온과 마주하게 된다.(1) 톨레의 말에 시끌벅적 떠들썩했던 내 마음이 오히려 진정이 된다. 뒤늦은 나이에 인생을 사는 지혜를 깨달았는지 물러지고 힘 빠진 노년에 더 이상 대응할 기력이 쇠진해서인지 옳음을 향한 형극보다 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보는 평온함이 좋다. 충분히 나이 든 사람의 여유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가? 크게 틀린 줄 알면서도 대다수가 가는 편한 길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Put peace above being right! 062626 (1) Eckhart Tolle, A New Earth: Awakening to Your Life’s Purpose (London: Penguin Books, 2005), pp 71-722026-06-26
-
[주의 몸된 교회보다 교회브랜드가 남지 않도록]"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전체에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우리나라나 전세계 근현대 교회사를 통하여 성령사역, 성령의 은사를 받고 능력사역을 하시던 사역자들이 많았다. 당시에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뜨거운 성령사역의 열기를 가는 곳마다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때 뿐. 위대한 영적유산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오랜 세월 교회와 기독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실제로 교회의 영적 유익보다, 사역자 개인이나 다른 차원의 유익으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는가?“ 반문해본다. 은사의 참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놀라운 현상이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 얼마나 유명해졌는가? 가 아니라… 그래서 교회가 더욱 거룩해졌는가? 성도들이 더 영적으로 성숙해졌는가? 복음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었는가? 그 사역이 사라진 후에도 교회가 건강하게 남았는가? 에 있다. 주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 보다 사역자의 이름이 남지 않도록, 주의 몸된 교회보다 교회 브랜드가 남지 않도록, 제자 양성 보다 집회 이벤트에 초점을 잃지 않도록 한국교회를 지켜주시옵소서. 061925 설교내용을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live/I3CQ_rmtR0M?si=y_xw3DZFZwxhqVM42026-06-19
-
[큰일 하는 자보다 끝까지 견디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20년전 읽었던 안이숙 여사의 저서『죽으면 죽으리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의 처절하며 찬란한 신앙의 기록이다. "가장 약한 자를 통해 가장 강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고난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순간,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평양의 평범한 교사였던 안이숙은 일제의 강요 아래 온 국민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한다. 남들이 눈치를 보며 타협할 때,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평탄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결국 그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좁디 좁은 감방 안에 놓인 똥통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늘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그 오물 위로 수천 마리의 구더기가 기어 나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살을 파먹었다. 한 겨울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그의 살점은 바닥과 달라붙어 얼어버렸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혔으나 그 피마저 금세 고드름이 되었다. 인간성이 말살된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제가 죽어야 한다면 지금 죽겠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이 책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은… 처철한 고문과 고통으로 가득 찬 절망적인 수형 장소를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6년의 옥고생활동안, 손발이 묶이고 온몸이 짓무르는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옆방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녀의 온유함과 강직함에 감동한 흉악범들과 일본인 간수들마저 하나 둘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보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메시지이다. 바울의 위대함은 끝까지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것에 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베드로 또한 수없이 반복되는 체포와 투옥, 그리고 갖은 매질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고난 경험을 바탕으로,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했다(벧전 4:12-13) 우리는 체질적으로 고난을 싫어한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능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의 지혜/실력/능력/재력/인맥을 총동원하여 피하려면 회피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교회는 고난을 혐오한다. 고난은 나쁜 것이고, 기도해서 척결해야 할 것이다. 기도를 통해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고난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를 간구한다. 주님의 뜻은 상관없고 평안 속 안주를 희구한다. 세속적 가치와 혼합, 형식적인 예배,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여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남유다의 멸망 직전, 영적 지도자들은 입을 모아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치며 거짓 위로로써, 임박한 심판을 부정하고, 죄를 증폭하고, 회개의 기회를 빼앗았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수십년전 들었던, LA에서 목회하시던 전직 인기가수 이종용목사님의 간증이 떠오른다. 좋은 주택을 장인에게 상속받았는데, 집이 너무 좋아서 평안과 안락에 영적으로 안이해질 것이 우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주에 하루는 꼭 교회에서 숙식하면서 젊은 날의 영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고 힘썼다고 한다. 주와 함께 하는 자의 영성은 간절히 간구하는 자에게서 나타난다. 인생의 어둔 밤길에 봉착한 영혼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실 수 없다. 최고의 재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가 겸손하여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런데 현대교회의 예배는 날이 갈수록 성대, 화려해지고 수준급 화음으로 명품화 되어 가지만, 간절함은 쇠약해지고 있다. 0612262026-06-12